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채이]
"못 드려요."
짧게. 이 사람한테는 그게 규칙이다.
민혁이 웃었다. 오늘 웃음은 끝이 갈라져 있었다.
"뭘 쥐고 있는지 알아요, 제수씨. 우리 아버지 얘기죠. 둘째 집 얘기. 그거 할머니가 줬어요? 그걸로 날 치라고?"
창고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간판은 고쳤는데 여긴 아직이다.
"아무도 누굴 치라고 안 줬어요."
"그럼 왜 할머니 앞에서 울렸어요. 쉰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안 우신 분을."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누가 말할 수 있는데요."
"할머니요."
민혁이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전무님 거예요. 그런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께 여쭤보세요. 할머니는 기다리고 계세요. 전무님이, 아니면 부회장님이 묻기를."
"기다려요? 쉰다섯 해를?"
"네."
민혁이 뭔가 말하려다 삼켰다. 그 표정을 안다. 상견례 때 작은아버지가 할머니한테 이름 불리고 말을 삼키던 얼굴. 부자가 닮았다. 말을 삼키는 버릇까지. 식탁 끝자리에 오래 앉으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쓰고 싶으면 써요, 제수씨. 이사회에서든 기자한테든."
민혁이 돌아섰다.
"대신 봄빛은 12월 31일이에요. 그건 안 바뀌어요."
구두 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졌다. 방 과장이 따라가다 문간에서 멈췄다. 나를 한 번 봤다. 뭔가 말하려는 얼굴. 흰 이어폰을 만졌다. 그리고 올라갔다.
[재헌]
금요일 밤. 식탁.
"전무님이 창고에 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반찬통 뚜껑을 열면서.
"뭘 달라고 했어요. 안 줬어요. 그 뭐가, 제가 말 못 하는 그거예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형이 협박했습니까."
"아뇨."
그녀가 반찬통을 내 쪽으로 밀었다. 탁 실장님 멸치볶음.
"무서워했어요. 전무님이."
"……형이요."
"네. 쓰고 싶으면 쓰라고 했는데, 제발 쓰지 말라는 얼굴이었어요. 예식장에서 그런 얼굴 많이 봐요. 신부 아버지가 축사 원고 잃어버렸을 때. 괜찮다고 하면서 제일 안 괜찮은 얼굴."
형이 무서워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삼십이 년 동안. 1207호에서 스테이크를 시켰다 혼날 때도 형은 웃었다.
"당신이 말 못 하는 그것 때문에 형이 무서워한다."
"네."
"그럼 당신은 그걸 형한테 안 쓰는 거고."
"안 써요. 무기가 아니에요. 그건 편지예요.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멸치볶음을 집었다. 달았다. 탁 실장님은 멸치에도 조청을 넣는다. 하가네 조청.
형한테 편지가 있다. 그녀가 그걸 쥐고 있다. 받을 사람이 묻기를 기다리면서. 할머니처럼.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그러듯이.
[채이]
토요일. 봄빛 로비. 벽 한쪽이 달라져 있었다.
준수와 도경 씨가 로비 왼쪽 벽에 코르크판을 세 개 붙였다. 거기에 사진이 붙기 시작했다. 봄빛 부부 찾기 첫 주 동안 우편과 택배로 온 사진들. 흑백, 누런 컬러, 필름 카메라 날짜가 박힌 것.
오전 예식 하객들이 사진 앞에서 발을 멈췄다. 자기 부모 사진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어, 이거 우리 이모다.
점심때 반장님이 사진 한 장을 들고 왔다. 휴무일인데 일부러.
"채이 씨. 이거."
삼십일 년 전. 드레스 입은 젊은 반장님. 밑단을 밟고 기우뚱한 순간. 그 옆에서 젊은 여자가 반장님 팔꿈치를 받치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치맛자락 들고 왼손으로 팔꿈치 받치고. 앞질러 걷지 않고.
원장님이었다. 새댁 원장님.
"신랑 쪽 사촌이 찍었어. 넘어지는 거 찍었다고 내가 삼십 년 동안 구박했는데. 이게 제일 잘 나온 사진이야."
반장님이 사진을 코르크판 한가운데 꽂았다. 원장님이 사무실에서 나와 그 앞에 섰다. 한참 봤다.
"……내가 저렇게 날씬했나."
"원장님 그 자세 그대로예요. 지금도."
원장님이 나를 봤다. 그리고 반장님을 봤다.
"그때 넘어졌으면 어떡할 뻔했어."
"넘어졌으면 원장님이 같이 넘어졌겠지. 저 자세로."
두 사람이 웃었다. 삼십일 년 전 밑단 한 번으로 묶인 사람들. 피는 아니다. 그런데 이 로비에선 그게 제일 진한 끈이다.
민혁한테 이 벽을 보여 주고 싶었다. 숫자로 버틴다는 사람한테. 그런데 이 벽도 숫자다. 사진 마흔일곱 장. 다음 주면 백 장이 넘을 것이다. 숫자로 버틴다는 사람한테 보여 줄 숫자가 늘고 있었다.
[재헌]
토요일 오후. 할머니 댁. 사진첩을 빌리러 갔다. 한 장만.
"봄빛 로비에 사진 벽을 만든답니다. 봄빛에서 결혼한 사람들 사진. 할머니 결혼사진도 거기 걸면 어떻겠습니까."
할머니가 찻잔을 들었다. 기다렸다.
"……그 사진엔 네 처 할머니도 나온다. 가장자리에. 반쯤 잘려서."
"압니다."
"그럼 가장자리 말고 한가운데 걸어라."
찻잔이 내려놓였다. 결론.
할머니가 사진첩에서 그 흑백 사진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오십구 년 동안 붙어 있던 사진이라 풀 자국이 뒷면에 남았다.
"잃어버리면 너 객실 청소 한 달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봄빛 로비. 코르크판 앞. 반장님 사진 옆에 할머니 사진을 꽂았다. 스물셋 신부, 터진 한복, 마른 신랑. 가장자리의 앞치마 새댁.
준수 씨가 옆에서 사진 설명 카드를 썼다. 그녀 글씨로 불러 준 대로.
[오십구 년 전. 신부 한복 솔기가 터졌다. 그 한복을 지은 새댁이 흰 실로 꿰맸다. 이 신부는 훗날 호텔을 지었다. 이 새댁은 꿰맨 삯을 안 받았다.]
원장님이 카드를 읽고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그 카드 밑에 볼펜으로 한 줄을 보탰다. 둥글고 큰 글씨.
[이 새댁의 손녀는 지금 이 홀 매니저다.]
그녀는 그때 신부대기실에 있었다. 이 카드를 언제 볼지 궁금했다. 볼 때 무슨 얼굴을 할지도.
[채이]
일요일. 언니와 진우 씨가 봄빛에 왔다. 제주 공방은 비웠다고 했다. 한 달 안에 비우라던 그 공방. 진우 씨는 서울 외곽에 작은 작업실을 구했다. 언니 필라테스 스튜디오 근처.
진우 씨가 트럭에서 나무 틀 세 개를 내렸다. 코르크판 크기에 딱 맞는 액자 틀. 모서리에 작은 꽃이 새겨져 있었다. 수국.
"사진 벽에 틀이 없길래요. 남은 나무로."
말이 느렸다. 한 마디, 한 박자.
준수와 도경 씨가 틀을 끼웠다. 코르크판이 액자가 됐다. 사진 쉰두 장이 갑자기 전시처럼 보였다.
언니가 벽 한가운데 사진 앞에서 멈췄다. 흑백. 앞치마 새댁. 그 밑의 카드. 원장님 볼펜 글씨.
이 새댁의 손녀는 지금 이 홀 매니저다.
언니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방금 그 카드를 처음 봤다. 신부대기실에서 나오자마자. 발이 굳었다.
"채이야. 너 울어?"
"안 울어."
"거봐. 운다."
진우 씨가 트럭에서 휴지를 가져왔다. 저 사람은 늘 휴지를 가지고 다닌다. 언니 옆에 있으려면 필요했을 것이다.
[채이]
화요일. 자문 날. 준비단 두 번째 회의. 총주방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
"총주방장님은요?"
윤 팀장이 대답했다.
"오늘 몸이 안 좋으시답니다."
엄하늘 부주방장이 수첩만 보고 있었다. 회의 끝나고 직원식당에서 지호가 식판을 들고 옆에 앉았다. 목소리를 낮췄다.
"자문님. 소문인데요. 총주방장님이 요즘 점심때마다 밖에서 누굴 만나신대요. 벨 데스크 앞으로 검은 차가 와요. 번호판이 우리 호텔 차가 아니에요."
"누구 차인데."
"모르죠. 근데 방준기 과장님이 두 번 같이 나가셨어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흰 이어폰. 저 사람은 오늘도 일을 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엄하늘 부주방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총주방장님 안 계셔도. 그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재헌]
수요일 아침. 서재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허리가 소리를 냈다. 뚝.
석 달째 이 소파다. 다리가 팔걸이 밖으로 한 뼘. 제주 펜션 소파랑 길이가 같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 소파가 제주 소파라는 걸 깨달았다.
출근했다. 백 실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보고 수첩을 폈다.
"부사장님. 허리를 왼손으로 짚고 계십니다."
"……소파가 작아서."
"석 달째 작습니다."
"알아."
"회장님께서도 아십니다."
"그것도 알아."
백 실장이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이번엔 안 보여 줬다. 대신 한마디를 보탰다.
"제가 칠 년 모시면서 드리는 첫 사적인 조언입니다. 소파를 바꾸시거나, 방을 바꾸시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백 실장이 먼저 내렸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칠 년 만의 조언은 한 줄이었다. 백 실장다웠다.
[채이]
수요일 밤. 새벽 한 시. 부엌.
엄마가 싸 준 누룽지를 팬에 데우는데 그가 나왔다. 허리를 손으로 짚고. 모르는 척했다. 오늘 아침부터 저러고 다닌다. 출근할 때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가 한 번 멈췄다. 그때부터 알았다.
거실 바닥. 버팀이 옆. 조청 종지.
"재헌 씨."
"네."
"가족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가 누룽지를 씹다 멈췄다. 한참.
"……예전엔 명절에 같은 상에 앉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성, 같은 피."
"지금은요?"
"실밥 묻은 사람들이요."
웃음이 터졌다. 그는 진지했다.
"한복집에서 다들 실밥을 묻히고 있었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채훈 씨. 저도 묻었고. 그날 저는 같은 성도 아니고 같은 피도 아닌데 거기 끼어 있었습니다. 그게 가족 같았습니다."
누룽지를 한 조각 집어 조청을 찍었다. 그의 접시에 올렸다.
민혁 생각이 났다. 우린 어차피 둘째잖아요. 이 사람은 같은 성이 아니어도 식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같은 성인데도 둘째라서 덜 식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었다. 제일 아끼는 치마를 뜯어 입힌 아들이었다.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반대쪽에 서 있다.
말 못 하는 그 하나가 목에 걸렸다. 누룽지와 같이 삼켰다.
"……좋은 대답이에요."
"점수는요."
"백 점. 실밥 가산점."
그가 웃었다. 입까지. 요즘은 입까지 자주 웃는다. 반장님이 알면 이십 년 치를 한꺼번에 본다고 할 것이다.
누룽지를 다 먹고 일어서는데 그가 허리를 짚었다. 이번엔 모르는 척이 안 됐다. 소리가 났다. 뚝.
"……소파요?"
"소파입니다. 제주 소파랑 길이가 같습니다."
그가 버팀이 쪽을 보며 단추를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새로운 기록이었다.
"채이 씨."
"네."
"짐 옮겨도 됩니까."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