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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화 봄빛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8 23:22:42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궁의 후원에 꽃이 한창이었다.

왕후가 마련한 꽃놀이 자리였다. 물가를 따라 자리가 깔렸고, 늘어진 가지 아래로 잔이 오갔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꽃잎이 상 위로 떨어졌다.

서리와 이겸이 함께 들어섰을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차례 그쪽으로 쏠렸다.

죽어가던 왕족과, 그를 고른 여인. 그 둘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이 자리의 대부분은 처음 보았다.

중심 자리에는 왕과 왕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아래쪽에 이헌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목연이 동행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

"영안공." 

왕이 먼저 반가운 낯으로 손짓했다. 

"얼굴이 많이 폈구나."

"염려해주신 덕입니다." 

이겸이 예를 갖췄다.

이헌의 시선이 잠시 그쪽에 머물다가, 뒤늦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영안공부인." 

왕후가 서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혼례 후 줄곧 병상 곁을 지켰다 들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많지 않습니다."

"겸양이 지나치군요." 

왕후가 옅게 웃었다. 

"저리 회복하신 것이 어디 저절로 된 일이겠습니까. 영안궁의 안살림도 잘 잡혔다 들었고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왕후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상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이왕 이리 잘 풀린 김에, 영안궁에 또 다른 경사가 들리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알아듣고 웃음을 지었다.

서리의 손이 잔 위에서 아주 잠깐 멎었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답이 반 박자 늦어졌다.

전생에 왕태자비였던 시절에도, 봄 꽃놀이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그때 서리는 이헌의 곁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상은 나란히 놓였고, 궁인이 술을 따르면 이헌은 서리의 잔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들었다.

그 아래 자리에서 한 부인이 웃었다.

"두 분이 나란히 계신 걸 뵈니 참 보기 좋습니다."

서리는 잔을 내려놓고 미소로 답했다.

"이제 좋은 소식만 들리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군요."

부인은 두 사람을 향해 말했으나, 답을 기다리는 눈은 서리에게 머물렀다. 곁에 앉은 여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무릎 위로 내렸다.

조금 전 자리에 들 때 들었던 말이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함께 나오셨네요."

"이런 자리야 함께 나오셔야지요."

서리가 지나가자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서리도 걸음을 늦춰 인사를 받았다. 누가 무엇을 들었는지 따로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이헌이 서리의 처소를 찾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궁 안에 퍼져 있었다.

"태자비께서도 같은 마음이시지요."

부인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서리는 곁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헌은 상 아래로 밀려난 소매를 거두고 있었다. 잔을 놓은 그의 손은 무릎 위로 내려갔다.

"좋은 소식은 빠를수록 반가운 법이니, 귀히 새기겠습니다."

"나라의 경사가 될 일이니 저희도 기다리겠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리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답했다. 부인도 만족한 듯 고개를 숙였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이헌에게 꽃나무의 수령을 물었다. 이헌은 고개를 돌려 답했고, 서리는 궁인이 내민 주전자를 보고 잔을 조금 앞으로 밀어두었다. 잔이 차는 동안에도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헌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서리가 답해야 할 것은 영안궁의 경사였다.

그 반 박자를 이겸이 메웠다.

"왕후께서 벌써부터 저희를 재촉하시는군요."

자리에서 웃음이 일었다.

"재촉이라니요. 덕담이지요." 왕후가 답했다. "그럼 부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시선이 다시 서리에게 돌아왔다.

"좋은 소식은 빠를수록 반가운 법이니," 

서리가 답했다. 

"귀히 새기겠습니다."

왕후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헌이 잔을 내려놓았다. 놓는 소리가 조금 늦게, 조금 크게 났다.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나이 지긋한 종친 하나가 말을 얹었다. 

"연택례 소식을 듣고 솔직히 놀랐지요. 그 자리에서 병상의 영안공을 고르실 줄이야."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겁니다." 

다른 이가 받았다.

"결단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요." 

또 다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곁에서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인데, 그걸 해내셨으니."

"두 분이 나란히 계신 걸 보니 어울리십니다."

"여기에 후사까지 보시면, 왕실의 복이지요."

말이 여기저기서 짧게 오갔다. 서리는 그때마다 짧은 답례로 받았고, 이겸은 서리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조금 틀어 앉아 있었다.

목연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물가 쪽 꽃가지로 옮겼다.

"왕실의 경사가 영안궁에만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목가와 연이 닿은 가신 가문의 나이 든 대신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좋은 이야기가 오갈 때 함께 짚어야 할 일이 있지요. 태자 전하의 곁도, 이제 정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자리의 공기가 한 결 달라졌다.

"연택례 이후로 그 일이 미뤄져 있었으니, 왕실로서도 더 미룰 일은 아닐 듯합니다." 

대신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마침 자리에 계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목가의 아가씨야 왕후께서 오래 곁에 두고 보신 분이고, 오늘 같은 자리에서도 저리 흐트러짐이 없으니, 태자 전하의 배필로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여러 시선이 목연에게로 향했다.

목연이 부채를 조용히 접었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목연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감히 오르내릴 자리가 아니지요."

거절은 아니었다. 자리에 있던 이들도 그것을 알아들었다.

목연의 시선이 아주 잠깐 이헌에게 향했다가, 왕후 쪽으로 옮겨갔다.

"그 아이의 됨됨이야 내 오래 보아 알지요." 

왕후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만 이런 일은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왕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은 곧바로 몸을 낮췄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이겸이 상 위에 놓인 서리의 손등을 가볍게 덮었다.

"언젠가 이 궁에도 좋은 소식이 들린다면 좋겠습니다."

서리가 잠깐 이겸을 바라보았다. 손을 빼지는 않았다. 대신 옅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누군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고,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흩어졌다.

목연의 시선이 그 손 위에 잠시 머물렀다. 곧 눈을 돌렸다가, 다시 한 번 그쪽을 향했다.

서리는 잔을 들며 방금의 흐름을 눈으로 따라갔다. 태자비 자리가 비었고, 목가가 그 자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 대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꺼낸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닐 것이었다.

이겸의 시선이 서리에게 한 박자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이헌은 그 이야기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시선이, 한 번은 목연 쪽으로, 그러고는 다시 건너편 자리로 짧게 흘렀다.

연회가 파할 무렵, 왕후가 상궁을 통해 함 하나를 내려보냈다.

"영안공의 회복을 축하하는 뜻입니다." 

상궁이 고했다. 

"혼례에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리셨다 하시니, 부인께서 받아주시지요."

함 안에는 곱게 갠 비단이 들어 있었다. 자수가 놓인 것이었다.

"과분한 것을 받습니다." 

서리가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후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영안궁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진 뒤였다.

서리는 처소에 함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등불 아래에서 비단을 조심스레 펼쳤다. 짙은 남빛 바탕에 흰 꽃송이가 수놓여 있었다.

한 겹을 젖혀도 아래에 접힌 폭이 더 있었다. 서리는 상 위의 잔과 작은 합을 옆으로 옮겼다. 비단 끝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무릎에 받아놓고, 꽃무늬가 이어지는 쪽을 펼쳐 보았다.

겉옷을 지어도 좋을 듯했다. 꽃송이를 어느 쪽에 두느냐에 따라 옷의 모양도 달라질 것이었다. 감씨에게 보여주면 어울리는 안감부터 골라낼 터였다.

서리는 가장자리를 잡아당겨 접힌 자국을 폈다. 꽃잎을 따라 놓인 바늘땀이 드러났다.

수실에 옅은 윤기가 돌았다.

곱게 놓인 흰 꽃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바로 곁의 꽃은 조금 어둡게 보였다. 비단을 돌려놓자 이번에는 그 꽃의 가장자리에 빛이 앉았다.

서리는 등불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빛이 닿는 각도를 바꿔가며 실을 들여다보았다. 물들인 빛깔이 유난히 고르게 앉아 있었고, 빛을 받은 자리에서만 은은하게 결이 살아났다.

비단을 다시 접으려던 손이 멎었다.

이 윤기를 얼마 전에도 들여다보았다.

가마터 아래 작은 건물, 문 안쪽 못에 걸려 있던 천 조각이었다.

서리는 접어 올린 폭을 다시 내려놓았다. 흰 꽃을 한 번 더 살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서함 안에는 낮에 살피던 종이들이 놓여 있었다. 그 아래 따로 싸둔 천 조각을 꺼내 왔다. 상 한쪽에 자리를 내고 조심스럽게 펼치자 찢긴 가장자리와 남은 자수가 드러났다.

손수건으로 보이는 작은 조각은 넓은 비단 옆에서 더 초라해 보였다. 서리는 두 천을 겹치지 않고 나란히 놓았다.

등불은 그대로 두고 천 조각을 조금 돌렸다. 빛이 비껴들 때 살아나는 결도, 물빛이 앉은 자리도 서로 닮아 있었다.

이번에는 비단 쪽을 움직였다. 흰 꽃잎의 윤기가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 서리는 천 조각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놓고 두 실을 번갈아 살폈다.

같은 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귀한 실이라면 그 결이 서로 닮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서리는 비단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필, 왕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진유의 서랍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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