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준은 담담한 어투로 건정제의 신경을 자극했다. 건정제가 방금 싸늘한 미소를 지은 것만 보아도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정제는 누구에게도 제위를 위협할 만한 여지를 주지 않는 군주였다.건정제는 붓을 든 채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고작 남이 네 마음에 둔 여인을 가로챘다고 해서, 짐의 앞까지 달려와 이리도 장황하게 모함을 늘어놓는 것이냐?"건정제의 안색은 처음의 여유롭던 기색이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방금 조원철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조원철을 수도 없이 의심해 왔다. 다만 그때마다 꼬투리를 잡을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서준은 입꼬리를 올려 특유의 거침없고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자가 드릴 말씀은 다 드렸으니, 판단은 아바마마께서 하십시오."그의 목적은 건정제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을 심어 두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의심이 많은 건정제의 성정상 그 씨앗이 머지않아 거대한 나무로 자라날 터였다. 결국 강유영과 조원철의 혼사는 성사될 수 없을 것이다.건정제는 붓을 든 채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붓끝에서 떨어진 먹물이 상소문 위로 시커멓게 번져 나갔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때 어린 내관이 다시 들어와 아뢰었다."폐하, 경화 공주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건정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익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며 말했다."어찌하여 하나같이 다들 이 시각에 찾아오는 것이냐? 들라 하거라."그는 상소문에 떨어진 먹물도 닦아 내려 했으나, 이미 종이 위에 깊이 스며든 먹물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경화 공주는 서준을 보고 힐끗 눈길만 준 뒤, 일부러 그를 지나쳐 앞으로 나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소녀, 아바마마께 문안드립니다."건정제는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한쪽으로 던져 두며 물었다."서왕을 보고도 인사 한마디 없구나. 너는 또 이 시각에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 자신전 안은 숨이 막힐 듯 무더웠다.전각 곳곳에 놓인 얼음 화로가 서서히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건정제는 어안 앞에 단정히 앉아 차분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상소문을 살피고 있었다.밖에서 내관이 들어와 아뢰었다."폐하, 서왕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건정제는 고개를 들어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고익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시각에 서왕이 어쩐 일로 입궁했단 말이냐?"고익은 공손히 미소를 띠며 답했다."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폐하가 그리우셔서 문안을 드리러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그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을 골라 답할 수밖에 없었다.건정제는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아래에 엎드린 어린 내관에게 명했다."그 아이가 말이지? 별일이 없다면 이 시각에 입궁할 리가 없는 녀석이니 들라 하거라.""예."어린 내관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린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서준은 성큼성큼 전각 안으로 걸어 들어와 상석에 앉은 건정제를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소자, 아바마마께 문안드립니다."그는 평소처럼 건들거리던 기색을 완전히 지운 채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건정제는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이 시각에 어쩐 일로 입궁했느냐?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니 짐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서준은 다시 한번 예를 갖추며 답했다."아바마마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건정제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네가 이토록 진지한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서준은 미간에 서늘한 기운을 띤 채 고개를 들어 건정제를 바라보며 물었다."조원철이 혼사를 정했다는 소식은 아바마마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건정제는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그 일은 짐도 알고 있다. 상대는 공혜 부인이 새로 되찾은 딸이자, 본래 진국공부의 양녀였던 아이지."서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아바마마께서는 아시면서도 막
조원철은 눈가에 옅은 웃음을 띠었다.강유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그분은 제 어머니십니다."조원철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네 어머니가 곧 내 어머니 아니겠느냐."강유영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살짝 내밀며 그를 흘끔거렸다. 언제부터 이리 능청스러운 말주변을 배웠는지 신기했다.조원철은 두 손으로 그녀의 두 뺨을 감싸고 시선을 내려 바라보며 물었다."왜 화가 났느냐? 내가 찾아오지 않아서 서운했던 것이냐?"강유영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그 말을 듣자 다시 서운한 기색이 눈가에 어렸다."다 아시면서 뭘 또 물으십니까."조원철은 차분하게 설명했다."형주에 처리할 공무가 있어 다녀오느라 이제야 돌아왔다."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먼 길을 다녀오시면서 어찌 사람이라도 보내 제게 일러 주지 않으셨습니까?"그녀는 그가 출타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원철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말했다."그리 먼 곳이 아니라 본래 이틀 안으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괜히 네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일이 생기는 바람에 시일이 지체되었구나."원래도 크게 화가 났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자상한 설명을 듣자마자 굳어 있던 얼굴이 눈 녹듯 풀렸다.조원철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여기는 밖이지 않습니까!"그녀는 죄지은 사람처럼 까만 눈동자를 굴려 좌우를 살폈다.조원철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화가 다 풀렸느냐?"강유영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고 짐짓 새침한 얼굴로 답했다."처음부터 진심으로 화난 건 아니었습니다."조원철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화가 나지 않았다면서 아까 대청에서는 어찌 내 쪽으로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느냐?"강유영은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공혜 부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네. 내가 직접 나서서 유영이가 진국공부에 지낼 때부터 남몰래 세자를 연모해 왔다고 말을 꺼내는 거지. 이제 딸을 되찾았으니 어미로서 딸의 소원을 들어주어 혼사를 성사시키겠다고 하면 어떻겠는가?"조원철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보며 답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유영이가 괜한 비난을 들을까 봐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먼저 연모한 쪽은 저이니까요."강유영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려 그의 눈빛을 피했다.그녀는 조원철의 그 한마디만으로도 조금도 억울할 것이 없었다. 사실 그녀도 아주 오래전부터 남몰래 그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연모해 왔었다.공혜 부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내 눈앞에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지 말거라. 이 일에 다른 의견이 없다면 이대로 결정하겠네."조원철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강유영은 한층 더 붉어진 얼굴로 입술만 살짝 깨물었다.공혜 부인은 조원철에게 물었다."세자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혹시 폐하께서 혼사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있는가?"조원철은 담담하게 답했다."몇 차례 물으신 적이 있고, 며칠 전에도 언급하셨습니다."공혜 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이치대로라면 폐하께서 관심을 두셨으니 혼인하기 전에 먼저 아뢰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폐하께서 중간에 훼방을 놓으실까 염려되니 우선은 말씀드리지 말게. 혼사가 완전히 결정되어 소문이 다 퍼지고 나면 그때 내가 직접 입궁하여 폐하께 말씀드리겠네."조원철은 흔쾌히 답했다."모두 부인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공혜 부인은 웃음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눈치가 참 빨라서 좋군."강유영은 뭉클해진 눈빛으로 공혜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는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의 짐을 크게 덜어 준 셈이었다.공혜 부인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식구끼리 새삼스럽게 예의차릴 것 없다. 진심으로 내
창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유가 안을 향해 말했다."아씨, 공혜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강유영은 짧게 답하며 빠른 걸음으로 창고를 나섰다."지금 나가마."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시녀는 강유영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서둘러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군주님을 뵙습니다."강유영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예는 되었다. 어머니께서 무슨 일로 너를 보내셨느냐?"그녀는 시녀의 이름은 몰랐으나 공혜 부인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시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답했다."부인께서 군주님을 모셔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진국공 세자께서 저택에 찾아오셨는데, 의논할 중대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강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다. 너는 먼저 돌아가 있거라. 나는 주변을 좀 정리하고 곧장 뒤따라가마."어젯밤 공혜 부인은 조원철을 불러 두 사람의 혼사를 의논하겠다고 했었다. 그녀는 아직 오전인데도 벌써 조원철을 저택으로 불러들인 공혜 부인의 추진력에 새삼 감탄했다.잠시 후 강유영은 영안군부로 돌아왔다.황씨 어멈은 반갑게 마중을 나오며 말했다."오셨군요, 군주님. 부인과 세자께서 대청에서 군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예, 알겠어요."강유영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한 뒤,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대청 안의 상석에는 공혜 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님석에 앉아 있던 조원철은 돌아온 강유영을 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유영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무릎을 살짝 굽혀 공혜 부인에게만 예를 올렸다."어머니, 다녀왔습니다."공혜 부인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왔느냐? 이리 앉거라."강유영은 조원철의 아랫자리에 조용히 앉았다.맞은편에 앉을 수도 있었으나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혼사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빨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할 것 같았다.게다가 그녀는 아직 그에
공혜 부인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네 말을 들어보니 조 세자에게 시집가고 싶은 모양이구나?"강유영은 속마음을 들키자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귓불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공혜 부인은 다시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그럴 거면 조 세자를 이곳으로 데려와 함께 살거라."강유영은 입술을 오므린 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조원철이 매일 이곳에 와서 지내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되면 조원철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셈이나 마찬가지라 사뭇 우스웠다.공혜 부인은 그녀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무엇이 그리 우스우냐?"강유영은 시선을 내리깔며 얌전한 얼굴로 답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공혜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내일 조 세자를 불러 의논할 테니, 너는 일찍 쉬거라."강유영은 앞으로 다가서며 공혜 부인의 팔을 부축해 나란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제가 배웅해 드릴게요."공혜 부인은 그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강유영은 공혜 부인을 처소 문밖까지 배웅했다.밖으로 나온 공혜 부인은 곁에 있는 황씨 어멈에게 물었다."유영이는 들어갔느냐?"황씨 어멈은 뒤를 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부인, 군주님께서는 아직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부인께서 멀어지실 때까지 배웅하려는 모양입니다."공혜 부인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참하고 정 깊은 아이로구나."황씨 어멈은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제가 보기에도 군주님께서는 참 좋은 분이십니다."공혜 부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창고에 내가 미리 마련해 둔 혼수품들을 정리해서 목록으로 만들어 두거라."황씨 어멈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멈칫하며 물었다."부인, 그 귀한 물건들을 군주님의 혼수로 내어 주시려는 겁니까?"공혜 부인은 어린 딸을 잃어버린 뒤로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긴 세월 동안 딸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그녀는 딸이 자라며 입을 사계절 옷을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정성껏 지어 두었고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