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재헌]
목요일 오후 세 시. 연경 주방.
주방이 조용했다. 오후 세 시 주방은 원래 저녁 준비로 시끄럽다. 오늘은 칼 소리만 났다. 한 사람 몫.
총주방장 자리. 스테인리스 책상 위가 비어 있었다. 모니터는 있는데 본체 연결선이 뽑혀 있었다.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십 년 치 레시피가 들어 있던 서랍.
엄하늘 부주방장이 그 책상 옆 도마 앞에 서 있었다. 파를 썰고 있었다. 일정하게. 저녁 영업은 해야 하니까.
"엄 셰프."
칼이 멈췄다.
"할 수 있습니까. 연회."
그가 나를 봤다. 삼 초.
"네."
한 음절. 우산 밑에서의 나처럼.
"레시피가 없는데."
"낮 잔치 메뉴는 회장님이 불러 주신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맛이 문제입니다. 사십 년 전 맛. 그건 파일에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파를 썰었다. 한 줄 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백 실장이 수첩을 폈다.
"확인했습니다. 총주방장님이 옮겨 가시는 호텔, 투자사 중 한 곳이 도원개발과 같은 펀드입니다. 그리고 지난 삼 주 동안 방준기 과장이 점심때 두 번 동행했습니다."
형이다. 또.
22층 버튼 옆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전무실 층. 누르면 형 앞이다. 그녀 목소리가 들렸다. 식장에서 사고 나면 소리 지르기 전에 뭐가 남아 있는지부터.
누르지 않았다. 내 사무실 층을 눌렀다.
"백 실장. 오늘 연경 주방에 뭐가 남아 있는지 목록 줘. 사람까지."
[채이]
목요일 밤. 식탁. 그가 목록을 펼쳤다. 백 실장님 글씨. 한 줄짜리가 스무 줄.
주방 인력 열둘 중 넷 이탈. 레시피 파일 전량 반출. 개관 연회 메뉴 기록 없음. 남은 인력 여덟. 엄하늘.
"레시피는 파일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반찬통 뚜껑을 열면서. 탁 실장님 갈비찜이었다.
"사람한테 있어요."
그가 갈비찜을 봤다. 나를 봤다.
"……이 갈비찜 말입니까."
"탁 실장님 갈비찜은 봄빛 명물이에요. 근데 탁 실장님이 이거 누구한테 배웠는지 저도 몰라요. 오 년 동안 안 물어봤어요."
"물어보세요."
"내일 물어볼게요."
그가 갈비를 하나 집었다. 오늘은 젓가락이었다. 기본 세팅은 이제 이 집에서 은퇴했다.
"맛이 문제라고 엄 셰프가 그랬습니다. 사십 년 전 맛."
"사십 년 전 맛을 아는 분이 한 분 계시잖아요."
그가 멈췄다.
"……할머니."
"네. 시식은 할머니가 하시면 돼요. 맛은 할머니가 알아요. 만드는 법은 사람이 알고요. 둘만 이으면 돼요."
그가 단추를 돌렸다. 한 바퀴. 생각이 정리되는 속도.
"예식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주방장님이 식 전날 도망간 적이요? 두 번이요. 한 번은 탁 실장님이 아니었고요."
"그럼 한 번은 탁 실장님이었습니까."
"이십 년 전에 신부 찾으러요."
그가 웃었다. 소리 내서. 처음이었다. 식탁에서 이 사람이 소리 내 웃은 건.
[채이]
금요일 아침. 봄빛 주방. 탁 실장님이 갈비를 핏물 빼는 중이었다.
"실장님. 이 갈비찜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탁 실장님이 손을 멈췄다.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
"허 영감님."
"허 영감님이요?"
"나 스무 살 때 여기 주방에 있던 양반. 봄빛 오기 전에 호텔 주방에 있었대. 개관할 때부터. 막내로."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어느 호텔이요."
탁 실장님이 칼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봤다. 기억을 더듬는 얼굴.
"도원. 도원호텔. 맞다. 개관 연회 때 자기가 갈비 핏물을 사흘 뺐다고 맨날 자랑했어. 그 연회 손님들 손에 들려 보낸 복주머니 삼백 개는 한복집 새댁이 자투리 비단으로 지어 줬다고. 삯도 안 받고. 너희 할머니 얘기네."
숨이 멈췄다.
"실장님. 허 영감님이 적어 둔 거 있어요? 레시피 같은 거."
탁 실장님이 주방 구석 선반으로 갔다. 양념통들 뒤에서 뭔가를 꺼냈다. 기름때 묻은 공책. 표지가 다 해졌다. 겉에 볼펜으로 한 줄.
허.
"영감님 은퇴하면서 나 줬어. 이거 보고 하라고. 나는 이거 다 외워서 안 봐. 근데 버리진 못했지."
공책을 폈다. 삐뚤빼뚤한 글씨. 갈비찜, 잡채, 녹두전, 탕평채. 그리고 한 페이지 맨 위에 두 줄로 밑줄 친 제목.
도원 개관 연회. 첫날 그대로.
공책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탁 실장님이 다시 칼을 들었다.
"그거 가져가. 호텔에 돌려주는 거야. 영감님이 거기서 배운 거니까."
[재헌]
토요일 밤 열 시. 연경 주방.
봄빛 예식이 끝나고 탁 실장님이 왔다. 조리복을 들고. 엄 셰프가 맞았다. 둘이 서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스무 살 차이 나는 두 주방장이 말없이 인사하는 걸 봤다. 둘 다 한 줄짜리 사람이다.
허 영감님 공책이 도마 옆에 펼쳐졌다. 엄 셰프가 읽었다. 탁 실장님이 옆에서 손으로 보여 줬다. 간장은 두 번에 나눠. 배는 갈지 말고 채 쳐서. 그거 영감님 고집이야.
장인어른이 보자기를 들고 왔다. 연회 답례품 복주머니 견본 세 개. 자투리 비단에 매듭 끈. 들어오다가 조리대 앞의 나를 봤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강, 한 글자.
"자네는 뭐 하나."
"설거지입니다."
"……잘 어울리네."
장인어른이 보자기를 내려놓고 내 옆에 섰다. 행주를 들었다. 내가 씻고 장인어른이 닦았다. 도원호텔 주방에서. 부사장과 한복집 영감이.
행주를 내려놓더니 장인어른이 탁 실장님 조리복 소매를 잡았다. 단추 하나가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바늘쌈을 꺼냈다. 삼십 초. 탁 실장님은 끝까지 몰랐다.
그녀가 새벽 한 시에 왔다. 봄빛 정리를 마치고. 주방 문간에 서서 우리를 봤다. 조리대 네 개 위에 갈비찜 냄비가 끓고 있었다. 탁 실장님과 엄 셰프가 한 숟가락씩 맛보며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
그녀가 웃었다. 오늘 하루 중 제일 피곤하고 제일 밝은 얼굴이었다.
[재헌]
일요일 새벽 두 시. 연경 주방. 불 꺼진 줄 알았는데 조리대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형이었다.
양복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셔츠 소매를 걷고, 냄비 앞에 서 있었다. 어제 탁 실장님과 엄 셰프가 끓이다 남긴 갈비찜. 식은 냄비에서 한 점을 집어 먹고 있었다. 손으로.
문간에서 멈췄다. 형은 나를 못 봤다. 한 점을 씹고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맛이네."
할아버지. 창업주. 형은 여덟 살까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밥을 먹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거의 기억 못 한다. 형은 기억한다. 형이 나보다 세 해 더 이 집 식구였다.
발소리를 냈다. 일부러. 형이 돌아봤다. 손에 갈비 한 점을 든 채. 들킨 얼굴이었다. 1207호에서 스테이크 시켰다가 총지배인한테 걸렸을 때의 얼굴.
"……배고파서."
"압니다."
"총주방장 일은."
형이 말을 멈췄다. 변명을 고르는 얼굴. 고르다가 그만뒀다.
"맛있네, 이거. 누가 했어."
"봄빛 탁 실장님이랑 엄 셰프. 개관 때 주방 막내 레시피로."
형이 갈비를 마저 먹었다. 손가락을 핥지는 않았다. 냅킨으로 닦았다. 형은 끝까지 형이었다.
"……이런 걸로 이기겠다고?"
"이기려는 게 아닙니다. 할머니가 드시려는 겁니다."
형이 재킷을 들었다. 나가다 문간에서 멈췄다. 등을 보인 채.
"할머니한테 이거 맛있다고 전하지 마. 내가 먹었다는 거."
나가고 나서 냄비를 봤다. 갈비가 세 점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세 접시를 먹었다고 했다. 형은 세 점. 할아버지를 닮았다. 형한테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해 주지 않았다. 요즘 형은 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문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녀가 말 못 하는 그 하나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만 들었다.
[채이]
월요일. 직원식당. 반장님이 식판을 내려놓자마자 말했다.
"주방 넷이 나갔다며. 연회 날 서빙은 우리 층이 할게."
"하우스키핑이요?"
"객실 청소하는 손이 접시 못 나를까. 이순옥이는 이십 년 전에 연회팀이었어. 지호도 끼워."
지호가 옆 테이블에서 손을 들었다.
"저 쟁반 세 개 들 수 있어요!"
"두 개만 들어."
저녁에 봄빛 단체방에도 같은 말이 올라왔다. 은비. 연회 날 봄빛 쉰다. 우리 전원 도원 간다. 준수. 음향 제가 볼게요. 탁 실장님. 갈비찜은 나. 폐백 이모님. 복주머니 담는 건 나.
원장님이 마지막에 한 줄을 올렸다. 봄빛이 도원 개관 연회 복주머니 빚 갚는 날이다. 반대 방향으로. 단체방에 한동안 아무도 답을 안 했다. 다들 그 줄을 세 번씩 읽는 모양이었다.
[채이]
화요일 점심. 연경 별실. 시식.
할머니가 상석에 앉았다. 앞에 갈비찜 한 접시, 잡채, 녹두전, 탕평채. 그리고 상 끝에 복주머니 하나.
엄 셰프와 탁 실장님이 문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둘 다 조리복. 둘 다 긴장한 얼굴. 탁 실장님이 긴장한 얼굴은 처음 봤다. 이십 년 전 신부 찾으러 갈 때 이런 얼굴이었을까.
할머니가 갈비찜을 한 점 집었다. 천천히 씹었다. 눈을 감았다.
오래.
찻잔을 들지 않았다. 젓가락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씹기만 했다.
"……영감 생각이 나는구나."
눈을 떴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할머니가 우는 걸 두 번째 봤다. 두 번 다 오십 년 넘은 기억 앞에서.
"그날 영감이 이걸 세 접시 먹었다. 손님들 앞에서 체면도 없이. 자기 호텔 첫 잔치라고."
할머니가 문간을 봤다.
"누가 했느냐."
엄 셰프가 한 걸음 나섰다.
"연경 부주방장 엄하늘입니다. 레시피는 봄빛 탁성만 실장님이 주셨습니다. 원래는 개관 주방 막내 허 씨 어르신의 것입니다."
"허 막내. 기억한다. 핏물 사흘 뺐다고 자랑하던."
할머니가 웃었다. 탁 실장님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할머니가 복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하가네 견본. 매듭을 손끝으로 만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복주머니도 이 매듭이었다고. 바느질은 사십 년이 지나도 손이 안 변한다고. 한복집이 안 변하니까.
"엄 셰프. 이번 연회, 네가 총괄해라. 낮이고 밤이고."
엄 셰프가 대답했다. 한 음절.
"네."
시식이 끝나고 복도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였다.
"채이야. 날짜 잡았어. 9월 마지막 토요일. 봄빛. 작은아빠가 폐백 한복 지어 준대."
"……열하루 남았는데?"
"응. 너희 연회 전이 낫대, 진우 씨가. 그 뒤엔 너 바빠서 안 된다고. 청첩장은 벌써 찍었어. 하객 마흔 명. 작게."
언니가 숨을 한 번 골랐다.
"내 식, 네가 맡아 줘. 매니저로."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