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헌]
토요일 밤 아홉 시 반. 봄빛 지하.
버려도 되는 옷을 입고 왔다. 회색 티셔츠,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앞치마. 채훈 이름에 줄 두 개, 강 한 글자.
그녀가 나를 보고 웃음을 참았다. 은비 씨는 참지 않았다. 준수 씨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그녀 눈빛에 내렸다.
창고 문이 열리자 먼지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형광등 두 개 중 하나만 켜졌다. 철제 선반 네 줄. 선반마다 누런 상자. 상자마다 매직 글씨. 연도 대신 권수가 적혀 있었다. 1권부터 예순한 권.
재채기가 나왔다. 세 번.
"그러니까 버려도 되는 옷 입고 오랬잖아요."
"입었습니다."
"코는 못 버리잖아요."
탁 실장님이 김밥 네 줄을 들고 내려왔다. 폐백 이모님이 보리차 주전자. 은비 씨가 신문지를 바닥에 깔았다. 창고 한가운데 소풍 자리가 생겼다.
"먼저 먹고 해. 먼지 먹기 전에 김밥 먹어."
탁 실장님 말에 다들 신문지에 앉았다. 나도 앉았다. 도원그룹 부사장이 예식장 지하 창고 신문지 위에서 김밥을 먹는다. 기자들이 알면 제목을 뭐라고 뽑을지 잠깐 생각했다. 실 라인이 막아 줄 것이다.
김밥은 계란이 두꺼웠다. 맛있었다.
"실장님, 이거 봄빛 메뉴입니까."
"아니. 우리 집 메뉴. 마누라가 쌌어."
폐백 이모님이 보리차를 따르며 한마디 했다.
"도망갔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싼 게 이 김밥이야. 탁 씨가 계란 두껍게 좋아하거든."
탁 실장님이 헛기침을 했다. 이십 년 된 부부의 한 줄짜리 고백을 김밥과 같이 삼켰다.
[채이]
열 시. 원장님이 계단 위에서 내려다봤다. 내려오지는 않았다. 무릎이 안 좋아서 지하 계단은 못 내려오신다.
"맨 앞 스무 권은 우리 시어머니 거야. 조심해서 넘겨."
"시어머님이 원장이셨죠."
"그래. 그 양반이 장부를 그렇게 썼어. 식 끝나면 밤에 불 켜 놓고 한 줄씩. 신부 이름 옆에 뭐든 하나씩 적었어. 울었는지, 웃었는지, 뭘 먹었는지. 내가 시집와서 물었지. 어머니, 그런 걸 왜 적어요. 돈 받은 거만 적으면 되지."
"뭐라고 하셨어요."
"돈은 은행이 적어 준다. 사람은 우리가 적어야 한다."
원장님이 난간을 잡은 손을 폈다 오므렸다.
"나는 그 말 반만 지켰어. 뒤로 갈수록 여백 메모가 줄어. 바빠서. 너 오고 나서 다시 좀 늘었고."
원장님이 올라갔다. 계단 삐걱이는 소리가 멀어졌다. 사람은 우리가 적어야 한다. 그 말을 수첩 맨 앞장에 적었다. 이백열세 번째 상견례보다 앞에.
[채이]
열 시 반. 작업 시작.
상자를 하나씩 내렸다. 장부는 두꺼운 공책이었다. 표지가 천으로 싸인 것도 있고, 은행 달력 뒷면을 묶은 것도 있었다. 앞쪽 스무 권은 원장님 시어머니 글씨. 세로로 쓴 한자 섞인 글씨. 그다음부터 원장님 글씨. 둥글고 크다.
날짜, 신랑 신부 이름, 하객 수, 음식, 한복. 그리고 칸 밖 여백에 작은 메모.
[신부 긴장 심함. 청심환.]
[신랑 아버지 술 과함. 폐백 전에 꿀물.]
[비 옴. 우산 서른 개 빌려줌. 스물두 개 돌아옴.]
[신랑 친구들 축가 음 이탈. 신부 할머니 박수. 다들 따라 박수.]
[정전 이십 분. 촛불 예식.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
[신부 아버지가 신부보다 먼저 입장해 버림. 다시 나감. 하객 웃음. 아버지 귀 빨개짐.]
"야, 이거 봐.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은비가 장부를 들어 보였다. 준수가 다가와 찍었다.
"누나, 이거 날짜 보니까 태풍 온 날이에요. 이 날 식이 세 건인데 세 건 다 촛불로 했대요."
"원장님 시어머니 대단하시다. 촛불을 어디서 구했지."
"여기 적혀 있어요. 옆 성당에서 빌림. 초 백이십 개. 돌려줄 때 성가대 가운 단 수선."
성가대 가운 단 수선. 하가네다. 그 시절 이 홀에 바늘 들고 드나든 집은 우리뿐이었다. 우리 할머니 바느질이 초 백이십 개 값이 됐다. 이 홀에선 바느질이 화폐다.
은비가 한 줄 읽을 때마다 웃었다. 준수는 휴대폰으로 한 장씩 찍었다. 원본 보관. 그 애 입버릇이다. 예순한 해 치 원본. 휴대폰 용량이 버틸지 걱정이었다.
나는 한복 칸을 봤다. 앞쪽 장부 한복 칸엔 거의 다 같은 이름이 있었다. 하가네. 폐백 한복 한 벌 대여, 혼주 치마 단 수선, 원삼 고름 교체. 그리고 가끔 여백에 다른 글씨. 작고 급한 글씨. 획 끝이 위로 튄다.
[하가네: 고름 새로 달아 드림. 신부 어머님 우셔서.]
[하가네: 삯 반만. 신랑 집 형편.]
손끝이 멈췄다. 우리 할머니 글씨다. 한복집 치수 공책에 적힌 메모랑 같은 글씨. 할머니는 폐백 한복을 대러 와서 봄빛 장부에 몰래 한 줄씩 보탰다.
"은비야. 이 홀 바느질삯 절반은 우리 할머니가 안 받았나 봐."
"그러니까 너희 집이 부자가 안 된 거야."
"맞아. 그래서 내가 예식장 다니잖아."
[재헌]
열한 시 반. 그녀 옆에서 3권을 넘겼다. 오래된 종이 냄새. 먼지. 조금 곰팡이.
한 줄에서 손이 멈췄다.
[강 씨·홍 씨 혼례. 신부 한복 솔기 터짐. 하가네 새댁이 흰 실로 꿰맴. 신부 울음 그침. 하객 스물여덟.]
홍 씨. 홍옥란. 할머니.
오십구 년 전. 사진첩의 그날. 하객 스물여덟 명. 지금 도원호텔 로비에 하루에 오가는 사람이 삼천 명이다. 할머니는 스물여덟 명 앞에서 결혼했다. 터진 한복을 입고.
그녀를 불렀다. 말없이 장부를 내밀었다. 그녀가 읽었다. 하가네 새댁. 흰 실. 울음 그침.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 줄을 쓸었다. 실밥 떼듯이.
"……하객 스물여덟 명이래요. 우리 결혼식은 이백 명이었는데."
"할머니 결혼식이 우리보다 진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것도 진짜였어요. 한복 대신 드레스가 컸고, 흰 실 대신 안전핀이었을 뿐이에요."
준수 씨가 그 페이지를 찍었다. 두 장. 원본 보관.
[채이]
자정. 은비와 준수가 첫 줄을 다 찍었다. 탁 실장님 부부는 먼저 올라갔다. 계란 김밥 한 줄을 남겨 두고.
나는 신문지 위에 장부를 펼쳐 놓고 수첩에 적었다. 떠오르는 대로.
"봄빛 부부 찾기. 장부에 있는 이름. 예순한 해 동안 몇 쌍이야?"
준수가 휴대폰을 두드렸다.
"한 권에 대충 이백 쌍이라 치면…… 만 이천 쌍이요. 돌잔치랑 칠순 빼고."
만 이천 쌍. 이만 사천 명. 그 사람들의 자식, 그 자식의 자식.
"은비야. 네 청첩장 삼백 장 보낸다고 했지."
"응."
"그거 우리도 해 보자. 청첩장 말고 편지. 봄빛에서 결혼하신 분들께. 아니면 돌잔치 하신 분들께. 12월 31일에 이 홀이 문 닫습니다. 그 전에 한 번 와 주세요. 결혼식 사진 들고."
준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진은 제가 모을게요! 인터넷에 올리고, 도경 형 사진도 받고. 봄빛 결혼사진 모음. 예순한 해."
"여론으로 막자는 거야?"
은비가 물었다.
"여론 말고. 봄빛 거로. 이 홀 거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잖아. 건물은 전무님이 샀어. 사람은 못 사."
그가 창고 문간에 기대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먼지투성이 앞치마를 두른 채. 봄빛 거가 뭡니까. 그가 물었던 질문의 대답이 방금 나왔다. 그의 눈이 웃었다.
[재헌]
새벽 한 시. 은비 씨와 준수 씨가 하품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 5권을 넘기고 있었다. 뺨에 먼지가 한 줄 묻어 있었다. 코끝에도.
엄지로 뺨의 먼지를 쓸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었다. 한복집에서 그녀가 내 눈썹의 실밥을 떼 주었던 것처럼. 빚은 실밥처럼 옮겨 붙는다고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먼지다.
"……코에도 있습니다."
"코는 제가 할게요."
그녀가 소매로 코를 문질렀다. 먼지가 더 번졌다. 말하지 않았다. 번진 먼지가 잘 어울렸다.
그녀가 여백 메모를 하나 읽어 줬다.
[신랑이 서약 중에 신부 이름 틀림. 신부가 웃어서 넘어감. 둘 다 오래 살 듯.]
"오래 살았을까요, 이 사람들."
"장부 뒤쪽에 돌잔치가 있으면 살았겠죠."
그녀가 뒤쪽 권을 뒤지기 시작했다. 같은 이름을 찾으려고. 새벽 한 시에. 이 사람은 남의 결혼이 잘 살았는지 궁금해서 잠을 안 잔다.
"커피 사 오겠습니다."
"블랙이요. 진하게."
"밤에 커피 못 드신다면서요."
"오늘은 밤이 아니라 창고예요."
[재헌]
편의점까지 삼백 미터. 봄빛 간판이 꺼져 있었다. 봄 자 받침까지 전부. 깜빡이지도 않았다. 꺼진 간판은 처음 봤다. 12월 31일이 지나면 매일 저렇게 되는 건가.
편의점 불빛 아래서 할머니 결혼식 하객 스물여덟 명을 생각했다. 스물여덟 명 중 몇이 아직 살아 계실까. 그중 한 명은 흰 실로 한복을 꿰맨 새댁이었다. 그 새댁의 손녀가 지금 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커피 두 잔. 하나는 블랙 진하게. 하나는 조청 대신 시럽을 넣은 라테. 조청 라테는 편의점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 꺼진 간판 아래 잠깐 섰다. 휴대폰 손전등을 간판에 비췄다. 봄 자 받침. 전구 하나가 까맣게 탔다. 그거 하나 때문에 예순한 해 동안 깜빡였던 거다.
사진을 찍었다. 전구 규격이 보이게. 이건 돈이 아니다. 전구다. 그녀도 전구까지는 뭐라고 안 할 것이다.
[채이]
새벽 한 시 반. 은비와 준수를 올려 보냈다. 그는 편의점에 커피를 사러 나갔다.
혼자 남아 7권을 폈다. 할머니 혼례 네 해 뒤.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돌잔치 칸. 원장님 시어머니의 세로 글씨. 그 옆 여백에 작고 급한 글씨. 획 끝이 위로 튄다. 우리 할머니.
[강씨 댁 둘째 태준 돌잔치. 어른들 모르게. 뒤쪽 작은 방. 안주인 혼례 치마로 돌복. 안주인이 아기 안고 한참 욺. 둘째도 잔치는 한다고. 돌복 삯 안 받음. 하가네.]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도 읽었다. 글자는 안 바뀌었다. 쪽지는 세 번 읽어도 안 바뀐다. 장부도 그렇다.
강태준. 부회장님. 민혁의 아버지.
어른들 모르게. 돌잔치를 몰래 하는 집이 있나. 봄빛에서 돌잔치 백 번을 넘게 치렀다. 몰래 한 집은 한 번도 없었다. 돌잔치는 원래 동네에 알리려고 하는 거다.
혼례 치마. 폐백실 뒤에서 우리 할머니가 흰 실로 꿰맨 그 치마. 그걸 뜯어서 둘째 아들 돌복을 지었다. 할머니가 울면서. 둘째도 잔치는 한다고.
전무님이 그랬다. 우리 집 둘째는 예비라고. 그런데 이 줄 속의 둘째는 예비가 아니었다. 제일 아끼는 옷을 입은 아기였다.
계단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렸다.
우린 어차피 둘째잖아요, 아버지.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