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식이 끝나고 십 분 만에 내 휴대폰은 난로가 됐다.
신부대기실 거울 앞. 은비가 등 뒤에서 안전핀을 하나씩 빼는 동안 알림이 쉬지 않고 올라왔다.
[도원그룹 후계자 결혼식, 신부가 바뀌었다]
[예식장 직원이 신부로… 도원가 결혼식 대혼란]
"보지 마."
은비가 휴대폰을 뒤집었다.
"하나. 둘. 셋."
들어갈 때처럼 셌다. 나갈 때도 세는 게 예의다.
"여섯. 어, 일곱 번째 안 빠져. 안감에 걸렸어. 가만있어."
가만있었다. 거울 속 나는 아직 신부였다. 속눈썹이 무거웠다. 입술은 은비가 고른 산호색. 내 취향은 아니다. 오늘은 취향 말할 처지가 아니다.
"됐다. 일곱."
은비가 핀 일곱 개를 내 손바닥에 모아 줬다.
"이거 버리지 마. 오늘 너 살린 애들이야."
파우치 안쪽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다른 핀들과 섞이지 않게. 전우는 따로 모신다.
문이 벌컥 열렸다.
"하채이!"
큰어머니였다. 분홍 한복 고름이 반쯤 풀려 있었다. 뒤에서 큰아버지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네가 감히. 우리 세라 자리를."
손이 내 팔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박혔다.
"큰어머니, 언니가 먼저 나갔어요."
"그러니까 기다렸어야지! 냉큼 드레스를 입어? 처음부터 이러려고 이 식장 하자고 꼬셨지?"
"꼬신 적 없어요. 언니가."
"그 팔, 놓으시죠."
낮은 목소리. 문턱에 그가 있었다. 턱시도 재킷을 벗어 팔에 걸고.
큰어머니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저 속도는 우리 홀 조명 전환보다 빠르다.
"아이고, 강 서방. 아니 부사장님. 이게 다 오해라서요."
"제 아내 팔입니다. 놓으세요."
제 아내.
그게 나라는 걸 한 박자 늦게 알았다. 반 박자면 좋았을 텐데. 입장 신호를 한 박자 늦게 주면 신부가 문 앞에서 서 있게 된다. 지금 내가 딱 그 신부였다.
손이 풀렸다. 팔에 반달 모양 자국이 네 개 남았다.
"세라 씨 일은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돌아가 쉬시죠. 백 실장이 모시겠습니다."
큰아버지가 큰어머니 어깨를 끌었다. 나가면서 나를 한 번 돌아봤다. 미안하다는 얼굴. 말은 없었다. 우리 집 남자들은 미안할 때 말을 안 한다. 다듬이를 두드리거나 뒤를 돌아본다.
은비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변 원장님한테 좀. 오 분."
문이 닫혔다. 둘만 남았다.
[재헌]
"팔."
"괜찮아요."
"보여 주세요."
그녀는 소매를 걷지 않았다. 파우치에서 반창고를 꺼내 손톱자국 위에 직접 붙였다. 네 개. 능숙했다. 남의 상처에 붙여 본 손이다.
나는 문에 등을 기댔다.
"이제 정해야 합니다."
"네."
"기사가 나갔습니다. 당신 이름까지. 내일 신부가 사라지면 오늘보다 더 떠듭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
"1년만 해 주세요. 부부로."
그녀가 나를 봤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표 선임은 가을입니다. 호텔 40주년 연회 날. 그 뒤로 몇 달. 사람들이 잊을 만큼. 그게 1년입니다."
"그다음은요?"
"조용히 끝냅니다. 당신한테 불리한 말은 한 줄도 안 나가게."
"조건이 있어요."
"말하세요."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예식 견적 설명하는 손 같았다.
"하나. 저 봄빛 계속 다녀요."
"좋습니다."
"둘. 저희 한복집이랑 가족은 건드리지 마세요. 기자든 누구든."
"약속합니다."
"셋. 방은 따로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참았다. 눈을 내리깔았다. 참는 얼굴은 들키기 쉽다.
"당연히."
"그쪽 조건은요?"
"공식 자리엔 같이 나갑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봤다.
"밖에선 다 거짓말이어도, 서로한테는 거짓말하지 않기."
그녀가 그 말을 입안에서 한 번 굴리는 게 보였다.
"……종이에 쓰진 않아요?"
"말로 합니다. 종이는 남으면 증거가 되니까."
"그럼 말로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잡았다. 식장에서만큼 차갑지 않았다. 내 손이 데워진 건지 그녀 손이 데워진 건지는 모르겠다.
복도에서 발소리. 누군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문틈 너머 계단참에 회색 양복 등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귀에 흰 이어폰.
"기자인가. 3층은 막았는데."
문을 열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백 실장한테 확인하라고 하죠."
그러고 둘 다 잊었다. 그날은 잊을 게 너무 많았다.
말로 한 약속이 종이보다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 폐백실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 폐백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대추, 밤, 육포, 구절판. 그리고 상 옆 옷걸이에 아빠가 새벽에 다려 둔 폐백 한복. 원삼 소매에 씌운 비닐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폐백은 생략했다. 양가 어른이 한 분도 앉을 수 없는 식이었다. 큰집은 원장실에서 씩씩거렸고, 도원 쪽 어른들은 기자를 피해 먼저 떠났다.
"이건 뭡니까."
그가 뒤에서 물었다.
"폐백상이요. 식 끝나고 신부가 시댁 어른들께 절하는 자리. 어른들이 대추랑 밤을 던져 주시면 신부가 치마로 받아요. 받은 개수만큼 자식을 낳는다고."
"……미신이군요."
"네. 근데 다들 열심히 받아요. 치마 넓게 펴고."
그가 상 앞으로 걸어갔다. 대추 하나를 집었다. 한참 들여다봤다. 저 사람은 뭐든 결재 서류 보듯 본다.
"이건 버립니까."
"직원들이 나눠 먹어요. 아까우니까."
그가 대추를 입에 넣었다. 씹었다. 표정이 안 변했다.
"……달군요."
"단 건 안 드신다면서요."
"오늘은 예외가 많은 날입니다."
나도 하나 집었다. 폐백실 문턱에 서서 우리는 대추를 하나씩 먹었다. 던지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이. 폐백 없는 폐백실에서 신랑 신부가 대추를 몰래 먹는 건 봄빛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원장님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로비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아빠가 앉아 있었다. 개어 넣은 원삼 가방을 안고.
"아빠."
"응."
"……엄마는?"
"가게. 전화 서른 통 했다더라. 너 안 받아서 나한테."
아빠가 일어나 그를 봤다. 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재헌입니다."
"……네."
아빠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한마디도 안 했다. 대신 옷 가방 앞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 줬다.
"우리 애,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누룽지 한 봉지였다. 설탕이 살짝 뿌려져 있었다. 아빠는 그 말만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등이 작았다. 삼 년 전 양복을 사 왔을 때는 그 등이 좀 더 컸던 것 같은데.
[재헌]
차 안에서 그녀가 누룽지를 먹었다. 부스러기가 떨어질까 봐 손바닥을 턱 밑에 받쳤다. 두 조각째에서 봉지를 내밀었다.
"드실래요?"
"단 건 안 먹습니다."
"누룽지는 안 달아요. 설탕이 조금 달지."
봉지가 거둬지지 않았다. 하나 집었다.
바삭했다. 고소했다. 조금 달았다.
"……괜찮네요."
"저희 엄마 누룽지예요. 새벽 네 시에 가게 난로에 솥 올려 눌렀을 거예요. 아빠 다림질하는 옆에서."
그녀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묻지 않았다. 룸미러 속 백 실장도 묻지 않았다.
[채이]
도원가 본가는 언덕 위 한옥이었다. 대문이 우리 한복집 가게만 했다. 대문 하나에 한복집 하나. 계산이 빨리 끝났다.
홍옥란 회장님은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흰머리를 쪽 찌고 옥색 저고리. 여든둘이라는데 등이 꼿꼿했다.
"앉아라."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는 한참 나를 봤다. 얼굴보다 손을 오래. 반지의 흰 실에서 눈이 멈췄다.
"실은 네가 감았느냐."
"네. 헐거워서요."
"몇 바퀴."
"열 바퀴요."
할머니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한복집 둘째 손녀가 맞구나. 너희 할머니도 그렇게 감았다."
"……저희 할머니를 아세요?"
대답 대신 찻잔이 올라갔다. 이 집에서는 대답이 찻잔에 담겨 나오는 모양이다.
"신부가 걸음을 잘 걷더구나. 떨면서도 박자를 안 놓치고."
"오 년 동안 남의 박자를 맞춰 드렸거든요."
"오늘부터 너는 이 집 사람이다. 재헌이 집으로 들어가라."
"네?"
"기자들이 레지던스 앞에 와 있다더구나. 신혼부부가 첫날밤 따로 자면 내일 아침 그게 기사다."
옆을 봤다. 그는 표정이 없었다. 무릎 위 손이 단추를 찾고 있었다. 저 사람은 당황하면 소매가 바빠진다. 벌써 두 번 봤다.
할머니가 문턱에서 돌아봤다.
"그리고 채이야. 할머니라고 불러라. 너희 언니는 끝까지 그렇게 못 부르더구나."
할머니가 나가자마자 마루 끝에서 단발머리가 쏙 나왔다. 후드티를 입은 젊은 여자.
"끝났어? 할머니 가셨어? 안녕하세요! 강소율이에요. 오빠 동생. 저 오늘 뒤에서 세 번째 줄. 면사포 올라갈 때 소리 질렀어요. 좋아서요."
속도가 우리 엄마급이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원래 언니 될 분은 저랑 말을 한 번도 안 했거든요. 부케 직접 묶으셨죠? 테이블 꽃이죠?"
"……네."
"대박. 오빠, 나 이 언니 좋아."
그녀는 내 번호를 받아 가더니 저장 이름을 «새언니»라고 써서 보여 줬다.
대문 앞에서 내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 서른한 번째. 받았다.
"하채이! 너 결혼했어? 뉴스에서 네가 결혼했대! 네 아빠는 원삼 가방 들고 와서 울기만 하고!"
휴대폰을 귀에서 한 뼘 뗐다. 그 한 뼘으로 옆 사람까지 다 들었다.
"엄마, 내일 가서 다 말할게. 오늘은 이사해야 돼."
"이사? 어디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을 달라는 뜻. 망설이다 건넸다.
"어머님. 강재헌입니다."
전화 너머가 뚝 끊긴 듯 조용해졌다. 엄마를 조용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
"오늘 따님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따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내일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밤은 제 집에서 지냅니다. 방은 따로 씁니다."
삼 초 뒤. 엄마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누룽지 좋아하세요?"
"오늘 처음 먹어 봤는데, 좋았습니다."
"……내일 와요. 누룽지 새로 눌러 둘게."
끊겼다.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를 봤다.
"우리 엄마가 전화를 먼저 끊은 거 처음 봐요. 먹는 얘기는 우리 엄마가 항복할 때 하는 말이에요."
"그럼 내일은 누룽지를 먹겠군요."
검은 차가 대문 앞에 섰다. 차에 오르기 전에 왼손을 내려다봤다. 흰 실 감은 반지가 저녁 햇빛에 반짝였다.
오늘 아침 이 반지는 언니 거였다.
지금은 1년짜리 내 거였다.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