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리가 물러난 뒤, 전각 안에는 왕과 이겸, 둘뿐이었다.왕은 문이 닫힌 뒤에도 한동안 이겸을 바라보았다. 예복의 목깃이 전보다 헐거워 보였다.
"많이 야위었구나."
이겸이 다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형님."
왕은 고개를 숙인 아우를 내려다보다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인사는 아까 받았다. 이리 앉거라."
이겸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곧바로 몸이 펴지지 않아 잠깐 멈췄다. 왕이 자리에서 몸을 기울였으나, 이겸이 먼저 허리를 세웠다.
"괜찮습니다."
"앉은 뒤에 해도 될 말이다."
이겸은 잠시 그 자리를 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왕은 잔을 하나 당겨 차를 따랐다.
"탕약은 아직 먹느냐."
"예."
왕은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차를 따른 잔을 이겸 쪽으로 밀었다.
이겸은 잔을 들기 전에 그 손을 잠깐 바라보았다.
오래전에도 저 손이 제 앞에 내밀어진 적이 있었다.
— 그날 아침, 늘 이겸을 깨우던 시종이 오지 않았다.대신 들어온 자는 씻을 물을 내려놓고 옷을 꺼냈다. 띠를 매는 손이 익숙하지 않아 두 번이나 풀었다.
이겸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어제 있던 사람은 어디 갔느냐."
"다른 곳으로 배속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로."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침상을 물린 뒤 이겸은 행랑까지 가서 다시 물었다.
돌아온 답은 비슷했다. 배속이 바뀌었다는 말뿐이었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면 담당자에게 물으라 했고, 짐은 이미 빠져 있었다.
어제 저녁에도 그 사람은 이겸의 곁에 있었다.
소매 끝이 뜯어진 것을 보고 내일 갈아입을 옷을 따로 꺼내두겠다 했다. 다른 데로 간다는 말은 없었다.
이겸은 처소 앞까지 갔다가 발을 돌렸다.
빈 전각 뒤편에는 담과 나무 사이로 좁은 자리가 있었다. 회랑에서 내려다봐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겸은 그곳에 앉아 무릎을 끌어당겼다.
종종 이곳에 숨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종은 한참 뒤에라도 그를 찾아냈다.
흙바닥에 작은 돌 하나가 박혀 있었다.
손톱으로 가장자리를 파내자 돌이 빠졌다. 이겸은 그것을 손안에 쥐었다.
얼마 뒤 회랑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돌아왔나.
이겸은 고개를 들었다.
"이런 데서 무엇을 하느냐."
길게 내려온 태자의 예복 자락이 눈앞에 있었다.
"형님."
왕태자는 그 자리에 선 채 아우를 내려다보았다.
"왜 여기 있느냐."
한동안 답이 없었다.
"제 곁에 있던 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시종 말이냐."
"예."
이겸은 손안의 돌을 내려다봤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물어보았느냐."
"예."
"누구에게."
이겸이 두어 사람의 이름을 댔다.
왕태자가 물었다.
"그래서 이리 숨어 있었느냐."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돌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왕태자의 시선이 잠깐 그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자가 자리를 옮겼다고 네 자리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답을 듣고 싶으면 다시 가서 물어라."
"……."
"네가 입을 다물고 이런 데 앉아 있으면 아무도 대신 물어주지 않는다."
왕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거라."
이겸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다시 가서 물을 수 있겠느냐."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은 그대로 내밀어져 있었다.
이겸은 돌을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오래 웅크리고 있던 무릎이 바로 펴지지 않았다.
이겸이 몸을 일으키자 왕태자는 손을 놓았다.
"가서 물어라."
그 말을 남기고 왕태자는 먼저 회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겸은 잠시 그 뒷모습을 보았다.
그날 이겸은 다시 행랑으로 갔다.
담당자를 찾아가 물었고, 다른 사람에게 가라는 답을 들으면 그 사람을 다시 찾아갔다.
몇 번을 더 묻고서야 시종이 별궁으로 배속되었다는 답을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뒤 이겸은 무예를 익혔다.
군에 나가겠다고 먼저 청한 것도 이겸이었다.
누구의 권유냐는 물음에는 자신의 뜻이라 답했다.
훗날 북방에서는 무령후와 같은 전장에 섰다. 궁에서 배운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았다.
병사들과 밤을 넘기고, 직접 맡은 자리를 지키며 이겸은 제 이름으로 공을 쌓았다.
— "몸은 좀 어떠하냐."이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혼백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다. 궁 일을 벌써 직접 보고 있다지."
"처소에서 살필 수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것도 몸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왕은 아우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기억은, 온전하고?"
이겸은 잔에서 손을 떼었다.
"흐릿한 부분이 아직 있습니다."
"어디까지 기억하느냐. 북방에서 다쳤을 때는."
"화살을 맞은 것은 기억납니다. 그 뒤 도성으로 오는 길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말을 해주면 떠오르기도 하느냐."
"그런 것도 있고, 들어도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의관에게 빠짐없이 이르거라. 당장 기억나지 않는다고 애쓸 것은 없고."
"예."
이겸은 도성에 닿은 뒤의 일은 덧붙이지 않았다. 왕도 거기까지는 묻지 않았다.
"북방에서의 일도 많이 힘들었겠지. 지원이 늦어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에서 늦어진 것인지는 확인하셨습니까."
왕이 그를 보았다.
"아직 보고를 맞추는 중이다. 보냈다는 쪽과 받았다는 쪽의 말이 다르니, 중간 기록까지 보아야겠지."
"확인되는 대로 알려주마."
왕의 목소리는 앞서 몸을 묻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겸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석 달이었다. 적어도 어디까지 확인했는지는 들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현장에 있었던 자들의 말이 필요하면, 제 휘하에도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마. 너도 몸이 더 나으면 기억나는 것을 정리해두거라."
"알겠습니다."
왕은 잔을 들어 남은 차를 마셨다. 이겸의 잔에도 차가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마저 비우고 내려놓았다.
"어쨌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다."
왕이 말했다.
"네가 직접 와서 묻는 날이 올지, 한때는 그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연택은 뜻밖이었겠구나."
왕이 빈 잔을 상 위에 놓았다.
"서가의 여식이, 죽어가는 너를 고를 줄 누가 알았겠느냐."
"저도 뜻밖이었습니다."
"깨어나니 부인이 곁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더냐."
이겸은 잠시 대답을 골랐다.
"제 이름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왕의 입가에 옅게 웃음이 걸렸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재차 물었는데도 뜻을 거두지 않더구나."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마음에 드느냐."
"아직은, 서로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함께 지내는 데 어려움은 없고?"
"각자 하던 일이 있어, 부딪칠 일은 많지 않습니다."
대답을 마친 뒤 이겸은 서리가 자신의 처소에 들어와 심문에 참여하겠다고 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자가 노린 것이 자신이라면 제 일이라던 말도.
왕은 그 짧은 침묵을 기다렸다. 이겸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부인이더구나."
"필요한 말은 합니다."
"그래. 연택례에서도 그러했지."
왕은 더 묻지 않았다. 이겸 역시 습격 이후의 조사나 서가가 다시 잇고 있는 거래처에 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부인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무릎이 바로 펴졌다.
"너무 오래 앉혀두었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안색이 좀 나아져서 오거라."
"예, 형님."
왕은 아우가 예를 마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이겸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한마디가 더 왔다.
"탕약도 거르지 말고."
이겸이 돌아보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전각을 나서자 기다리던 내관이 다가왔다. 부인은 후원을 걷고 계신다며 길을 가리켰다.
이겸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님의 반가움만은 진심이라고 믿었다.
지원이 어디에서 늦어졌는지는, 돌아가서 다시 살펴볼 생각이었다.
— 후원에 닿았을 때 서리는 목연 일행과 함께 있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이겸은 서리와 함께 회랑을 따라 궁문 쪽으로 향했다.서리는 독대에 관해 묻지 않았다. 이겸도 한동안은 말없이 걸었다. 궁인이 다가와 예를 갖추면 잠깐 걸음을 늦췄다가 다시 나란히 걸었다.
"영안공께서는 인기가 많으신 듯합니다."
이겸이 서리를 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많이들 궁금해하시더군요. 얼마나 나으셨는지, 이제 거동은 괜찮으신지."
서리가 덧붙였다.
"제가 대신 답을 꽤 했습니다."
"그랬습니까."
회랑이 끝나고 넓은 뜰이 나왔다. 앞서 가던 내관이 수행들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가 아가씨와는 구면이십니까."
"멀리서 뵌 적은 있습니다. 말을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렇습니까."
더는 묻지 않았다.
말 앞에 이르자 이겸이 서리의 말 곁에 먼저 섰다.
서리가 다가오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궁인들의 시선이 아직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
서리는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고 등자에 발을 올렸다.
안장에 오르는 짧은 순간, 맞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소매 끝이 이겸의 손목을 스치고, 높아지는 서리의 시선이 그의 눈을 잠깐 스쳐 갔다.
서리는 안장에 자리를 잡고 고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손을 거두려 했다.
이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이내 서리의 손이 빠져나갔지만, 손끝에 남은 온기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겸은 제 말로 돌아가 고삐를 잡고 안장에 올랐다.
이윽고 두 필의 말과 수행 행렬이 궁문을 벗어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연이 영안궁에 든 것은 해가 제법 높이 오른 뒤였다. 목연이 탄 말이 영안궁 앞뜰에 멎자, 기다리던 하인이 다가와 고삐를 받아 들었다. 목연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한 번 정돈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뒤따라온 시비와 호위들도 차례로 말에서 내렸고, 마당의 시비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손님을 맞았다. 서리는 마루 앞에서 목연을 맞이했다. 예를 갖추는 데 부족한 데가 없었으나, 반가움을 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지나온 회랑에도, 이쪽을 향해 자리를 비켜서는 시비들의 몸짓에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어서, 목연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 궁의 살림이 이미 서리의 손에 익어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내주셔서, 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고 안으로 들었다. — 다과상 위로 김이 옅게 올랐다. "보내주신 향은 잘 받았습니다." 서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것을 받고 서찰만 돌려보내기가 마음에 걸려, 이리 청했습니다." "영안공께서 큰 병을 이겨내셨으니, 그 정도야 마땅한 일이지요." 목연은 찻잔을 들며 옅게 웃었다. "다만 침향은 두는 자리를 조금 가립니다. 볕이 드는 데 오래 두면 향이 얕아지니,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향합째로 옷장 안쪽에 넣어두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리하겠습니다." "요즘은 향낭에 넣어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 아예 조각을 잘게 내어 쓰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기가 아까워서 통으로 두는 편입니다만." "향낭도 그만큼 작아지겠군요." "예. 옷에 걸었을 때 처지지 않을 만한 것을 찾지요. 수가 아무리 고와도 무거우면 손이 잘 가지 않으니까요." 목연은 다과 하나를 집어 작은 접시에 옮겼다. "작은 것을 찾는 건 거울도 비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 이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앞에 엎드린 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친척 되는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물었으나, 그 뒤로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합니다. 연고가 있다는 고을 두 곳도 사람을 보내 살폈습니다만—" "없더냐." "예." 이헌은 서안 위에 놓인 종이를 손끝으로 밀었다. 몇 달째 같은 자리에 같은 내용이 적혀 오는 종이였다. "관청 기록은." "이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신고도, 호적을 옮긴 흔적도 없습니다." "집은." "그대로 비어 있습니다. 다만—" 사내가 잠시 말을 골랐다. "이웃들 말이, 어느 날 보니 사람이 없더랍니다. 짐을 싣는 것도, 나가는 것도 본 사람이 없다고요." 이헌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온 집안이 나가는데, 아무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저희도 그것이 이상하여 몇 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답만 돌아옵니다." 사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 집에 셈이 남아 있던 상인이 둘 있었는데, 받으러 갔더니 이미 비어 있었다 합니다. 빚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했다기엔, 집이 너무 깨끗했다더군요." "깨끗했다." "예. 쓰던 세간까지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다고요." 이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었다는 소문도, 도망쳤다는 소문도 없었다. 몰락했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면 도성 안에 반드시 말이 돌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돌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웃던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흩어졌다. "내가 태자다." 이헌이 말했다. "태자의 사람들이 반년을 뒤졌는데, 집 한 채가 통째로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가라." 이헌이 종이를 밀어냈다.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리는 비단과 천 조각을 나란히 놓고 이겸을 기다렸다.이겸은 들어서자마자 그 앞에 앉았다. 등불을 끌어당겨 각도를 바꿔가며 두 실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비단의 수실을 쓸어보고, 다시 조각 쪽으로 옮겨갔다."닮았군요.""같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서리가 말했다. "조각 쪽은 흙을 오래 먹어서, 빛깔이 죽었습니다. 물들인 결도 어긋났고요.""그렇다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고.""예."이겸이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렸다."이런 실을 쓰는 곳이 왕후전뿐일 리는 없겠지요.""그렇습니다." 서리가 답했다. "귀한 물건일수록, 오히려 쓰는 집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상단이 들여와서 어디로 가는지가요.""그 길은 부인이 더 빨리 찾겠군요.""바느질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늘 오갑니다."이겸은 잠시 조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나는 그날의 명부를 다시 보겠습니다. 이 조각과는 별개로, 아직 짚지 못한 것이 있으니." — 바느질방 주인은 도성 안쪽에서 귀족가의 자수품을 오래 다뤄온 여인이었다.서리가 영안궁에서 왔다는 말에 여인의 낯빛이 먼저 굳었다. 그러고는 서리가 내민 조각을 흘긋 보더니, 아예 두 손을 내저었다."저희는 궁에서 나온 물건은 손대지 않습니다. 그런 건 만져본 적도 없고요.""궁의 물건이 아닙니다." 서리가 담담히 답했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몰라 여쭈러 온 것입니다."여인은 그 말에도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다만 조각을 받아 들고는 눈빛이 달라졌다.여인은 조각을 손바닥에 펼쳐놓고 한참을 만졌다. 엄지로 바탕천을 문질러보고, 뒤집어 안쪽 결도 살폈다. 그러고는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췄다."이상하네요.""무엇이 말입니까.""이 실이야 제가 봐도 귀한 겁니다. 이런 건 아무나 못 써요." 여인이 실 한 오라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궁의 후원에 꽃이 한창이었다.왕후가 마련한 꽃놀이 자리였다. 물가를 따라 자리가 깔렸고, 늘어진 가지 아래로 잔이 오갔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꽃잎이 상 위로 떨어졌다.서리와 이겸이 함께 들어섰을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차례 그쪽으로 쏠렸다.죽어가던 왕족과, 그를 고른 여인. 그 둘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이 자리의 대부분은 처음 보았다.중심 자리에는 왕과 왕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아래쪽에 이헌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목연이 동행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영안공." 왕이 먼저 반가운 낯으로 손짓했다. "얼굴이 많이 폈구나.""염려해주신 덕입니다." 이겸이 예를 갖췄다.이헌의 시선이 잠시 그쪽에 머물다가, 뒤늦게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영안공부인." 왕후가 서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혼례 후 줄곧 병상 곁을 지켰다 들었습니다.""제가 한 일은 많지 않습니다.""겸양이 지나치군요." 왕후가 옅게 웃었다. "저리 회복하신 것이 어디 저절로 된 일이겠습니까. 영안궁의 안살림도 잘 잡혔다 들었고요.""과분한 말씀입니다."왕후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상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이왕 이리 잘 풀린 김에, 영안궁에 또 다른 경사가 들리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알아듣고 웃음을 지었다.서리의 손이 잔 위에서 아주 잠깐 멎었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답이 반 박자 늦어졌다. — 전생에 왕태자비였던 시절에도, 봄 꽃놀이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그때 서리는 이헌의 곁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상은 나란히 놓였고, 궁인이 술을 따르면 이헌은 서리의 잔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들었다.그 아래 자리에서 한 부인이 웃었다."두 분이 나란히 계신 걸 뵈니 참 보기 좋습니다."서리는 잔을 내려놓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문 밖 옛 가마터는, 듣던 것보다 더 오래 버려진 자리였다.무너진 가마 아궁이 위로 마른 덩굴이 뒤엉켰고, 깨진 기왓장이 잡초 사이에 반쯤 묻혀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잔 기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오간 자국을 찾기에는, 비도 바람도 너무 여러 번 지나간 뒤였다.서리는 포로가 그린 약도를 펼쳤다. 남문에서 갈라진 길을 되짚고, 종이를 돌려 가마터가 있는 쪽과 맞추었다."갈림길은 맞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왔다면 가마 앞을 지나게 되고요."이겸은 그들이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에서는 가마의 윗부분만 보였다.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자 무너진 담장 너머로 다른 비탈이 드러났다."뒤쪽도 살펴라.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백우가 데려온 자들을 나누어 보냈다. 둘은 담장을 따라 돌고, 나머지는 가마 안쪽과 터 가장자리를 훑었다.포로가 가마터를 알려주며 함께 짚어준 표식 자리는 길목에 있었다. 담장 끝에 박힌 쇠고리는 비어 있었다. 백우가 고리 아래에 엉킨 마른 풀을 걷어냈다."이 자리입니다."고리 아래 벽면에 얕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리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무언가 매달려 벽에 닿았던 듯했으나, 남은 끈이나 조각은 없었다."걸려 있던 것은 없군요.""주변에도 떨어진 것은 없습니다."이겸은 고리를 살피고 손을 거두었다."언제 거둔 것인지는 모르겠군."서리는 약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가 종이를 접었다. 길과 표식을 보았다는 자리는 포로의 말과 맞았다.가마 앞은 기왓조각이 촘촘히 박힌 단단한 땅이었다. 백우가 몸을 낮추고 움푹 팬 곳을 살폈다. 그 안에도 잘게 부서진 기와와 흙이 가득 차 있었다."발뒤꿈치 자국 같기는 합니다만, 가장자리가 다 무너졌습니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서리는 가마 곁의 평평한 돌을 살폈다. 잠시 앉아 기다리기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씨는 빗을 들기 전에 서리의 무릎 위에 놓인 문서부터 보았다."그것은 내려놓으세요.""읽고 있지 않아.""제가 들어올 때까지는 읽고 계셨지요."서리가 문서를 접었다. 감씨는 그것을 받아 거울 옆에 놓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등 뒤로 모았다.빗이 머리 끝에서 잠깐 걸렸다. 감씨가 손가락으로 엉킨 곳을 풀었다."어젯밤에는 언제 누우셨어요.""그리 늦지 않았어.""궁에 다녀오셨으면 좀 쉬셔야지요. 옷만 갈아입고 곧장 문서를 찾으셨다면서요.""기다리던 것이 와 있어서.""그 기다리던 것들 때문에 저녁상도 두 번이나 데워 올렸습니다."서리는 거울 속 감씨를 보았다."먹기는 했다.""얼마나 드셨는지도 물어보았어요."빗질이 다시 이어졌다. 서리가 옆에 놓인 문서로 손을 뻗자 감씨는 팔꿈치로 가볍게 막았다."머리 다 빗을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계세요."서리는 손을 무릎 위로 돌려놓았다."아침은 다 먹을게.""그 말씀은 기억하겠습니다."감씨는 빗에 걸린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목덜미부터 천천히 빗어 내렸다."한집에 계셔도 두 분 다 각자 일만 붙들고 계시니, 누가 누구더러 쉬라고 하겠어요. 영안공께서는 탕약이라도 드시지요. 이러다 마님께서 먼저 앓아누우시겠습니다.""걱정도 많네.""앓기 전에 하는 말씀입니다."서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감씨가 머리를 한데 모으는 동안 거울 옆의 문서 모서리만 손끝으로 눌렀다.감씨가 빗질을 마저 하며 낮게 말을 얹었다."영안공께서 기력을 많이 되찾으셨다 들었어요. 그러면 마님께서도 이제 슬슬, 앞날을 생각하셔야—""그래서 박가 객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냐."서리가 담담히 받았다."가문의 앞날이라면, 이미 생각하고 있어."감씨의 손이 잠시 멈췄다."……제가 말씀드린 앞날은, 그 앞날이 아닙니다.""그럼 무슨 앞날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