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채이]
수도를 잠갔다. 언니 손을 잡은 채 화장실 바닥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 타일이 차가웠다. 봄빛 직원 화장실은 난방이 안 된다. 원장님은 이십 년째 고친다고 하신다.
"언니. 숨부터. 나 따라 해. 들이쉬고. 내쉬고."
세 번쯤 하자 언니 어깨가 내려갔다.
"이제 말해 봐. 천천히. 뭐가 있는지부터."
"뭐가 있는지?"
"식장에서 사고 나면 그렇게 해. 소리 지르기 전에 뭐가 남아 있는지부터 봐."
언니가 코를 훌쩍이며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 휴대폰에서 몰래 찍었어. 엄마 링거 맞고 자는 동안."
은행 앱 화면을 찍은 사진. 입금 내역. 보낸 사람 이름이 법률사무소였다. 그 대리인의 사무실.
금액을 봤다. 숫자를 두 번 셌다. 한복집에서 평생 바느질을 해도 만지기 힘든 돈.
"이 돈만 돌려주면 돼?"
"응. 근데 돌려줄 돈이 없어. 아빠 회사는 그 돈 없으면 다음 달에 문 닫아."
휴대폰을 돌려줬다.
"내일 한복집 와. 큰아버지랑 같이. 아침 여덟 시."
"한복집?"
"응. 인두 데우는 시간."
[채이]
일요일 여덟 시. 하가네 한복집은 셔터를 끝까지 내렸다.
가게 안에 사람이 꽉 찼다. 작업대 한쪽에 아빠와 엄마. 맞은편에 큰아버지와 언니. 나는 옷감 두루마리 옆 플라스틱 의자. 재헌 씨는 가게 밖. 집안 얘기라고 내가 부탁했다. 셔터 틈으로 그의 구두 끝만 보였다. 반들반들했다. 실밥 날리는 동네에선 눈에 띄는 구두다.
큰어머니는 안 왔다. 아직 누워 있다고.
언니가 휴대폰 사진을 작업대에 놓았다. 큰아버지가 봤다. 한참.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이걸 미경이가."
"응. 아빠 몰래."
큰아버지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다리미 받침에서 김이 올라와 천장 쪽으로 흩어졌다. 풀 먹인 옷감 냄새가 났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빠가 일어났다.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 소리. 나왔다. 손에 파란 통장.
통장이 작업대 위, 사진 옆에 놓였다.
"형. 이거 써."
"……정호야."
"채이 결혼 자금이야. 애 스무 살 때부터 부었어. 한 달에 조금씩."
옷감 두루마리 옆에서 굳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엄마를 봤다. 엄마는 알고 있었다는 얼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빠."
"쓸 데가 없어졌어. 채이는 결혼했으니까."
아빠가 나를 안 보고 말했다.
"양복도 사 뒀는데 못 입었고. 식장도 못 골랐고. 한복도 내가 못 지어 줬고. 그러니까 이 돈도 쓸 데가 없어."
엄마가 앞치마로 눈가를 눌렀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셔터 틈 너머의 구두 끝이 한 걸음 움직였다가 멈췄다.
"다 합쳐도 모자랄 거야. 나머진 형 아파트 줄이든지 해. 형이 한복집 나갈 때 그랬잖아. 바느질로는 사람 못 산다고. 형 말 맞아. 근데 형 딸 입 막으려는 놈한테 빚지고 사는 것보단, 한복집 동생한테 빚지는 게 나아."
큰아버지가 통장을 봤다. 손을 뻗지 못했다.
"……내가 무슨 낯으로."
"낯은 무슨. 형 낯은 어릴 때부터 실밥투성이였어."
아빠가 통장을 큰아버지 손 밑으로 밀었다.
"대신 조건 있어. 세라, 식은 봄빛에서 해. 한복은 내가 지어. 그 제주 총각이랑."
언니가 소리 내 울었다. 큰아버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가 두 사람 앞에 휴지 상자를 내밀고 셔터 쪽으로 소리쳤다.
"강 서방! 들어와요! 문 앞에서 떨지 말고!"
셔터가 반쯤 올라갔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안에 있는 사람이 전부 울고 있었다. 그는 어디 서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옷감 두루마리 옆, 내 곁에 섰다. 도원그룹 후계자의 자리 배치로는 최악이었다. 나한텐 최선이었다.
[재헌]
옷감 두루마리 옆 낮은 걸상에 앉았다. 생각보다 단단했다.
작업대 건너편에서 장인이 나를 봤다. 결혼식 뒤로 처음 눈이 마주쳤다.
"자네."
"네, 아버님."
"자네는 돈 내지 말게."
입을 열려다 닫았다. 휴대폰에 백 실장이 보낸 숫자가 떠 있었다. 정석푸드 은행 빚 전액. 오늘 아침까지 그 숫자를 보고 있었다. 들켰다. 어떻게 들켰는지 모르겠다. 이 집 사람들은 다 그렇다. 안 보고도 안다.
"이건 우리 집 일이야. 자네가 돈 내면 우리 형은 평생 자네 앞에서 고개를 못 들어. 채이도 그렇고."
"……네."
장인이 다듬이 방망이를 들었다. 다듬잇돌 위에 개어 둔 무명을 폈다. 탁, 탁.
"그리고. 우리 채이, 식장 두 번은 없게 하게."
탁, 탁.
대답했다. 방망이 소리에 묻히지 않게 또박또박.
"한 번 더는 있게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걸로."
방망이가 공중에서 멈췄다. 장인이 나를 봤다. 옆에서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장모님이 휴지를 뽑다 말았다.
장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망이를 내리쳤다. 탁. 아까보다 훨씬 셌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싫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싫으면 이 집 사람들은 방망이를 내려놓는다.
[채이]
돌아오는 차. 오늘은 그가 직접 몰았다. 신호가 세 번 바뀐 뒤에 물었다.
"아까 그거요. 한 번 더는 있게 하겠다는 거. 제대로 된 걸로."
핸들을 쥔 손가락이 한 번 오므라들었다 펴졌다.
"……아버님 방망이가 무서워서 한 말입니다."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네."
"그럼 거짓말이에요, 아니에요?"
대답 대신 깜빡이. 차가 레지던스 쪽으로 꺾어졌다. 귀 끝이 빨갰다.
"……대답 안 하는 건 거짓말 아닙니다."
"그건 누가 정했어요."
"방금 제가요."
창에 이마를 댔다. 입김이 서렸다. 1년짜리 남편이 1년 뒤의 식 얘기를 했다. 방망이가 무서워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알아서 더 묻지 않았다. 약속이 종이였다면 조항을 뒤져 봤을 것이다. 말이라서 다행이었다. 말은 뒤질 데가 없다.
수요일 밤. 큰어머니 전화. 삼 초 망설이다 받았다.
"……여보세요."
한참 아무 말도 없었다. 텔레비전 소리만.
"호박죽."
쉰 목소리.
"병원에 두고 간 거. 너희 엄마가 쑨 거지. 간이 딱 너희 할머니 간이더라. 내가 시집와서 처음 먹은 죽이 그 간이었어."
대답하지 못했다. 큰어머니도 더 말하지 않았다. 뚝.
고맙다도 미안하다도 없었다. 그런데 끊긴 휴대폰을 한참 귀에 대고 있었다. 호박죽 간 얘기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을 리 없다. 그건 큰어머니 식의 다른 말이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 번역이 필요하다. 나도 그 집안 사람이다. 나도 번역이 필요한 말을 자주 한다. 괜찮아, 같은.
[재헌]
수요일 저녁. 할머니 전화. 요즘 할머니는 나보다 그녀 소식을 먼저 안다.
"한복집에서 통장이 나왔다더구나."
"……어떻게 아십니까."
"네 작은고모 계모임 사람들 한복을 네 장모가 다 손봐 준다. 거기서 들었다."
세상은 바느질로 이어져 있다. 도원그룹 정보망보다 빠르다.
"둘째가 딸 시집 밑천을 형한테 내줬다고."
"네. 저는 돈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잘 들었구나."
할머니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 집 둘째는 제 어미를 닮았다. 바느질삯 안 받는 거. 사십 년 전에 나한테도 그랬지. 복주머니 삼백 개를."
"사십 년 전이요? 호텔 문 열 때 말입니까."
"그래. 개관 연회 날."
"나중에 말해 주마. 그 아이한테 먼저 할 얘기다."
끊겼다. 할머니는 늘 반만 말하고 끊는다. 나머지 반은 기다리게 만든다. 그 방식으로 그룹을 사십 년 끌어오셨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은행 앱을 지웠다. 백 실장이 보낸 숫자도. 내지 말라고 한 돈의 숫자를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 내게 된다. 나는 나를 안다.
[채이]
목요일 오후 세 시. 봄빛 1층 로비.
두 번째 회견 장소는 언니가 정했다. 봄빛. 원장님은 전화로 그 부탁을 듣고 오 초 뒤에 대답했다. 로비 의자 서른 개면 되겠니.
나는 모자 없이 무전기를 차고 계단 옆에 섰다. 봄빛 매니저로서. 그가 옆에 섰다.
언니가 로비 계단 앞에 섰다. 탁자도 마이크도 종이도 없었다. 흰 셔츠, 대충 묶은 머리. 제주 마당의 얼굴. 맨 앞줄에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없었다.
"하세라입니다. 지난주 회견은 끝내지 못했습니다. 오늘 끝내겠습니다."
숨을 한 번.
"저는 도망쳤습니다."
기자들이 웅성였다.
"누가 문을 열어 준 건 맞습니다. 하지만 걸어 나간 건 저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끝까지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일 비겁한 방법으로 떠났습니다. 결혼식 사십육 분 전에요."
언니가 나를 봤다.
"그날 제 자리에 선 건 제 사촌 동생입니다. 이 예식장 매니저예요. 동생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어요. 제가 버린 식을 주워서 끝까지 치러 줬어요. 드레스 등 뒤를 안전핀 일곱 개로 여미고요. 제 동생이 저를 살렸어요. 그리고 이 예식장도요."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누굽니까?"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증거가 제 말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흰 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분 쪽에서 저희 집에 보낸 돈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전액 돌려보냈습니다. 이건 이체 확인증이에요. 저희 작은아버지가 한복집 하시는데, 그 바느질삯으로 갚았습니다."
누군가 웃었다. 웃음이 번졌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봄빛 로비에 오래 앉아 본 사람들이 웃는 웃음.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언니 옆으로 걸어 나갔다. 손을 잡았다. 기자석 누군가 중얼거렸다. 신부가 둘이네.
언니가 귀에 속삭였다.
"나 양 갈래 머리 기억 나? 그거 갚은 거다."
웃으면서 울었다. 오늘은 화장이 번져도 괜찮았다.
회견이 끝나고 로비 탁자에 대바구니가 놓였다. 아빠와 엄마가 밤새 지은 답례품이었다. 자투리 비단 복주머니. 기자들 몫까지 서른 개. 안에는 엄마가 사탕을 한 알씩 넣었다. 기자들이 하나씩 들고 나갔다. 복주머니를 받아 든 사람은 기사를 험하게 못 쓴다. 우리 아빠의 오래된 영업 비밀이다. 삼십 년 동안 동네 반상회에서 검증됐다. 오늘 기자단에서도 통하는지는 저녁 기사 제목이 말해 줄 것이다.
그날 저녁 기사.
[원래 신부 하세라 "제가 도망쳤습니다… 동생이 저를 살렸다"]
[바느질삯으로 갚은 돈… 봄빛웨딩홀 로비의 두 번째 회견]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도 사무실 전화는 울렸다. 이번엔 취소가 아니었다. 원장님이 파란 볼펜으로 한 줄씩 적었다. 은비가 셌다. 하나, 둘, 셋.
[재헌]
밤 아홉 시. 문자 한 통. 저장된 이름, «형».
[재밌네. 그럼 다음 카드.]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