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눈앞에서 강민서가 다다미 소파를 방으로 옮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집을 돌아다녔지만 잘 곳이 소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긴 그의 집이었다. 심지어 집안엔 도우미도 두 명이나 살고 있었다. 집주인인 그가 소파에서 잔다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강한서는 안방 앞을 서성이며 몇 번이나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시 거두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현진이 잠옷을 입고 걸어 나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문 앞에서 이미 30분을 서성였어요. 저랑 같이 잘지, 고민은 끝났어요?”잠시 말이 없던 강한서가 대답했다. “한현진 씨와 자는 게 아니에요.”그가 한현진의 말을 정정했다. “아하.”강한서의 말에 대꾸한 한현진이 곧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합방이겠네요.”“...”강한서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민서가 제 서재에 있던 다다미 소파를 자기 방으로 옮겨서 제가 잘 곳이 없어요.”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하룻밤만 대충 자죠. 내일 침대를 가져오라고 할 거예요.”한현진은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자리를 비켜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들어와요.”옷깃을 끌어 내리며 심호흡하던 강한서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한현진은 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자 강한서가 이불을 안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현진이 그런 강한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침대에서 자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무리하지 마요.”강한서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현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에 느껴지던 거부감은 점점 더 사그라들었고 그는 오히려 ‘지난번처럼 손이 차지는 않아서 다행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강한서는 한참 만에야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요.”한현진이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
송가람은 한현진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별로 좋은 얘기들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돌아온 후 송민준이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거나 송병천이 한현진에게 방을 바꿔주라고 했다거나, 혹은 한현진이 싸구려 물건들로 2억이 넘는 인테리어 소품을 가져갔다는 그런 얘기뿐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강한서는 한현진이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만나보고 싶다. 그런 이유로 송가람이 없단 어느 날엔가 강한서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당시의 그는 한현진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몰랐지만 그녀를 본 순간 눈앞의 여자가 바로 한현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한성 그룹 밖에는 단정한 옷차림의 한현진이 로우번을 한 채 건물 밖으로 나와 박부자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한현진은 조막만 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메이크업으로도 하긴 했지만 눈 밑에 서린 피곤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송가람이 말하던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한현진은 마치 화려한 장미나 모란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강한서는 마음이 간질이는 듯한 기분에 한현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송가람이 어디냐며 전화가 와서야 그는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송가람은 강한서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자신이 강한서의 곁에 없을 때도 그녀는 병실에 최소한 두 명을 붙여 강한서를 돌보도록 했다. 돌본다기보다는 감시에 가까웠다. 강한서가 매일 뭘 했는지,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송사람에게 보고했다. 강한서는 송가람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애써 모른 척하며 몰래 한현진을 만나러 간 일을 송가람에게 숨겼다. 그땐 다친 곳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고 많은 일들이 파악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당시의 강한서에겐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송가람은 결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한현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강한서
한현진이 조향에 대해 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부분을 채워가고 있었다. 책을 몇 페이지 뒤적이던 강한서는 안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는 책을 다시 덮어 협탁에 올려두고는 휴대폰을 꺼내 민경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쪽으로 연락 좀 넣어줘요...]강한서가 민경하에게 일을 지시하고 톡을 마무리하자 한현진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게임에 접속 중인 채로 켜져 있었고 누군가 한현진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강한서는 그녀의 휴대폰을 훔쳐볼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힐끔 시선을 돌렸을 때, 화면에 문자 알람이 떴다. [누나, 카톡 친추해요.]멈칫, 행동을 멈춘 강한서가 대화창을 클릭했다. 문자를 보낸 건 “한현진 일반인 남친”이라는 아이디의 사람이었다. 아이디를 확인한 강한서는 곧 방금 한현진과 게임을 하던 소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강한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문자를 보낸 상대방은 한현진이 답장이 없자 또 곧 자기 연락처를 보내왔다. [누나, 연락처 저장해요. 나중에 또 같이 게임해요. 제가 랭크 티어 올려드릴게요.]강한서는 어쩐지 조금 화가 치밀었다. 그는 자기 휴대폰을 가져와 연락처를 저장했다. 그리고 곧 상대방이 강한서의 친구 추가를 수락하고는 문자를 보냈다. [누나예요?]강한서가 도도한 태도로 답장을 보냈다. [응.]상대방은 부끄러움을 표현한 이모티콘을 보내더니 그에게 물었다. [누나도 현진 누나 팬이에요?]그와 차미주는 한현진의 팬클럽 채팅방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차미주가 한현진의 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차미주가 소개한 사람 역시 한현진의 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뭇거리던 강한서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응.]소년은 또 강한서 같은 꼰대는 알아보지 못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고 강한서는 미소 짓는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 소년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살의가 곧 상영하잖아요. 요즘 제작사에서는 여
휴대폰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강한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화면에는 탈색한 머리가 보였다. 상대방은 멋있어 보이려고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든 소년은 눈앞에 나타난 잘생긴 성숙한 남자의 얼굴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입은 연 그는 목소리마저 삑사리가 났다. “누나?”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력이 안 좋은 건가? 남녀 구분도 안 되나 봐?”그의 말에 소년은 말이 없었다. “아니, 아저씨. 방금 게임에서는 음성변조로 저랑 대화한 거예요?”소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연기를 너무 잘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마터면 순수한 제 마음을 뺏길 뻔했다고요.”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소년이 멈칫하더니 얼른 말을 바꿨다. “형, 형님.”강한서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소년은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워낙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소년은 누구와도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형님도 현진 누나 팬이에요?”강한서가 말했다. “난 한현진 씨 전남편이야.”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년은 당황했다. “형님이 전남편이면 그럼 전 전남친이에요. 전남편 형, 처음 뵙겠습니다.”“...”강한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자식, 어디 모자란 거 아냐?’소년도 생각했다. ‘나보다 더 한 놈이 있네. 전남편? 꿈도 야무지지. 난 기껏해야 남동생이나 되고 싶은 것뿐인데.’“형, 외모랑 게임 스킬이 너무 안 어울리시는데요. 외모만 봐선 최소한 마스터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실제론 고작 다이아몬드이시잖아요. 혹시 연세가 있으셔서 반응속도가 느리신 거예요?”멈칫한 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너 재밌으라고 놀아준 거야.”그 말에 소년이 순간 흥분하며 말했다. “말싸움엔 지지 않으시네요. 빨리 한 번 붙어봐요. 전남편이 나은지 현남친이 나은지 겨뤄보자고요.”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게임 접속이나 해.”강한서가 카톡으
[그러면 바꿔.]소년은 억울함에 입을 삐죽였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오늘은 형이 이겼어요. 내일도 해요. 내일은 제가 꼭 이길 거예요.][얼른 바꾸기나 해.]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 강한서의 “한현진 일반인 남편”이던 아이디가 한현진 현남친”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왜 이따위로 바꾼 거야?]소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형님이 바꾸라고만 하셨지 뭐로 바꾸라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강한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말이 없었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까지 덕질을 하세요. 그냥 아무렇게나 닉네임 지은 것도 질투하시는 거예요?]질투라는 두 글자가 강한서의 귀에 꽂혔다. 그리고 그는 순간 오늘 밤 자기가 했던 이상한 짓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소년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바꿀래?]소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한 판만 더 해요. 형님이 이기시면 바꾸라는 대로 바꿀게요.]그리고 때마침 한현진이 욕실에서 나왔다. 강한서는 다급하게 [내일]이라고 답장하고는 휴대폰 화면을 잠갔다. 드라이까지 마친 한현진은 침대 끝에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휴대폰 화면이 여전히 켜져 있는 것을 본 한현진은 게임을 끄려고 휴대폰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녀는 “한현진 일반인 남편”이라는 아이디가 자기를 삭제한 것을 발견했다. “...”‘랭크 티어 올려준다며?’‘역시, 남자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나이 많은 놈이고 어린놈이고 똑같아.’게임을 끈 한현진은 휴대폰를 충전해 놓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에선 갓 샤워를 마친 싱그러운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옆에 기대어 앉아 있던 강한서는 조금 긴장되는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책을 넘기는 척했다. 침대에 몸을 뉜 한현진이 몸을 돌려 강한서를 마주했다. “아직도 안 자요?”피곤한 듯 나른한 목소리였다. 강한서는 도무지
종업원은 예의가 없이 말을 내뱉었고 말투를 들어보니 그 여자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송민준은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모욕적인인 발언이 담긴 단어 몇 개는 들을 수 있었다. 뻘쭘한 표정을 짓는 여자를 보니 아마도 그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송민준은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손은혜 씨 되시나요?”고개를 돌려 송민준을 쳐다본 여자의 얼굴에 놀라움과 경계가 가득했다. “누구시죠?”송민준인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입니다.”멈칫하던 여자는 그제야 송민준을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네가 그때 그 남자아이니?”송민준은 그녀의 말에 대답 대신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앉아서 얘기하시죠.”손은혜는 불편한 듯 쭈뼛거리며 송민준을 따라 룸으로 들어갔다. 룸에는 송민준 외에도 백인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건장을 체격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는 겉보기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손은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손은혜 씨, 앉으시죠.”송민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손은혜는 품에 안은 가방을 꼭 끌어안으며 잔뜩 겁먹은 채 송민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송민준이 손은혜에게 뭘 마시겠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난 마실 건 필요 없어. 나에게 약속한 돈, 정말 줄 수 있어?”송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손은혜 씨께서 저에게 주실 정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냐에 달렸겠죠.”그러나 손은혜는 송민준을 믿지 않았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이 너무 무서웠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용기 내 말했다. “먼저 돈부터 줘. 안 그러면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야.”송민준은 손은혜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달러가 가득 들어있었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그중의 절반을 꺼내 손은혜 앞으로 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를 내뿜는 송민준의 눈빛에 손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왔다. 주먹을 꽉 움켜쥔 송민준의 손등엔 핏줄이 울끈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고 손을 들어 돈 한 뭉치를 손은혜 앞으로 밀었다. “그래서 아기는 누구에게 줬나요?”“우리가 사망한 아기를 산모 보호자에게 맡긴 후 조예단은 바로 나왔어. 당시의 난 혹여 보호자에게 그 사실을 들킬까 너무 무서웠던 터라 조예단을 따라가 언제면 돈을 줄 수 있냐고 물으려고 했지. 만약 들켰을 때를 대비해 대책을 세워야 했거든.”“조예단은 혼자 옥상으로 올라갔어. 난 그곳에서 한 남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걸 봤지. 내가 조예단을 부르려는 데 그 남자가 조예단에게 묻더라고. 아이가 죽었냐고 말이야. 난 그 말에 깜짝 놀라 몸을 숨겼어.”“그리고 조예단은 아기는 낳았을 때부터 이미 사망했다고 말했어. 그러더니 언제면 돈을 줄 수 있냐고 물었지. 난 그제야 알게 된 거야. 누군가 아기를 산 것이 아니라, 아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걸 말이야.”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불안한 듯 손은혜는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물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나에게 돈을 건넨 조예단은 바로 그 여자 아기를 안고 가버렸어. 그 아기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난 몰라. 난 그 돈을 함부로 쓸 수도 없었어. 그래서 매일 마음 졸이며 출근해야 했지. 그리고 어느 날 조예단은 갑자기 나와 그때 같이 분만실에 있었던 다른 간호사 두 명을 찾아와 우리더러 한주를 떠나라고 했어. 최대한 멀리. 누군가 그때의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면서 말이야.”“우리는 겁이 나서 한 명씩 병원을 그만뒀어. 나와 조예단은 한주가 고향이라 혹시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집으로 도망갈 수도 없었어. 조예단은 나에게 해외로 가 있으라고 했고 난 당시 조예단에게 받은 2억을 들고 M 국으로 왔지.”해외에서의 생활은 그다 좋지 못했다. 손은혜는 여행 비자였던 탓에 해외에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옥에
손은혜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너... 너 그게 무슨 말이야?”송민준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질문은 내가 해요.”손은혜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런 건 조예단을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날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난 아이가 바뀐 사실 밖에 몰라. 난산은, 내가 그런 게 아냐.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난 그저 돈이 욕심났을 뿐이야. 한 번도 사람 생명을 해치려고 한 적 없어. 당시 분만실에 있던 사람은 모두 4명이야. 다른 두 사람에게 물어봐. 그 사람들이 아기를 받았으니 아마 나보다 더 잘 알—”“죽었어요.”송민준이 손은혜의 말을 자르며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모른다고요?”손은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죽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송민준은 손은혜의 표정을 살폈다. 공포와 충격은 연기는 아닌 듯싶었다. “그 남자 얼굴 잘 떠올려봐요. 만약 저와 함께 돌아가 증인이 되어주시겠다고 하면, 오늘 준 두 배의 돈을 드리죠.”정신을 차린 손은혜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이미 해외에서 20년이 넘도록 생활했다. 부모님도 진작 돌아가셨고 이미 50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 년만 더 버티면 사회 보조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생활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귀국한다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옥과 형제들의 원망일 것이다. 그러니 타국에서의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귀국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형제들은 그녀가 해외에서 출세해 가족마저도 전부 잊어버려 연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녀는 그들 앞에서 머리조차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송민준도 전혀 다그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시간 되실 때, 제 제안 한번 잘 고민해 보시죠.”말하며 그는 명함 하나를 손은혜 앞으로 밀었다. “혹시 생각 바뀌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