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도원레지던스 앞에는 정말로 기자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틀린 말을 안 한다. 벌써 두 번째 확인이다.
차 문이 열리자 플래시가 터졌다.
"사모님, 한 말씀만!"
"원래 신부와는 어떤 사이세요?"
"언제부터 계획하신 겁니까?"
계획. 발이 멈칫했다. 오늘 내가 계획한 건 점심 메뉴뿐이었다. 그것도 못 먹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듯. 그는 기자들 쪽으로 고개도 안 돌렸다.
"걸어요. 멈추면 더 찍습니다."
걸었다. 로비 유리문이 닫히자 소음이 칼로 자른 듯 끊겼다.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놓았다.
"허락 없이 잡아서 미안합니다."
"아뇨. 덕분에 안 넘어졌어요."
넘어질 뻔한 건 다리가 아니었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집은 넓었다. 그리고 비어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도시가 발밑에 깔렸다. 회색 소파 하나, 유리 탁자 하나, 아무것도 없는 선반. 텔레비전도 없었다. 모델하우스도 이것보단 사람 냄새가 난다.
"여기 사신 지 얼마나 됐어요?"
"삼 년."
"……삼 일 된 집 같아요."
"잠만 잡니다. 대부분 호텔에 있으니까."
통유리 앞에 큰 화분이 하나 있었다. 올리브나무. 내 어깨쯤 오는 키. 잎이 절반쯤 떨어져 흙 위에 말라붙어 있었다. 남은 잎도 끝이 누렜다.
"얘는요?"
"누가 이사 선물로 준 겁니다."
"물은 언제 줬어요?"
침묵이 조금 길었다.
"……관리하는 분이 한 달에 한 번."
흙에 손가락을 찔렀다. 돌처럼 말라 있었다. 그런데 가지 끝 하나에 손톱만 한 초록 잎이 두 장 붙어 있었다.
"아직 살아 있네요. 버티고 있어요. 이름 있어요?"
"나무한테 무슨 이름을."
"버팀이."
화분을 한 번 쓰다듬었다.
"오늘부터 버팀이예요. 저랑 같이 1년 버티는 거예요."
그는 대답 없이 부엌으로 갔다. 물 한 컵을 떠 와 내게 내밀었다.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작게 났다. 쪽, 하는 소리. 목이 많이 말랐던 모양이다. 버팀이도, 나도.
방은 두 개였다. 안쪽 방이 내 방이 됐다. 그는 서재에서 잔다고 했다. 원래 거기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고. 이 집에서 침대는 장식품인 모양이다.
밤 아홉 시, 은비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왔다. 내 원룸에서 쓸어 온 짐이었다. 로비에서 기자들한테 사진을 세 번 찍혔다고 투덜댔다.
"그리고 이거. 너희 어머님이 한복집 들렀다 가래서."
종이 가방. 누룽지 한 봉지, 작은 유리병 하나. 조청이었다. 병뚜껑에 엄마 글씨로 «조청» 두 글자가 붙어 있었다.
"밥 안 먹고 잘까 봐 그러신대. 나한테 사위 키 몇이냐고 물어보셨어."
"뭐라고 했는데."
"문틀에 머리 닿을 것 같다고."
은비는 현관에서 거실을 훑어보고 속삭였다.
"야. 집이 너무 추워. 호텔 로비 같아. 사람 사는 데 같지가 않아."
"그러게."
"그래도 버텨. 뭔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체크인 완료. 짐 두 개, 누룽지 한 봉지, 조청 한 병. 1년짜리 투숙객치고는 짐이 가벼웠다.
[재헌]
새벽 한 시. 잠이 안 왔다. 늘 그렇다.
서재 문을 열었다.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고소한 냄새. 그녀가 팬 앞에 서 있었다. 포장도 안 뜯었던 팬이었다. 이 집에서 그 팬이 처음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뭐 합니까."
그녀가 집게를 떨어뜨릴 뻔했다.
"누룽지 데워요. 배고파서."
"새벽 한 시에."
"예식장 사람은 밥때가 없어요. 드실래요?"
"단 건."
"조청에 찍어 먹는 거예요. 조금 달아요."
대답 대신 식탁 의자를 끌어 앉았다. 접시에 누룽지 네 조각. 종지에 조청.
하나 찍어 먹었다.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게 뭡니까."
"누룽지요."
"아는데. 어제 차에서 먹은 거랑 다릅니다."
"팬에 데워서 그래요. 겉은 바삭, 속은 고소. 조청 찍으면 또 달라요."
두 번째를 집었다. 조청을 더 찍었다. 그녀가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못 본 척했다.
왼손을 내리는데 소매에서 툭, 뭔가 떨어져 식탁 위를 굴렀다. 커프스 단추. 은색 네모. 뒤쪽 고정 막대가 부러져 있었다.
"아끼는 거예요?"
대답이 늦었다.
"……어머니가 대학 졸업할 때 준 겁니다. 그 뒤로 받은 게 없어서."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새벽 한 시는 사람을 헤프게 만든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파우치를 가져왔다. 흰 실. 단추 고리에 꿰어 소매 단춧구멍 사이로 몇 번 감아 묶었다. 단추가 다시 붙었다. 돌리면 돌아갔다. 빠지지는 않았다.
"임시예요. 수선집 가면 제대로 고쳐 줄 거예요."
손목을 돌려 봤다. 은색 단추 뒤에 흰 매듭이 조그맣게 보였다.
"이대로 두죠."
"보여요, 실."
"괜찮습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 손끝에 매듭이 걸렸다. 걸리는 게 나쁘지 않았다.
세 번째 조각을 집었다.
[채이]
일요일 오전. 하가네 한복집은 셔터를 반만 올려 두고 있었다. 휴무라서가 아니라 기자 때문이라고 엄마가 셔터 밑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가게 안은 다리미 김 냄새로 따뜻했다. 작업대 위에 치수를 적어 핀으로 꽂아 둔 옷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벽에는 혼주 한복 여섯 벌이 비닐을 쓰고 나란히 걸려 있었다.
"앉아요. 거기 말고. 거긴 옷감 두루마리야."
그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긴 다리가 작업대 밑에 다 안 들어가서 비스듬히 뻗었다. 도원그룹 후계자와 옷감 두루마리. 사진 찍었으면 기사 백 개는 났다.
엄마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에 모았다. 면접관 얼굴.
"나이."
"서른둘입니다."
"방은."
"따로 씁니다."
"술."
"조금 합니다."
"담배."
"안 합니다."
"누룽지는."
"어제부터 좋아합니다."
엄마 입꼬리가 씰룩했다. 참는 게 다 보였다. 우리 엄마는 포커를 하면 첫판에 집을 날릴 사람이다.
질문이 스무 개쯤 이어졌다. 그는 하나도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
뒷문이 열리고 동생 채훈이 들어왔다. 추리닝에 까치집 머리. 그를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오, 매형?"
엄마 손바닥이 채훈 등에 날아갔다. 짝.
"누가 매형이야, 아직."
"뉴스에서 결혼했다던데."
"뉴스는 뉴스고!"
그가 일어나 채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채훈이 얼떨결에 같이 숙였다. 두 남자가 옷감 두루마리 옆에서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비닐 커튼 너머에서는 탁, 탁,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쉬지 않았다. 아빠였다. 한 번도 안 나왔다.
"아버님께 인사드려도 됩니까."
"오늘은 놔둬요. 저 양반은 속이 풀려야 나와."
그는 다시 앉았다. 다듬이 소리가 날 때마다 단추를 한 번씩 돌렸다. 흰 매듭이 손끝에 걸렸다.
돌아오는 차에서 그가 말했다.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화 아니에요. 아빠는 속상하면 다듬이질을 해요."
"그럼 많이 속상하셨군요. 두 시간 내내 두드리셨으니까."
창밖을 봤다. 신호가 두 번 바뀌었다.
"아빠가요, 제 결혼식 때 입으려고 양복을 한 벌 사 뒀어요. 삼 년 전에. 딸 결혼은 언제 할지 모르니까 미리 사 둔다고."
"……"
"어제는 실밥 묻은 작업복 입고 걸었잖아요. 남의 집 폐백 한복 다리다 말고요. 그게 제일 속상할 거예요."
세 번째 신호 앞에서 그가 물었다.
"그 양복, 아직 있습니까."
"옷장에요. 비닐도 안 뜯었을걸요."
그는 대답 대신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뭔가 적었다. 나는 안 봤다. 보면 물어보게 될 것 같아서. 물어보면 1년짜리 계산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재헌]
일요일 밤 열한 시. 서재.
메모장을 열었다. 아까 적은 줄이 있었다.
장인 양복. 삼 년. 비닐.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으려다 말았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랐다. 1년짜리 사위가 장인의 양복을 걱정하는 건 계약 범위 밖이다. 계약서가 없으니 범위도 없지만.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갔다. 물을 마시러. 그렇게 해 두자.
통유리 앞에 그 나무가 있었다. 버팀이. 어제 저녁 그녀가 붙인 이름.
잎 두 장이 도시 불빛에 거뭇하게 보였다.
나는 부엌에서 물을 한 컵 받았다. 마시지 않았다. 화분 앞에 섰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 봤다. 그녀가 한 대로. 어제보다 덜 말라 있었다. 그래도 말라 있었다.
삼 년 동안 이 나무 앞을 천 번은 지나갔다. 한 번도 흙을 만져 본 적이 없다. 이름이 없었으니까.
물을 부었다. 반 컵.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는 건 어디서 들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흙이 쪽, 소리를 냈다.
"……버티라니까."
나무한테 말을 걸었다. 새벽 한 시만 사람을 헤프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밤 열한 시도 그렇다.
컵을 씻어 제자리에 뒀다. 그녀가 모르게.
[채이]
월요일 아침 여덟 시. 봄빛 뒷문으로 출근했다. 앞문엔 카메라가 세 대.
준수가 음향실에서 손을 흔들었다. 은비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달려왔다. 탁 실장이 주방 창으로 엄지를 들었다.
"야, 사모님이 왜 출근해."
"매니저야. 열한 시에 김 씨 댁 최종 상담 있잖아. 다음 달 첫 토요일 식."
"그 댁 어제 전화 왔어."
은비 얼굴이 굳었다.
"취소한대."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원장님이 받았다. 네, 네. 그러세요. 내려놓자 또 울렸다. 또.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마다 장부에 빨간 줄이 하나씩 그어졌다. 이십 년 동안 볼펜으로 한 칸씩 채운 장부였다. 빨간 줄에 볼펜 똥이 번졌다.
다섯. 여섯. 일곱.
"원장님."
"괜찮아. 가을은 원래 취소도 좀 있어."
"일곱 건이에요."
"……그러게. 일곱 건이네."
원장님이 웃었다. 그 웃음이 제일 아팠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시지.
나는 장부 옆에 섰다. 빨간 줄 일곱 개. 그중 셋은 내가 상담한 집이었다. 한 집은 신부 어머님이 고운 색을 좋아해서 폐백 한복 옷감 견본을 두 번 싸 드렸다. 한 집은 신랑이 하객 수를 다섯 번 바꿔서 도면을 다섯 장 그렸다. 도면은 아직 내 서랍에 있다. 다섯 장 전부.
어제 나는 도원그룹 며느리가 됐다. 오늘 나는 봄빛 예약을 일곱 건 날린 매니저가 됐다. 둘 중 뭐가 더 실감 나는지 묻는다면, 뒤쪽이다. 압도적으로.
은비가 말없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침 일곱 시 기사.
[단독] 도원가 신부 바꿔치기, 우연 아니었다… "동생이 언니 도주 도왔다" 하객 증언
기사 속 사진을 봤다. 신부대기실 문을 등으로 막고 선 나. 큰어머니에게 웃으며 거짓말하던 바로 그 순간.
그 각도는 3층 복도 끝에서만 나온다.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