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씨는 빗을 들기 전에 서리의 무릎 위에 놓인 문서부터 보았다."그것은 내려놓으세요."
"읽고 있지 않아."
"제가 들어올 때까지는 읽고 계셨지요."
서리가 문서를 접었다. 감씨는 그것을 받아 거울 옆에 놓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등 뒤로 모았다.
빗이 머리 끝에서 잠깐 걸렸다. 감씨가 손가락으로 엉킨 곳을 풀었다.
"어젯밤에는 언제 누우셨어요."
"그리 늦지 않았어."
"궁에 다녀오셨으면 좀 쉬셔야지요. 옷만 갈아입고 곧장 문서를 찾으셨다면서요."
"기다리던 것이 와 있어서."
"그 기다리던 것들 때문에 저녁상도 두 번이나 데워 올렸습니다."
서리는 거울 속 감씨를 보았다.
"먹기는 했다."
"얼마나 드셨는지도 물어보았어요."
빗질이 다시 이어졌다. 서리가 옆에 놓인 문서로 손을 뻗자 감씨는 팔꿈치로 가볍게 막았다.
"머리 다 빗을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계세요."
서리는 손을 무릎 위로 돌려놓았다.
"아침은 다 먹을게."
"그 말씀은 기억하겠습니다."
감씨는 빗에 걸린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목덜미부터 천천히 빗어 내렸다.
"한집에 계셔도 두 분 다 각자 일만 붙들고 계시니, 누가 누구더러 쉬라고 하겠어요. 영안공께서는 탕약이라도 드시지요. 이러다 마님께서 먼저 앓아누우시겠습니다."
"걱정도 많네."
"앓기 전에 하는 말씀입니다."
서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감씨가 머리를 한데 모으는 동안 거울 옆의 문서 모서리만 손끝으로 눌렀다.
감씨가 빗질을 마저 하며 낮게 말을 얹었다.
"영안공께서 기력을 많이 되찾으셨다 들었어요. 그러면 마님께서도 이제 슬슬, 앞날을 생각하셔야—"
"그래서 박가 객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냐."
서리가 담담히 받았다.
"가문의 앞날이라면, 이미 생각하고 있어."
감씨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제가 말씀드린 앞날은, 그 앞날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앞날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두 분의…… 부부로서의 앞날 말입니다."
서리가 거울에서 눈을 떼고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감씨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손에 남은 머리끈을 매만지더니 서리의 어깨를 가볍게 바로잡았다.
"아닙니다. 앞을 보세요. 아직 다 안 됐습니다."
서리는 더 캐묻지 않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안 감씨는 마지막 매듭을 지었다.
"우선 아침부터 드세요."
이번에는 서리도 문서를 집어 들지 않았다.
— 백종길이 별당에 다시 든 것은 그날 오후였다.서리는 이겸과 마주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종길은 예를 갖춘 뒤 접어 온 종이를 폈다.
"하가에서 빠져나간 수레들의 행로를 더 알아보았습니다. 그중 일부가 북쪽 길로 향했다고 합니다."
"전부는 아니고요."
"예. 북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수레만 추린 겁니다. 나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서리는 종이를 당겨 보았다. 백종길이 짚은 줄에는 수레를 보았다는 사람과 그가 전한 말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어디까지 갔는지는 압니까."
이겸이 물었다.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북쪽 길로 접어드는 것을 본 뒤로는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럼 목적지가 북방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도중에 다른 길로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서리는 해당 줄 끝에 짧게 표를 했다.
"사람들 쪽은 어떻습니까."
"일꾼들은 대부분 흩어졌습니다."
서리는 붓을 내려놓았다.
이겸이 종이를 건네받았다.
"표식을 알려준 자에게 다시 물어볼 수는 있겠습니다."
"별채의 포로 말씀이군요."
"누구와 어디서 접선했는지 다시 들어봐야겠습니다."
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백종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북쪽 길로 향했다는 수레는 계속 알아봐주십시오."
"확인되는 것만 아뢰겠습니다."
백종길은 서리가 표한 곳을 살피고 종이를 다시 접었다.
— 포로는 전보다 살이 조금 빠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했다.문이 열리자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이겸이 들어서고, 서리가 뒤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하가에서 빠져나간 수레 일부가 북쪽 길로 향했다. 일꾼들은 흩어졌다."
이겸이 먼저 말했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리 앞에 놓인 종이를 보다가 이겸에게로 눈을 옮겼다.
"……벌써 그것까지."
헛웃음이 짧게 새었다.
"제 목숨값이 자꾸 깎이는군요."
"네가 말한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럼 이번엔 뭘 내놓으면 됩니까."
사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릎에 얹었던 손을 모으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 전에 값부터 정하고 싶군요. 제 식구들 말입니다."
이겸은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저 하나 죽는 거야 제가 벌인 일이니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저를 없애려 했다면, 식구들한테도 손을 뻗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식구들이 이 일을 아느냐."
"모릅니다. 제가 어디서 무슨 일을 받는지까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는 네 식구를 알고 있고."
사내가 입술을 눌렀다.
"어디까지 아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믿고 버틸 수는 없다는 겁니다."
서리는 펴놓은 종이에서 손을 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겸이 물었다.
"말뿐인 보호로는 안 됩니다. 영안공의 이름을 걸고 약조해주십시오. 그럼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도 말씀드리지요."
"먼저 들어보지. 네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때 내 이름으로 약속하겠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이겸을 바라보았다.
"말을 다 듣고 나서 쓸모없다 하시면요."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말해라. 네가 본 것과 짐작한 것을 섞지 말고."
한동안 방 안에 말이 없었다. 사내는 모았던 손을 풀어 무릎 위에 다시 놓았다.
"접선은 늘 남문 밖, 기와 굽던 옛 가마터에서 했습니다."
서리가 붓을 들었다.
"늘이라면, 매번 같은 시각이었나."
"아니요. 시각은 매번 달랐습니다. 다만 장소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죠."
"세 번 다 그곳이었나."
"예."
"남문에서 가는 길을 말해라."
사내는 문 쪽을 한번 보았다가 서리가 펼친 종이로 눈을 내렸다.
"그려도 되겠습니까. 말로만 하면 길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서리가 여분의 종이와 붓을 건넸다. 사내는 붓을 받아 들고 남문이 있는 곳부터 표시했다. 선을 긋다 멈추고, 갈라지는 길 하나를 더 보탰다.
이겸이 그 자리를 짚었다.
"여기서 어느 쪽이지."
사내가 붓끝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제가 다닌 것은 이 길뿐입니다. 다른 데서 들어오는 길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서리는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종이를 돌려받았다.
"그곳에 다른 자와 함께 간 적은."
"없습니다. 저는 혼자 갔습니다."
"다른 자도 그곳에서 접선했는지는 아나."
"그것도 모릅니다. 다른 자의 일은 묻지 않았습니다."
이겸은 약도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접선한 자가 창고 관리인이었나."
"모르겠습니다. 그자가 하가 사람인지도 저는 몰랐습니다. 그 문양이 하가에서 쓰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요."
"접선한 자는 다시 보면 알아보겠나."
"얼굴은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세 번 다 가리고 나왔으니까요. 지금 누굴 데려다 놓고 그자냐고 물으셔도, 다 그자 같을 겁니다."
이겸은 더 외모를 묻지 않았다. 서리가 약도 옆에 짧게 적고 붓을 놓았다.
이겸은 사내가 그린 약도를 다시 살폈다. 사내의 시선은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가마터는 가보시면 압니다."
"길이 다르거나 찾을 수 없으면 다시 물을 것이다."
"거짓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겸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내 이름을 걸겠다. 네 식구는 보호한다."
사내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무릎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제가 더는 쓸모없어져도, 식구들은 지켜주시는 겁니까."
"사는 곳과 이름을 말해라."
서리가 새 종이를 폈다. 사내가 가족의 이름과 거처를 불렀다. 처음보다 말이 빨라져, 서리가 한 번 멈추게 하고 들은 내용을 되짚었다.
마지막 이름까지 확인한 뒤에야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이겸은 그 종이를 받아 들고 일어섰다. 서리도 약도를 챙겨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히자 대기하던 백우가 다가왔다.
"그자의 식구부터 찾아라. 찾는 즉시 우리 사람을 붙여."
이겸이 종이를 건넸다.
"가마터를 확인하기 전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찾는 대로 먼저 알려라."
"예, 주군."
백우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물러났다.
서리는 손에 든 약도를 펼쳤다. 포로가 몇 번 덧그린 곳은 아직 먹이 덜 말라 있었다.
"가마터부터 살펴야겠군요."
"날이 밝는 대로."
이겸이 답했다.
— 그날 밤, 서리는 늦도록 문서를 살폈다.박가 객주 쪽에서 전해 온 말과 낮에 받아 적은 진술을 나란히 놓았다. 수레가 북쪽 길로 향했다는 줄 아래에는 더 적을 것이 없었다. 서리는 붓을 내려놓고 가마터 약도를 위에 얹었다.
내일 나가기 전 백종길에게 남겨둘 말도 정리해야 했다.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가, 아침에 말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도로 밀어놓았다.
서리는 팔을 책상에 얹고 문서를 조금 가까이 당겼다.
같은 줄을 세 번째 되풀이해 읽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 마지막이었다.
— 이겸은 서리의 다음 날 일정을 확인하려고 처소를 찾았다.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밖에서 부인을 부르고 잠시 기다렸으나 답이 없었다. 가볍게 문을 두드려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조금 열자 책상 앞에 엎드린 서리가 보였다.
이겸은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종이 끝을 누른 손가락 아래로 붓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곁에는 낮에 포로가 그린 약도가 펼쳐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책상 곁에 잠시 섰다. 서리가 팔 위에서 고개를 조금 고쳐 눕혔다. 그가 입을 열려다 말았다.
등잔의 불꽃이 가늘게 흔들렸다.
잠시 뒤 이겸이 방을 나왔다.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 서리가 눈을 떴을 때는 창호 너머가 희게 밝아 있었다.팔이 저렸다. 천천히 몸을 세우자 어깨에 걸쳐진 옷이 흘러내렸다. 서리는 바닥에 닿기 전에 자락을 붙잡았다.
짙은 남빛 겉옷이었다.
접힌 자락을 펴자 끝에 놓인 구름문양이 드러났다. 어제 이겸이 걸치고 있던 옷이었다.
서리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옷깃을 조용히 여몄다.
잘 부탁드립니다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연이 영안궁에 든 것은 해가 제법 높이 오른 뒤였다. 목연이 탄 말이 영안궁 앞뜰에 멎자, 기다리던 하인이 다가와 고삐를 받아 들었다. 목연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한 번 정돈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뒤따라온 시비와 호위들도 차례로 말에서 내렸고, 마당의 시비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손님을 맞았다. 서리는 마루 앞에서 목연을 맞이했다. 예를 갖추는 데 부족한 데가 없었으나, 반가움을 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지나온 회랑에도, 이쪽을 향해 자리를 비켜서는 시비들의 몸짓에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어서, 목연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 궁의 살림이 이미 서리의 손에 익어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내주셔서, 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고 안으로 들었다. — 다과상 위로 김이 옅게 올랐다. "보내주신 향은 잘 받았습니다." 서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것을 받고 서찰만 돌려보내기가 마음에 걸려, 이리 청했습니다." "영안공께서 큰 병을 이겨내셨으니, 그 정도야 마땅한 일이지요." 목연은 찻잔을 들며 옅게 웃었다. "다만 침향은 두는 자리를 조금 가립니다. 볕이 드는 데 오래 두면 향이 얕아지니,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향합째로 옷장 안쪽에 넣어두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리하겠습니다." "요즘은 향낭에 넣어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 아예 조각을 잘게 내어 쓰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기가 아까워서 통으로 두는 편입니다만." "향낭도 그만큼 작아지겠군요." "예. 옷에 걸었을 때 처지지 않을 만한 것을 찾지요. 수가 아무리 고와도 무거우면 손이 잘 가지 않으니까요." 목연은 다과 하나를 집어 작은 접시에 옮겼다. "작은 것을 찾는 건 거울도 비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 이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앞에 엎드린 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친척 되는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물었으나, 그 뒤로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합니다. 연고가 있다는 고을 두 곳도 사람을 보내 살폈습니다만—" "없더냐." "예." 이헌은 서안 위에 놓인 종이를 손끝으로 밀었다. 몇 달째 같은 자리에 같은 내용이 적혀 오는 종이였다. "관청 기록은." "이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신고도, 호적을 옮긴 흔적도 없습니다." "집은." "그대로 비어 있습니다. 다만—" 사내가 잠시 말을 골랐다. "이웃들 말이, 어느 날 보니 사람이 없더랍니다. 짐을 싣는 것도, 나가는 것도 본 사람이 없다고요." 이헌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온 집안이 나가는데, 아무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저희도 그것이 이상하여 몇 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답만 돌아옵니다." 사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 집에 셈이 남아 있던 상인이 둘 있었는데, 받으러 갔더니 이미 비어 있었다 합니다. 빚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했다기엔, 집이 너무 깨끗했다더군요." "깨끗했다." "예. 쓰던 세간까지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다고요." 이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었다는 소문도, 도망쳤다는 소문도 없었다. 몰락했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면 도성 안에 반드시 말이 돌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돌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웃던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흩어졌다. "내가 태자다." 이헌이 말했다. "태자의 사람들이 반년을 뒤졌는데, 집 한 채가 통째로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가라." 이헌이 종이를 밀어냈다.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리는 비단과 천 조각을 나란히 놓고 이겸을 기다렸다.이겸은 들어서자마자 그 앞에 앉았다. 등불을 끌어당겨 각도를 바꿔가며 두 실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비단의 수실을 쓸어보고, 다시 조각 쪽으로 옮겨갔다."닮았군요.""같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서리가 말했다. "조각 쪽은 흙을 오래 먹어서, 빛깔이 죽었습니다. 물들인 결도 어긋났고요.""그렇다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고.""예."이겸이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렸다."이런 실을 쓰는 곳이 왕후전뿐일 리는 없겠지요.""그렇습니다." 서리가 답했다. "귀한 물건일수록, 오히려 쓰는 집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상단이 들여와서 어디로 가는지가요.""그 길은 부인이 더 빨리 찾겠군요.""바느질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늘 오갑니다."이겸은 잠시 조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나는 그날의 명부를 다시 보겠습니다. 이 조각과는 별개로, 아직 짚지 못한 것이 있으니." — 바느질방 주인은 도성 안쪽에서 귀족가의 자수품을 오래 다뤄온 여인이었다.서리가 영안궁에서 왔다는 말에 여인의 낯빛이 먼저 굳었다. 그러고는 서리가 내민 조각을 흘긋 보더니, 아예 두 손을 내저었다."저희는 궁에서 나온 물건은 손대지 않습니다. 그런 건 만져본 적도 없고요.""궁의 물건이 아닙니다." 서리가 담담히 답했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몰라 여쭈러 온 것입니다."여인은 그 말에도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다만 조각을 받아 들고는 눈빛이 달라졌다.여인은 조각을 손바닥에 펼쳐놓고 한참을 만졌다. 엄지로 바탕천을 문질러보고, 뒤집어 안쪽 결도 살폈다. 그러고는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췄다."이상하네요.""무엇이 말입니까.""이 실이야 제가 봐도 귀한 겁니다. 이런 건 아무나 못 써요." 여인이 실 한 오라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궁의 후원에 꽃이 한창이었다.왕후가 마련한 꽃놀이 자리였다. 물가를 따라 자리가 깔렸고, 늘어진 가지 아래로 잔이 오갔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꽃잎이 상 위로 떨어졌다.서리와 이겸이 함께 들어섰을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차례 그쪽으로 쏠렸다.죽어가던 왕족과, 그를 고른 여인. 그 둘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이 자리의 대부분은 처음 보았다.중심 자리에는 왕과 왕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아래쪽에 이헌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목연이 동행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영안공." 왕이 먼저 반가운 낯으로 손짓했다. "얼굴이 많이 폈구나.""염려해주신 덕입니다." 이겸이 예를 갖췄다.이헌의 시선이 잠시 그쪽에 머물다가, 뒤늦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영안공부인." 왕후가 서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혼례 후 줄곧 병상 곁을 지켰다 들었습니다.""제가 한 일은 많지 않습니다.""겸양이 지나치군요." 왕후가 옅게 웃었다. "저리 회복하신 것이 어디 저절로 된 일이겠습니까. 영안궁의 안살림도 잘 잡혔다 들었고요.""과분한 말씀입니다."왕후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상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이왕 이리 잘 풀린 김에, 영안궁에 또 다른 경사가 들리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알아듣고 웃음을 지었다.서리의 손이 잔 위에서 아주 잠깐 멎었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답이 반 박자 늦어졌다. — 전생에 왕태자비였던 시절에도, 봄 꽃놀이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그때 서리는 이헌의 곁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상은 나란히 놓였고, 궁인이 술을 따르면 이헌은 서리의 잔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들었다.그 아래 자리에서 한 부인이 웃었다."두 분이 나란히 계신 걸 뵈니 참 보기 좋습니다."서리는 잔을 내려놓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문 밖 옛 가마터는, 듣던 것보다 더 오래 버려진 자리였다.무너진 가마 아궁이 위로 마른 덩굴이 뒤엉켰고, 깨진 기왓장이 잡초 사이에 반쯤 묻혀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잔 기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오간 자국을 찾기에는, 비도 바람도 너무 여러 번 지나간 뒤였다.서리는 포로가 그린 약도를 펼쳤다. 남문에서 갈라진 길을 되짚고, 종이를 돌려 가마터가 있는 쪽과 맞추었다."갈림길은 맞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왔다면 가마 앞을 지나게 되고요."이겸은 그들이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에서는 가마의 윗부분만 보였다.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자 무너진 담장 너머로 다른 비탈이 드러났다."뒤쪽도 살펴라.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백우가 데려온 자들을 나누어 보냈다. 둘은 담장을 따라 돌고, 나머지는 가마 안쪽과 터 가장자리를 훑었다.포로가 가마터를 알려주며 함께 짚어준 표식 자리는 길목에 있었다. 담장 끝에 박힌 쇠고리는 비어 있었다. 백우가 고리 아래에 엉킨 마른 풀을 걷어냈다."이 자리입니다."고리 아래 벽면에 얕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리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무언가 매달려 벽에 닿았던 듯했으나, 남은 끈이나 조각은 없었다."걸려 있던 것은 없군요.""주변에도 떨어진 것은 없습니다."이겸은 고리를 살피고 손을 거두었다."언제 거둔 것인지는 모르겠군."서리는 약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가 종이를 접었다. 길과 표식을 보았다는 자리는 포로의 말과 맞았다.가마 앞은 기왓조각이 촘촘히 박힌 단단한 땅이었다. 백우가 몸을 낮추고 움푹 팬 곳을 살폈다. 그 안에도 잘게 부서진 기와와 흙이 가득 차 있었다."발뒤꿈치 자국 같기는 합니다만, 가장자리가 다 무너졌습니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서리는 가마 곁의 평평한 돌을 살폈다. 잠시 앉아 기다리기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씨는 빗을 들기 전에 서리의 무릎 위에 놓인 문서부터 보았다."그것은 내려놓으세요.""읽고 있지 않아.""제가 들어올 때까지는 읽고 계셨지요."서리가 문서를 접었다. 감씨는 그것을 받아 거울 옆에 놓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등 뒤로 모았다.빗이 머리 끝에서 잠깐 걸렸다. 감씨가 손가락으로 엉킨 곳을 풀었다."어젯밤에는 언제 누우셨어요.""그리 늦지 않았어.""궁에 다녀오셨으면 좀 쉬셔야지요. 옷만 갈아입고 곧장 문서를 찾으셨다면서요.""기다리던 것이 와 있어서.""그 기다리던 것들 때문에 저녁상도 두 번이나 데워 올렸습니다."서리는 거울 속 감씨를 보았다."먹기는 했다.""얼마나 드셨는지도 물어보았어요."빗질이 다시 이어졌다. 서리가 옆에 놓인 문서로 손을 뻗자 감씨는 팔꿈치로 가볍게 막았다."머리 다 빗을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계세요."서리는 손을 무릎 위로 돌려놓았다."아침은 다 먹을게.""그 말씀은 기억하겠습니다."감씨는 빗에 걸린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목덜미부터 천천히 빗어 내렸다."한집에 계셔도 두 분 다 각자 일만 붙들고 계시니, 누가 누구더러 쉬라고 하겠어요. 영안공께서는 탕약이라도 드시지요. 이러다 마님께서 먼저 앓아누우시겠습니다.""걱정도 많네.""앓기 전에 하는 말씀입니다."서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감씨가 머리를 한데 모으는 동안 거울 옆의 문서 모서리만 손끝으로 눌렀다.감씨가 빗질을 마저 하며 낮게 말을 얹었다."영안공께서 기력을 많이 되찾으셨다 들었어요. 그러면 마님께서도 이제 슬슬, 앞날을 생각하셔야—""그래서 박가 객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냐."서리가 담담히 받았다."가문의 앞날이라면, 이미 생각하고 있어."감씨의 손이 잠시 멈췄다."……제가 말씀드린 앞날은, 그 앞날이 아닙니다.""그럼 무슨 앞날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