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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없는 결혼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남편 없는 결혼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By:  꿀떡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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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민윤희는 마치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남편과 살았다. 아이를 낳던 날에도 남편 이정호는 곁에 없었다. 과다 출혈로 몇 번이나 의식을 잃으면서도 민윤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온 것은 연결되지 않는 통화음뿐이었다. 의료진이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정신을 붙들었고, 민윤희는 떨리는 손으로 응급 수술 동의서에 제 이름을 적어야 했다. 아이가 열이 나서 40도까지 오르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정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민윤희는 홀로 아이를 품에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버티다 끝내 기력이 다해 병원 복도에 쓰러졌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날에도, 그는 여전히 곁에 없었다. 차갑게 식은 부모님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돌아온 민윤희에게 큰아버지는 다짜고짜 뺨부터 올려붙였다. 남편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한 탓에, 평생 체면을 지키며 살아온 부모가 사위의 마지막 배웅조차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며 몰아세웠다.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거라는 모진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쉰여덟이 되던 해. 말기 암을 선고받은 민윤희의 삶도...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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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요양보호사가 민윤희에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창밖의 잎 마른 오동나무를 바라보던 민윤희는 희미하게 남은 기대를 끌어모아 이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실수로 연결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소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하게 재촉하는 두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 케이크 다 먹으면 아진 이모랑 우리 넷이 가족사진 찍자.]

“그래.”

민윤희의 가슴 깊숙한 곳이 쿡 찔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민윤희는 바닷속 깊이 침잠하는 외로운 배처럼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민윤희는 27살로 돌아와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이혼 조정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그 서류를 들고 남편의 잊지 못한 첫사랑, 임아진을 찾아갔다.

“이정호와 이혼하기로 했어요.”

민윤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합의서를 탁자 위에 놓았다.

“이정호에게 이 서류에 서명만 받아 주면, HT그룹 안주인 자리는 임아진 씨 거예요.”

임아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정호와 결혼한 지 7년이나 됐고 아이도 둘이잖아요. 정말 그 자리를 나한테 넘길 수 있어요?”

민윤희의 머릿속에 전생에서 겪었던 참혹한 기억들이 지나갔다.

민윤희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정호는 아직 임아진 씨를 잊지 못했고, 아이들도 임아진 씨를 더 좋아해요. 내가 물러나면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겠죠.”

마침 민윤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아들 이재준과 딸 이우희의 찢어질 듯한 울음이 쏟아졌다.

[엄마, 빨리 와서 살려줘!]

[나쁜 아저씨가 우리를 때려죽이려고 해. 으아앙...]

곧이어 납치범의 싸늘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이 둘 다 내 손에 있어! 살리고 싶으면 20억 원을 준비해. 안 그러면 내가...]

“그럼 죽여요.”

납치범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민윤희는 전화를 끊었다.

지켜보던 임아진의 표정이 굳었다.

“재준이랑 우희가 살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구하러 안 가요?”

민윤희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장난 전화예요.”

전생의 민윤희는 아이들이 납치됐다는 말을 듣고도 집안의 돈줄을 쥔 이정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사정한 끝에 가까스로 20억 원을 마련했다.

약속 장소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아이들 걱정에 정신을 놓은 탓에 가드레일까지 들이받았다. 이마가 터져 피가 흐를 정도였다.

하지만 끝에 가서 알게 된 진실은... 납치극은 두 아이가 직접 꾸민 자작극이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그런 짓을 벌인 이유는 민윤희에게서 20억 원을 받아 임아진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민윤희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온 민윤희는 며칠 동안 이정호와 두 아이를 위해 뜨던 목도리와 미리 준비해 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남김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민윤희와 이정호의 결혼은 집안끼리 맺은 정략결혼이었다.

임아진은 이정호가 평생 놓지 못한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한때 결혼을 약속할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임아진의 부모가 운영하는 LB그룹이 비자금 조성과 불법 자금 거래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이정호의 부모는 집안의 배경을 문제 삼아 두 사람의 교제를 강제로 끝냈다.

그 뒤 임아진은 유학을 떠났고, 이정호는 반년 내내 폐인처럼 지냈다.

그제야 이정호는 민씨 집안과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였다.

결혼식 날, 이정호는 딱딱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우리는 집안끼리 필요해서 맺어진 사이야. HT그룹 안주인이라는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줄 수 없어.”

민윤희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철없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사람 마음은 정성을 들이면 움직인다고 믿었다.

더 많이 베풀고 더 오래 참으면 얼음장 같은 결혼도 언젠가는 따뜻해질 줄 알았다.

그래서 이정호가 좋아하는 음식을 배웠고, 셔츠를 때마다 미리 한 장 한 장 다려 두었으며,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조리 외웠다.

하지만 이정호가 민윤희에게 내준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의무처럼 갖는 잠자리뿐이었다. 마음만큼은 한 번도 민윤희를 향하지 않았다.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으며, 민윤희는 물론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임아진이 돌아온 뒤에는 미련을 끊지 못한 채 두 아이까지 데리고 임아진과 더 가까워졌다.

삶을 다시 얻은 지금... 민윤희는 사랑 없는 결혼에 제 인생을 또다시 묻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이정호의 서늘하고 거리감 어린 목소리가 꽂혔다.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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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요양보호사가 민윤희에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창밖의 잎 마른 오동나무를 바라보던 민윤희는 희미하게 남은 기대를 끌어모아 이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실수로 연결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소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하게 재촉하는 두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아빠, 케이크 다 먹으면 아진 이모랑 우리 넷이 가족사진 찍자.]“그래.”민윤희의 가슴 깊숙한 곳이 쿡 찔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끝없는 절망 속에서 민윤희는 바닷속 깊이 침잠하는 외로운 배처럼 눈을 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민윤희는 27살로 돌아와 있었다.가장 먼저 한 일은 이혼 조정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그다음에는 그 서류를 들고 남편의 잊지 못한 첫사랑, 임아진을 찾아갔다.“이정호와 이혼하기로 했어요.” 민윤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합의서를 탁자 위에 놓았다. “이정호에게 이 서류에 서명만 받아 주면, HT그룹 안주인 자리는 임아진 씨 거예요.”임아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정호와 결혼한 지 7년이나 됐고 아이도 둘이잖아요. 정말 그 자리를 나한테 넘길 수 있어요?”민윤희의 머릿속에 전생에서 겪었던 참혹한 기억들이 지나갔다.민윤희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정호는 아직 임아진 씨를 잊지 못했고, 아이들도 임아진 씨를 더 좋아해요. 내가 물러나면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겠죠.”마침 민윤희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아들 이재준과 딸 이우희의 찢어질 듯한 울음이 쏟아졌다.[엄마, 빨리 와서 살려줘!][나쁜 아저씨가 우리를 때려죽이려고 해. 으아앙...]곧이어 납치범의 싸늘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이 둘 다 내 손에 있어! 살리고 싶으면 20억 원을 준비해. 안 그러면 내가...]“그럼 죽여요.”납치범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민윤희는 전화를 끊었다.지켜보던 임아진의 표정이 굳었다. “재준이랑 우희가 살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구하러 안 가요?”민윤희의 마음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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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민윤희는 무려 보름 만에 보는 남자를 힐끗 올려다보고 무심히 답했다. “집이 너무 어수선해서 정리 중이야.”이정호는 달라진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휑해진 거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재준이랑 우희는?”말이 끝나기 전에, 현관문이 쾅 열리며 주먹을 꼭 쥔 작은 아이 둘이 뛰어 들어왔다.임아진도 아이들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우희는 눈가가 벌게진 채 울먹였다. “나쁜 엄마! 우리가 죽든 말든 내버려뒀어!”재준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악을 썼다. “아진 이모가 제때 돈을 들고 와 주지 않았으면 나쁜 사람들이 우리를 죽였을 거야! 엄마는 우리가 죽어도 상관없잖아! 엄마 자격도 없어!”이정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집 안 공기까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이정호는 민윤희를 향해 날 선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무슨 일이야?”“정호야, 윤희 씨 탓하지 마.” 임아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알맞게 꾸며 냈다.“아까 카페에서 우연히 윤희 씨를 만났어. 전화받는 걸 들었는데 납치라는 말이 나오더라. 윤희 씨는 장난이라고 했으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아이들 위치를 알아봤어. 찾아갔더니 재준이랑 우희가 창고 천장에 매달린 채 맞고 있더라.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도 다 쉬었고...”임아진은 말끝에 미안한 눈으로 민윤희를 바라봤다. 마치 친엄마가 할 일을 가로챈 사람처럼 굴었다.이정호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두 아이를 품에 안은 이정호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민윤희를 노려봤다.“내가 아이들을 맡겼더니 이런 식으로 돌본 거야?”민윤희는 미간을 세게 좁혔다. 눌러 두었던 분노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납치는 거짓말이야. 아이들이 직접 꾸민 일이라고...”“아니야!” 우희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구하러 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서 우리한테 누명까지 씌워!”“아빠,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야. 책임지기 싫어서 저러는 거라고!”민윤희의 눈매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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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임아진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이정호는 비닐장갑을 벗었다. 만년필을 건네받아 서명란에 제 이름을 적었다.“이렇게 바로 해도 돼? 내용은 안 봐?” 임아진은 뻔히 알면서도 묻고, 일부러 민윤희 쪽을 흘겨봤다.이정호가 옅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것까지 따져야 해?”“아진 이모, 나도 장난감 사 줘!” 이우희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내 방을 인형으로 꽉 채우고 싶어. 엄마가 만든 건 다 못생겨서 싫단 말이야!”“나도!” 이재준도 신이 나서 손을 들었다. “나는 변신 로봇 피규어 백 개 놓을 거야!”민윤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희 둘 다 천식이 있어. 방에 장난감을 너무 많이 두면 목숨도 위험할 수 있어.”임아진은 잠깐 멈칫했다가 웃었다. “가장 안전한 소재로 골라 줄게요. 윤희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이정호도 거들었다. “아진이 고르는 건 믿어도 돼.”이정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재준과 이우희는 활짝 웃으며 임아진의 양 볼에 입을 맞췄다.“와! 아진 이모가 최고야!”“이모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이정호는 세 사람이 웃고 떠드는 내내 더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민윤희에게는 그 광경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전생의 민윤희는 장난감이 아이들의 천식을 자극할까 봐 친환경 소재를 하나하나 골라 직접 만들었다. 작업 중에 손을 다치거나 까져도 아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성을 쏟아 만든 물건은 아이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었다.민윤희는 홀로 방으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아진이 이혼 조정 합의서를 들고 찾아왔다.“정호가 서명했어요. 이제 와서 마음 바꾸지는 않겠죠?”“물론이죠.” 민윤희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법원 결정이 확정되는 날 바로 떠날 거예요.”...다음 날, 임아진은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장난감을 한가득 사 왔다.이재준과 이우희는 임아진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들뜬 얼굴로 제 방을 꾸몄다.복도를 지나던 민윤희는 아이들이 자신이 손수 쌓아 준 블록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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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애지중지 키운 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민윤희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아려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민윤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래, 그럼 네 아진 이모한테 가. 아진 이모가 실컷 사랑해 줄 테니까!”“민윤희!” 민윤희의 태도에 이정호는 끝내 격분했다. “너 때문에 우희가 죽을 뻔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천식 발작이 오면 우희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이정호는 문밖에 서 있던 관리인을 향해 명령했다. “솜을 가져와.”이정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챘을 때는 이미 경호원 몇 명이 민윤희를 바닥에 눌러 놓은 뒤였다.“입안에 솜을 밀어 넣어. 숨을 못 쉬는 게 어떤 기분인지 직접 느끼게 해.”“이정호... 읍!”경호원은 민윤희의 어깨를 짓누른 채 솜뭉치를 한 줌씩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가느다란 솜털이 수많은 바늘처럼 기도로 파고들었다.민윤희의 몸이 크게 휘었다. 가슴속에 불붙은 마른풀이 들어찬 것처럼 뜨겁고 답답했다. 거친 기침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흘렀고, 목에서는 고통스러운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민윤희는 바닥을 죽을힘을 다해 긁으며 이정호와 이재준을 올려다봤다.“아빠, 더 많이 넣어! 그래야 엄마가 다시는 못 그러지!” 이재준이 잔뜩 화난 목소리로 재촉했다.이정호는 아들 옆에 서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소동을 구경하듯 무심하게 바라봤다.남은 산소마저 바닥나자 민윤희는 바닥에 무겁게 쓰러졌고,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눈을 뜬 민윤희는 침대 곁에 앉아 있는 임아진을 보았다.민윤희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임아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윤희 씨, 내가 잘못했어요. 우희한테 봉제 인형을 너무 많이 사 줬어요.”“병원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그 장난감들 때문에 천식 발작이 온 거래요.”“정호한테는 이미 사과했어요. 윤희 씨도 나를 용서해 주면 안 돼요?”민윤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마침 이재준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아진 이모 잘못 아니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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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민윤희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차에 타고 나서야 임아진도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혼자서 아이 둘을 챙기기 힘들 것 같아서 아진이에게 도와 달라고 했어.” 이정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민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가는 내내 조수석에 앉은 임아진은 간식을 집어 운전석에 앉은 이정호의 입가로 가져갔다. 두 아이도 앞좌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대화에 끼어들며, 차 안에 민윤희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놀이공원에 도착하자 네 사람은 크고 작은 짐을 전부 민윤희에게 맡겼다.“엄마, 이것 좀 들고 있어!”“나는 아빠랑 아진 이모랑 회전목마 탈 거야!”아이들이 조금이나마 모정을 그리워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윤희에게 맡긴 역할은 아이 돌보미였다.세 사람이 회전목마 위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던 민윤희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헛웃음만 나왔다.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저 네 식구 정말 행복해 보인다. 아빠도 잘생겼고 엄마도 예쁜데, 아이들까지 귀엽네.”“고용한 아이 돌보미도 꽤 예쁘지 않아?”‘아이 돌보미’라는 말에 민윤희는 허탈하게 웃었다.돌이켜 보면 민윤희의 삶은 정말 아이 돌보미와 다를 바 없었다.그래도 이제 무시당하는 나날은 곧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몇 가지 놀이기구를 탄 뒤, 이재준과 이우희는 롤러코스터를 타겠다고 졸랐다.민윤희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막았다. “너희는 천식이 있어서 그렇게 자극적인 놀이기구는 타면 안 돼.”두 아이의 기분이 금세 상했다.“싫어! 우리도 탈 거야!”“나쁜 엄마는 또 방해해!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맨날 못 하게만 하잖아.”이번에는 뜻밖에도 이정호가 민윤희의 편을 들었다.“엄마 말이 맞아. 아직 어린 너희가 타기에는 너무 위험해. 말 들어.”이재준과 이우희는 눈을 맞추더니 입을 모았다. “그럼 아빠랑 아진 이모가 타. 우리는 엄마랑 오리 보러 갈게!”임아진은 수줍은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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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5일 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가 열렸다.이정호에게서 꼭 참석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민윤희는 떠나기 전까지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집을 나섰다.학교 강당은 학부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민윤희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얼마 뒤 교장이 단상에 올라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이재준 학생과 이우희 학생의 어머님을 학부모 대표로 모시고 말씀을 듣겠습니다!”민윤희는 당황했다. 왜 아무도 미리 알려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중, 임아진이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 마이크를 들었다.“안녕하세요. 이재준과 이우희가 엄마, 임아진입니다.”그 뒤로 임아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 민윤희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두 아이가 꽃다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단상으로 올라가 임아진 곁에 섰다.임아진의 양팔을 하나씩 끌어안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앞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야’라고 소개했다.민윤희는 자신의 존재가 쓸데없이 덧붙은 조각처럼 느껴졌다.학부모 총회가 끝나자 누구보다 빠르게 강당을 빠져나왔다.한 교실 앞을 지날 때,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준아, 우희야. 선생님한테 사실대로 말해 보렴. 임아진 씨가 정말 너희 엄마니?” 담임 교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입학 때 제출한 가족관계 서류가 선생님한테 있어. 너희 어머니 이름은 분명 한...”“우리는 친엄마 싫어요! 더는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좋겠어요!”이재준이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아진 이모는 우리를 간섭하지 않아요. 아빠도 아진 이모를 좋아해요. 어차피 곧 우리 엄마가 될 거예요!”이우희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아빠는 아진 이모랑 금방 결혼할 거예요!”민윤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은 어느새 무감각해지고 있었다.입술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려 교문으로 향했다.학교를 나서자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민윤희는 비가 잦아들 때까지 처마 아래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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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병원에서 깨어난 민윤희는 온몸이 트럭에 짓밟힌 듯 아팠다. 갈비뼈 부근에서는 정으로 쪼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배에도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다.낯선 통증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깨어났어?” 이정호가 곁에 서서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한동안 침묵하던 이정호가 입을 열었다.“아진이는 이틀 뒤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 핵심 책임자라 빠질 수가 없어.”민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생기가 없었다.이제 지겨운 핑계로 둘러댈 필요가 없다고 이정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민윤희는 이미 한평생을 바친 결과로 이정호의 차디찬 마음을 꿰뚫어 봤으니까.“참.” 이정호는 잠깐 말을 멈췄다. “아진이는 원래 신장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 사고로 상태가 더 나빠졌어. 그래서... 병원에 압력을 넣어 동의 절차를 대신 밟게 하고, 네 신장 하나를 아진이에게 이식시켰어.”그 말을 듣고서야 민윤희의 눈에 반응이 돌아왔다.민윤희는 고개를 들어 이정호를 바라봤다. 눈에는 충격과 고통, 먹물처럼 짙어 풀어지지 않는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사고는 임아진의 전적인 잘못이었다. 그런데 대가로 신장 하나를 잃은 사람은 민윤희이었다.‘임아진을 향한 이정호의 사랑은 옳고 그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맹목적이었던 건가?’민윤희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전생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어 웃음이 났다. ‘이 무정한 남자에게 내 가장 빛나는 시절을 통째로 묻어 버렸다니...’이정호는 민윤희의 웃음이 이상하리만큼 거슬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에 내려앉았다. “치료 잘 받고 빨리 퇴원해. 이 집에는 네가 필요하고, 아이들에게도 네가 필요해.”민윤희는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는 바싹 마르고 쉬어 있었다. “하지만 이정호...”‘난 이제 당신이 필요 없어.’마지막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 젊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보호자님, 임아진 씨가 수술 부위가 아프다고 합니다.”이정호는 듣자마자 몸을 돌려 나갔다. 민윤희에게 남긴 것은 차갑고 단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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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도 민윤희를 찾지 못한 이재준과 이우희는 울상이 되어 돌아왔다. 이정호의 허리를 양쪽에서 끌어안았다.“아빠, 엄마 어디 갔어?”“우리 너무 배고파. 엄마가 구워 주는 쿠키 먹고 싶어!”이정호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민윤희는 늘 두 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어디를 가든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맞다!” 이재준이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 외쳤다.“학부모 총회 날 엄마가 곧 떠난다고 했어. 어디로 가는지는 말 안 했는데, 아진 이모도 함께 들었어.”임아진이 알고 있다는 말에 이정호는 마음을 조금 놓았다. 민윤희에게 급한 일이 생겨 잠시 아이들을 맡긴 것이라고 짐작했다.“아빠, 아진 이모 만나서 저녁 먹자.” 이우희가 고개를 들어 제안했다.이재준도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좋아! 나도 갈래!”기대에 찬 아이들을 보며 이정호는 반쯤 뜯은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너그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자.”30분 뒤, 검은 벤틀리가 도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프렌치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이정호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별실로 들어갔을 때 임아진은 이미 와 있었다.“재준이랑 우희가 왔구나? 어서 앉아.” 임아진은 메뉴판을 내밀며 웃었다. “이모가 여기 대표 케이크도 주문해 놨어. 곧 나올 거야.”“신난다!” 이우희는 곧장 임아진 옆에 앉았다. 이재준도 가까이 붙어 작은 손으로 탁자 끝을 잡고 임아진에게 귓속말했다.세 사람이 다정하게 모여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자 이정호의 눈에도 옅은 온기가 번졌다.그러나 탁자 위에서 잠잠한 핸드폰을 보자 따뜻했던 기색이 조금 식었다.민윤희는 결혼기념일 선물은 준비했으면서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았다.‘내가 먼저 연락해 주기를 기다리는 건가?’이정호는 낮게 코웃음 치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속으로 민윤희의 헛된 기대를 비웃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재준과 이우희는 임아진의 팔에 매달려 다시 집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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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정호는 몇 번이나 민윤희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침대에 쓰러진 채 빈 천장을 올려다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민윤희는 집에 없었다.이때면 집안 고용인들은 모두 잠들었을 시간이었다.임아진이 늦은 밤까지 기다려 줄 리도 없었다.이정호는 억지로 일어나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시려 했다. 하지만 거센 취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외투조차 벗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이정호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어젯밤 자세 그대로 잠들어 옷자락이 엉망으로 구겨진 것을 알았다.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자 허둥대며 달려오던 작은 몸 둘이 이정호의 품에 부딪혔다.“내 머리 엉망이야... 예전에는 엄마가 묶어 줬는데!” 이우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눈물을 글썽였다.“내 책가방 어디 있어? 곧 지각이라고!” 이재준은 슬리퍼도 한 짝만 신었고, 양말은 어디에 뒀는지도 몰랐다.두 아이가 쉬지 않고 떠드는 사이, 잠에서 덜 깬 임아진이 방에서 나왔다. 표정에는 짜증이 선명했다.이정호의 깊고 어두운 눈과 마주치자 임아진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빠르게 다가가 아이들 앞에 쪼그려 앉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재준아, 우희야. 무슨 일이야?”재준은 금방이라도 울 듯 입술을 삐죽였다. “알람을 못 들었어. 일어나 보니까 벌써 9시란 말이야!”우희도 작은 손으로 임아진의 옷자락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해, 아진 이모? 이제 선생님께 혼날 거야!”임아진은 곧 이정호를 올려다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정호야, 오늘은 학교를 쉬게 하는 게 어때? 내가 데리고 나가서 놀아 줄게. 기분도 풀 겸.”이정호는 눈가가 붉어진 두 아이를 바라보다가 몇 초 뒤 마지못해 허락했다.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들어와.”이재준과 이우희는 환호하며 임아진의 팔을 잡고 뛰었다.하지만 임아진이 데리고 놀러 간다는 말이 쇼핑몰과 네일 숍을 돌며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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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우희가 다가와 작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한 자씩 읽었다. “이, 혼, 신, 고, 수, 리, 증, 명, 서... 아빠, 엄마랑 이혼했어?”이정호는 몇 걸음 만에 다가와 이우희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듯 받아 펼쳤다.혼인관계증명서 안쪽에 적힌 이정호와 민윤희의 이름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손끝으로 종이를 무의식중에 문지르며 몇 번이나 앞뒤를 뒤집었다. 주민등록번호까지 한 자리씩 대조했다.관공서의 직인과 발급번호가 모두 맞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정호는 이혼이 법적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혼 서류에 서명한 기억조차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혼 신고까지 마친 거야?’“아빠, 정말 엄마랑 이혼한 거야? 그럼 이제 아진 이모가 우리 엄마가 될 수 있어?” 이우희는 천진한 표정이었다. 이정호의 눈에서 거센 동요가 일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이혼 서류가 든 봉투는 여러 날 동안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정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멀리 있던 임아진이 다가왔다.이정호가 이혼 서류를 손에 든 것을 본 임아진은 더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한 달 전, 윤희 씨가 카페로 나를 부른 건 이혼 얘기를 하려던 거였어.”“더는 HT그룹 안주인으로 살고 싶지 않고 아이 둘도 맡지 않겠다고 했어. 나한테 재준이랑 우희를 대신 돌봐 달라고 부탁했고.”임아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아이를 바라봤다. “그래서 아동용품을 사는 데 관계인 확인이 필요하다고 속여서, 이혼 조정 합의서에 네 서명을 받은 거야.”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말에 이재준은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쁜 엄마! 엄마가 우리를 싫어하면 우리도 엄마 따위 필요 없어!”“아빠, 그냥 가게 둬! 우리한테는 아진 이모만 있으면 돼!” 이우희도 곧장 거들었다.임아진은 몸을 낮춰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이정호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이해심과 다정함이 한없이 가득했다.“정호야, 걱정하지 마.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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