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진은 그녀의 상태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다시 바닥에 내려줬다.“그럼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난 가서 전화 받을게.”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흔들었다.하지만 이런 모습마저 강지한의 눈에는 아주 애틋하게 느껴져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심미연, 감히 날 이런 취급해? 간이 부었네?’박유진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다가왔다.아까까지는 너무 괴로웠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다.그리고 강지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한테 주겠다고 했던 그 재산들이 아까우면 나랑 같이 살 때 당신이 온지유 씨한테 줬던 선물, 집, 차, 미용원까지 전부 다 받아와. 그리고 다시 재산 나누던지.”어차피 그녀는 앞으로도 변호사 일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그저 강지한만 버텨내면 된다.심미연의 말을 들은 강지한은 순간 눈빛이 살벌해졌다.“변호사라 그런지 말주변 하나는 끝내주네. 나는 지금 너랑 저 떳떳하지 못한 남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온지유는 왜 갑자기 튀어나와? 그리고 가만히 있는 여자를 왜 자꾸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예전의 심미연은 항상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어서 그녀를 다루기 참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참 악독하고 못된 사람인 것 같았다.“그러는 당신은 온지유 씨랑 붙어 먹은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 사실을 전 경성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자격으로 내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야?”다시 살아난 심미연은 전투력이 슬슬 올라가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듣다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나랑 온지유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 헛소리 그만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심미연은 핸드폰에 뜬 발신자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강지한은 온지유한테서 걸려 온 전화인 걸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끊자마자 또다시 전화가
심미연은 강지한의 반응이 너무 웃겼다.박유진과 심미연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자신과 온지유 이야기만 나오면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이기적인 인간!’“미연아, 만약 미르 파크에 돌아가기 싫으면 내가 매일 제때 집에 가서 너랑 같이 저녁 먹을게. 어때? 네가 받아들인다면 그 넥타이를 박유진 씨한테 줬던 일은 내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게.”강지한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조금 비참해 보이고 비굴해 보여도 심미연이 자기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었다.“강지한 씨, 정신과 치료 좀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심미연은 너무 진지한 그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그의 내연녀가 되면 돈도 많이 받고 직업도 자유롭다.다른 여자였으면 분명 구미가 당겨 바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텐데 아쉽게도 심미연은 이제 강지한에 대한 감정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심미연, 내가 지금 좋게 말할 때 받아들여. 나중에 사서 고생하지 말고.”강지한은 아까보다 한껏 낮은 말투로 말했는데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백번 양보해서 그 넥타이 사건은 이제 따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도리어 강지한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비꼬았다.심미연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두 번 다시는 지한 씨한테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만약 온지유 씨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면 다른 여자라도 찾아보던지. 아마 기꺼이 당신 성욕을 만족시켜 줄 테니까.”저 말도 안 되는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의 말에 강지한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아직 상황판단이 안되나 보네.”말을 마친 뒤 그는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서야 심미연은 그가 진짜 떠났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박유진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미연아, 그 사람은 갔어?”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응. 오빠도 그만 가봐. 나
그날 백화점에서 심미연이 넥타이를 사 가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똑같은 걸 사서 박유진한테 보냈을 것이다.그래서 오늘 강지한이 갑자기 찾아와서 질투심에 불타올라 난리를 쳤던 것이고.“그래. 지금 가서 카드 가져올게.”박유진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어차피 거짓말한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그럼 난 먼저 올라가 볼게.”박유진은 심미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이때, 갑자기 박유진의 핸드폰이 울려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그는 차에 올라탔다.심미연이 집에 들어서니 신하린한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혹시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어서 전화했으리라 생각하고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 신하린의 변함없는 마음이 심미연은 언제나 너무 고마웠고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미연아, 난 네가 혼자 있는 게 너무 불안해. 내가 옆에서 돌봐줄까,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라도 불러줄까? 둘 중에 네가 선택해.”신하린은 혹시나 심미연이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너무 무서웠다.“그럴 필요 없어. 정말 괜찮다니까.”아직 배도 덜 나왔고 몸이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혼자라도 상관없었다.신하린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 혹시나 무슨 일이 있거나 몸이 이상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심미연은 거실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신하린에게 고백했다.“하린아, 방금 지한 씨가... 한바탕 난리 치다가 갔어. 날 먹여 살리겠대. 그러면서 카드도 주더라.”신하린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뭐? 그 인간이 구연궁까지 찾아갔다고? 진짜 미친 거 아니야?”신하린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그녀의 눈에는 강지한이 그저 쇼하는 걸로 보였다.심미연은 수화기 너머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그 사람도 그저 일시적인 충동에 그런 말을 했을 거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미연아, 걱정하지 마. 내가 부탁해서 알아볼 테니까.”신하린은 화면을 통해 한껏 단호한 목소리로 심미연을 안심시켰다.듣고 있던 심미연도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누가 넥타이를 샀는지만 알아내면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쉬울 것이다.“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쉬어. 이따 다시 얘기하자.”신하린은 핏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순간 가슴이 아팠다.“그래. 난 좀 쉴게.”심미연은 말을 마친 뒤 영상 통화를 껐다.신하린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차갑고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멍해진 신하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데 이진영이 의도적으로 그녀와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말해.”이진영은 살짝 짜증이 났는지 말투가 아까보다 더욱 어둡게 들렸다.“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는데요.”신하린은 어떻게 말해야 이 남자가 자기 부탁을 들어줄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침대 밖에서는 우리가 남남인 척해야 한다며? 함부로 낯선 사람에게 도움 요청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하지만 말과는 달리 이진영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실례했어요.”순간 신하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이진영을 통하면 분명 백화점 판매 기록을 빠르게 찾을 수 있겠지만 그가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혼자 해결해야 했다.이 시각, 심미연은 심란했던 기분이 신하린과의 수다로 조금 풀린 것 같아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소파에 담요를 덮고 누워서 TV를 보기 시작했다.공교롭게도 TV에서는 온지유에 대한 인터뷰를 라이브로 진행하고 있었다. 화면 속 온지유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모습이었는데 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담요를 손에 꼭 쥐고 머리는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유산했다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몸도 채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나와서 인터뷰까지 한다고? 열심히 사네.”사실 온지유라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이때, 갑자기 온지유의 낯빛이 변하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면서 기절했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빨리 119 불러!”“라이브 꺼요!”심미연은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역시 수법이 너무 단순해.’그리고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자 TV 화면이 꺼지면서 거실도 조용해졌다.심미연은 이미 색이 바래진 스크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머릿속에 갑자기 수많은 화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온지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자신과 강지한은 애틋한 사이란걸 연기했는데 거의 배우 뺨치는 수준이었다.순간 두통이 몰려와 심미연은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그만 소파에서 잠이 들어버렸고 이상한 꿈까지 꾸게 되었다.꿈속의 하늘은 이미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천둥소리는 마치 불길함을 예고하는 듯 요란했다.이때 갑자기 두 명의 어린아이의 그림자가 비치면서 안개 속을 헤집고 그녀 쪽으로 뛰쳐나왔다.그들은 초라한 옷차림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심미연의 두 다리를 꼭 껴안으면서 끊임없이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심미연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자마자 아이들의 가슴을 찢는 듯한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엄마,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사람들이 저희를 죽이려 해요!”아이의 목소리는 심미연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애써 손을 내밀어 위로를 건네려다 보니 어느새 자기 두 손도 떨고 있었다. 주위의 공기도 마치 응고된 것처럼 점점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바로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더니 나지막하고 차가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심미연은 애써 고개를 들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마치 저승사자처럼 그림자 형태로 그녀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심미연은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가면 알게 될 거야.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박유진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는 심미연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승낙하려던 찰나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화면에 깜빡이는 ‘강 씨 저택’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유진 오빠, 나 먼저 전화 좀 받고 다시 말해도 될까?” 이미 강지한과 이혼한 사이였지만 강준형의 전화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강준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았어. 먼저 전화 받아. 기다릴게.” 박유진은 언제나 온화하고 세련된 도련님처럼 보였다. 심미연은 화면을 가볍게 몇 번 터치한 후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어. 내가 직접 시장에 가서 장도 봐 왔단다.” 강준형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단호함 속에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 저랑 지한 씨는 이미 이혼했잖아요.” 심미연은 강지한이 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르며 본가에 돌아갔다가 그와 마주칠까 봐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 지한 씨가 내가 마음이 바뀐 줄 알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찾아가 내연녀라도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 줄 알겠어!’“너희가 이미 이혼한 건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그게 우리가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강준형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음 섞인 말투였다.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게 확 느껴졌다. 다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 기회에 심미연에게 젊고 능력 있는 상대를 소개해 주려는 거였다. 하지만 이 말을 미리 꺼내면 심미연이 너무 놀랄까 봐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고 복잡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강지한과 마주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심미연은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연아, 갈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가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그는 일부러 심미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절한 지 몇 시간 만에 벌써 생각이 바뀌었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마음이 생긴 거야? 강 부인,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소문이라도 나면 누가 너한테 소송 걸자고 찾아가겠어.” 그가 말을 내뱉는 사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심미연은 주먹을 꽉 쥐며 손톱이 거의 손바닥에 박힐 정도였지만 여전히 숨이 막힐 듯한 차가운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 강지한과 가까운 접촉을 피하며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강 대표님,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난 이제 당신과 어떤 연관도 있고 싶지 않아요. 그냥 할아버지랑 밥 한 끼 먹으러 온 거고 당신을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에요.”말을 끝낸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눈빛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 뜻밖의 만남은 마치 총성이 울리지 않는 전쟁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결국 누가 승자가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미연아, 네가 좀 더 늦게 왔으면 내가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갈 뻔했어.” 강준형의 힘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그녀는 가슴 속 안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미연은 빠르게 그의 앞에 다가갔다. 가방을 그의 손에 건넨 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산 무릎 보호대예요. 무릎 상태가 안 좋으시잖아요. 날씨가 더 추워지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강지한이 들어오며 할아버지가 심미연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에 미묘한 질투를 느꼈다. ‘누가 진짜 친손자인지 모르겠네.’ 강준형은 고개를 들어 강지한과 시선이 마주치자 금세 웃음을 지었던 얼굴을 확 굳어버
여자의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는 모습이 강지한을 자극했다. 입술 끝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번지며 그 곡선이 매혹적으로 빛났다. 그의 손끝이 여자의 다리 위에서 원을 그리듯 스쳤고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흘러나왔다. “심미연 씨, 왜 이렇게 나 쳐다봐? 내가 그렇게 멋있어?”‘말 진짜 뻔뻔하게 하네.’ 심미연을 이를 갈며 남자의 장난치고 있던 손을 잡아 확 꼬집었다. ‘이미 전남편 전처인데 왜 자꾸 이렇게 은근슬쩍 다가오는 거지? 예전엔 강지한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이 여자 진짜 손끝이 세네.’ ‘너무 아프잖아!’ 하지만 손이 아파도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강준형은 그릇에 국을 담아 심미연 앞에 놓으며 그녀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보고는 강지한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줄 알았다. 그는 강지한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빨리 먹고 가!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그는 그저 심미연이랑 조용히 식사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지한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강지한이 지금까지 심미연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런 사람을 절대로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저야말로 당신 친손자잖아요! 쟤는 남인데 왜 저 대신 쟤를 도와주는 거예요?” 강지한은 말하면서도 손과 발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심미연을 괴롭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심미연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녀가 따분하고 거슬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집에서 혼자 한나절을 보내니 집안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준형을 찾아가 심미연을 설득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려 했는데 여기서 그녀를 뜻밖에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할아버지도 참. 심미연만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하고 정작 친손자인 나한텐 말 한마디도 없으시네.’‘편애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강지한이 그렇게 웃는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