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다만 이 부분은 바꿔. 다음 투자자가 디자인을 담보로 달라고 하면 아르덴도 반대할 수 있게.”“내 권리를 지키겠다는 핑계로 거부권을 챙기시겠다고요?”“네가 반대할 때 같은 표를 던지는 조건으로.”채원은 펜을 들어 그 문장을 직접 고쳤다. 도현은 수정된 조항을 읽고 서류를 덮었다.“투자자 차도현은 제법 쓸 만하네요.”“다른 차도현은?”“평가 보류.”“기한은.”그 질문이 지나치게 진지해 채원은 농담으로 넘기지 못했다. 도현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절제가 또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오후에 루네로 돌아오자 홍보팀이 아르덴 창업자 간담회 자료를 가져왔다. 주최 측은 갈라 이후 처음 열리는 아르덴 주최 공동 일정에 선 두 사람을 메인 기사에 쓰고 싶어 했다.채원은 인터뷰 문항을 읽은 뒤 연애 관련 질문 세 개를 지우고, 루네 선주문 페이지의 연결 주소를 넣었다.“계약 연애도 판매 경로로 쓰겠다는 거야?”서민지가 물었다.“사람들이 내 사생활을 구경하러 올 거면 입장료는 내야지.”“차 대표가 좋아하겠네.”“그 사람 기분은 계약 조건에 없어.”하지만 도현은 수정안을 보고 어떤 문항도 되살리지 않았다. 차 안에서 그는 채원이 만든 연결 주소의 유입 예상치만 확인했다.“내 이름을 써도 돼.”“허락받으려고 넣은 거 아니에요. 오늘은 내가 차 대표님을 이용하는 날이니까.”“공평하네.”도현이 태블릿을 끄며 덧붙였다.“더 이용해도 돼. 네가 정한 범위 안에서는.”채원은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남자가 정작 자신이 가장 의식하는 한 걸음만 내딛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저녁에는 아르덴의 창업자 간담회가 있었다. 공식 연인 역할이 필요한 일정이라는 이유로 채원도 참석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도현의 손이 그녀의 등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닿지 않았는데도 손바닥의 자리를 알 것 같았다.사진기자 한 명이 웃으며 주문했다.“두 분 조금만 더 붙어 주세요. 사이가 너무 정중해 보입니다.”채원이 먼저 반 걸음 다가갔다.
계약 15일째 아침, 채원은 식탁 위 달력을 뒤집었다.검은 펜으로 그어진 날짜가 정확히 절반에 닿아 있었다. 남은 15칸을 세는 동안 등 뒤에서 토스터가 튀어 올랐다.도현은 평소처럼 커피만 들고 나갈 차림이었다. 그런데 채원의 자리에는 버터를 바르지 않은 토스트와 블루베리 잼, 껍질을 벗긴 복숭아가 놓여 있었다.“복숭아 껍질까지 벗겼네요.”채원이 괜히 말했다.“손에 과즙 묻는 걸 싫어하잖아.”“먹는 데 지장 없는데.”“알아.”도현은 어젯밤 일을 꺼내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말려 주던 손도, 거울 속에서 입술로 떨어졌던 시선도 없었던 일처럼 셔츠 단추를 잠갔다.채원은 잼을 바른 칼을 접시 끝에 반듯하게 놓았다.“차 대표님은 아침 안 먹잖아요.”“오늘은 먹어.”그가 맞은편에 앉아 토스트를 집었다. 무슨 일이든 결정한 뒤에야 행동하는 남자였다. 채원이 밤마다 식탁에 남겨 둔 샌드위치의 포장이 다음 날 비어 있던 것도, 주방 한쪽에 그녀가 마시는 원두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식탁의 폭이 전보다 좁아 보였다.“오늘 투자 조건 협상은 11시야.”도현이 말했다.“대표님은 또 빠지시고요?”“응. 협상 끝날 때까지 밖에 있을게.”“그게 맞겠죠.”“그럴 줄 알았어.”도현이 컵을 들자 채원은 복숭아 조각을 필요 이상으로 잘게 나눴다.“협상보다 복숭아가 더 긴장되나?”채원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아는 척하지 마요.”“이미 아는데 어떻게 그래.”그가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단정한 뒷모습이 사라진 뒤, 채원은 입도 대지 않은 복숭아를 포크로 오래 눌렀다.***조건 협상은 예상보다 거칠었다.아르덴 측은 30억 원을 제시하면서 매출 목표를 두 번 연속 놓치면 다음 투자자를 들일 때 먼저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채원은 그 문장을 세 번 고쳐 돌려보냈다.“목표를 못 맞췄다고 다음 자금줄까지 아르덴이 고르면, 루네는 한 번 흔들린 뒤 영원히 묶입니다. 시장 전체가 얼어붙어도 똑같고요.”담당 심사
채원은 서민지와 고객 주문지를 지역별로 다시 나눴다. 독립 편집숍에는 위탁 판매 대신 판매분 정산을 7일로 줄이고, 루네가 직접 고객 데이터를 공유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류 스타트업에는 빈 창고를 요구하는 대신 야간 집하량을 보장했다.가장 어려운 상대는 생산 공장이었다. 선주문 방식은 공장에 여러 번 라인을 바꿔야 하는 부담을 줬다.채원은 공장 대표 앞에 지난 3년 치 발주서를 펼쳤다.“최소 수량을 낮춰 달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12개 품목의 원단을 공용화하겠습니다. 재단 일정은 루네가 양보하고, 1차 대금은 사전 주문금이 들어오는 날 바로 지급하죠.”“세림도 빠졌다면서 뭘 믿고 갑니까?”“저를 믿으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여기, 고객 6천 명에게 받은 출시 알림 신청입니다. 오늘 밤까지 8천을 넘기면 1차 생산을 진행해 주세요. 못 넘기면 제가 원단 예약금까지 책임지겠습니다.”마감 20분 전, 출시 알림 신청자는 9천 명을 넘겼다. 편집숍 아홉 곳이 팝업 진열에 합의했고, 물류사와는 수도권 당일 집하 계약을 맺었다.채원이 아르덴 심의실로 보낸 보완안의 마지막 장에는 세림 없이도 첫 달 고정비 대부분을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갔다.심사는 조건부 통과로 바뀌었다.조건은 합의한 선주문 전환율과 편집숍 다섯 곳의 확정 발주였다. 채원은 승인 메일을 직원들에게 그대로 공유했다. 축하 이모티콘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아직 투자금이 들어온 게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오늘은 살아난 날이 아니라 다음 문턱을 얻은 날이야. 주말에 쉬고, 다음 주에는 실제 주문으로 조건을 채우자.”말은 단단했으나 전화를 내려놓는 손에는 사흘 치 피로가 묻어 있었다.사무실을 나온 순간, 사흘 동안 참았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우산은 서민지가 공장에 두고 왔고 호출한 차는 20분 뒤에나 도착한다고 했다.검은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췄다. 뒷문을 연 도현이 채원을 바라봤다.“타.”“오늘은 대표님 기사까지 하세요?”“계약 상대가 감기 걸리면 일정이 꼬여.”채원은
《너를 삼킨 밤의 계약》014화. “한마디쯤 보태 줄 수 있었잖아요.”“그러길 바랐어?”채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의 눈에 아주 얕은 빛이 스쳤다. 그녀가 기대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투자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됩니다.”채원이 먼저 선을 그었다.“그래서 빠졌어.”도현은 빈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심사에서만.”도현은 곁에 기다리던 한지혁을 돌아봤다.“8년 전 태강이 내게 보낸 투자 제안과 익명 서버 지원금 경로를 확인해 주세요.”채원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지혁이 이유를 묻자 도현은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답했다.“서로 기억하는 마지막이 다르니까.”그가 지나간 뒤에도 채원은 한동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12일째 오후, 세림리테일에서 계약 해지 통보가 왔다.루네 매출의 38퍼센트를 맡던 온라인 유통사가 다음 시즌 입점을 전면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확정한 물량에 대해서는 위약금을 물겠지만, 메인 화면과 물류 창고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서민지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이를 갈았다.“태강캐피탈이 세림에 납품업체 금융을 묶어 줬대. 이태준이 우리 하나 빼겠다고 세림 숨통을 잡은 거야.”“위약금 받으면 한 달 급여는 막아.”“그 뒤는?”“지금부터 만들면 돼.”채원은 화이트보드에서 세림리테일 로고를 지웠다. 그 아래에 자사몰, 사전 주문, 독립 편집숍, 당일 배송권역을 새로 적었다.저녁 7시, 아르덴 회의실에서 열린 추가 검토는 처음보다 더 차가웠다. 심사위원들은 최대 판매처가 사라진 회사에 투자할 근거를 요구했다.도현은 이번에도 의결석에 앉지 않았다. 대신 별도의 정보 제공자로 들어와 채원 맞은편에 섰다.“세림의 해지 통보는 유감입니다.”그의 말투에는 사적인 온기가 한 조각도 없었다.“아르덴이 확보한 독립 편집숍의 가동률과 지역별 물류 단가를 공유하겠습니다. 연락처는 제외합니다. 법무팀은 세림의 위약 조항과 태강캐피탈의 개입이 공정거래상 문제인지 검토하죠.”한
“용기까지 내면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요.”채원이 서재 책상 위에 놓인 루네의 분석 자료를 덮었다. 표지에 찍힌 날짜는 3년 전이었다. 브랜드가 첫 쇼룸을 열기도 전, 채원이 직원 셋과 밤을 새워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던 무렵이었다.도현의 손끝이 닫힌 표지 위에 잠깐 머물렀다.“투자할 가치가 있었으니까.”“회사 얘기 말고요.”“그 답이 내일 네 숫자를 더럽히게 하고 싶지 않아.”“아주 편리하게 미루네요.”도현이 자료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내일 심사에는 네가 낸 자료만 올라가. 나는 질문도, 표결도 하지 않아.”“대표가 빠져도 돼요?”“내가 들어간 순간, 심사는 네 숫자보다 우리 관계부터 봤을 테니까.”계약 8일째 밤이었다.다음 날 오전, 아르덴파트너스의 투자심의실에는 일곱 명이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 맨 끝에 도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채원은 준비해 온 샘플 행어를 세우고도 한동안 그 빈 의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결에서 빠질 거라는 통보는 회의 시작 10분 전에 한지혁이 전했다.특혜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도현이 아예 나타나지 않자, 매끈하게 정리한 숫자 어딘가가 느슨해진 것처럼 기분이 거슬렸다.심사위원 한 명이 물었다.“윤 대표님 개인 채무와 거주 문제가 당사 대표와 얽혀 있습니다. 루네 투자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채원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스크린에 지분 구조와 자금 사용처가 떴다. 채원은 아르덴이 가져갈 수 있는 지분의 한도와 자신이 지킬 의결권, 디자인과 상표를 넘기지 않는 조건을 차례로 짚었다.“제 개인 사정은 투자 근거가 될 수도, 투자 철회 사유가 될 수도 없습니다. 아르덴이 사는 건 제 곤란이 아니라 루네가 앞으로 만들 현금 흐름이어야 하니까요.”다른 위원이 팔짱을 풀었다.“그 현금 흐름을 설명해 보시죠. 기존 백화점 매출이 빠지면 3개월 뒤 운전자금이 바닥납니다.”채원은
낯선 집에 두 사람의 습관이 조금씩 생겼다.8일째 밤, 채원은 다음 날 투자 심사에 쓸 자료를 출력하려 서재에 들어갔다. 도현은 전략회의 중이라 늦는다고 했다. 프린터 아래 서랍에서 여분 용지를 찾다가 ‘LUNE’이라고 적힌 회색 바인더들을 발견했다.한 권이 아니었다.2023년 고객 구조 분석. 2024년 유통 채널 변화. 2025년 공개 재무 지표와 상품군별 온라인 반응. 기사와 공시 자료, 루네가 배포한 룩북을 정리한 보고서가 연도별로 꽂혀 있었다.가장 오래된 자료는 3년 전 것이었다. 채원이 도현과 재회하기 훨씬 전이었다.채원은 첫 장부터 빠르게 넘겼다. 밑줄과 메모는 도현의 필체였다. ‘디자인 정체성 유지’, ‘대표 의사결정 속도 우수’, ‘자금 구조만 개선되면 확장 가능’. 그 아래에는 투자 검토 보류라는 문장이 반복되어 있었다.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도현이 서재에 들어왔을 때, 채원은 바인더 세 권을 책상 위에 펼쳐 둔 뒤였다.“설명해요.”도현은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자료를 보았다.“뭘 알고 싶어?”“나를 언제부터 조사했는지.”“루네가 첫 외부 투자를 받았을 때부터.”“3년 전이네요.”“그래.”“우리가 우연히 다시 만난 게 아니었군요.”채원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내가 망하는 과정을 계속 들여다보다가, 채권하고 집까지 살 적당한 때를 기다렸어요?”“아니.”도현이 단호하게 잘랐다.“여기 있는 건 전부 공시, 기사, 루네가 공개한 자료로 만든 사업 분석이야. 네 통화나 동선, 사적인 관계를 확인한 적 없어. 할 생각도 없고.”“그 차이가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중요해야 해. 네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내 허락 없이 3년 동안 내 회사를 지켜본 건 경계 밖이고요?”“기업을 분석하는 데 대표 허락은 필요 없어.”투자자로서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바인더 곳곳에 남은 메모는 보통의 검토 자료보다 집요했다. 루네가 사라질 위기마다 자금 구조를 다시 계산했고, 채원이 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