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는 온화하게 보이고자 하였다.그러나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그가 어떤 미소를 짓든, 아이들은 겁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그 아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주위의 아이들 역시 서로를 의지하며 잔뜩 겁먹은 눈빛으로 소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저쪽에서 이미 사탕을 사 온 이각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며 말했다.“그저 물어보는 것이니 겁낼 것 없다.” 사탕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아이들은 사탕을 손에 쥐자,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덜어낸 듯했다. “저는 호국에게서 들었습니다!”그러자 호국이 즉시 말했다. “민수가 가르쳐 줬습니다!” 그러자 민수가 대뜸 답했다.“저는 저 골목 어귀의 수준이한테 배운 겁니다!”보아하니 단번에 진상을 밝혀내기는 어려울 터였다.이각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일은 제가 사람을 시켜 퍼뜨린 자를 꼭 밝혀내겠사옵니다.” 소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담담하게 ‘그러거라’고 답했다.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떼지 못하더니 끝내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한 마디 내뱉었다. “다시는 부르지 말거라.”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소하도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더 이상 거리를 거닐 마음도 사라진 소하는 다시 마차에 올라 저택으로 향했다.그의 모친께서는 이미 저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하가 돌아오자, 소 씨 부인은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황제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어머니의 염려 어린 모습에 소하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답하였다. “그저 예전 일을 회상하였으니,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옵니다."그 말에 소 씨 부인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얼굴빛이 어딘가 좋지 않았다. 이를 알아차린 소하가 곧장 물었다. “혹시 다른 걱정거리라도 있으신 것이옵니까?”그러자 소 씨 부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하지만 당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며 핑계만 늘어놓을 뿐이었다.“내가 김단이를 그리 말한 것이 아니고, 모두 밖에서 떠도는 말들이니라…… 그만두자, 어차피 그런 유언비어는 내버려두면 이내 사라지는 법이니라.”“네. 신경 쓸 것 없습니다.”소하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조용히 덧붙였다.“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쉬겠습니다.” “그래, 그래, 어서 가서 쉬거라!” 소 씨 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허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갔다. 그가 멀어진 후, 그녀는 뒤편에 서 있던 나인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김단과 소하의 혼서를 가져와라. 김단의 생년월일을 베껴 법화사의 자은 법사께 보내어 궁합을 보도록 하거라.” 당시 혼인 전에 두 사람의 사주를 따져보지 않았던 것은, 황제께서 내린 혼인이었고 김단이 소하와 맺어지지 않았다면, 소한과 혼인해야 했으니, 사주 따위를 따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나도는 소문이 점점 흉흉해지니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명정 대군, 정암, 그리고 후부의 큰 마님까지 모두 과거 김단과 가까웠던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혹여 소하가 아니겠는가? 미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소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소 씨 부인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자은 법사는 득도하신 분이니, 만일 김단이 사주가 극히 강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혹여 이를 풀어낼 방도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하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잠시 문밖에 멈춰 섰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고서야 발걸음을 옮겼다.초여름의 볕은 제법 따가웠지만 다행히도 뜰에 자란 오동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잎들이 마치 커다란 우산처럼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고 있었다.무성한 가지와 잎이 커다란 우산처럼 퍼져, 뜨거운 볕을 온전히 가려주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에서 김단과 숙희는
“다음에 하도록 하오.” 소하는 김단의 말을 끊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 새벽부터 입궁하여 몸이 몹시 피로하오.” 김단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며,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소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오늘 이른 새벽에 떠나 이제야 돌아왔다. 황제와는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 아마도 심란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지금은 말을 꺼낼 때가 아님을 깨달은 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시지요.” 소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그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손안에 아직 복숭아씨를 꼭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각이 물을 떠와 소하의 손을 씻길 준비를 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혹 외부의 소문을 걱정하고 계시옵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님께서는 자주 외출하지 않으시니, 당장은 그 이야기들을 들을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소인이 최대한 빨리 해결하겠습니다.” 소하는 손을 씻고 말끔히 닦은 후에야 담담하게 답하였다. “그래. 이제 쉬어야겠으니 물러가거라.” 소하의 기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이각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자, 방안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소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밖은 여전히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방안은 어둡고 서늘했다.이 자리에서는 나무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김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조금 전 하려던 말을 소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자신이 우물 하나를 파자고 하면 숙희는 틀림없이 손뼉을 치며 당장이라도 사람을 불러 공사를 시작하자고 했을 터였다. 김단 역시 환한 얼굴로 우물에 어떤 과일을 넣을지 즐겁게 고민했을 터이다. 적어도 방금 전처럼 그런 표정들은 아니었다. 숙희와 김단은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기색이었다. 소하는 그 모습이 낯설고 불편했
소하는 곁에 서 있던 이각에게 시선을 보냈다.겉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담담한 눈빛이었지만 이각은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유 대인께서는 도련님께서 5년 동안 다리를 쓰지 않으셨으니, 갑작스레 회복되면서 몸이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매일 꾸준히 마사지를 해 주어야 한다 하시더이다.”물론, 그 마사지는 부인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었다. 소하와 이각의 말을 들은 소씨 대감과 소씨 부인의 얼굴에 서려 있던 걱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김단 또한 유 대인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래도 의원에게 한 번 더 물어보는 것이 더 안심될 것 같았다. 더욱이, 마사지를 한다면 혹 의원에게 특별한 기술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에 잠긴 김단을 본 소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낭자, 어제 나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이오?”“네?”김단은 순간 당황했다.소하의 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별일 아니옵니다. 우선 요양에만 신경 쓰시지요.”소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우선 시간을 벌고, 그동안 방법을 찾아 떠나려는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접도록 할 심산이었다.소씨 대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마도 어제 궁에 다녀온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구나. 다리가 이제 막 회복되었는데 그리도 오래 걸었으니 무리가 갔을 터. 김단의 말이 옳다. 너는 우선 몸을 잘 돌보아야 하느니라.” 소씨 부인 또한 그 말에 수긍했으나, 여전히 마음속 불안이 가시지 않는 듯하였다. 어머니의 근심을 알아차린 소하는 어제 그녀가 품었던 걱정을 떠올렸다. 혹 이 일을 김단과 연관되었다고 의심이라도 하면 안 되었기에 그는 한층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아미타불.” 소미는 눈앞의 사내를 향하여 두 손을 합장하고 공손히 예를 올렸다. “소 장군을 뵙나이다.” 소한 역시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소미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자은 법사의 명을 받들어 장군부로 서찰을 전하러 가는 길이옵니다.” “본 장군도 마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하오?” 소한은 한없이 온화한 말투로 말하였다.소미는 소한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살가운 태도는 처음 보는 바였다. 내심 의아함이 일었으나, 마침 같은 길이기도 하니 동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법화사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다리도 이미 뻐근하였기에 예를 올리고는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은은한 향이 피워져 있어, 편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찰의 향불 냄새보다 훨씬 기분 좋은 향이었다. 소미는 그리 생각하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으나, 이내 나른함이 엄습해 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더니, 결국엔 이기지 못하고 러지 듯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소한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소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보게?” 두어 번 불러 보았으나, 소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소한은 손을 들어 향로를 집어 마차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소미의 품을 뒤져 서찰을 찾아내었다. 봉투를 열어 펼쳐 보니, 과연 자은 법사가 친필로 적어 내린 명서가 맞았다. 서찰에는 단 한마디 불길한 말도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김단이 부귀와 번영을 누릴 팔자라 적혀 있었다. 소한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 수레 가림막에 머물렀고, 깊은 눈빛 속에 조소가 스쳤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서찰을 구겨 작은 종잇조각으로 만들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하고는 미리 준비해 둔 서찰을 꺼내, 자은 법사의 필체를 본떠 적은 명서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소미가 눈을 떴을 때, 소한 역시 옆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든 듯하였
매년 자은 법사가 친히 쓴 경문을 볼 수 있었으니, 자은 법사의 필적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더욱이, 방금 그 소미라는 승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승려는 자은 법사의 곁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고, 지금까지 10년을 넘게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서찰은 그 승려가 직접 그들의 손에 전달한 것이니, 어떠한 위조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확실히 천살고성이라 했다. 어쩌면, 그녀가 궁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마님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명정 대군과 혼인을 약속한 뒤, 명정 대군이 죽고, 곧이어 임씨 큰 마님까지 돌아가셨다. 하물며 그녀와 애매한 관계였던 정암까지 죽었다... 그럼 소하는 어찌 된단 말인가? 그는 김단과 부부가 된 몸인데 말이다! 옆에 있던 나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도련님의 다리는 아씨께서 치료하신 것이 아니 옵니까?” 소씨 부인의 마음도 복잡했다. “그래, 김단이 치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도 따로 방을 쓰고 있지 않느냐! 만약 정말로 부부의 연을 맺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일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각방을 쓴다는 것은 아직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다.만약 진정으로 함께 밤을 보내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길이 없었다.소하에 대해 주명희는 단순한 모성애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세상을 떠난 언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소하만큼은 지켜야 했다.수 나인 역시 그런 소씨 부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그렇다면 아씨의 처소를 따로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후에 방도를 알아보시지요. 불교에 해결책이 없다면, 도교에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두 줄의 글귀만 보고 아씨를 내쫓으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씨는 저희 소 씨 가문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김
소하는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시녀는 소하를 보자마자 급히 예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부인님께서는...”“모친께는 내가 친히 말하겠다.”소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런데도 시녀가 여전히 물러설 기색이 없자, 그는 고개를 들어 시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서히 차가운 기운이 서리자, 시녀는 저절로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친히 바래다주어야겠느냐?” 흠칫 놀란 하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물러났다.겁에 질려 도망치는 시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고는 소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나가시면 어머님께서 마음이 상하실 것이옵니다.”소하가 어찌 어머니의 의도를 모를 리 있겠는가?그녀의 모든 결정은 결국 그를 위한 것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단의 마음을 상하게 둘 수는 없었다.“내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실 것이오.”김단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하의 다리를 치료해야 하므로,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소하의 다리가 완전히 나은 후에는 떠날 것이니 상관없었다.어머니께서 언짢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하는 김단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숙희는 왜 보이지 않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의 부탁으로 신의께 서신을 전달하러 갔습니다.”그 말에 소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숙희는 이제 떠도는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왜 그녀의 처소를 옮기려고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을 것이었다.게다가 신의께서 소하가 다리를 못 쓰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거짓을 말한 소하에게 분명 실망할 것이다.그러
운명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소하의 목소리.“낭자.”김단은 소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그는 우뚝 서 있었다. 간혹 늘어지는 수양버들 가지가 그의 얼굴을 자꾸만 가리려 했다. 김단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레졌다. “오라버니 다리가, 이게 대체 어찌…” “내가 속였소.”소하는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이마에도 미묘한 미안함이 스쳤다. “미안하오.”김단의 미간도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속이신 겁니까? 설마 어제 궁에 다녀온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독을 탄 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걱정되셨던 겁니까?”그녀는 계속해서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소하의 대답은 마치 벼락처럼 김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김단은 잠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소.”“어제,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대 말을 잘랐소.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리가 낫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했소. 미안하오.”그는 또다시 사과를 건네며 김단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소하도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리도 서툴고도 어설픈 거짓말이 어찌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막 사랑을 깨달은 소년이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이라면 모를 일이었다.그는 김단이 분명히 그를 비난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김단은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소하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소하의 “떠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