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재헌]
"애월 쪽 목공방입니다."
휴대폰 메모를 읽었다. 백 실장이 새벽에 보낸 것.
"세라 씨 카드가 지난주 그 근처 약국에서 한 번 쓰였습니다. 공방 주인 서진우. 서른하나."
그녀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서진우."
"아는 이름입니까."
"작년 겨울에 언니가 한복집 왔을 때. 저고리 품 줄이러요. 휴대폰 보면서 혼자 웃길래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무 깎는 사람, 하고 말았어요."
"그럼 그 사람한테 간 거군요."
"근데 왜 그날이에요?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한 달 전에도 말할 수 있잖아요. 왜 입장 사십육 분 전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있었다. 하기 싫었다. 형의 웃음이 대답이었으니까.
"당장 가요."
"오늘은 안 됩니다. 오후에 상담 두 건 있잖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냉장고에 붙어 있더군요. 주간 일정표."
그녀가 냉장고를 돌아봤다. 봄빛 로고 자석 밑에 그녀 글씨의 일정표. 이사 온 첫 주에 붙인 것. 매일 아침 물 꺼낼 때 읽었다. 월요일 상담 둘. 화요일 휴무. 목요일 공란. 이 집 냉장고에서 제일 읽을 만한 문서다.
"목요일이 비어 있죠. 목요일 비행기, 금요일 저녁 귀경. 토요일 예식엔 지장 없게."
"그쪽 회사는요."
"이틀은 백 실장이 막습니다."
그녀는 반박할 말을 찾다가 그만뒀다.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썼다.
[언니. 나 목요일에 갈게. 도망가지 마.]
읽음 표시는 뜨지 않았다.
[채이]
화요일. 자문 첫날.
연회팀 사무실은 그랜드볼룸 뒤편 좁은 복도 끝이었다. 윤 팀장이 창가 책상 하나를 비워 줬다. 책상 위에 이름표. 흰 플라스틱, 검은 글씨. 연회 자문 하채이.
명찰이 하나 생겼다. 봄빛 명찰은 결혼식 날 이후로 못 봤다. 어디 뒀는지 모르겠다. 누구 주머니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자문님. 올해 연회 예약 전부입니다. 취소된 것까지. 궁금하다고 하셔서."
두꺼운 파일 세 권.
"감사해요. 오늘 다 볼게요."
"다요?"
"봄빛에서도 새 시즌 전엔 작년 장부부터 다 봐요. 어디서 사고 났는지 알아야 올해 안 나니까."
윤 팀장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난주까지 그 눈은 부사장 부인을 보는 눈이었다. 지금은 옆 팀 경력직을 보는 눈이다. 승진이다. 월급은 그대로지만.
점심은 조건대로 직원식당. 오늘은 고등어조림이었다. 반장님이 가운데 토막을 얹으며 투덜댔다.
"제육은 격주야, 채이 씨. 이번 주는 생선이고."
"그럼 다음 주도 꼭 와야겠네요."
"오지 마. 도련님이 질투해."
반장님은 혼자 깔깔 웃었다. 옆 테이블 지호가 사레가 들렸다. 나는 고등어 가시를 발랐다. 질투라는 단어는 가시처럼 빼서 접시 가장자리에 올려 두었다.
오후 내내 파일을 넘겼다. 취소된 연회마다 빨간 포스트잇. 다섯 시쯤 파일 세 권이 빨간색으로 삐죽삐죽해졌다. 고슴도치 세 마리.
"왜 이렇게 많이 취소됐는지, 보이십니까."
"조금요. 대부분 하객 수예요. 로즈룸도 최소 백 명부터죠. 요즘은 오십 명짜리 식이 제일 많은데, 그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요."
윤 팀장이 수첩을 꺼내 뭔가 적었다. 백 실장이랑 똑같은 손짓. 이 호텔 사람들은 중요한 말을 들으면 수첩을 꺼낸다. 봄빛 사람들은 무전기를 꺼낸다. 문화 차이다.
[재헌]
화요일 저녁 여섯 시. 윤 팀장이 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파일 세 권을 안고.
"부사장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책상에 파일을 내려놓았다. 빨간 포스트잇이 사방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고슴도치 같았다.
"자문님이 오늘 하루에 다 보셨습니다. 취소된 연회마다 이유를 적어 두셨어요."
한 권을 펼쳤다. 포스트잇마다 그녀 글씨. 동글고 빠른 글씨.
[하객 80명 → 로즈룸 최소 100명. 못 맞춰서 취소.]
[금요일 저녁 7시. 로즈룸 빔. 이날 문의 두 건 있었는데 둘 다 인원 미달.]
[신부 어머님이 떡 문의. 외부 떡 반입 불가로 취소. 아까움.]
마지막 포스트잇에서 멈췄다. 아까움. 보고서에 감정을 적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상하게 그 단어가 제일 정확했다.
"자문님 말로는 오십 명짜리 식이 갈 데가 없답니다. 제가 십오 년 연회를 했는데, 그걸 파일 세 권으로 하루 만에 보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윤 팀장."
"네."
"외부 떡 반입 불가. 그 규정, 누가 만들었지."
윤 팀장이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습니다. 원래 있었습니다."
"다음 달부터 없애."
윤 팀장이 수첩을 꺼냈다. 적었다. 나가다 말고 돌아봤다.
"자문님이 퇴근하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고등어가 맛있었다고. 제육은 다음 주라고."
문이 닫혔다. 빨간 포스트잇 하나를 떼어 냈다. 아까움. 그걸 지갑에 넣으려다 멈췄다. 지갑 안쪽 칸엔 이미 그녀 이름이 하나 들어 있다. 두 개는 과했다. 도로 붙였다.
[채이]
수요일 오후. 봄빛 로비. 상담 테이블에서 예비부부에게 도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신랑이 하객 수를 세 번째로 바꾸던 참이었다.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채이!"
큰어머니. 오늘은 베이지 투피스. 뒤에서 큰아버지가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붙잡힌 채 끌려오는 쪽이 큰아버지였다.
"잠깐만 은비 매니저가 이어서 봐 드릴게요."
은비가 어디선가 나타나 앉았다. 오 년 같이 뛴 사람의 속도다.
큰어머니를 로비 구석 소파로 모셨다. 원장님이 사무실 창으로 내다봤다.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로비 구석 소파. 봄빛에선 거기를 «양가 대기실»이라고 부른다. 식 전에 사돈끼리 한판 붙을 것 같으면 거기로 모신다. 사람 눈이 덜 닿는다.
"네가 요즘 아주 살 만하지? 호텔 드나들고, 복주머니 돌리고, 갈라 나가고."
"큰어머니, 여기 제 일터예요. 손님 계세요."
"그 손님 앞에서 말해 볼까? 네가 누구 자리를 차고 앉았는지."
"여보, 그만해."
"당신은 가만있어요!"
큰어머니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정석푸드 도원호텔 납품 제안서. 세라 결혼하면 들어가기로 했던 거. 식자재 전부. 그런데 네가 그 자리 들어가고 나서 연락이 딱 끊겼어. 네가 막은 거 아니야?"
"저 그런 거 몰라요. 오늘 처음 들어요."
"모르긴!"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상담 테이블의 예비 신부가 움찔했다. 은비가 그 앞에 도면을 더 크게 펼쳤다. 우리 홀 도면은 A3다. 얼굴 하나쯤은 가린다.
안전핀을 열었다 닫았다. 딸깍. 목소리를 낮췄다.
"큰어머니. 그건 언니가 결혼해서 생기는 거였어요. 언니가 그걸 두고 간 거예요. 트렁크 하나 들고, 비상계단으로. 제가 뺏은 게 아니라 언니가 버린 거예요."
"너, 너."
"그리고 저 그 납품, 부탁 못 해요. 제가 부탁하면 장사가 아니라 떼쓰는 거예요. 정석푸드가 좋으면 입찰로 들어가세요. 그럼 저도 응원할게요."
큰어머니가 봉투를 낚아챘다.
"두고 봐. 세라 돌아오면 너 그 자리 한 달도 못 가."
구두 소리. 유리문이 쾅.
큰아버지는 따라 나가지 않았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네 큰어머니가 요새 잠을 못 자. 회사가 좀 어렵다. 세라 결혼만 보고 있었거든."
큰아버지가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모았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아빠 손이랑 똑같이 생겼다. 한복집 막내아들이던 시절의 손.
"네 아빠한텐 말하지 마라. 형이 동생 딸한테 이러고 다닌다고."
"안 할게요."
"그리고. 세라, 찾으면. 밥은 먹고 다니는지만 알려 다오."
나가는 뒷모습이 결혼식 날 계단에 앉아 있던 아빠 등이랑 닮아 있었다. 형제는 등으로 닮는다.
상담이 끝나고 은비가 옆에 털썩 앉았다.
"미안. 상담 망쳤지."
"아니. 계약했어. 신부가 그러더라. 저 매니저님은 싸우는 것도 조용하게 싸우신다고. 자기 시어머니도 좀 저러시는데 든든하겠다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게 새어 나왔다.
"근데 나도 할 말 있어. 도경 오빠가 반지를 샀어. 차 콘솔박스에 있더라. 영수증까지. 내가 본 걸 오빠는 몰라. 그래서 모르는 척하는데, 언제 할지 몰라서 매일 화장하고 다녀. 오늘로 열하루째."
은비 얼굴을 봤다. 정말 풀메이크업이었다. 속눈썹까지.
"……고생이 많다."
"그러니까. 너는 좋겠다. 청혼 없이 바로 식장이잖아."
은비가 아차 하는 얼굴이 됐다. 괜찮다고 어깨를 툭 쳤다.
그런데 그 말이 저녁까지 남았다. 청혼 없이 바로 식장. 그날 들은 말은 청혼이 아니었다. 당신이 서요. 급한 부탁이었다. 급한 부탁도 부탁이긴 하다. 1년짜리한테 청혼까지 바라는 건 과한 주문이다. 알면서도 조금 억울한 나 자신이 웃겼다.
[채이]
밤 열한 시. 침대에 누워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064로 시작하는 번호.
제주.
벌떡 일어나 받았다.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 그리고 멀리서 파도 같은 소리.
"……언니지."
"채이야."
코 막힌 목소리. 오래 운 목소리.
"괜찮아? 밥은? 어디 아파?"
"나 괜찮아. 진짜야. 진우 씨가 밥 해 줘."
"그 사람이 서진우야? 목요일에 갈 거야. 도망가지 마."
파도 소리가 조금 커졌다.
"미안해. 네가 드레스 입은 사진 봤어. 내 드레스. 등 뒤가 좀 떴더라."
"안전핀 일곱 개 꽂았어."
언니가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너답다, 진짜."
"하나만 물어볼게. 왜 그날이었어? 말을 하지. 한 달 전에라도."
"……말하려고 했어. 몇 번이나. 근데 엄마가."
언니가 멈췄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에, 누가 그랬어. 지금 아니면 평생 못 간다고. 계단 문 열어 둘 테니까 가라고. 표도 다 끊어 놨다고."
휴대폰을 꽉 쥐었다.
"누가."
"그건."
뚝.
바로 다시 걸었다. 신호만. 다섯 번째에 꺼져 있다는 안내.
휴대폰을 든 채 방을 나왔다. 서재 문 아래로 불빛. 노크도 없이 열었다.
[재헌]
문이 열렸다. 그녀였다. 잠옷에 맨발. 얼굴이 하얬다.
일어섰다.
"언니가. 그날 누가 등을 떠밀었대요. 계단 문 열어 둘 테니 가라고. 표도 다 끊어 놨다고."
문장이 머리에 들어오는 데 일 초. 이해하는 데 이 초. 인정하는 데는 그보다 오래 걸렸다.
형이다.
책상 위 휴대폰을 집었다.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백 실장. 늦게 미안해. 목요일 비행기, 제일 이른 걸로. 공항에서 공방까지 차도 하나."
끊었다. 그녀를 봤다. 맨발이었다. 서재 바닥은 차다.
"옷 챙기세요. 내일 제주 갑니다."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