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 소식을 전해 들은 김지숙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강민재라고…?”
명실상부 업계 1위 건설사를 이끄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젊은 기업인.
경제지마다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 자신의 딸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김지숙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한편 그 이야기를 들은 유지원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민재. 그 이름이 주는 무게는 분명 달랐다. 이진성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강민재와 비교되는 순간 그 존재감은 한없이 작아지는 듯했다.요즘 들어, 모든 일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기분.
마치 평생 받을 행운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지원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약속 날이 되었다. 유지원은 이 날을 위해 평소보다 훨씬 공을 들였다. 옷차림부터 메이크업, 헤어까지 작은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스스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완벽했다. 오늘만큼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장 빛나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고급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유지원의 표정이 한층 더 여유로워졌다. 모든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오늘의 만남을 향해 걸어갔다. 강민재 역시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설레고 긴장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닮은 화이트튤립과 카라가 믹스된 꽃다발을 준비했고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밤새도록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천하의 강민재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강민재는 그 자체로 시선을 끌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존재감. 배우라 해도 믿을 만큼 또렷한 이목구비에, 흠잡을 곳 없이 떨어지는 수트 차림.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조차 어딘가 완성된 장면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머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한눈에 알아본 유지원은 순간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떨리는 가슴을 겨우 눌러 담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저기, 혹시 강민재씨 이신가요?”
조심스럽게 건넨 인사.
강민재는 고개를 돌려 유지원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의문만 담겨 있었다. 유지원은 그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표정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대한병원 이사장님 손녀, 유지원입니다.”
강민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어긋났다는 걸 직감했다.
‘손녀딸은… 한 명 아니었나.’
그가 알고 있는 정보와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날 파티에서 마주친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던 걸까. 강민재는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 만남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이미 확신한 듯했다.“…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담담하게 말을 꺼낸 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
“식사는 하고 가십시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대로 쥔 채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유지원의 표정이 굳었다. 황당함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일방적으로 자리를 정리당한 기분.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집으로 향하던 강민재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뭔가 어긋난 느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회사로 가죠.”
짧게 방향을 바꾼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몇 달을 기다린 만남이었는데, 결국 그녀는 아니었다. 강민재는 대체 그 여자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누구인지 이후로도 계속 찾아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대한병원 손녀딸 아니었어요?”
그 이상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두달 동안 강민재는 회사 일은 완벽히 해내면서도 그녀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마치 연기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그러던 중, 강두수 회장의 지시로 미국 지사 설립 자본 문제를 맡게 된 강민재는 결국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미국 세인트 존 메디컬센터.
붉은 벽돌 건물들이 이어진 캠퍼스와 고요하지만 긴장감이 흐르는 복도.
세계 각국에서 모인 의료진들이 분주히 오가고, 최신 장비가 갖춰진 수술실과 연구실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결과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그 안에서 유봄은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술실에서는 흐트러짐 없는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움직였고, 연구실에서는 자료를 정리하며 한 줄 한 줄 꼼꼼히 확인해 나갔다. 말수는 적었지만, 집중한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이곳에서 유봄은 더 치열하게, 그리고 더 깊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여유가 생긴 날, 유봄은 이곳에서 친해진 샐리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병원을 나서자, 익숙해진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 볼티모어. 붉은 벽돌 건물들이 길게 이어지고, 오래된 건물과 현대적인 시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곳. 항구 쪽으로 가면 잔잔한 물 위로 저녁 노을이 퍼지고, 거리에는 조용한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번화한 대도시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차분하고 묵직한 분위기. 유봄은 잠시 걸음을 늦추며 그 풍경을 바라봤다. 마침 투자 파트너들과의 협상을 끝낸 강민재는 잠시 숨을 고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멈췄다. 그토록 찾고 있던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순간, 강민재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처럼, 눈빛이 선명하게 반짝였다.‘드디어…’
몇 달 동안 찾아 헤매던 얼굴.
그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민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유봄을 바라봤다. 그날도 분명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그녀는 달랐다. 조용한 도시의 저녁과 어우러진 모습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묘한 분위기까지 담고 있었다.김지숙은 유재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한다. 유재원은 김지숙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만 정리는 해야 할 것 같아 약속 장소로 나간다.카페 구석 자리.유재원은 먼저 와 앉아 있었다.문이 열리고 김지숙이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김지숙은 그를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의자에 앉자마자 손을 모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제가 잘못했어요.저는… 정말로 지원이가 당신 딸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유재원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이제는”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당신이 어떤 말을 해도 난 믿을 수가 없어.”김지숙의 어깨가 움찔했다.“당신의 그 뻔뻔한 거짓말로… 봄이 엄마와 봄이는 불행하게 살았어.”그의 눈에 서늘한 분노가 번졌다.“당신의 행복 하나 지키겠다고 다른 사람 인생을 통째로 무너뜨렸어.”“그게 아니에요”“아니긴 뭐가 아니야.”그가 말을 끊었다.“난 당신을 용서 못 해.”한 단어, 한 단어가 칼처럼 떨어졌다.“당신 때문에 난…봄이 엄마나 봄이에게 평생을 사죄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됐어.”김지숙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그래도 우린 부부였잖아요.당신, 나 사랑한 거 아니었어요? 겨우 잘못 한번 한거잖아요”유재원이 허탈하게 웃었다.차가 식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유봄은 차트를 넘기며 VIP 병동 복도를 걸었다.며칠 전 인공로봇수술을 집도했던 환자, 한국대학교 원로교수 안기철의 병실 앞에 멈춰 섰다.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노교수가 고개를 들었다.“교수님, 오늘은 좀 어떠세요?”안기철은 주름 깊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자네가 수술해줬는데 괜찮지 않을 수가 있나?덕분에 통증도 많이 줄었네.”“회복 경과 아주 좋으세요. 수술 부위도 깨끗하고요.”그는 한참 유봄을 바라보더니 문득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말이야, 아직 결혼 전이면… 우리 아들 한 번 만나볼 생각 없나?”뜻밖의 말에 유봄이 웃음을 터뜨렸다.“교수님 아드님이면… 정형외과 안영찬 교수님 말씀이세요?”“그래, 그래! 그 녀석도 자네처럼 공부만 해서 아직 여자가 없어.집에 오면 연구 이야기밖에 안 한다니까.”유봄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안영찬 교수님 여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으신데요? 그럴 리가요. 다시 알아보세요. 분명 있으실 거예요.”“없다니까. 내가 아비인데 모르겠나.”“저한테까지 기회가 안 올걸요.”농담처럼 말하자 안기철의 병실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유봄은 차트를 덮으며 말했다.“회복 속도 보니까 이틀 뒤엔 퇴원하셔도 될 것 같아요.식사 잘하시고, 조금씩 걷는 운동도 하세요.”“알겠네, 우리 주치의 선생.”그는 흐뭇한 눈으로 유봄을 바라봤다.유봄은 정중히 고개
호텔방은 지나치게 조용했다.조금 전까지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왔다는 사실이 현실감 없이 공기 속에 떠 있었다.캐리어는 대충 벌려져 있고 옷은 반쯤 쏟아진 채였다.김지숙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창가에 서 있었다.“이게 다 강철수 그 인간 때문이야.그 인간만 아니었어도”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내가 가만 안 둬.”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유지원은 그 말을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왜 그랬어.”김지숙이 돌아봤다.“뭐가.”“왜 친아빠 버리고 그 집으로 가서 내가 친딸이라고 거짓말했어.”목소리가 갈라졌다.“이게 뭐야, 지금.다 끝났잖아.”김지숙의 얼굴이 굳었다.“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다 너 때문이야.네가 잘됐으면, 네가 똑바로 했으면 병원에서 쫓겨났겠어?”그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유지원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의사도 아니고, 집도 없고, 아버지도 사라졌고 자신이 서 있던 자리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김지숙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일단 나가서 밥부터 먹자.이러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거 없어.”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엄마가 그동안 챙겨둔 돈이 있어.조그만 아파트 하나는 살 수 있어.다시 시작하면 돼.”
전화가 끊기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수술 케이스가 펼쳐진 책상 위로 스탠드 불빛만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유봄은 한동안 휴대폰을 쥔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할아버지의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우리 봄이 얼마나 외로웠을꼬…그 한마디가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엄마가 떠난 날 이후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거실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들렸다.김지숙과 유지원, 그리고 아버지 유재원의 웃음.그 웃음은 자신을 향한 적이 없었다.유봄은 조용히 방문을 조금 열고 그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소파에 나란히 앉아 과일을 먹으며 웃던 세 사람.아버지는 유지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웃음은 예전엔 자신의 것이었다.그걸 깨닫는 순간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아무도 모르게 다시 방문을 닫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물고 베개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던 밤들.“아빠…”불러도 오지 않는 이름을 속으로만 수십 번 되뇌었다.그 어린아이는 슬프다고 말하는 법도 몰랐다.더 미원할까 봐,혹은 더 싫어질까 봐.그 시절의 공기가 지금 이 방 안으로 스며든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유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아파트 거실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밤의 한강이 보였다.잔잔한 물 위에 도시의 불빛이 길게 흔들리고 있었다.저 물은 저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는데 자신의 시간은 그날 이후로 한동안 멈춰 있었던 것 같았다.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한 번,그리고 또 한 번.“괜찮아&he
서재는 적막했다.불도 켜지 않은 채, 유재원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어린 유봄이 그의 넥타이를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아직 앞니가 다 나지 않은 채, 아빠를 세상 전부처럼 바라보던 눈.그 눈을, 그는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퇴근하면 현관까지 달려 나오던 작은 발소리.“아빠!” 하고 매달리며 하루 있었던 일을 숨도 안 쉬고 떠들던 목소리.그때 옆에서 웃으며 말하던 여자.최진희.수술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환자 차트를 들여다보던 아내.어려운 케이스를 두고 밤늦도록 의논하던 동료.수술이 성공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의 어깨를 안아주며 “수고했어요” 하고 웃어주던 사람.그 여자가, 어느 날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그 여자… 어떻게 할 거예요.”김지숙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최진희는 끝내 말했다.“당신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체념이었다.자신을 붙잡지 않는, 그저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지막 배려였다.그런데 그는 그 배려를 짓밟고 돌아섰다.김지숙의 말만 믿고.눈물과 연기를 진심으로 착각하고.자신의 딸도 아니었던 아이를 위해 자기 피로 태어난 딸을 밀어냈다.사진 속 유봄이 웃고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는 웃지 않았다.조용해졌고, 묻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다.“아버지에겐… 아무 기대도 없어요.”차갑게 말하던 딸의 목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유재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현관에 서 있던 김지숙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지원이 일은”“앉아.”짧고 낮은 말.김지숙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혹시 유지원에게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유재원은 말없이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당신… 나한테 속인 거 없어?”김지숙의 눈이 흔들렸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내가 왜 속여요? 무슨 말이에요.”유재원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유전자 검사 결과지.김지숙의 손이 떨렸다.한 줄 한 줄 내려가던 시선이 ‘불일치’라는 단어에서 멈췄다.“이, 이게 뭐예요…? 조작이잖아요. 이거 강철수 그 인간이 준 거죠? 그 사람 말 믿지 말아요!”“내가 했어.”차갑게 잘린 말.유재원은 손가락으로 결과지의 수치를 짚었다.“여기. 0. 전부 0이야.”그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당신이 인간이야?”김지숙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당신 행복하려고 몇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거야!”유재원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당신 때문에 내가… 내가…”말을 잇지 못했다.그동안 믿었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