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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난 뒤에야 후회하는 CEO 남편

내가 떠난 뒤에야 후회하는 CEO 남편

Por:  알리사 제이Completo
Idiom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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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님. 정말로 20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아이들의 양육권까지 포기하시겠습니까?” “네. 서류 진행해주세요. 이제 정말 끝이에요.” 나는 대리인과 통화하며 담담하게 대답한 뒤, 주방의 화강암 아일랜드에 눌어붙은 끈질긴 기름때를 힘주어 문질렀다. 20년 동안 나는 이 가족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다. 집안 살림을 책임졌고, 아이들의 교육을 도맡았으며, 남편이 사회에서 성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불평 한마디 없이 곁을 지켜왔다. 하지만 남편 우진은 인터뷰 자리에 자신의 젊은 의붓여동생 지아를 데리고 나가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건 전부 제 여동생 덕분입니다.” 심지어 내 친자식들조차 나를 업신여겼다. 그들은 나를 평범하고 세련되지 못한 전업주부라며 비웃었고,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진짜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지아 고모’의 편에 서 있었다. 나는 이혼 서류에 서명한 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떠났다.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가족’을 이루고 싶다면, 이제는 마음껏 그렇게 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떠난 순간, 그 가족은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기 시작했고, 곧 걷잡을 수 없는 공황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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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장

“이경은 님, 합의서 내용은 모두 검토하셨나요?”

“이제 서명만 하시면 20년간 이어진 이 결혼 생활은 법적으로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양육권 관련 사항까지 포함해서, 정말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신 건가요?”

나는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운 채, 한 손으로 화강암 아일랜드 식탁에 눌어붙은 기름 얼룩을 박박 문지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네. 접수해주세요. 이제 끝낼 거예요.”

변호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소리에 스친 짧은 망설임 속에는 어렴풋한 동정이 묻어 있었지만, 그는 곧 다시 업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이제 심우진 씨의 서명만 받으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법원에서 정한 의무 숙려기간만 지나면 이혼 판결이 최종 확정될 거예요.”

통화를 마친 나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비눗물이 잔뜩 묻은 수세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20년이나 이어진 결혼 생활이 주방 조리대를 닦던 와중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거실에 놓인 85인치 대형 평면 TV에서는 황금 시간대 경제 채널이 올해의 기업가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었다.

화면 속 우진은 맞춤 제작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권위와 카리스마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쳤고,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여유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는 입양된 여동생이자 개인 비서인 지아가 앉아 있었다.

지아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화장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고, 우진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순수하면서도 노골적인 동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행자가 미소를 띤 채 질문을 던졌다.

“심우진 대표님, 지금의 놀라운 성공을 누구의 공으로 돌리고 싶으신가요?”

우진은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지아 쪽으로 몸을 돌렸고, 차갑던 눈빛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심지아 씨죠. 제 비서이자 제 여동생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지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사업 파트너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직원들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함께 회사를 성장시킨 사람들에게도 아낌없이 공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집을 돌보고, 아이들을 키우고, 무려 20년 동안 그림자처럼 뒤에서 그를 떠받쳐 온 아내에게는 단 한마디의 감사조차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에게 유령과도 같았다.

보이지 않는 사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들 주원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찡그리더니 과장스럽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엄마, 또 뭐 만들었어? 집 전체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하잖아. 진짜 역겨워.”

딸 서윤은 명품 운동화를 벗자마자 곧장 TV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화면을 가리키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저것 좀 봐! 아빠랑 지아 고모 나왔어! 오늘 지아 고모 진짜 섹시하다. 저 촌스러운 옷 입은 엄마보다 훨씬 낫네.”

“완전 인정.”

주원도 기다렸다는 듯 즉시 맞장구를 쳤다.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다운 장난기가 아니라 노골적인 경멸이 담겨 있었다.

“지아 고모는 완전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잖아. 엄마는 그냥 맨날 부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요리만 하고 있고.”

나는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남편과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을 듣는 동안, 가슴 한구석은 이미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우진은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그래서 그는 입양된 여동생인 지아를 언제나 자신의 곁에 두고 살아왔다.

그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지아는 힘든 삶을 살아왔어. 나는 오빠잖아. 내가 아니면 누가 저 애를 챙겨주겠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둘은 고등학생 시절 뜨거운 관계를 가졌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의 지아는 그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전속 비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지아의 지나치게 가까운 행동이나 선을 넘는 태도에 불편함을 드러낼 때마다 우진은 언제나 같은 말로 나를 몰아세웠다.

“왜 그렇게 생각이 더러워? 지아는 그냥 내 여동생이야! 쓸데없는 의심 좀 그만해. 진짜 한심하다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우진과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지만, 그들이 보여 주는 모든 행동은 정반대의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충성심과 애정은 언제나 지아에게 향해 있었고, 나는 그들 가족의 주변을 맴도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나는 말없이 오븐에서 훈제치킨을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은 뒤 TV 속의 ‘완벽한 커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를 조롱하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 네 사람이 진짜 가족이라면, 나는 기꺼이 비켜주겠어.’

나는 몸을 돌려 2층 안방으로 올라갔다.

며칠 전 미리 출력해 두었던 이혼 서류를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냈다.

그리고 ‘청구인’이라고 적힌 칸 아래에 흔들림 없는 손으로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무급 가정부처럼 살아온 20년.

그 길고도 지긋지긋한 시간이 이제 정말 끝나고 있었다.

나는 서류를 정성스럽게 접은 뒤 두꺼운 생명보험 갱신 서류 뭉치 사이에 끼워 넣고, 아무 의심도 사지 않도록 거실 커피 테이블 한가운데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뒤를 따라 현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는 실내화조차 신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가죽 소파에 비틀거리듯 몸을 던지며 실크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쳤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비싼 스카치위스키 향이 그의 숨결에서 진하게 풍겨왔고, 그 짙은 술 냄새 사이로 지아가 늘 뿌리던 상탈 33 향수가 선명하게 섞여 있었다.

게다가 셔츠 칼라에는 붉은 립스틱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끝내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진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지아랑 네트워킹 행사에 갔는데 칵테일을 너무 많이 마셨어. 난 그냥 좀 도와준 것뿐이고.”

그는 말을 이어가다가 바닥에 놓여 있던 종이 상자를 발끝으로 툭 밀어 내 쪽으로 보냈다.

“이거 당신 주려고 사 왔어.”

나는 시선을 내려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최신형 고급 로봇 청소기가 들어 있었다.

우진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아 새 펜트하우스로 이사하는 거 도와주다가 산 거야. 당신은 하루 종일 쓸고 닦고 하니까 이게 딱 어울릴 것 같더라고.”

어울린다고?

그러니까 그의 눈에 나는 바닥이나 닦는 사람일 뿐이었고, 지아는 그가 직접 고급 펜트하우스 이사까지 도와줄 가치가 있는 여자라는 뜻이었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차갑고 짧은 웃음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을 뿐이었다.

나는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집어 들고 그의 손에 건넸다.

“여기.”

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뭔데? 서류? 이 시간에?”

“생명보험 갱신 서류야.”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보험 설계사가 오늘 안에 서명해야 아이들 보장이 계속 유지된다고 하더라고.”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듣자 그의 눈에 어려 있던 짜증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서류를 단 한 장도 읽어 보지 않은 채 곧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알았다, 알았어. 서명하면 되잖아.”

그는 휘갈기듯 서명을 남기고는 펜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지아가 술 때문에 속이 안 좋대. 따뜻한 국물 좀 끓여서 갖다줘야겠어.”

나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올리브유 병 하나 넘어져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자가, 이제는 다른 여자를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린 ‘보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양측의 서명이 모두 완료된 정식 이혼 합의서가 되어 있는 그 서류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심우진.

2주 뒤 법원에서 이혼 판결문이 송달될 때에도.

부디 지금처럼 그렇게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기를.

지금과 같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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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경은 님, 합의서 내용은 모두 검토하셨나요?”“이제 서명만 하시면 20년간 이어진 이 결혼 생활은 법적으로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양육권 관련 사항까지 포함해서, 정말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신 건가요?”나는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운 채, 한 손으로 화강암 아일랜드 식탁에 눌어붙은 기름 얼룩을 박박 문지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네. 접수해주세요. 이제 끝낼 거예요.”변호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소리에 스친 짧은 망설임 속에는 어렴풋한 동정이 묻어 있었지만, 그는 곧 다시 업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알겠습니다. 이제 심우진 씨의 서명만 받으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법원에서 정한 의무 숙려기간만 지나면 이혼 판결이 최종 확정될 거예요.”통화를 마친 나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비눗물이 잔뜩 묻은 수세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20년이나 이어진 결혼 생활이 주방 조리대를 닦던 와중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그때 거실에 놓인 85인치 대형 평면 TV에서는 황금 시간대 경제 채널이 올해의 기업가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었다.화면 속 우진은 맞춤 제작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권위와 카리스마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쳤고,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여유까지 느껴졌다.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는 입양된 여동생이자 개인 비서인 지아가 앉아 있었다.지아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화장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고, 우진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순수하면서도 노골적인 동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진행자가 미소를 띤 채 질문을 던졌다.“심우진 대표님, 지금의 놀라운 성공을 누구의 공으로 돌리고 싶으신가요?”우진은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그는 자연스럽게 지아 쪽으로 몸을 돌렸고, 차갑던 눈빛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심지아 씨죠. 제 비서이자 제 여동생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지아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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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다음 날 아침, 우진은 의외로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심한 숙취에 시달리며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일 법도 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그는 몸을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그 행동에는 뒤늦은 미안함이 묻어나는 듯했다.“경은아, 어젯밤 일은 미안. 회사 일이 너무 바빴거든. 당신을 너무 신경 못 쓴 것 같네.”“오늘 마침 주말인데 가족끼리 캠핑장 가서 바비큐라도 할까? 애들도 오래 전부터 가고 싶다고 했잖아.”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우진은 폴로 셔츠 단추를 채우며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지아한테 방금 문자 왔던데, 혼자 있는 집이 너무 외롭다네?”“그래서 짐 챙겨서 오라고 했어. 알다시피 걔는 다른 가족도 없잖아. 혼자 있게 두면 너무 불쌍하니까”나는 입술 끝까지 차올랐던 거절의 말을 조용히 삼켜 버렸다.항상 똑같았다.무슨 일이든 결국은 ‘불쌍하고 외로운 여동생’이라는 핑계로 귀결되곤 했다.호숫가 캠핑장에 도착한 뒤 우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편처럼 행동했다.하지만 그의 관심과 배려는 단 한 번도 나를 향하지 않았다.“지아야, 모기 기피제 뿌려. 여기 모기 엄청 많아.”“여기 햇볕이 너무 강하다. 천막 아래 가서 앉아 있어. 피부 타겠다.”지아는 배가 드러나는 짧은 크롭톱과 데님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젊음과 생기가 온몸에서 흘러넘쳤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 공기마저 밝아지는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우진과 아이들의 손을 잡아끌고 잔디밭으로 뛰어가 놀기 시작했고,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처럼 주변에 퍼져 나갔다.“아빠! 원반 지아 고모한테 던져요!”주원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고모 진짜 잘한다! 고모 최고!”서윤은 지아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환호했다.그 눈빛에는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거의 숭배에 가까운 동경이 담겨 있었다.반면 나는 마치 직접 장비를 챙겨 온 고용된 일꾼처럼 행동하고 있었다.혼자 SUV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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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집에 돌아온 뒤, 결국 내 허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둘째 아이를 낳을 때 맞았던 하반신 무통주사의 후유증이었다. 오래 전부터 남아 있던 합병증이었지만, 이번 발작은 유독 심했다.눈앞이 하얗게 번질 정도의 통증이 척추를 따라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허리 근육은 돌처럼 굳어 버렸고,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우진은 소파에 앉아 ‘월 스트리트 저널’을 읽고 있었다.내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오자 그는 벌떡 일어나 달려왔고, 내가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몸을 받아냈다.그의 눈에는 당황과 걱정이 선명하게 어려 있었다.“경은아! 무슨 일이야? 또 허리야?”그 눈에 담긴 진심 어린 걱정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지난 20년 동안 우진의 다정함은 언제나 완벽해 보였다.흠잡을 데 하나 없이.“응... 상태가 안 좋아...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이를 악문 채 겨우 말을 짜내듯 내뱉었다.“당황하지 마. 지금 바로 응급실로 데려갈게.”그는 마치 조금만 힘을 줘도 깨질 것 같은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나를 안아 올리려 했다.바로 그때였다.그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지아에게만 지정해 둔 특별한 벨소리였다.우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꺼낸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것은 울먹임이 잔뜩 섞인, 지나치게 나약한 목소리였다.“오빠... 서류철에 손가락을 베였어. 피가 너무 많이 나...”“아… 너무 아파... 나 이러다 과다출혈로 죽는 거 아니야?”우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불과 몇 분 전, 내가 걷지도 못하는 모습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창백한 얼굴이었다.“지아야, 울지 마! 움직이지 말고 상처 부위를 눌러! 지금 바로 갈게!”그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그의 품에 기대어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아주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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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그래. 묵은 건 버리고 새 걸 들이는 거지. 당신 화 안 났으면 됐어.”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선물 상자를 내게 건넸다. 내가 아직도 허리 통증 때문에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이건 출장 갔을 때 내가 직접 고른 거야. 열어봐.”나는 말없이 상자 뚜껑을 들어 올렸다.안에는 선명한 핫핑크색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겹겹이 쌓인 망사 소재와 저렴해 보이는 레이스 장식, 그리고 과할 정도로 풍성한 주름장식이 달린 드레스였다.20살 인플루언서가 코첼라 같은 음악 축제에 입고 갈 법한 옷.40살 주부인 내가 입는다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디자인이었다.무엇보다도 나는 그 드레스를 보자마자 어디서 본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불과 사흘 전, 지아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와 있던 바로 그 옷이었다.사진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사이즈를 너무 작게 주문했네. 진짜 숨 막혀 죽을 것 같음. 원하는 사람 있으면 그냥 가져가요. #패션실패’그러니까 그의 ‘직접 고른 선물’이라는 것은 사실 지아가 버린 쓰레기를 나에게 재활용한 것에 불과했다.나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스타일 아니야. 입고 싶지 않아.”우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며, 눈빛에 진심 어린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거울 좀 봐. 당신은 매일 회색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니잖아. 자기 관리도 완전히 포기했고.”그는 드레스를 내 품에 밀어 넣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오늘 밤은 중요한 자리야. 부탁할게. 한 번만 입어주면 안 될까? 나를 위해서.”나는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결국 드레스를 들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거울 앞에 선 순간, 핑크색 천이 허리 부분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가차 없는 재단이었다. 몸매의 작은 단점까지 모조리 드러나게 만들었고, 마치 솜사탕으로 감싼 소시지처럼 보이게 했다.너무나 굴욕적이었다.나는 차라리 바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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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그 드레스는 거의 고문 기구나 다름없었다.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며 갈비뼈를 압박했고, 사방에 떠도는 가식적인 미소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졌다.“화장실 좀 다녀올게. 바람도 좀 쐬고 오고.”우진은 투자자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는 건성으로 손을 한 번 흔들며 말했다.“그래. 다녀와. 피곤하면 기사한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 애들은 나중에 내가 데리고 갈게.”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연회장을 빠져나왔다.호텔 정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스쳐 지나갔다.나는 무심코 옆구리를 더듬다가 문득 멈칫했다.클러치를 VIP 라운지에 두고 나온 것이다.집 열쇠도, 휴대폰도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연회장 옆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작은 무대 위에는 지아가 서 있었고, 그녀는 방금 재즈곡 한 곡을 마친 참이었다.행복한 작은 새처럼 환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곧장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우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우진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행동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나직이 속삭였고, 그 말을 들은 지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을 툭 쳤다.주변 직원들의 반응은 더욱 충격적이었다.누구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치 늘 있는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일부러 못 본 척 넘어가는 듯했다.심지어 휘파람을 불며 웃는 사람들까지 있었다.“심우진 대표님이랑 여동생은 정말 각별하네.”“완전 파워 남매야.”“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인인 줄 알겠는데?”주원과 서윤마저 신이 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서윤은 눈을 반짝이며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 고모 완전 애니메이션 공주 같아! 그런데 원더우먼처럼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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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그날 밤,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 탓에 자정이 되자 내 체온은 39.5도까지 치솟았다.그 여파로 예전에 입었던 허리 부상까지 악화되었고, 나는 반쯤 의식을 잃은 채 헛소리를 내뱉는 상태에 빠져들었다.그날만큼은 드물게도 우진이 인맥 관리를 하러 밖에 나가 있지 않았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를 안아 들고 종합병원으로 달려갔다.“의사 선생님! 빨리 좀 봐주세요! 열이 너무 높아요!”검사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단순한 고열이 아니었다.면역 체계가 무너져 내리면서 오래된 부상 부위 주변의 깊숙한 조직에 심각한 감염이 발생한 상태였고, 감염 부위 고름을 짜내고 괴사한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수술을 진행하려면 보호자 서명이 필요했다.우진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헌신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경은아, 무서워하지 마. 난 계속 대기실에 있을 거야. 눈을 뜨는 순간 가장 먼저 보게 될 얼굴도 바로 나일 거고.”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이 가슴속으로 천천히 스며들며 번져 나갔다.바로 그때였다.우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순간,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무너져 내렸다.“뭐라고? 발목을 접질렸다고? 얼마나 심한데? 걸을 수는 있어?”수화기 너머에서는 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울음을 섞은 듯한 목소리였다.“오빠, 너무 아파... 뼈가 부러진 것 같아... 여기 나 혼자라서 너무 무서워...”우진은 마취 준비를 받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다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깊은 갈등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경은아.”그가 내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쥔 채 말했다. 미간은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당신은 강하잖아. 하지만 지아는... 종이에 손만 베여도 난리가 나는 애야. 지금 완전히 패닉 상태라고. 나를 필요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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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병원에서 퇴원한 뒤, 우리 부부의 결혼 20주년 기념일까지는 단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우진은 수술 직전 나를 두고 떠났던 일 때문에 적지 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정말 오랜만에 그는 도시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예약하기 어려운 회전식 루프톱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나를 향해 굳게 맹세했다.“경은아,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이번 결혼기념일만큼은 반드시 당신에게 보상해 주고 싶어.”“레스토랑 최고의 자리를 예약해 뒀어. 우리 둘만의 시간이야. 아이들도 없고, 일도 없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어.”나는 거절하지 않았다.어차피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결혼기념일이었으니까.……기념일 당일 밤.레스토랑은 은은한 조명 아래 잠겨 있었고, 공간 전체에는 짙고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라이브 현악 4중주가 부드러운 선율을 연주하며 저녁의 분위기를 더욱 깊게 물들이고 있었다.전채 요리가 막 테이블 위에 놓였을 때였다.우진의 휴대전화가 새하얀 테이블보 위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영상통화 요청이었다.우진은 나를 한 번 바라보고 아주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그는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 배경은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으로 가득한 어둡고 혼란스러운 나이트클럽이었다.지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그녀는 보드카 병을 손에 든 채 카메라를 향해 울부짖듯 외쳤다.“오빠! 어디야? 보고 싶어... 흑...”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남자들이 자꾸 나한테 들이대고 있어. 나 집에 가고 싶어...”우진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술에 취해서 클럽에 있다고? 저긴 완전 막장 같은 곳이잖아. 위험해!”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여자 혼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나는 여전히 손에 포크를 쥔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늘은 우리 결혼 20주년이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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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 사흘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출국 사흘 전, 지아는 정성스럽게 이어 붙인 사진 콜라주 하나를 내게 보냈다.왼쪽에는 우진과 지아, 그리고 아이들이 롯데월드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네 사람은 서로 바짝 붙어 머리를 맞댄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지아는 그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있었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있었다.누가 봐도 완벽한 한국식 핵가족의 모습이었다.오른쪽에는 누군가 몰래 찍은 내 뒷모습 사진이 있었다.나는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대형 오븐의 기름받이를 문지르며 청소하고 있었다.사진 아래에는 겉으로는 다정한 척하지만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꿈의 가족 vs. 가정부.”“더러운 일 맡아줘서 고마워, 언니. 언니는 정말 자기 자리 하나는 잘 지킨다니까.”나는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화는 전혀 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삭제한 뒤, 집 안에서 내 존재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나는 폐기물 수거 업체에 연락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낡은 가전제품들을 모두 처분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직접 고쳐 가며 사용했던 물건들이었다.옷장에 걸려 있던 ‘엄마 옷’들도 전부 꺼냈다. 우진이 늘 “촌스럽다”고 비웃던 옷들이었다.나는 그것들을 커다란 봉투에 담아 의류 수거함에 넣을 준비를 했다.그리고 우진이 지난 세월 동안 아무렇게나 써 놓았던 메모와 카드들은 전부 세단기에 집어넣었다.잘게 잘려 나가는 종이 조각들과 함께, 이 집에서 보낸 내 스무 해의 흔적도 조금씩 사라져 갔다.……출국 당일 아침.눈을 뜨자마자 침대 곁에 서 있는 우진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내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고, 미간은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은행에서 이상 거래 알림이 왔어.”그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당신 계좌에서 큰돈이 빠져나갔다는데. 돈을 어디로 옮긴 거야?”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날 새벽, 그가 아직 잠든 사이 개인 명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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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비행기 창가 좌석에 앉아, 프랑스 니스로 향하는 항공편의 날개 아래로 끝없이 흘러가는 구름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길고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마치 지난 20년 동안 나를 짓눌러 왔던 숨 막히는 압박감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비행기가 착륙하면 나는 곧바로 해안가로 향해 작지만 개성 있는 분위기의 민박집을 열 예정이었다. 그것은 내가 20살 무렵부터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 온 꿈이었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끝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이루는 편이 훨씬 나았다.……한편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우진이 스스로 폭풍의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그는 하루 종일 갤러리에서 열린 파티에서 지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좀처럼 떨쳐낼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가슴 한구석을 갉아먹고 있었다.이상하게도 평소라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듯한 느낌을 주던 지아의 집착 어린 행동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아침 내가 보였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고요하고도 평평한, 마치 죽은 물처럼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던 눈빛이었다.“오빠, 에이, 그러지 말고! 데킬라 한 잔만 더 마시자!”지아는 깔깔 웃으며 술잔을 그의 입가 가까이 들이밀었다.우진은 말없이 술잔을 밀어냈다. 투덜거리며 붙잡는 지아의 항의를 무시한 채 재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갈게. 집에 들어가 봐야겠어. 오늘 경은이가 너무 조용했어. 뭔가 이상해.”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시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량 전용도로를 달리는 내내 속도를 높인 채 차량들 사이를 가르며 질주했고, 가슴속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현관문을 밀어 열었을 때, 평소처럼 현관 홀을 환하게 비추는 따뜻한 불빛도, 갓 만든 음식의 냄새도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그를 맞이한 것은 짙은 어둠과 싸늘한 정적뿐이었다.“경은아? 여보?”그는 두 번이나 내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거실 안에서 허무하게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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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우진은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그는 거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한 번.두 번.열 번이 넘도록.하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한결같았다.우진은 곧바로 부산에 있는 우리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시절 함께 지냈던 사교 클럽 자매들에게도 연락했고, 평소에는 알림조차 꺼 두었던 가족 단체 채팅방의 먼 친척들에게까지 닥치는 대로 연락을 돌렸다.그러나 모두의 대답은 똑같았다.“경은이 못 봤는데?”“어디 있는지 몰라.”“연락도 못 받았어.”그제야 우진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포에 조금씩 잠식되기 시작했다.떨리는 손으로 그는 모바일 뱅킹 앱을 열어 자신이 내게 지급했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했다.그리고 곧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내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던 모든 추가 사용자 카드가 오늘 아침 가장 먼저 해지되어 있었던 것이다.나는 그의 돈을 단 1원도 가져가지 않았다. 공동 계좌도 건드리지 않았고, 카드 한 장조차 챙기지 않았다.그저 나 자신만 데리고 떠났을 뿐이었다.우진은 급히 서재로 달려가 집 보안 시스템에 접속했다. 그리고 클라우드에 저장된 영상을 불러와 화면을 확인했다.모니터 속에는 내가 있었다.작은 기내용 여행 가방을 끌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이었다.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걸음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문을 나설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그 수십억짜리 저택 안에는 마지막으로 한 번쯤 시선을 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했다.그 순간 우진은 문득 오늘 아침 2층 커튼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내 눈빛을 떠올렸다.고요하고도 차가웠던 그 시선.그것은 작별 인사이자,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마음이 완전히 식어 버린 여자의 마지막 눈빛이었다.그때였다.우진의 시선이 마호가니 책상 위로 향했다. 서명이 끝난 이혼 서류와 결혼반지, 내가 문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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