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카일의 손끝이 은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카일.”세이아가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하나가 이미 빛이 되어 사라졌고, 남은 손마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며 단단하게 붙잡던 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빛밖에는 잡히지 않았다.“괜찮아.”“괜찮지 않습니다.”“이번에는 나도 인정해야겠군.”카일이 자신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푸른 눈만큼은 웃지 않았다.“정말 조금 위험해.”“조금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농담할 때도 아닙니다.”“당신이 울 것 같아서.”“안 웁니다.”“이미 울고 있는데.”그 말을 듣고서야 세이아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급히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창조의 힘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가슴에서 힘이 움직이는 순간 오르페온의 은빛 계약이 반응했다. 금빛과 보랏빛이 섞인 빛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꿈도, 시간도, 이름도, 창조도. 오르페온은 그 모든 것의 기원이 자신이라고 주장했고, 적어도 지금 펼쳐진 계약 안에서는 힘을 사용할수록 그의 ‘회수’에 휘말리는 것처럼 보였다.어떻게 해야 하지.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카일이 사라진다. 힘을 사용하면 오르페온의 계약에 먹힌다. 어느 쪽이든 그가 정해 둔 답이었다.“세이아.”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말하지 마세요.”“들어.”“싫습니다.”“당신이 자주 하는 말이군.”“카일.”“그러니까 나도 한 번쯤은 끝까지 말하게 해 줘.”카일이 남은 손을 들어 세이아의 뺨에 댔다. 이미 감각이 거의 남지 않은 손인지 손길이 어색했다. 그래도 세이아는 그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손이 사라진 뒤에도 그 온도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오래 붙들고 싶었다.“내가 없어져도.”“그런 말 하지 마세요.”“끝까지 들어.”푸른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내가 없어지는 건 당신 선택이 아니야
“드디어 찾았구나.”오르페온이 손을 내밀었다.“나의 마지막 창조자.”남쪽 폐허에서 열린 검은 문이 황실 성역의 공간을 가르며 완전히 벌어졌다. 그러나 문 너머에 펼쳐진 것은 무너진 신전도, 리안이 잠들어 있던 오래된 관도 아니었다.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얀 궁전과 높게 솟은 기둥, 한 점의 얼룩도 허락하지 않는 바닥이 눈부신 빛 아래 이어져 있었다. 하늘은 지나치게 맑았고 정원에는 흰 꽃이 만개해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으며, 슬픔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였다.그런데 세이아는 곧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바람이 없었다.기둥 사이에 피어난 꽃은 단 한 송이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은 정확히 같은 궤도를 반복해서 돌았다. 구름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무엇도 스스로 다음 순간을 선택하지 않았다.헤르미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첫 번째 세계?”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멈췄다. 은빛 눈에 혼란이 번졌다.“아니. 저곳이 정말…….”기억 속의 세계는 무너졌다. 수많은 신과 인간이 죽었고, 끝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 익숙했다. 기억과 똑같아서 오히려 믿을 수 없었다.오르페온이 웃었다.“남아 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구나.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으니.”세이아가 즉시 물었다.“저곳이 정말 당신들이 말하는 첫 번째 세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오르페온의 은빛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는가?”“직접 본다고 해서 그것의 과거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보존된 일부일 수도 있고, 재현된 공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일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그들은 기억과 기록, 계약과 이름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오르페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싫다고 하면요?”아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검은 방에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의 벽에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가두고, 죽이고, 자신의 삶을 버렸던 장면들이 흐르고 있었지만 아이는 더 이상 그쪽을 보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세이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싫다고?”처음 들어 보는 말처럼 아이가 되물었다.“네.”세이아는 아이가 내민 손을 잡아 주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선택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 선택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은 아이였다.“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아이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거절은 존재하지 않는다.』가슴에 남아 있던 검은 계약이 즉시 대답했다. 아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 문장을 따라 말하면 됐다. 거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이아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할 때까지 이곳에 붙잡아 두면 된다고.그렇게 만들어졌다.그렇게 배웠다.그런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그건…….”작은 손이 떨렸다.“안 돼.”“왜 안 됩니까?”“그러면…….”아이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랑하는 신을 영원히 가둔다.』라는 문장이 심장 주위를 뱀처럼 감싸고 있었다. 세이아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면, 세이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순간 자신에게 무엇이 남는가.아이는 한참 뒤에야 겨우 말했다.“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잖아.”세이아의 눈빛이 흔들렸다.그제야 알았다.이 아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존재의 상실이었다.사랑받지 못하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하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세이아가 필요했다.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해도 된다는 증명을 세이아에게서 받아야 했기 때문에.“그래서.”아이가 다시 웃으려 했다. 하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둘만 남으면 괜찮아.”검은 사슬이 작은 몸을 더욱 단단하게 감쌌다.“다른 사람
“나는…… 누구야?”남쪽 폐허의 검은 거울 앞에서 이름 없는 아이가 처음으로 세이아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 순간, 가슴에 새겨진 계약이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사랑하는 신을 영원히 가둔다.』라는 문장은 대답 대신 아이의 심장을 더욱 단단히 휘감았고, 조금 전 생겨난 가느다란 균열 사이에서는 여전히 작은 글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아니야.』아이는 손끝으로 그 두 글자를 만졌다. 누가 쓴 것인지, 언제부터 자신의 안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숨이 조금 편해졌다. 반대로 세이아를 가져야 한다고, 카일을 없애야 한다고 속삭이는 문장이 강해질수록 가슴은 조여 왔다. 무엇이 자신이고 무엇이 새겨진 명령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세이아.”그래서 아이는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이번에는 데리러 오라는 명령도, 자신만 사랑하라는 요구도 아니었다.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싶어서.그러자 검은 거울이 크게 흔들렸다.우우웅―!꿈과 현실의 경계가 얇아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검은 거울 속으로 들어간 작은 손이 수면을 통과하듯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황실 성역에서 남쪽의 기척을 좇고 있던 세이아의 꿈이 강제로 열렸다.차가운 손가락이 세이아의 손목을 붙잡았다.“……!”세이아가 반사적으로 힘을 끌어올렸다. 보랏빛 빛이 손끝에서 터지기 직전, 꿈 너머로 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은빛 머리카락.보랏빛 눈.어린 얼굴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낯설면서도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눈매에서는 카일이 떠올랐고, 입술과 턱선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두 사람의 특징을 기억해 한 얼굴 안에 섞어 놓은 것처럼.세이아의 힘이 순간 멈칫했다.“당신은…….”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정체를 몰라 불안해하던 아이가 세이아를 마주하자마자 다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아낸 것처럼.“나를 알아보겠어?”“아니요.”아이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꿈의 연결을 따라
“절대로.”아이의 보랏빛 눈이 가늘게 휘었다.“놓치지 않을게.”남쪽 폐허의 가장 깊은 곳에서 두 번째 관이 완전히 열렸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돌뚜껑이 기이할 정도로 느린 소리를 내며 기울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묵직한 충격과 함께 수백 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 쌓였을 먼지가 피어올랐다. 아이는 그 한가운데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은빛 머리카락이 작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보랏빛 눈동자와 창백한 피부, 아직 어린 티가 선명한 얼굴. 그러나 가늘고 선명한 눈매는 기묘할 만큼 카일을 닮아 있었고, 입술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세이아를 떠올리게 했다. 둘을 아는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한 번쯤 숨을 삼켰을 만큼 노골적인 닮음이었다.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누군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인지, 기억을 재료로 삼은 것인지, 혹은 그들과 전혀 다른 이유로 닮은 것인지.아이 자신조차 몰랐다.아이는 관 가장자리를 짚고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맨발에 닿은 돌바닥의 냉기에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지만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기한 듯 한 번 더 발바닥을 바닥에 붙여 보는 순간, 발끝에서 검은 글자들이 퍼져 나갔다.『사랑하는 신을 영원히 가둔다.』문장은 아이의 발밑을 지나 폐허 전체로 번졌다. 그러자 죽어 있던 것처럼 잠잠했던 벽의 봉인들이 하나둘 빛을 내기 시작했다.『사랑은 떠나지 않는다.』『사랑은 거절하지 않는다.』『사랑은 영원히 곁에 머문다.』아이는 천천히 벽을 둘러봤다.“사랑.”처음 배우는 단어처럼 조심스럽게 발음했다.그런데 이상했다.단어는 처음인데.감정은 알고 있었다.세이아가 웃고 있었다.어디인지 모를 호숫가에서.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다른 장면에서는 세이아가 피를 흘렸고, 카일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또 다른 기억에서는 카일이 기억을 잃은 채 세이아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녀를 선택했고, 세이아는 자신을
“그리고.”아벨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을 관통한 검은 검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입가로 피가 흘렀지만, 조금 전까지 끊어질 듯 희미하던 심장 소리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씩,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듯 뛰었다.쿵.“하루로는…… 부족하군.”그 말을 들은 노아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졌다. 울고 있던 아이가 웃어야 할지 더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벨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살 거지?” 다급한 질문에 아벨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달랐다. 그 사실을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내려다봤다.“가능하다면.”“그렇게 말하지 마.”노아가 코끝을 훔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살고 싶다고 했잖아.”“그래.”“그럼 그걸로 해.”아벨의 붉은 눈이 조금 흔들렸다. 노아는 아직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살아갈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나는 노아가 된 지 얼마 안 됐어. 그래도 아직 할 게 많아.”노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밖에도 나가 보고 싶고, 음식도 먹어 보고 싶고, 왜 웃는지도 더 알고 싶고…….”잠시 고민하다 아벨을 바라봤다.“너도 하나씩 찾으면 되잖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응.”아벨은 그 말이 낯선 듯 오래 바라봤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검은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라시엘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주어진 문장은 언제나 죽여라, 지켜라, 기다려라, 깨어나라 같은 명령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살고 싶다.”아벨이 다시 말했다.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확인하듯.“그 다음은…… 아직 모르겠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어.”세이아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벨의 심장과 검을 이어 주던 검은 선에는 분명 금이 갔지만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