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서진의 눈동자에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암전이 찾아와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면마취의 기운과 극심한 피로감 속에서 설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설고 고급스러운 병실의 천장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에 설아는 본능적으로 제 아랫배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리며 지독한 통증을 뱉어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손을 쳐다보던 설아의 시선이, 침대 곁에 멈추었다.
그곳에는 서진이 있었다. 늘 빈틈없이 완벽하던 수트 차림은 온데간데없고, 셔츠 깃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침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의 하얀 소매 자락에 박힌 붉은 핏자국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사그락거리는 미세한 소리에 서진은 감고 있
순간 분을 참지 못한 서진의 어머니의 손이 허공으로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주위의 시선과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손을 거두며 고상한 척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표독스러운 독설을 고상한 어조에 담아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다행이구나.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생각이 없다니. 어디 한번 맨몸으로 나가서 구질구질하게 살아봐라. 너 같은 건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네가 살던 집 현관 문짝도 못 살 테니까."서진의 어머니는 설아는 무시하며 비아냥거렸다."우리 서진이가 진작에 수현이 같은 격에 맞는 짝을 만났어야 했는데, 너 같은 걸 만나서 지난 3년 동안 신세 망친 걸 생각하면...휴...그런데 넌 미안해 할 줄도 모르고 아주 뻔뻔하기까지 하구나. 그래서 내가 널 처음부터 싫어했던 거야.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지, 아유, 증말 재수 없으려니……."서진의 어머니가 혀를 쯧쯧 차며 테이블 위의 명품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채 일어났다."다시는 우리 서진이 앞에 얼씬거리 지도 마라. 재수 없으니까.“마지막까지 폭언을 한바탕 쏟아부은 서진의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카페를 빠져나간 후, 홀로 남겨진 설아의 입가에 허탈한 쓴웃음이 새어나왔다."누가 누구 인생을 망쳐…… 하…….“설아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 속에 고인 응어리가 무거웠지만, 기운을 내어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집으로 걸어가는 길, 설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과거의 기억들과 방금 전 유서진의 어머니의 독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아, 주위의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마치 음소거 상태가 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빵—————!그때, 뒤쪽에서 날카롭고 거친 클락션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설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의 발걸음 바로 옆으로 고급 스포츠카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조수석 창문이 아래로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강윤이 설아
“......”마음고생이라니. 설아는 기가 차서 말문이 턱 막혔다. 정작 지옥 밑바닥을 구르며 피눈물을 쏟은 게 누구인데, 감히 제 아이를 앗아간 악마들의 입에서 저런 가당치도 않은 단어가 튀어나오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뻔뻔하게 낯짝을 쳐들고 자신을 기만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역겨운 토기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설아는 더 이상 이 지독하도록 추악한 공간에, 그리고 제 모든 것을 처참하게 망가뜨린 두 인간과 단 1초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말 상대를 해주는 것조차 시간 낭비였다.설아는 서진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수현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설아의 시선은 오직 서진만을 향해 있었다. 설아는 들고 있던 하얀 봉투를 서진의 손에 가차 없이 쥐여주었다.“빨리 처리해 주세요”바스락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이혼 서류 봉투가 서진의 손에 쥐어지자, 서진의 커다란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서류를 전달한 설아는 미련 없이 그대로 뒤돌아 서진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대표실의 대리석 바닥 위로 설아의 구두 굽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고, 서진은 붙잡지도 못한 채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숨이 막힐 것 같던 서진의 회사 건물에서 마침내 빠져나오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마치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듯 힘이 쭉 빠져나갔다.회사를 나서는 설아의 위로 잔인하도록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이미 메말라 더는 나올 눈물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설아의 눈가에 금세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지난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nb
택시에서 내린 설아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손에 쥔 이혼 서류 봉투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달하고, 묵직한 대리석 복도를 지나 대표실 앞에 도착한 설아는 곧바로 서진의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설아의 등장에 비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지금 대표님 회의 중이시라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회의요?“"예,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일정이 조금 길어질 것 같아서요…….“대답하는 비서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게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설아는 더는 유서진을 기다리며 단 1분 1초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얼굴을 마주해봤자 지옥 같은 기억과 끔찍한 환멸만 되살아날 뿐이었다."네, 알겠어요."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설아는 잠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흐르는 침묵 속에서 대표실 문 너머의 묘한 기류를 감지한 듯, 이내 생각보다 회의가 더 길어지는 것 같자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서에게 다가가 이혼 서류가 든 빳빳한 봉투를 건넸다."이거 대표님께 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 사모님…….“설아가 비서에게 서류를 전달하고 차갑게 돌아서서 대표실 로비를 벗어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철컥-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서
이튿날 아침, 병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을 받으며 설아는 밤새 허물어졌던 눈빛을 완벽하게 지워냈다. 부어오른 눈가와 피멍이 든 얼굴은 처참했지만, 그 위로 들어앉은 눈동자만큼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서늘하고 단단해져 있었다.설아는 오전 회진을 돌러 들어온 간호사에게 다급하게 사정해 휴대폰을 빌렸다.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익숙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네, 스타트업 이음입니다.“"……팀장님. 저 설아예요.“"어? 설아 씨! 연락도 없이 왜 출근 안 해? 무슨 일 있어? 이건 또 무슨 번호야?“수화기 너머 장서인의 목소리에는 설아의 걱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사회에서 만난 유일하게 자신을 '이설아'라는 온전한 인격체로 대해주며 능력을 믿어주었던 직장 상사이자 멘토였다."그게…… 어제 일이 좀 있었어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입원?! 왜? 어디가 아픈 건데?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설아의 짧은 대답 뒤에 숨겨진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했는지, 서인의 목소리가 단숨에 거칠어지며 다급하게 물어왔다. 누구 하나 제 편이 없던 설아의 세계에서 오직 자신만을 향해 쏟아지는 조건 없는 걱정과 온기.그 따스함이 도화선이 된 듯, 밤새 독하게 치켜세웠던 설아의 마음 한구석이 툭 하고 허물어졌다."팀장님…… 흐흑, 흑…….&ldqu
서진은 나지막한 말을 마지막으로 설아의 병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서진은 복도 차가운 의자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정말 이렇게 마지막이라니……."이설아…….“서진은 들리지 않을 이름을 나지막히 속삭였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롭게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은, 굳게 닫힌 설아의 병실 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힘없이 자리를 떴다.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무슨 정신으로 운전대를 잡은 건지 기억조차 없었다. 붉은 신호등과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 속에서 서진의 머릿속은 온통 백지가 된 것 같았다.서진이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은 잔인할 정도로 아늑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는, 그 아늑함을 비웃듯 자신의 어머니와 박수현이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서진은 핏발 선 눈으로 두 사람 앞에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살얼음 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왜 두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야?“서진의 날카로운 말투와 차가운 눈빛에 수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또다시 억울한 연기를 이어갔다. 슬픔과 배려를 가장한 가식적인 안색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서진아, 그게 아니라……. 어머님이 아까 급하게 병원에 가시느라 가방을 두고 가셨더라구.....가방도 챙기고.....또 어머님이 아까 충격으로 많이 놀라셔서, 진정 좀 시켜드리느라 같이 있었어. 오해하지 마.“수현의 말에 서진의 어머니가
서진의 눈동자에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암전이 찾아와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면마취의 기운과 극심한 피로감 속에서 설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설고 고급스러운 병실의 천장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에 설아는 본능적으로 제 아랫배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리며 지독한 통증을 뱉어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손을 쳐다보던 설아의 시선이, 침대 곁에 멈추었다.그곳에는 서진이 있었다. 늘 빈틈없이 완벽하던 수트 차림은 온데간데없고, 셔츠 깃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침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의 하얀 소매 자락에 박힌 붉은 핏자국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사그락거리는 미세한 소리에 서진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고개를 든 서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힘없이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설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이설아…….“서진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어난 그녀를 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설아의 시선을 마주한 서진의 심장이 사정없이 덜컹거렸다.자신 때문에 두 번이나 아이를 잃게 되었다는 잔인한 진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제 뜻대로 주무르던 유서진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 한 마디도 뱉지 못하는 무력한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설아야…… 아이는…….“차마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소파에 팔짱을 낀 자세로, 굳은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디 다녀와?"낮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설아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병원에서 왜 퇴원했어?""아무 이상 없다길래요.“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호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빈혈 수치, 면역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그런데 설아는 지금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아무 이상 없다고?""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다. 기대도,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설아의 부모는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서진은 설아의 곁에 있었다. 식이 끝나고 설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잘 부탁해. 이설아“그 한마디가 설아에게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신혼 초, 서진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었다.바쁜 와중에도 설아를 챙겼고, 서툴지만 함께 밥을 지어먹었고, 설아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설아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행복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