LOGIN새벽에, 위지헌이 궤 하나를 열었다.월령이 한 번도 열리는 것을 못 본 궤였다. 검은 옻칠에, 자물쇠도 없는. 그는 그 안에서 작은 종이 봉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뭐예요, 그거.""열어 봐라."월령이 봉지를 폈다.마른 꽃잎이었다. 다섯 장. 색이 다 바래서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향이 남아 있었다. 아주 옅게. 감송향 밑에서, 다른 향."…살구꽃이에요, 이거?""그래."*"열다섯이었다."위지헌이 말했다. 궤 앞에 앉은 채. 월령을 보지 않고, 꽃잎을 보며."늦둥이 황자를 궁이 어찌할 줄 몰라서, 형님이 나를 북문으로 보냈다. 심도윤 장군 진영에. 군막에서 밥 먹고, 말 배우고. 그 진영에서 첫 싸움을 치렀다. 이기고 돌아온 봄이었다. 그 진영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살구나무가 많은 데였다."월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도윤. 아버지. 북문. 어린 날의 저는 그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기억이 없는 나이로."봄이었다. 살구꽃 지는. 나는 나무 밑에 혼자 서 있었고, 소매에 꽃잎이 앉았다. 안 털었다. 털 까닭이… 없었으니까. 그때 아이 하나가 왔다."*"아이요? 무슨 아이요.""예닐곱 살. 뒤꿈치가 아직 가벼운. 나를 올려다보더니 내 소매 꽃잎을 떼어 줬다. 하나씩. 다섯 장."위지헌의 손이 꽃잎 위에서 멎었다."떼어서, 내 손에 쥐여 줬다. 그러고는 그랬다. 아저씨는 외로운 사람이구나. 그렇게."월령의 손끝이 접혔다. 접힌 채로 풀리지 않았다."열다섯한테요? 아저씨라고요?""그래서 내가 그랬다. 아저씨 아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웃었다. 웃고는 그냥 갔다. 제 어머니가 부르는 쪽으로.""제 어머니가요. 그 어머니가 누구였는데요.""…장모님이었다. 지금의."*월령은 꽃잎을 오래 보았다.기억이 없었다. 예닐곱 살의 봄. 살구나무. 소매에 앉은 꽃잎. 외로운 사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손이 알았다. 꽃잎을 떼는 손이, 어디에선가 한 번 이 일을 한 것 같았다."부군은 그걸
"그 봄부터요. 그 봄부터 말씀해 주세요."월령이 말했다."오래된 것 말고요. 부군이 늦은 봄부터."위지헌은 오래 답하지 않았다. 등불 심지가 한 번 튀었다. 그는 그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북에 있었다.""알아요. 흑령이 국경 밟은 해였잖아요.""밟은 게 아니다. 밟게 한 거다. 내가 도성에 없어야 하는 봄이었으니까. 그때는 그것도 몰랐고."위지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낮고, 고르지 않았다. 고르지 않은 것을 감추려는 목소리였다."급보가 왔다. 황후가 별궁에 들었다고. 병이 돈다고. 그때 나는 국경에서 사흘 거리에 있었다. 이틀 만에 달렸는데… 반나절이 모자랐다. 반나절.""그래서 문 앞에요.""문 앞에."*월령은 그 문을 기억했다.안에서 본 문이었다. 닫히는 문. 닫힌 뒤로 열리지 않던 문. 그 문 밖에 누가 서 있었는지, 전생의 저는 몰랐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그 뒤로는요? 그 뒤에는 어떻게 하셨어요.""그 뒤는, 네가 아는 대로다.""저는 몰라요. 저는 문 안에 있었는데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 그 눈이 잠깐 흔들렸다. 무엇을 물으려는 눈이었다. 물으려다, 멈추는 눈.월령은 그 멈춤을 보았다. 그가 무엇을 못 묻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못 묻는 것을, 저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두었다."…형장에 갔다."위지헌이 말했다. 물음 대신."늦게. 비가 왔고. 그리고."그가 거기서 멈췄다. 그러다 낮게 이었다."문 앞에 서고 사흘 뒤에 흑령이 다시 밟았다. 북으로 되돌아갔고, 형장 날짜는 북으로 가는 길에 들었다. 되돌아 달렸다. 그래서 두 번 늦었다. …네 기억엔 내 품이었고, 내 기억엔 이미 끝나 있었다. 그 어긋남은 아직 못 풀었다."월령은 그 어긋남을 알았다. 저도 풀지 못한 것이었다. 비, 누군가의 품, 그 품에서 한 말. 두 사람이 다르게 아는 것을, 두 사람 다 더 말하지 않았다."그날 밤에 자녕궁 담을 넘었다. 그냥, 넘었다."*"넘어서요?""넘
국청 옥에서 심부름꾼이 한 말은, 하나 더 있었다.강무진이 그것을 왕부로 가져왔다. 등불을 올린 뒤였다. 강무진은 문가에 서서, 직역해 들은 그대로 옮겼다."…돈 준 손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다른 이름은 값이 없으면 두어라. 근데 그 아이 이름만은 값이 없어도 지워라. 그대로 옮긴 겁니다. 토씨까지."월령의 손이 봄의 저고리 위에서 멎었다."…그 아이라니. 어느.""예. 섭정왕가의 여아, 라고 했답니다."*"왜요."월령이 물었다. 강무진에게가 아니었다. 방 안에 그 물음을 놓았다."은매도 서윤이도 아란이도, 값 없으면 둔대요. 그런데 봄만 값이 없어도 지우래요. 왜 봄만이에요? 계승 때문이면요, 삼전하 세우는 데 봄이 걸린다면요, 그건 값이 드는 일이잖아요. 돈 마르면 미뤄야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안 미뤄요. 왜 안 미뤄요.""…월령.""돈보다 급한 게 뭐예요, 숙비한테. 뭐가 있어요."위지헌이 등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이 답이었다.*강무진이 물러가려다, 문가에서 멈췄다."마마님. 그, 하나 더요. 이건 좀.""말해라.""그 손이 돈을 줄 때 이렇게도 말했답니다. 그 아이는 값이 아니라 빚이다, 하고.""…빚이요?""예. 저는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냥 들은 대로요."강무진이 물러갔다. 청아가 봄을 안고 옆방으로 갔다. 나가면서 위지헌을 한 번 보았다. 위지헌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빚. 월령은 그 말을 굴렸다. 값은 치르면 끝났다. 빚은 치러도 남았다. 숙비에게 봄이 값이 아니라 빚이라면, 그 빚은 봄이 태어나기 전에 진 빚이었다."부군. 빚이래요. 들으셨어요?""들었다.""누가 누구한테 진 빚이에요. 봄이 무슨 빚을."위지헌이 답하지 않았다.위지헌의 손이 무릎 위에 멎어 있었다. 어제도 멎었고, 오늘도 멎었다."…부군. 아세요?""….""봄만 왜인지요. 아시는 얼굴인데, 지금."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내렸다. 보지 않는 척 보는 시선이 아니
왕부 우물가에 물동이가 둘 놓여 있었다.하나는 청아 것, 하나는 초비 것. 초비가 뒤채 담 너머에서 안채로 옮겨 온 첫날이었다. 묵아도 함께였다. 청아가 앓다 일어난 첫날이기도 했다. 방어멈이 두 아이를 마당에 세워 놓고 한참 훑어보다가, 결론을 내렸다."물 긷고, 장작 패고. 그거면 된다. 청아 몫까지 당분간 너희가 해.""예."초비가 답했다. 묵아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끝의 붉은 실을 만졌다. 방어멈이 그 손을 보았다."그 실은 뭐냐, 손에.""내 거.""그래, 네 거면 됐다. 됐어."방어멈은 더 묻지 않았다. 묵아가 그 안 묻는 것을 잠깐 보다가, 물동이를 들었다.강무진이 마당 끝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묵아가 물동이를 들고 지나가다, 그 앞에서 멈췄다."나리.""음.""여기서 살아?""산다.""밥은. 밥도 줘?""준다. 큰 그릇으로."묵아가 그 말을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는 물동이를 고쳐 들고 갔다. 강무진은 헛기침을 했다. 윤백이 어느새 옆에 서서, 그 헛기침을 못 들은 척했다."…너 지금 웃었냐.""안 웃었습니다.""웃었다. 봤다.""…반만요. 반만."*청아가 두레박을 올리는데, 발소리가 났다.사흘 누웠다 나온 얼굴이었다. 아직 창백했다. 눈가의 부기는 빠졌는데, 두레박 줄을 당기는 손에 힘이 덜 들어갔다. 줄이 한 번 미끄러졌다. 청아가 다시 잡았다.인기척 없는 발소리였다. 남들은 못 듣는. 청아만 듣는."기윤 님이죠."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기윤이 우물가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어떻게 아오.""발소리요.""발소리 안 내오, 나는.""그러니까요. 그 안 내는 발소리요. 어머, 그게 더 잘 들리는데."기윤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청아의 손에서 두레박 줄을 받았다. 받아서 올리고, 물동이를 들었다. 청아 것을.*"어머, 제가 들어요. 그거 제 건데.""누워 있으라 했을 텐데.""사흘 누웠으면 됐지요. 태의도 됐다 그랬어요.""얼굴이 그런데.""어머, 얼굴이 뭐요. 기윤
작은집 부엌에 불이 먼저 들어왔다.한씨가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새벽이었다. 시비를 깨우지 않고, 제 손으로 불을 지폈다. 그 손이 서툴렀다. 오래 안 한 일이었다.심도현이 그 뒤에 섰다."…당신이 왜 거기.""차 끓이려고요.""시비가 할 것을.""제가 하고 싶어서요."한씨가 답했다. 돌아보지 않고. 심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아궁이 옆에 앉아, 장작을 하나 밀어 넣었다.*차는 식었다.끓여서 방에 들이고, 두 사람이 마주 앉고, 아무 말도 없는 사이에 식었다. 늘 그랬다. 이 부부의 차는 늘 식은 채로 상 위에 남았다. 심도현이 끝내 마시지 않아서.오늘도 식었다.심도현이 그 잔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들었다.마셨다. 식은 차를, 끝까지.한씨의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남편의 옷깃으로 갈 손이었다. 가지 않았다."식었는데요, 그거.""아오.""다시 끓여 드릴까요?""…아니. 이게 좋소. 이대로."한씨가 남편을 보았다. 그러고는 제 잔을 들었다. 제 것도 식어 있었다. 마셨다."저, 서윤이가요.""음.""어젯밤에 제 방에 왔어요. 그 일 뒤로는 처음이에요.""뭐라 합디까.""아무 말도요. 문 앞에 서 있다가, 그냥 갔어요. 그게 다예요."심도현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나도 그 애 방 앞에 서 있다 왔소. 어젯밤에. 당신처럼.""들어가시지 그러셨어요.""당신이 안 들어간 까닭하고 같소."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보지 않았다. 식은 잔 둘이 상 위에 나란히 비어 있었다.*심가 마당에서는 잔당 처리가 끝나 가고 있었다.심부름꾼과 담 밖의 자, 둘 다 강무진이 국청으로 넘겼다. 궁에서 나온 돈, 이라는 진술만 남기고. 자녕궁이라는 이름은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또 남의 손이에요. 또요."월령이 낮게 말했다."남의 손도, 손이 있어야 쓴다."위지헌이 답했다."오상궁 잡혔고, 상단 말랐고, 호위 잡혔다. 남은 건 값 안 드는 손뿐인데, 그것도 오늘 둘. 다음엔 셋 남고, 그다음엔 하
"눈속임이면, 그럼 뭐요. 진짜는."월령이 물었다.심부름꾼이 마당 흙을 보았다. 보면서, 말했다."우물은 그냥, 사람 눈을 우물로 돌리라고요. 그거 하나 하라고 돈 준 거고. 진짜는 서찰이오. 오늘 아침에 왕부로 갔소. 심가 둘째 댁 아가씨 이름 달아서."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제 이름이요? 제 이름으로요?""아가씨 글씨 흉내 낸 서찰에다, 아가씨가 짓는다는 배냇저고리를 싸서. 그 저고리에다가—"심부름꾼이 말을 멈췄다. 은매가 그 뒤를 대신 맡았다. 냄새로."…같은 거요. 병에 든 거하고 같은 거."은매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서윤보다 더 빨리."오, 오늘 아침에요. 소인이 심가로 나올 때, 청아 언니가 그 보따리를 풀고 있었어요. 아기씨한테 입힌다고. 소인이… 냄새가 이상하다고, 아기씨 살에 닿는 건데 마마님 오시거든 입히라고, 그러고 나왔는데. 그게 뭔지는 몰라서. 그냥 이상하다고만—"기윤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왕부까지 반 시진. 그림자가 그 반 시진을 뛰었다.남은 마당은 조용했다. 서윤이 그 조용함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열여덟의 어깨가 굳어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이렇게 서 본 적이 있는 어깨였다. 제 이름이 남의 손에 쓰인 날."…저 안 썼어요."서윤이 말했다. 어른스러운 말투로. 그 말투가 떨렸다."제가 안 썼어요. 저는 이제 그 글씨 안 쓴다고요. 저는, 저는—""안다."월령이 말했다."네가 안 쓴 거 안다. 그러니까 아니라고 하지 마라. 자꾸 아니라고 하면 그랬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남들 눈에."서윤이 입을 다물었다. 다문 입 안에서 이가 부딪쳤다.아란이 그 곁으로 왔다. 당과 하나를 서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언니. 이거. 먹어.""…지금 당과가 문제니, 아란아.""먹으면 이 안 부딪쳐. 내가 해 봤어."서윤이 아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당과를 입에 넣었다. 이가 부딪치지 않았다.*심도현이 마당으로 들었다.군량 호송에서 막 돌아온 얼굴이었다.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
은매가 사라졌다는 말은 밤공기보다 먼저 월령의 손끝에 닿았다.청아는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으나, 마지막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숨은 목구멍에서 가늘게 부서지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서원당 뒤뜰의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가 삐져나와 달빛을 받았다."제가 문을 잠갔습니다."청아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분명히 안에서 잠그고, 바깥 고리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월령은 먼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열쇠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짓말하는 손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제 잘못을 먼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