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수요일. 봄빛 드레스실. 언니 가봉.
드레스는 언니가 직접 골랐다. 어깨가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옷. 진우 씨 공방 나무색이랑 어울리는 상아색. 입자마자 드레스 이모님이 허리에 손을 넣어 봤다. 손가락 하나도 안 들어갔다.
"딱이네."
"네 치수로 맞춘 거니까."
나는 언니 등 뒤에서 지퍼를 올렸다. 끝까지. 걸리는 데 없이.
언니가 거울 속의 나를 봤다.
"너 그날 가봉 없이 입었지. 내 드레스."
"응."
"등 뒤 떴었어?"
"손가락 세 개."
"……미안."
"안전핀 일곱 개가 버텼어."
언니가 웃었다. 이번엔 울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엔 네가 입장 신호 줘. 삼, 이, 일. 그거 들어야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매니저가 원래 그거 하는 사람이야."
"알아. 그래서 너한테 맡긴 거야."
[재헌]
토요일. 서진우 씨가 호텔로 왔다. 약속 없이. 로비에서 지호 씨가 연락했다. 부사장님, 키 큰 분이 나무 상자 들고 찾으세요.
라운지 창가에 앉았다. 서진우 씨가 탁자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 뚜껑에 꽃이 새겨져 있었다. 수국이 아니었다. 작은 종 모양 꽃이 한 줄로.
은방울꽃.
"……이건."
"세라 반지 상자 만들다가 남은 나무로요. 부사장님도 필요하실 것 같아서."
말이 느렸다. 한 박자 쉬고.
"공방 마당에서 판자 옮기실 때. 그 사람 얘기 들으면 먼저 웃는다고 하셨잖아요. 우는 건 아직이라고."
"……기억하십니까."
"나무 깎는 사람은 들은 걸 오래 씹어요."
상자를 열었다. 안에 홈이 파여 있었다. 반지 하나 들어갈 크기. 바닥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너무 작아서 창가 빛에 기울여야 보였다.
두 번째.
"첫 번째는 식장에서 급하게 하셨으니까. 두 번째는 제대로 하시라고."
상자를 닫았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봤다. 은방울꽃이 손금 위에 있었다.
"값을."
"꽃값 대신 사진 달라던 농장 분 얘기 들었어요. 저도 그걸로 할게요. 그 상자 여는 사진."
서진우 씨가 일어섰다. 라운지를 나가며 한 번 돌아봤다.
"토요일에 봬요. 저 식장에서 안 떨게 기도해 주세요."
"떨어도 됩니다. 신부는 그거 좋아합니다."
그가 느리게 웃었다. 나는 상자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명찰 옆. 안주머니가 요즘 붐빈다.
[채이]
수요일 밤. 한복집. 큰어머니가 왔다. 엄마가 셔터를 올리다 멈췄다.
큰어머니 손에 그릇 하나. 병원에 두고 온 호박죽 그릇. 석 달 만에 돌아왔다. 깨끗이 씻겨서.
"……그릇 돌려주러."
엄마가 그릇을 받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봤다. 삼십 년 동서지간. 명절마다 부엌에서 말없이 전을 부친 사이.
"형님. 들어와요. 차 한 잔 드시고."
"아니, 나는."
"토요일 세라 식에 폐백 한복 뭘로 할지 정해야지. 형님이 엄마잖아요."
큰어머니가 가게 안으로 한 발 들어왔다. 풀 먹인 옷감 냄새, 다리미 김 냄새. 큰어머니가 시집와서 처음 맡은 냄새.
"……세라가 분홍 좋아해. 연분홍 저고리에 다홍 고름."
"알아요. 애기 때부터 가게 오면 분홍 고름만 잡아당겼잖아요."
큰어머니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소리 지르지 않는 큰어머니.
"채이야."
"네."
"토요일에 세라 머리. 네가 해 줄 수 있니. 초등학교 입학식 때 세라가 너 해 준 것처럼. 양 갈래 말고."
"……올림머리로 할게요. 실핀 스무 개로."
[재헌]
금요일 밤. 새벽 한 시. 그녀가 잠을 못 잤다. 언니 식 전날. 남의 식 전날엔 잘 자던 사람이 가족 식 전날엔 못 잔다.
부엌에 불을 켰다. 이번엔 내가 데웠다. 마른 팬, 약불, 뒤집개 한 번. 이제 안 태운다. 석 달 걸렸다.
거실 바닥. 버팀이 꽃은 절반쯤 졌다. 떨어진 꽃잎이 화분 받침에 크림색으로 쌓여 있었다. 그녀는 그걸 안 치웠다. 어제가 남아 있게.
"재헌 씨."
"네."
"그날 도망가고 싶었어요? 결혼식 날. 언니처럼."
누룽지를 씹었다. 천천히.
"……누가 계단 문을 열어 줬으면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아침 거울 앞에서 면도하다가 턱을 벴습니다. 손이 떨려서."
"봤어요. 그 자국."
"그래서 당신이 대기실 문을 두드렸을 때, 솔직히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식이 깨진다고. 취소하죠, 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가벼웠던 건 그래서입니다."
그녀가 누룽지를 든 채 나를 봤다.
"그럼 왜 저한테 서라고 했어요."
"당신이 사정을 말해서요. 이 분 안에. 끝까지."
누룽지를 한 조각 더 집었다.
"도망갈 사람은 사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정을 말하는 사람 옆에 서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날 알았습니다."
그녀가 조청 종지를 내 쪽으로 밀었다. 대답 대신. 한복집 식구의 방식이다.
[채이]
9월 27일, 토요일 오후 한 시 십 분. 봄빛 신부대기실 앞.
문고리를 잡고 숫자를 셌다. 삼, 이, 일.
"언니, 들어갈게요."
"응!"
대답이 있었다. 크게.
문을 열었다. 거울 앞 의자에 언니가 앉아 있었다. 올림머리. 실핀 스무 개. 면사포는 아직 화장대 위. 쪽지는 없었다.
넉 달 전 이 방은 비어 있었다. 오늘은 사람이 꽉 찼다. 큰어머니, 엄마, 은비, 소율. 소율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언니 친구도 아닌데. 소율은 이제 봄빛 행사마다 온다.
"매니저님. 신부 준비 완료입니다."
언니가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나도 경례했다.
"신부님. 입장 이십 분 전입니다. 도망가실 계획 없으시죠?"
대기실이 웃음으로 터졌다. 큰어머니까지 웃었다.
그랜드홀. 하객 마흔 명. 봄빛 역사상 작은 편. 그런데 뒤쪽 두 줄이 꽉 찼다. 봄빛 직원들, 호텔 하우스키핑 반장님, 지호. 그리고 맨 뒤 벽에 그가 서 있었다. 요즘 이 사람의 지정석이다.
삼, 이, 일. 문이 열렸다.
큰아버지가 언니 팔을 잡고 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떨지 않았다. 대신 큰아버지가 울었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딸 결혼식에서 운다. 유전이다.
길 끝의 진우 씨는 떨었다. 누가 봐도. 반지 교환 때 나무 상자를 열다가 뚜껑을 떨어뜨렸다. 뚜껑에 수국이 새겨져 있었다. 하객들이 웃었다. 언니가 제일 크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떨지 말라고.
[재헌]
부케 순서.
세라 씨가 뒤돌아서 부케를 들었다. 수국과 은방울꽃. 은방울꽃은 철이 아닌데 들어 있었다. 강원도 농장에 한 번 더 전화했다고 그녀가 말했다. 두 대 남은 걸 받았다고.
하객석 앞쪽에 은비 씨가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약혼자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세라 씨가 던졌다. 은비 씨 쪽이 아니었다. 옆쪽. 버진로드 가장자리. 무전기를 든 채 서 있던 매니저 쪽.
그녀가 피했다. 일하는 중이라서. 매니저는 부케를 받지 않는다. 몸이 먼저 비켰다.
부케가 그녀 어깨를 스치고 날아왔다. 맨 뒤 벽 쪽으로. 내 쪽으로.
잡았다. 반사였다. 호텔 로비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잡는 버릇. 여덟 살 때부터.
홀이 웃음으로 무너졌다. 세라 씨가 박수를 쳤다. 은비 씨가 배를 잡았다. 반장님이 도련님! 하고 소리쳤다.
부케를 들고 버진로드를 걸어갔다. 열두 걸음. 그녀 앞에 섰다. 무전기를 든 손 말고 다른 손에 부케를 쥐여 줬다.
"받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녀 얼굴이 빨개졌다. 무전기에서 준수 씨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나, 다음 순서 폐백이요. 누나? 누나 듣고 있어요?
[채이]
폐백실. 오늘은 폐백이 있었다. 폐백 이모님이 차린 상. 대추, 밤, 구절판.
언니가 절을 했다. 작은아빠가 지은 연분홍 저고리에 다홍 고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대추와 밤을 던졌다. 언니가 치마를 넓게 펴서 받았다. 진우 씨가 옆에서 같이 받았다. 치마가 아니라 두 손으로. 대추가 몇 개 그 손바닥에서 튕겨 나갔다.
나는 문간에 서서 봤다. 부케를 든 채. 아직 내려놓지 못했다. 무전기랑 부케를 같이 든 매니저. 봄빛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폐백 이모님이 옆에 와서 속삭였다.
"다음 폐백 대추, 안 잃어버렸지?"
파우치 안쪽 주머니를 만졌다. 안전핀 일곱 개 옆에 대추 한 줌. 이모님이 고른 굵은 대추. 조금 말라 가고 있었다.
"네. 있어요."
[채이]
식이 끝나고 원장실. 원장님이 장부를 펼쳤다. 예순한 번째 권. 오늘 날짜 칸. 볼펜을 들었다. 신랑 신부 이름, 하객 마흔, 한복 하가네. 그리고 여백.
원장님이 한참 생각하다 적었다. 둥글고 큰 글씨.
[넉 달 전 이 홀에서 도망간 신부가 돌아와 식을 올림. 매니저는 신부 사촌. 신부가 부케를 매니저에게 던졌으나 매니저가 일하느라 피함. 뒤에 서 있던 매니저 남편이 받음. 하객 전원 웃음.]
"원장님, 그걸 왜 적어요."
"사람은 우리가 적어야 한다며. 우리 시어머니가."
원장님이 볼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이 이 장부에서 제일 웃긴 줄이다. 촛불 예식 이십 분보다 웃겨."
은비가 문간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부케 원래 내 거였어. 약혼한 사람한테 던지는 게 원래 법이야."
"미안."
"미안은 무슨. 나 11월에 내가 던질 거야. 너한테 정조준해서. 피하지 마."
[채이]
저녁 여덟 시. 식이 다 끝난 로비. 사진 벽 앞. 언니가 오늘 찍은 사진 한 장을 코르크판에 꽂았다. 넉 달 전 도망간 신부가 넉 달 뒤 돌아와서 결혼한 사진. 봄빛 장부에 적힐 한 줄.
언니가 휴대폰을 꺼냈다.
"채이야. 이거."
화면에 캡처 두 장. 문자였다. 보낸 번호 밑에 저장된 이름. 강민혁 전무.
[지금 아니면 평생 못 갑니다. 방 과장이 열두 시 십 분에 계단 문 열어 둘 겁니다. 표는 봉투에.]
그리고 비행기표 사진. 오후 세 시 사십 분, 제주.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지우라고 해서 지웠어. 근데 그 전에 화장실 가서 캡처해서 진우 씨한테 보냈어. 무서워서. 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쓰려고."
언니가 휴대폰을 내 손에 쥐여 줬다.
"기자회견 때도 못 썼어. 쓰면 진우 씨 공방이 끝날 것 같아서. 이제 공방 없어. 쓸 수 있어."
언니가 내 손을 휴대폰째 감쌌다.
"근데 이건 내가 정할 게 아닌 것 같아. 네 식이 망가질 뻔했잖아. 네 홀이, 네 남편이."
"……언니."
"이건 네가 정해."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