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채이]
짐 옮겨도 됩니까.
조청 종지를 들고 있던 손이 멈췄다. 종지 안에서 조청이 천천히 기울었다. 조청은 천천히 기운다. 나는 그보다 빨리 기울었다.
"……짐이 몇 개인데요."
그가 대답을 준비해 온 사람처럼 말했다.
"셔츠 열두 장. 넥타이 여덟 개. 책 몇 권. 앞치마 하나."
"앞치마도요?"
"채훈 씨 거. 강, 이라고 적힌."
"버팀이는요."
"버팀이는 거실에. 거기가 제일 해가 잘 듭니다."
이 사람은 이사 계획서까지 머릿속에 써 왔다. 한 줄짜리가 아니라 목록으로.
"소파는요."
"……두고 가겠습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청 종지를 내려놓았다. 안전핀을 열려다 그가 보는 걸 알고 말았다.
"소파는 두고 오세요. 손님 오면 써요. 제주 소파요."
그가 웃었다. 입까지.
그날 밤 셔츠 열두 장이 내 방 옷장으로 왔다. 넥타이 여덟 개는 서랍 한 칸. 앞치마는 문고리에 걸렸다. 베개가 하나 더 생겼다. 서재에서 온 베개. 호텔 베개다. 너무 푹신했다.
불을 껐다. 침대가 넓었다. 원래 넓었는데 오늘 처음 그걸 알았다. 그가 반대편 끝에 누웠다. 반대편 끝이 조금 기울었다.
오 분 뒤 그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느려지고 깊어졌다.
잠들었다. 오 분 만에. 석 달 동안 새벽 두 시까지 누룽지를 데우던 사람이.
나는 한참 천장을 봤다. 그의 숨소리를 셌다. 입장 신호처럼. 셋, 둘, 하나.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몇까지 셌는지 모른다.
[재헌]
눈을 떴다. 창밖이 밝았다. 시계를 봤다. 아침 일곱 시 십 분.
잤다. 일곱 시간. 1207호를 나온 뒤로 처음이다.
천장이 낯설었다. 고개를 돌렸다. 의자 등받이에 그녀 카디건이 걸려 있었다. 어제 입은 것. 탁자 위에 봄빛 수첩, 누룽지 봉지 하나, 안전핀 한 줌, 반쯤 남은 물컵. 바닥에 그녀 슬리퍼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침대 밑 어딘가.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어제가 그대로 있었다.
어제가 남아 있는 방.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서 그녀가 자고 있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진 채. 왼손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약지에 흰 실. 열 바퀴.
그녀가 깨면 이 방이 치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사십 분 동안. 출근이 늦었다. 백 실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안 보여 줬다. 안 봐도 알았다.
방을 바꾸셨군요.
[채이]
일요일. 엄마 아빠가 31층에 왔다. 처음이다. 채훈까지 셋. 보자기 꾸러미 두 개와 함께. 하나는 엄마 반찬, 하나는 아빠 바느질.
엄마는 현관에서부터 눈을 굴렸다. 소파, 통유리, 버팀이. 그리고 곧장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우리 엄마는 남의 집에 가면 냉장고부터 연다. 그 집의 진실이 거기 있다고 믿는다.
"누룽지 세 봉지. 조청 두 병. 반찬통 네 개. 레몬은 없네?"
"레몬은 첫 주에 다 썼어."
"잘했다. 레몬 먹고 사는 집은 오래 못 가."
엄마의 판정은 늘 단호하다.
아빠는 버팀이 앞에 서 있었다. 오래. 가지 끝을 손가락으로 들춰 봤다.
"……이거 꽃 올라온다."
"뭐?"
다가가 봤다. 가지 끝 잎 사이에 쌀알보다 작은 봉오리들이 뭉쳐 있었다. 연한 크림색. 열 개, 스무 개.
"올리브도 꽃이 펴요?"
"피지. 원래 봄에 피는데. 이놈은 철을 모르네."
아빠가 봉오리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물을 두 사람이 주니까 헷갈렸나 보다. 봄인 줄 알고."
그 말을 하고 아빠는 버팀이한테서 돌아섰다. 그리고 복도 끝, 방문 두 개를 봤다. 하나는 열려 있었다. 서재. 소파 하나. 담요가 개어져 있었다. 하나는 반쯤 열려 있었다. 내 방. 아니, 우리 방. 베개 두 개.
엄마도 봤다. 엄마가 입을 막았다. 채훈이 휘파람을 불려다 엄마 눈을 보고 삼켰다.
아빠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서재로 들어가 소파를 봤다.
"짧네."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정리됐다. 아빠는 짧은 소파를 보고, 긴 사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헌]
장인어른이 보자기를 풀며 말했다. 나한테만 들리게. 무명 베갯잇 두 장이 나왔다. 두 장. 복도 끝 방을 보기 전에 이미 두 장을 지어 온 것이다.
"자네. 그때 차에서 적던 거. 양복 얘기."
손이 멈췄다. 결혼식 다음 날 차 안. 메모장. 장인 양복, 삼 년, 비닐. 그녀가 말했을 것이다. 실 라인.
"채이가 그러더라. 자네가 그 양복 얘기를 물었다고."
"……네."
"그거 꺼내 봤다. 비닐 아직 안 뜯었어. 근데 삼 년 사이에 배가 나와서 안 잠겨."
장인어른이 베갯잇 솔기에 남은 실밥을 가위로 끊었다. 가위질이 빠르고 일정했다. 다듬이질 백 번 한 무명을 만지는 손.
"수선집 좀 알면 소개해 주게. 호텔에 있다며."
"있습니다. 호텔 양복 수선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언제 입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잠기게만."
"사십 주년 연회가 10월 11일입니다. 가족분들 모시려고 합니다. 그날 입으시면 됩니다."
장인어른이 가위를 멈췄다.
"……호텔 연회에 한복집 영감이 양복 입고 가도 되나."
"그날 연회 답례품이 하가네 복주머니입니다. 복주머니 지은 분이 제일 좋은 옷을 입으셔야죠."
장인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베갯잇 한 장을 반듯하게 접어 내 손바닥에 올렸다. 한복집에서 대답은 바느질로 한다.
[채이]
금요일 새벽 여섯 시.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왔다가 멈췄다.
버팀이가 피어 있었다.
크림색 작은 꽃. 쌀알만 한 꽃잎 네 장. 가지 끝마다 뭉쳐서. 스무 송이, 서른 송이. 향이 났다. 아주 희미하게. 풀 냄새랑 꿀 냄새 사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재헌 씨. 재헌 씨."
그가 눈을 떴다. 반쯤. 요즘 이 사람은 잠이 깊다. 깨우는 데 두 번 흔들어야 한다. 석 달 전엔 흔들 필요도 없었다. 늘 깨어 있었으니까.
"……무슨 일입니까."
"버팀이 폈어요."
그가 일어났다.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둘이 거실 바닥에 앉았다. 통유리 너머로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버팀이 꽃이 햇빛을 받아 조금 투명해졌다.
"올리브꽃은 처음 봅니다."
"저도요. 올리브는 열매만 있는 줄 알았어요."
"철 모르는 꽃이라고 아버님이 그러셨죠."
"네. 물을 두 사람이 줘서 헷갈렸대요."
그가 휴대폰을 꺼내 한 장 찍었다. 꽃만. 그리고 한 장 더 찍었다. 나를 향해서. 머리가 부스스하고 잠옷 차림인 나를.
"지우세요."
"안 지웁니다."
"왜요."
"철 모르는 꽃이 제일 오래 기억됩니다. 호텔에서 배웠습니다. 제철 꽃장식은 다들 잊는데, 철 아닌 꽃을 놓은 날은 손님들이 기억합니다."
"그래서 강원도까지 은방울꽃을 가지러 갔어요?"
"……그래서 갔습니다."
대답이 빨랐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해가 다 뜰 때까지 버팀이를 봤다. 출근이 둘 다 늦었다. 백 실장님은 수첩에 뭐라고 적었을까. 원장님은 뭐라고 할까. 아마 숨은 쉬고 왔냐고 물을 것이다. 쉬었다. 꽃 냄새로.
[재헌]
월요일 오후. 호텔 지하 1층 양복 수선실. 장인어른을 모시고 갔다. 비닐도 안 뜯은 양복을 들고.
장인어른은 호텔 로비를 지나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앞치마 대신 점퍼. 목에 늘 걸던 줄자도 없었다. 한복집 밖의 장인어른은 처음 봤다. 생각보다 작았다.
수선 기사님이 양복을 입혀 보고 줄자를 댔다. 배 쪽에서 줄자가 한 번 멈췄다.
"삼 센티 늘리면 됩니다. 어깨는 그대로. 원단이 좋네요."
장인어른이 거울을 봤다. 양복 입은 자기를. 오래.
"……이거 삼 년 전에 샀는데. 딸 결혼식 때 입으려고. 그때는 딱 맞았어요."
"따님 결혼식은 하셨죠. 뉴스에서 봤습니다."
수선 기사님이 무심하게 말했다. 장인어른이 나를 봤다. 거울 속에서.
"……작업복 입고 했지요. 실밥 묻은 거."
기사님이 줄자를 감다가 멈췄다. 뭔가 알아챈 얼굴. 그리고 한마디를 보탰다.
"그럼 이건 다음 결혼식 때 입으시면 되겠네요. 삼 센티 늘려 드릴게요. 넉넉하게. 그날 많이 드셔도 되게."
장인어른이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다음 결혼식. 수선실 기사님은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이 제일 정확한 말을 할 때가 있다.
[채이]
화요일. 준비단 회의. 할머니가 오셨다. 처음이다. 긴 탁자 상석에 앉자 방 안 공기가 한 단계 조용해졌다.
민혁의 글로벌 갈라안, 내 «처음 그날»안. 두 안이 화면에 나란히 떴다.
할머니가 돋보기를 쓰고 두 안을 오래 봤다. 찻잔을 들었다. 다들 기다렸다. 명단을 받은 사람은 나와 재헌 씨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기다렸다.
찻잔이 내려놓였다.
"둘 다 해라."
민혁이 눈썹을 올렸다.
"낮엔 처음 그날. 직원 가족, 봄빛 사람들, 옛 손님들. 밤엔 갈라. 투자자든 외신이든. 사십 년을 버틴 호텔이면 하루에 잔치 두 번은 한다."
그리고 나를 봤다.
"낮 잔치 메뉴는 개관 연회 그대로 해라. 기록이 없다고 들었다. 내가 기억한다. 받아 적어라."
수첩을 폈다. 할머니가 천천히 불렀다. 갈비찜, 잡채, 녹두전, 탕평채, 전복초. 그리고 답례품. 자투리 비단 복주머니. 하가네. 삼백 개.
엄하늘 부주방장이 옆에서 따라 적었다. 손이 빨랐다. 적다가 한 번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를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는 얼굴이었다. 한 줄짜리 얼굴. 이 호텔엔 한 줄짜리 얼굴이 많다. 나는 이제 그 얼굴들을 꽤 읽는다.
[채이]
9월 11일, 목요일. 연회 D-30.
봄빛에서 신부 가봉을 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윤 팀장이었다. 윤 팀장은 평일 낮에 전화를 안 한다. 문자로 세 줄을 보낸다.
"자문님."
목소리가 낮았다. 뒤에서 누가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주방 쪽 소리.
"총주방장님이 오늘 아침 사표를 내셨습니다. 새로 문 여는 외국계 호텔로 가신답니다. 연회팀 핵심 셋이랑 같이."
가봉 중인 신부 드레스 뒤에 핀을 꽂던 손이 멈췄다. 신부가 거울 속에서 나를 봤다. 매니저님,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웃었다. 오 년 동안 연습한 웃음. 요즘 이 웃음을 쓸 일이 줄었었다. 오랜만에 꺼냈다.
"그리고요."
"그리고?"
"연회 메뉴 파일. 사십 년 치 레시피. 전부 가지고 가셨습니다."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