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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빈손으로 가라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9 20:29:12
조서는 얇았다.

얇은 종이일수록 사람을 깊게 베는 날이 있다. 심가 대문에 걸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하인들은 감히 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부엌의 솥뚜껑은 평소보다 조용히 닫혔다. 종이 한 장이 집 안의 숨을 바꾸었다.

누가 지나가도 발끝이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웃다가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월령은 조서를 다시 펼쳤다.

'궁중 내지 유출. 호부 군량 장부 조작. 심가 여식.' 그 말은 일부러 넓었다. 월령일 수도, 서윤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넓은 말은 사람을 서로 의심하게 만든다. 누가 불려 갈지 모르는 동안, 집 안 사람들은 먼저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된다.

한씨는 조서를 본 뒤부터 서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예부에서 묻는 말에만 답하면 된다. 숙비마마께서 너를 아끼신다. 겁낼 것 없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숙비마마께서 아끼신다.

그 말은 어제까지는 빛이었을지 모른다.

오늘은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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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3. 병풍 앞

    문지방을 넘자 향이 탄 냄새가 먼저 왔다.불이 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회랑에 남아 있는 냄새였다. 물지게를 오른쪽에 지던 궁인이 앞서 걸었고, 다른 하나가 회랑 끝에 서 있었다. 초비가 센 셋 가운데 하나는 지금 왕부 마당에 묶여 있으니, 담 안에 남은 손은 이 둘이었다.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월령은 돌아보지 않았다."설련이는 안에 있느냐.""마마 곁에 계시옵니다. 이쪽으로 드시옵소서."궁인은 그 말만 하고 앞서 걸었다. 안에서 열면 열리는 문이라는 것을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향방 앞을 지났다.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은 채였고, 문갑이 있던 자리에 재가 쓸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안쪽 방 문이 열려 있었다.*병풍이 있었다.그런데 그 앞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병풍을 등지고 앉은 무향의 소매와 정갈하게 여민 깃, 숙비였다.월령은 그 자리에 멎었다. 이 방에 들 때마다 병풍이 있었고 목소리는 그 뒤에서 왔다. 오늘은 목소리가 앞에서 왔다."왔군."숙비의 목이 쉬어 있었다. 연기를 마셨다는 말 하나는 서찰에서 참이었다."설련이 글씨로 불렀는데, 설련이 글씨가 아닌 줄 알고 왔겠지.""예, 마마.""그러고도 왔어.""예.""요 밑에는 아무것도 없네.""알아요. 그것도 알고 왔어요."월령은 숙비가 앉으라 하기 전에 앉았다. 이 방에서 처음 하는 일이었고, 숙비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설련이 숙비 곁에 서 있었다.소매가 그을린 궁인 옷을 입고 있었다. 뺨의 검댕은 씻었고 머리는 도로 반듯했다. 월령을 보지 않고 고모의 어깨 너머 그림 없는 병풍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담 밖에서 초비가 해를 보았다.오시가 반쯤 갔다. 초비는 지붕 위에서 문을 보고, 해를 보고, 다시 문을 보았다. 기윤이 반대편 지붕에서 손가락 하나를 들어 반 시진이 남았다고 알렸다.병사장은 문 앞에서 제 발을 보고 있었다. 미시가 오면 누가 오는지 그 사람은 몰랐다. 독고진겸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2. 급한 첫 획

    "설련 언니 글씨를 흉내 낸 거예요."서윤이 새벽에 기윤이 데려온 걸음 그대로 마루에 앉아 말했다. 밤에 바느질을 하다 온 손끝에 실 자국이 있었다. 종이를 등잔 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제 쪽으로 기울였다."모양은 맞아요. 마 자 꺾는 데도, 요 자 끝을 올리는 데도요. 언니 글씨를 오래 본 사람이에요. 그런데요, 언니.""그런데?""숨을 안 쉬었어요. 언니는 첫 획을 놓고 한 번 쉬잖아요. 그래서 첫 자가 굵고요. 이건 모양만 베끼고 숨은 못 베꼈어요. 남의 글씨를 베끼는 사람은 보통 첫 획에서 쉬어요. 모양을 보느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안 봤어요. 외워서 썼어요."서윤이 종이를 접지 않고 내려놓았다."언니 글씨를 안 보고도 쓸 만큼 오래 본 사람이에요."월령은 그 말을 받았다. 설련이 찻상 뒤에서 자란 그 방에서, 설련의 글씨를 열 해 넘게 본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숙비였다.*"저도 제 이름으로 남이 글을 쓴 적이 있어요."서윤이 어른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는데, 그 밑에서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때 그 글씨도 이랬어요. 제 것 같았어요. 저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저를 오래 본 사람이 썼으니까요. 언니, 이걸 받은 사람이 설련 언니 글씨를 믿고 가면, 그때 저처럼 돼요.""안다.""그런데 가실 거죠."월령이 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그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손끝의 실 자국을 제 치마에 문질렀다.*독고진겸이 밤새 담 밖에 섰다가 온 걸음으로 마루 아래 서 있었다.종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서윤의 말만 들었다. 듣고 나서 한참 뒤에 물었다."그 아이 첫 획이 느리오?"서윤이 그를 보았다."예. 붓을 놓고 한 번 쉬어요.""나는 그 아이 글씨를 모르오."늙은 사내가 담을 짚던 손을 소매에 넣고 있었다."셈방 글씨만 알지. 그 아이는 셈방에 앉지 않았으니. 여섯 살에 열쇠를 삼키려 했소, 셈방에 안 들어가려고.""다음에 보시면 아실 거예요. 첫 자가 다른 자보다 굵어요."독고진겸이 셈을 받아 적는 사람처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1. 담 안의 손

    묵아가 등롱을 들고 협도로 왔다.해가 담 너머로 넘어가는 교대 시각이었다. 낮을 지킨 초비가 내려와 물 표주박을 건네자 묵아가 받았다. 손끝에는 늘 그렇듯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오늘도 그대로야. 셋이 물 긷고, 들어가고. 그게 다야.""휘장은 그대로고?""안 걷었어. 봉쇄한 날부터 한 번도.""알았어. 밤엔 내가 볼게."묵아는 말이 짧았고 초비는 더 짧았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담이 하나 더 선 것 같았다.담 서쪽 협도 쪽에서 기와가 낮게 울렸다. 사람이 밟는 소리였다."서쪽이야.""올라갈게."초비가 도로 지붕으로 올라갔고, 묵아는 등롱을 내려놓고 손끝의 실을 풀었다.*담 안에서 궁인 옷을 입은 사람이 넘어왔다.치맛자락을 허리에 묶고 기와에 매달렸다가 손을 놓아 협도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기 전에 초비가 지붕에서 소리 없이 그 위에 내려섰다. 어깨를 누르고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묵아의 실이 그 손목으로 갔다. 던지고, 감고, 당겼다. 붉은 실이 두 손목을 세 번 돌았다. 손이 등 뒤에서 묶였다.궁인은 버둥거리지 않았다."왕부에 가는 길입니다. 왕비마마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궁인이 협도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말했다. 잡힌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설련 아가씨가 보내셨습니다. 소매 안에 있습니다."초비가 소매를 뒤지자 접힌 종이가 나왔다. 제가 볼 것이 아니라서 펴지 않고 품에 넣었다.*독고진겸이 협도 어귀에 서 있었다.기와 소리를 듣고 제 자리에서 온 걸음이었다. 늙은 사내가 엎드린 궁인의 얼굴을 보았다. 셋 중 하나의 같은 얼굴이었다."설련이는 어찌 있소.""안에 계십니다."궁인은 얼굴을 들지 않고 그렇게만 답했다. 독고진겸은 더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얼굴 앞에서는 물을 말이 없었다."왕부로 데려가오. 나는 여기 있겠소."초비가 궁인을 일으켜 세웠다. 묵아가 실 끝을 제 손목에 감아 쥐었다. 끌지 않고 앞세워 걸었다. 독고진겸은 따라오지 않고 담 밖 제 자리로 돌아갔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0. 심각

    국 그릇에 얼음이 앉아 있었다.밤새 눈 속에 둔 그릇에서 김이 오르던 것이 새벽에는 얇은 얼음이 됐다. 군사 하나가 그것을 치우려다 위명서를 보고 멈췄고, 위명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음째 들고 갔다.위명서는 허리를 만졌다. 밤새 찬 국자의 쇠가 차서 손이 시렸다."오늘 옮긴다."위지헌이 군막에서 나와, 조카가 아니라 강무진을 보며 명을 내렸다."염로는 일백을 남겨 지킨다. 본대는 성터 쪽으로 간다. 심 부장 부대가 거기서 온다.""성터라 하시면.""삭원 옛 성터다. 살구골 위다. 흑령이 산으로 빠졌으니 산 밑을 막는다."강무진이 붉은 것이 검게 마른 붕대를 만졌다."왕야, 심 부장이면 마마님의.""오라비다."위지헌이 그 말을 자르고, 자르고 나서 말에 올랐다.*심각은 부대를 반 리 뒤에 두고 혼자 앞서 말을 달려왔다.급한 사람이 급한 글씨로 쓰던 서신처럼, 말이 눈을 차며 왔다. 북문군 갑옷은 심도윤의 것보다 덜 낡았고, 그래도 낡았다.위지헌 앞에서 말에서 내려 반듯한 손으로 군례를 올렸다."북문군 부장 심각, 섭정왕 전하께—"거기서 말이 멎었다. 심각이 검은 대창포에 흰 것이 앉은 사람, 누이의 남편을 보았다. 이름은 열 해 넘게 들었으나 얼굴은 처음이었다."누이는요. 누이는 잘 있습니까."군례가 거기서 무너졌다. 급한 사람이라 격식이 세 마디를 못 갔다."잘 있소."위지헌이 하오로 답했다. 왕야가 부장에게 하오를 쓰는 것을 강무진은 처음 들어서 눈을 조금 크게 떴고, 정무는 못 들은 얼굴이었다."애는요. 딸이라고 들었습니다.""그렇소.""뒤집었습니까."위지헌이 답을 몰라서 답하려다 말았다. 심각이 그 얼굴을 보고 제가 먼저 웃고, 웃고 나서 멋쩍어서 갑옷 끈을 당겼다."아, 모르시겠구나. 여기 계시니까요. 저도 모릅니다. 그냥 물었습니다.""부장은 말이 빠르오.""어머니가 그러십니다. 글씨도 빠르다고요. 저희 집에서는 누이 것만 느립니다."*북문군 이백이 흙이 아니라 눈을 뒤집어쓴 채 닿았다.위명서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9. 염로

    염로는 눈 위에서도 소금 냄새가 났다.길이 하얀 것이 눈인지 소금인지 알 수 없었다. 소금이 나가고 군량이 들어오던 길에 수레 자국이 얼어 있었고, 그 위에 흑령 본대가 앉아 있었다.위지헌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천막이 길을 따라 늘어섰고, 말들이 눈을 파고 풀을 찾았다."본대입니다, 왕야. 척후 말로는 사백입니다."강무진이 붉은 것이 마른 붕대를 그대로 감은 채 아뢰었다."저희 두 배입니다.""눈이 소리를 먹는다. 언덕 밑에 닿을 때까지 저쪽은 모른다. 염로를 도로 잡는다. 오늘.""예. 그런데 왕야가 또 앞에 서시면—""선다. 명서는 오른쪽이다. 스물로 수레 길을 막는다. 본대가 밀리면 수레 길로 빠진다. 거기서 막아라. 쫓지 말고 막기만 해라."정무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위명서에게 그 명을 전하러 갔다.*위명서가 수레 길 옆 바위 뒤에서 그 명을 받았다.스물이 그 뒤에 엎드려 있었다. 박돌쇠가 국자를 허리에서 뺐다. 이번에는 위명서도 그 국자를 왜 빼는지 알았다."오늘도 국자냐.""칼은 삼전하가 드시고 국자는 제가 듭니다요.""삼전하, 오늘은 앞에 서지 마십쇼. 왕야가 서시니까요. 왕야가 서시면 다들 뒤에 서는 겁니다요. 열 해 그랬습니다.""안다.""아신다니 됐습니다요. 국자는 칼보다 낫습죠. 머리를 치면 안 죽고 쓰러지니까요. 쓰러진 놈은 뒤에서 누가 마무리합니다요."박돌쇠가 닦을 것도 없는 국자를 눈 한 줌으로 닦았다."칼 손잡이는 닦으셨습니까요.""닦았다. 네가 준 헝겊으로.""그건 검어졌을 테니 두 번째 조각은 제가 갖고 있습죠.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십쇼."위명서는 소매 안의 검게 마른 헝겊 조각을 만졌다. 초소에서 칼을 닦은 것이었다.*북경군이 소리 없이 언덕을 내려갔다.눈이 발소리를 먹어서, 흑령이 그것을 본 것은 언덕 밑에서였다. 천막이 흔들리고 말이 뛰고 사백이 일어섰다.위지헌이 앞에 있었다. 검은 대창포에 옥관, 털지 않아 흰 것이 앉은 어깨였다.소금길 위에서 칼이 부딪치자 흰 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8. 자로 잰 사람

    "제 글씨가 아닙니다, 대감."허도겸이 등잔이 아직 꺼지지 않은 새벽에 호부 고방 문 앞에서 그렇게 답했다.호부 상서가 순검 넷을 데리고 그 앞에 서 있었다. 허도겸보다 열 살 위인 늙은 사람이었다. 삼십 년을 제 밑에서 장부와 산 사람을 보는 눈이 오늘은 장부를 보는 눈이었다."자네 글씨가 아니면 누구 글씨인가. 획이 자로 잰 듯하고, 먹을 두 번 누르고. 호부에 그리 쓰는 사람이 자네 말고 있나.""없습니다. 그러니 흉내입니다.""흉내를 누가 내는가. 무엇 하러."허도겸이 답하지 못했다. 답은 있었다. 눈앞의 상서가 그 답이었다. 그런데 그 답을 상서 앞에서 입 밖에 내면 그것은 답이 아니라 죄가 됐다."염로 물표 열한 장이 자네 이름으로 나갔네. 군량이 그리로 샜고, 북에서 사람이 죽고 있네. 옥에 가 있게. 국청이 열릴 때까지."순검이 허도겸의 팔을 잡았다. 허도겸은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고방 안을 한 번 돌아보았다. 대장 여섯 권과 발행부와 붓과 자가 거기 있었다.자는 두고 갔다.*윤백이 먹 심부름꾼 옷을 입고 고방 문 옆에 서서 그것을 다 보았다.순검이 허도겸을 데리고 나갈 때 고개를 숙이고, 숙인 채 눈으로 세었다. 순검 넷에 상서 하나, 고방 문에 자물쇠 하나, 그 자물쇠의 열쇠는 상서 허리에 있었다.윤백은 왕부까지 뛰었다."마마님, 낭중 어른이 옥에 갇혔습니다. 새벽에 잡혀갔습니다."월령이 봄 곁에 앉은 채 그 말을 들었다. 아이가 요 위에서 한쪽 어깨를 들고 다리를 차더니 처음으로 한 번에 넘어갔다. 엎드린 채 돌아오지 못하고 울어서 월령이 아이를 도로 눕혔다."상서가 직접 왔던가요.""예. 순검 넷을 데리고요. 고방은 잠갔습니다. 발행부가 그 안에 있고, 열쇠는 상서 허리에 있습니다.""잠근 것이 아니라 태울 거예요. 국청이 열리기 전에요."윤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서였다.*곤원전에서 황후가 그 말을 들었다.월령은 아이도 청아도 없이 혼자 왔고, 늙은 상궁이 문을 지켰다."호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6. 길목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5. 안쪽

    은매가 사라졌다는 말은 밤공기보다 먼저 월령의 손끝에 닿았다.청아는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으나, 마지막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숨은 목구멍에서 가늘게 부서지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서원당 뒤뜰의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가 삐져나와 달빛을 받았다."제가 문을 잠갔습니다."청아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분명히 안에서 잠그고, 바깥 고리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월령은 먼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열쇠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짓말하는 손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제 잘못을 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4. 자리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7. 온기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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