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강솔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아직 새벽 한 시 무렵이었다.옆에서 편안히 잠든 지안을 바라보고는 이불 끝을 잘 여며 줬다. 강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발코니로 나가 찬바람을 맞았다. 차가운 공기가 살갗 안으로 스며들자 불안과 놀란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로부터 이틀이 더 흘러 월요일이 됐다.강솔이 바쁜 일을 끝내고 막 집에 돌아오자 레미가 소식을 전했다. “여태진이 돌아왔어.”강솔은 물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곧 평소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잘됐네. 지난번 일도 아직 계산이 안 끝났는데.”“네가 직접 갚아줄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레미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곡선이 걸렸다.강솔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레미는 중현이 해 둔 일을 설명했다. “중현이 미리 여태진의 범죄 증거를 수사기관에 넘겨 놨어. 돌아오는 대로 체포할 수 있게.”놀란 강솔의 눈이 조금 커졌다.중현이 준비해 둔 일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틀 전 두 사람이 완전히 틀어진 뒤에도 철회하지 않고 여태진의 처벌을 추진할 줄은 몰랐다.“아가씨.”홍일이 들어오며 강솔의 생각을 끊었다. 언제나처럼 감정 없는 기계 같은 말투였다. “여진동 회장님이 오셨습니다. 아가씨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강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만나.”이제 누구의 체면도 봐줄 필요가 없었다.예전에는 웃어른이라는 이유로 웬만한 일에는 예의를 다했다.하지만 지난번 사건 뒤 여진동은 강솔이 실제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지금 잘 지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태진이 저지른 일을 모두 용서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때부터 강솔은 그 노인의 실상을 똑똑히 파악했다.여진동의 입장에서는 여태진을 위해 선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피해자에게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한번 만나 봐도 괜찮을 것 같아.” 레미가 의견을 냈다.강솔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바라봤다.“별일 없으면 여태진까지 데리고 와서 사과시키려는 거야
“촬영 장소는 나 같은 조연 배우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단아는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온순한 말투로 도현에게 설명했다. “제작진이 H시에서 찍겠다고 정했는데 고작 조연인 내가 나서서 여기서는 못 찍는다고 할 수는 없잖아.”“그런 문제는 내가 해결해.” 도현은 단아의 손을 움켜쥐었다.단아는 겉으로만 수긍했다.H시에서 촬영하게 되면 가장 좋겠지만, 여건이 안 된다면 억지로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촬영에 들어가기만 하면 도현이 매번 단아의 핸드폰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카톡 계정은 도현의 태블릿에 연동되어 늘 감시받았지만, 일반 문자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기분 상했어?” 안경 너머 도현의 눈은 속을 읽기 어려웠다.“내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이야?” 단아는 부드럽게 답했다. “당신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다가 혹시 누군가가 우리 관계를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뿐이야.”“그럴 일 없어.” 도현은 이런 일을 늘 철저히 숨겼다. “사람들이 나와 남녀 주연 사이를 의심하면 했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너를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단아는 불쾌한 감정을 누르고 이미 습관이 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행이고.”두 사람은 각자 다른 속셈을 품었다. 어느 쪽도 진심을 내보이지 않았다.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는 점이었다.두 시간이 지난 뒤.두 사람은 이른바 ‘해야 할 일’을 마쳤다.도현은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단아를 바라봤다. 가슴에 뚫린 빈자리는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텅 비고 쓸쓸해졌다.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내던지는 중현이 어리석고 무지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중현이 부러웠다.강솔과 헤어진 뒤에도 서로를 신경 쓰는 관계가 부러웠다.두 사람이 함께 아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부러웠다.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중현의 용기도 부러웠다.
“그런 어설픈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도현은 단아의 턱을 놓아주었다. 서늘한 눈과 함께 주변의 공기까지 몇 도는 더 차가워진 듯했다.단아는 순순한 태도를 꾸며 냈다. “딱 한 번만.”도현이 눈을 조금 들어 올리자 위압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들지 마.”“이번 작품만 하게 해 주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할게!”단아는 도현의 팔을 끌어안았다. 티 없이 맑아 보이는 눈에 도현의 정신이 잠깐 흐트러졌다.그러다 금세 정신을 되찾았다.도현은 단아를 안아 옆자리에 앉혔다. 위험한 기운이 단아를 빈틈없이 감쌌다. “그렇게까지 연기가 하고 싶어?”“연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 힘으로 돈을 좀 벌고 싶어.”단아는 도현의 팔을 감싸안았다. 얌전하고 사려 깊은 표정 아래로 증오와 혐오를 전부 숨겼다. “몇 달 뒤면 당신 생일이잖아. 당신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하나 사주고 싶어.”도현은 뜻밖이라는 듯 굳었다. 품 안의 단아를 말없이 내려다봤다.옅은 색의 가운을 입고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단아는 부드럽고 차분하며 다정해 보였다. 도현이 좋아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그 말을 너는 믿어?” 도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왜 못 믿어?” 단아는 사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잘해 주는데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게 이상해?”“잘해 줘?” 도현은 단아의 턱을 천천히 문지르며 일깨웠다. “방금 네 동생 목숨으로 널 협박했는데?”“당신은 말만 그렇지, 속마음은 약하잖아. 입으로는 무섭게 말하면서도 몰래 사람을 붙여서 내 동생을 지켜 주고 있고.”단아는 속이 뒤집히는 걸 참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이어 갔다. “약속할게. 이번 작품 하나만 찍고 당신 생일 선물 살 돈을 벌면 얌전히 집에 있을게.”도현은 단아의 긴 머리를 어루만졌다. “매니저와 경호원을 내 사람들로 바꿔.”단아가 순순히 답했다. “알았어.”도현이 말했다. “대본도 가져와서 항상 나한테 보여
무겁게 가라앉은 하준호의 눈에 거친 기운이 스쳤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아버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서무진은 제 마음을 못 이겨서 스스로 뛰어내린 거야.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하준호는 한동안 침묵한 뒤 거짓말을 꺼냈다. “억지로 나에게 죄를 붙이겠다면 HS그룹을 키우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치운 것 정도겠지.”“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도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도현은 자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번 대화에서 진실을 들을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하준호는 벼랑 끝에 몰려야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사람이었다. 그때가 오면 도현도 아버지와 정식으로 협상할 생각이었다.불안을 감추지 못한 하준호가 떠보듯 물었다. “중현이 이 일로 나를 건드릴 것 같으냐?”도현이 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너와 오씨 집안 사이에 추진하는 혼사도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잖아.”하준호는 의미를 담아 말을 이었다. “이 일과 강솔 쪽 문제만 제대로 처리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권한도 주고, 결혼 상대도 네 뜻대로 고르게 해 주마.”“감사합니다, 아버지.” 도현은 아직 가슴에 품은 야심을 아버지에게 드러내지 않았다.두 사람의 대화는 깊은 밤까지 계속됐다.하준호는 중현이 정말 자신을 겨냥할까 두려워 도현에게 경호 인력을 늘리라고 지시했다.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도현이 떠나려 하자 하준호가 불러 세웠다. “참, 하나 묻자.”도현이 걸음을 멈췄다.하준호는 도현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네가 집에 데리고 있는 여자 때문에 사교계의 손용한 회장과 마찰을 빚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여러 사람 앞에서 아버지를 험담하길래 보기 거슬려 사람을 시켜 한 번 경고했습니다.”도현은 태연하게 설명했다. “그 일로 앙심을 품고 뒤에서 제 이야기를 꾸며 낸 모양입니다.”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말하자 하준호도 더 캐묻지 않았다.대신 한마디 경고했다. “네 동생은 여자 때문에 크게 넘어졌다. 형인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그건 아주 먼 훗날 이야기야.” 지안은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아빠가 엄마한테 죽어라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강솔이 물었다. “왜?”지안이 답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랑 아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거든.”지안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아빠가 이렇게 좋은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얻었는지도 궁금했다.강솔의 마음이 갑자기 누그러졌다. “네가 J시에 가서 아빠 옆에 있어 줄래?”“싫어.” 지안은 단번에 거절했다. “내가 가면 아빠는 힘든 마음을 다 감추고 좋은 모습만 보여 줄 거야. 아빠가 그렇게까지 힘들게 사는 거 싫어.”강솔은 지안을 품에 안았다.지안은 두 사람에게 내려온 작은 천사였다....같은 시각, 하씨 집안 본가.중현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하준호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 정원에 앉아 있었다.하준호는 옆에 앉은 도현을 무거운 눈으로 보며 물었다. “이번 일로 중현이랑 강솔이 완전히 틀어질 것 같으냐?”도현은 차를 한 잔 따르며 답했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하준호의 미간이 구겨졌다.‘이 일로도 안 틀어진다고?’“중현이는 자존심이 강하고 이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건 맞습니다.” 도현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강솔은 중현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사람이죠. 기껏해야 선을 긋고 멀어지려 할 뿐, 진짜 원수처럼 돌아서지는 않을 겁니다.”“둘 사이가 깨지지 않으면 재산과 지안이 양육권을 어떻게 되찾아.” 하준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그 문제는 오히려 가장 사소합니다.” 도현은 하준호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단정한 인상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버지는 과거에 있었던 서무진의 일을 중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부터 생각하셔야 합니다.”하준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설명할 게 뭐가 있어. 제 발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일까지 내 탓이라는 거냐?”“오랜 세월이 지난
아까부터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 멎었는지 모를 정도로 자취를 감췄고, 주변에는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긴 침묵이 이어졌다.고작 일 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몇 시간이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강솔은 의자에서 일어나 중현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손을 놓을 때 중현에게 짧은 말을 남겼다.잠시 뒤.중현은 강솔을 아래층까지 배웅했다.차 문 옆에 선 강솔을 바라보는 중현의 눈에서 모든 애정과 다정함이 지워졌다. 남은 건 멀고 낯선 거리감뿐이었다.“이번에 가면 다시 오지 마. 네 연민도 필요 없고, 베푸는 호의도 필요 없어.”“알았어.” 강솔은 차분하게 받아들였다.신동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좁아졌다.‘두 분이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신 거지?’중현은 눈 깊은 곳에 모든 감정을 감춘 채 강솔에게 말했다. “앞만 보고 가. 뒤돌아보지 말고.”중현은 서무진의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하준호에게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중현이 걸어갈 길에는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반면 강솔은 빛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그런 강솔을 어떻게 진흙탕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당신도 앞만 보고 가. 뒤돌아보지 말고.” 강솔은 같은 말을 중현에게 돌려줬다.강솔은 차에 올랐다.문이 닫히자 차는 곧 출발해 멀어졌다.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현은 양옆으로 내린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억눌린 가슴이 실제 통증으로 이어질 만큼 아팠다.한참 뒤 중현은 강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J시로 돌아간다.”강 비서는 곧바로 답했다. “전용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중현과 강솔은 끝내 서로 다른 길로 향했다. 강솔은 정해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고, 중현은 삶의 또 다른 길로 발을 내디뎠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강솔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홍일은 뒤를 슬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