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헌]
새벽 한 시 오십 분. 창고 문을 열었다. 커피 두 잔.
그녀가 신문지 위에 앉아 있었다. 장부를 무릎에 덮고. 얼굴이 하얬다. 먼지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녀가 나를 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못 해요."
"네."
"거짓말은 아니에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제 거가 아니라서."
"압니다."
커피를 건넸다. 블랙, 진하게. 그녀가 두 손으로 받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창고가 추운 건 아니었다. 팔월이다.
장부 표지가 보였다. 7권. 그녀가 그걸 안 보이게 돌려놓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고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 중간이 그녀 방식이었다. 거짓말은 안 하고, 남의 비밀은 지킨다.
기다리기로 했다. 할머니한테 배운 게 하나 있다면 그거다. 찻잔을 들면 기다린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 줬다.
"이건 돈 아닙니다."
꺼진 간판. 봄 자 받침. 까맣게 탄 전구 하나.
"전구입니다. 규격 찍어 왔습니다."
그녀가 화면을 보다가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그래도 웃음이었다.
"……전구는 돼요."
[채이]
일요일 아침. 봄빛 사무실 복사기. 7권 그 페이지를 한 장 복사했다. 딱 한 장. 원본은 상자에 도로 넣었다. 7권, 네 번째 줄 선반, 왼쪽 끝.
복사본을 봉투에 넣었다. 봉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호박죽처럼.
누구 거냐고 스스로 물었다. 이 한 줄은 누구 거지.
할머니 거다. 쉰다섯 해 전에 우신 분.
부회장님 거다. 돌잔치의 아기.
민혁 거다. 우린 어차피 둘째잖아요, 라고 말한 사람.
내 거는 아니다. 우리 할머니 글씨라서 조금은 내 거 같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내 거 같은 남의 것이 제일 위험하다. 예식장에서 배웠다. 신부 부케는 매니저가 제일 많이 만지지만 매니저 게 아니다.
[채이]
월요일. 봄빛 부부 찾기 첫날.
준수가 밤새 만든 글을 올렸다. 봄빛웨딩홀 예순한 해. 12월 31일, 이 홀의 마지막 날 전에 한 번 와 주세요. 그날의 사진을 들고. 밑에 장부 사진 세 장. 촛불 예식 이십 분, 신부 아버지 먼저 입장, 서약 중 이름 틀린 신랑.
은비가 편지를 인쇄했다. 장부에 주소가 남은 집부터. 우표는 원장님 서랍에서 나왔다. 사십 년 치 우표. 옛날 우표는 요금이 모자라서 두 장씩 붙였다.
오후 세 시.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원장님이 받았다. 한참 듣다가 수화기를 내게 넘겼다.
"여보세요, 봄빛웨딩홀입니다."
"아, 거기가 아직 있네."
할아버지 목소리였다. 떨렸다. 나이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우리가 거기서 했어요. 쉰다섯 해 전에. 촛불 예식. 정전 났던 날."
숨을 들이켰다. 준수가 올린 그 장부.
"손녀가 인터넷에서 봤다고 보여 주더라고. 우리 집사람 이름이 있다고.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 그거 누가 적은 거요?"
"그때 원장님이요. 지금 원장님 시어머님."
"……그 양반이 그렇게 적었구나. 우리 집사람이 그 말 들으면 좋아할 텐데."
"사모님은요?"
잠깐의 침묵.
"요양원에 있어요. 날 잘 못 알아봐요. 근데 촛불 얘기 하면 웃어. 그날 얘기만 하면."
원장님이 옆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12월에 갈게요. 사진 들고. 집사람도 모시고.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전화를 끊었다. 은비가 준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준수가 올린 글에 댓글이 오십 개 달려 있었다. 전부 봄빛 이야기였다. 결혼, 돌잔치, 칠순. 사람은 우리가 적어야 한다. 원장님 시어머니 말이 예순한 해 만에 일을 하고 있었다.
[재헌]
화요일 밤 열한 시. 봄빛 앞. 사다리.
원장님께 전화로 여쭸다. 전구 하나 갈아도 되겠습니까. 원장님이 오 초 뒤에 대답했다. 전구는 받을게요. 대신 떨어지지 마요. 우리 채이 과부 되면 안 되니까.
준수 씨가 사다리를 잡았다. 나는 올라갔다. 간판 뒤쪽 뚜껑을 열었다. 먼지. 예순한 해 먼지. 창고 먼지랑 같은 냄새가 났다.
탄 전구를 뺐다. 새 전구를 끼웠다. 규격이 맞았다. 사진을 찍어 둔 보람이 있었다.
"켭니다!"
준수 씨가 아래서 스위치를 올렸다.
봄빛. 두 글자가 한꺼번에 켜졌다. 봄 자 받침까지. 깜빡이지 않았다. 켜진 채로 있었다.
사다리 위에서 한참 내려다봤다. 간판 불빛에 골목이 조금 밝아졌다. 쓰레기통도 밝아졌다. 내가 제일 자주 서 있던 자리.
"부사장님! 누나한테 보여 줘도 돼요?"
"……찍어서 보내 주세요."
준수 씨가 찍었다. 오 분 뒤 내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였다. 문자 한 줄.
[안 깜빡여요.]
그리고 오 분 뒤 한 줄 더.
[이상해요. 깜빡이는 게 봄빛인 줄 알았는데.]
사다리를 내려오며 답을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
[이제 안 깜빡이는 게 봄빛입니다.]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백 실장이 보면 뭐라고 할까. 칠 년 만에 부사장님 문자가 두 줄을 넘겼습니다, 라고 수첩에 적을 것이다.
[채이]
수요일 오후. 본가. 대청마루가 아니라 안방. 할머니와 둘이.
봉투를 내밀었다. 할머니가 봉투를 열었다. 복사본을 꺼냈다. 돋보기를 썼다. 읽었다. 오래.
찻잔을 들지 않았다. 찻잔도 없었다. 할머니는 복사본만 들고 있었다.
"……네 할머니 글씨구나."
"네."
"그해 영감 가게가 넘어가게 생겼었다. 빚쟁이가 대문 앞에 앉아 있던 해. 시아버님이 그러셨지. 이 판에 무슨 잔치냐. 둘째 돌은 건너뛴다. 영감도 어른들 말을 따랐고."
할머니가 복사본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첫째 돌은 동네가 다 먹었다. 사진도 찍었지. 그 사진이 지금도 대청에 걸려 있다. 그런데 둘째는 아무것도 없이 첫 생일을 넘기게 생겼더구나. 나는 그게 안 됐다. 그래서 네 할머니를 찾아갔다."
"……몰래요?"
"몰래. 봄빛 뒤쪽 작은 방을 한 시간 빌렸다. 돈이 없으니 돌복 지을 비단도 없었지. 네 할머니가 그러더라. 새댁 혼례 치마가 있지 않냐고. 폐백실 뒤에서 흰 실로 꿰맨 그 치마. 다시 입을 일 없는 옷이니 아기라도 입히자고. 그걸 뜯어서 사흘 밤에 지어 왔다. 색동 대신 다홍 한 가지로. 삯은 끝내 안 받았다."
"……부회장님은 아세요?"
"모른다. 그 애는 제 돌잔치를 안 한 줄 안다. 제 형 돌 사진은 대청에 걸려 있는데 제 건 한 장도 없으니까. 친척들도 둘째 돌은 건너뛰었다고들 했고. 평생 그걸 서운해했다. 말은 안 해도 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했다고. 제일 좋은 치마로 했다고."
할머니가 창밖을 봤다.
"영감 몰래 한 잔치다. 영감 살아서는 영감 체면 때문에 말 못 했다. 가고 나서는 죽은 사람 체면이라 더 못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애가 한 번도 묻지 않더구나. 쉰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서운한 얼굴만 하고."
할머니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애가 물어 오면 말해 주려 했다. 쉰다섯 해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 애 아들이 저렇게 컸구나. 둘째라서 숫자로 버틴다는 아이로."
할머니가 문갑 서랍에서 낡은 지갑을 꺼냈다. 가죽이 다 닳아 하얬다. 안쪽 칸에서 손바닥만 한 흑백 사진 한 장.
작은 방. 벽에 걸린 봄빛 달력. 다홍 돌복을 입은 아기가 젊은 할머니 무릎에서 울고 있었다. 할머니도 울고 있었다.
"사진사도 몰래 불렀다. 한 장만 찍고 보냈다. 이것 하나다. 쉰다섯 해 동안 여기 넣고 다녔다."
민혁의 말이 생각났다. 숫자는 배신을 안 하거든요. 할머니가 알고 있었다. 전부.
"채이야. 이건 지금은 묻어 둬라."
"……네."
"네 남편한테도."
"네. 말 못 하는 게 하나 생겼다고만 했어요."
할머니가 나를 봤다. 돋보기 너머로.
"거짓말은 안 했구나."
"안 했어요. 서로한테는 안 하기로 해서요."
할머니가 복사본을 도로 봉투에 넣어 내게 돌려줬다.
"네가 가지고 있어라. 내가 가지고 있으면 또 쉰다섯 해를 묻어 둘 것 같다."
[재헌]
수요일 저녁. 그녀가 본가에 다녀온다고 했다. 혼자. 할머니 명단은 이미 줬다. 찻잔을 들면 기다린다.
나는 부엌에 섰다. 된장찌개. 반장님한테 전화로 배웠다. 반장님은 레시피를 불러 주다가 세 번 웃었다. 도련님이 된장을 푸는 날이 올 줄 몰랐다고.
멸치 육수. 된장 한 숟가락 반. 애호박, 두부, 양파. 약불. 이 집의 모든 요리는 약불로 시작한다. 그녀가 그렇게 가르쳤다.
여덟 시.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가 들어왔다. 눈이 부어 있었다.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 냄새를 맡은 얼굴.
"……된장이에요?"
"반장님 레시피입니다. 두부를 너무 일찍 넣어서 좀 부서졌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탁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두 입. 부서진 두부를 건져 먹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부은 눈에 대해서도, 할머니 댁 얘기도.
세 번째 숟가락에서 그녀가 말했다.
"짜요."
"압니다. 된장 반 숟가락이 많았습니다."
"……맛있어요."
그녀가 밥을 한 공기 다 먹었다. 나는 그걸로 됐다. 말 못 하는 게 하나 생긴 사람한테는 말 대신 밥이다. 한복집 식구들이 그렇게 한다. 나는 한복집 식구한테 배우는 중이다.
[재헌]
목요일 오전. 22층 복도. 형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봄빛 글이 떠 있었다. 준수 씨가 올린 것. 장부 사진. 촛불 예식 이십 분.
형이 나를 보고 휴대폰을 내렸다.
"봄빛 부부 찾기. 재밌네. 제수씨 작품이지?"
"봄빛 사람들 작품입니다."
"여론으로 건물을 지키겠다? 등기부엔 여론이 안 적혀."
"압니다."
형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타기 전에 돌아봤다.
"근데 제수씨, 요즘 할머니 댁에 자주 가더라. 혼자."
"……"
"할머니가 요즘 손부를 제일 예뻐하시나 봐. 장손 다음으로. 우리 집은 늘 그다음이고."
문이 닫혔다. 그다음, 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단어가 왜 거기 들어갔는지 몰랐다. 그녀는 알 것이다. 말 못 하는 그 하나 안에.
[채이]
금요일 저녁. 봄빛 지하 창고. 준수가 찍다 만 장부를 마저 정리하고 있었다.
계단에서 구두 소리. 원장님 발소리가 아니었다. 원장님은 지하 계단을 못 내려오신다.
강민혁이 창고 문간에 서 있었다. 뒤에 방준기 과장. 흰 이어폰.
"건물주가 자기 건물 지하 좀 보러 왔어요."
민혁이 먼지 낀 선반을 훑어봤다. 그러다 나를 봤다. 웃지 않았다.
"수요일에 할머니 댁 갔죠. 혼자. 봉투 들고."
방 과장이 시선을 피했다. 저 사람은 오늘도 일을 했다.
"할머니가 누구 앞에서 우시는 거, 저 한 번도 못 봤어요. 근데 수요일에 할머니 댁 도우미 아주머니가 그러더라고요. 회장님이 안방에서 우셨다고. 손부 앞에서."
민혁이 한 걸음 들어왔다. 창고 먼지가 그의 구두 앞에서 일어났다.
"할머니한테 뭘 가져갔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내놔요."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