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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낙요는 눈가가 빨갰지만 눈빛만은 의연하고 차가웠다.

방문을 닫은 뒤 그녀는 아직도 쑤시듯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침상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이 몸으로 환생해서인지 무력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여국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풍수와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혼자서 백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자기 몸이 못내 그리워졌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배워서 경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인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이미 좌골양회(挫骨揚灰: 원한이 깊거나 중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은 후 그 뼈를 갈아서 뿌리는 것)를 당했다.

서방(書房)으로 돌아온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마음도 심란했다.

소유(蘇游)가 그의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왕야, 오늘 밤도 그 사람들을 불러 큰아씨께 겁을 줄까요?”

그의 말에 부진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아니, 오늘은 됐다.”

어젯밤 그녀를 단단히 혼냈으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는다면 또 자결하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고, 혹시라도 진짜 죽기라도 한다면 승상부 쪽에 얘기하기가 껄끄러워진다.

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희미한 광선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젊고 예쁘장한 계집종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신선이라도 되려고 그러십니까?”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낙청연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고 날카로웠고 그 눈빛에 맹금우(孟錦雨)는 순간 겁을 먹었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밖에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더니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면서 느긋하게 얘기했다.

“왕비 마마께서 온종일 음식을 드시지 않았으니 배가 많이 고플 것이라 하여 왕야께서 자비를 베풀어 이것들을 하사해주셨습니다.”

계집종들이 손에 접시를 들고 하나둘 들어왔는데 접시 안에 든 것은 전부 찐빵이었다.

“드세요. 배부르게 드셨으면 저녁엔 일을 해야 합니다.”

맹금우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봤고 그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맹금우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겨 방에서 나갔고 문밖으로 나와서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안쪽을 흘겨봤다.

맹금우는 왕야의 통방(通房:하녀로서 첩을 겸한 여인)이 되는 것을 꿈꿨다. 만약 낙월영이 순조롭게 왕비가 되었다면 오늘 밤 왕야의 밤 시중을 드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터였다.

오래도록 바랐던 꿈이 곧 이뤄질 거로 생각했는데 낙청연 때문에 모두 허사가 된 것이다.

저렇게 못생긴 여인은 왕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맹금우는 생각했다.

갓 쪄서 나온 찐빵의 냄새를 맡자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확실히 배가 고팠던 낙청연은 찐빵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찐빵을 몇 개 먹는다고 해서 목이 메어 죽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낙청연은 몸을 일으켜 앉고는 찐빵을 손에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렇게 입에 넣고 두어 번 씹었는데 낙청연은 돌연 표정을 굳히더니 곧바로 찐빵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그릇에 담긴 찐빵들의 냄새도 하나하나 다 맡아봤는데 전부 약이 발라져 있었다.

극락산(極樂散)은 복용하면 아주 강한 환각을 일으키고 그 효과가 네 시진(時辰 옛날 두 시간을 세던 단위)까지 지속되면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눈앞에 있는 자의 용모가 어떻든, 설사 눈앞에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해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제는 향을 피웠고 오늘은 아예 극락산을 사용한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오늘 낙월영을 다치게 해서 부진환의 미움을 더 사게 되는 바람에 이토록 악랄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천궐국의 섭정왕은 역시나 소문대로 지독한 사람이었다.

찐빵에는 전부 약이 발라져 있었기에 낙청연은 그것을 먹지 못했고 그저 허기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낙청연의 눈동자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녀는 우선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부진환은 자신을 괴롭히려 했고, 낙요는 낙청연과 달리 순순히 감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찐빵 세 개를 침상 아래에 숨겨두고는 찐빵을 먹은 척했다.

조용하던 마당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윽박지르는 소리와 사람을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 어멈의 목소리도 은은히 들리는 것 같아 호기심이 생긴 낙청연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등 어멈이 계집종 몇 명에게 둘러싸여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는데 등 어멈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연신 애달픈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금우양, 우리 어머니는 병세가 심각하셔서 아마 곧 돌아가실 것 같소. 그래서 집에 가 봐야 하오. 날 때려서 분을 푼 다음, 날 저택에서 나가게 해주면 안 되겠소?”

옆에 있던 맹금우는 팔짱을 낀 채로 교만하게 말했다.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죽은 다음에 얘기하시지요.”

등 어멈은 급한 마음에 맹금우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빌었다.

“금우양, 제발 부탁이오. 제발…”

“이거 놓으시지요!”

혼란스러운 와중에 맹금우의 소맷자락이 찢어졌고 그녀는 등 어멈에게 발길질하면서 씨근거리며 욕을 했다.

“망할 노인네 같으니라고! 이 옷이 얼마나 비싼 것인 줄 아느냐? 널 팔아도 사지 못한다. 퉤. 너 같은 건 늙고 못생겨서 청루(青樓)에 팔아도 돈이 안 된다는 말이다!”

낙청연은 그 모습에 울컥 화가 났다. 맹금우는 조금 전 자신에게 찐빵을 가져다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등 어멈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알 수 없었다.

등 어멈은 어머니가 병중에 계셔서 저택을 나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그걸 막는 걸로도 모자라 나이 드신 분을 이렇게나 모욕하다니.

낙청연은 부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

낙청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등 어멈을 때리는 계집종들을 힘껏 밀쳤다.

맹금우는 그녀를 보고는 바로 턱을 쳐들면서 거만한 태도로 차갑게 말했다.

“왕비 마마는 정말 한가하신가 봅니다. 신부를 기절시켜서 대신 혼례를 치르시더니 이제는 여기까지 오셔서 저희 아랫사람들을 혼내시다니. 그렇게 마음씨가 좋으시면 저택의 뒷간 청소나 해주시지요. 그럼 저희도 좀 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낙청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맹금우의 뺨을 내리쳤다. 그녀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노비 따위가 감히 상전에게 일을 시킨다는 말이냐?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구나!”

체형 상의 우세 때문인지 낙청연은 힘이 꽤 셌고 맹금우는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맹금우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겨우 중심을 잡았고 옆에 있던 계집종들은 기함하면서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낙청연의 행동에 계집종들은 전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등 어멈 또한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맹금우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의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뺨에는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고 입가에서는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감히 날 때리다니? 빌어먹을 년! 왕야께서도 차마 날 때리지 않는데 너 따위가 뭐라고 내게 손찌검을 한단 말이냐?”

맹금우는 분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낙청연을 노려봤고 대놓고 낙청연의 면전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낙청연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왜? 네가 어느 대단한 집안의 여식이라도 되느냐? 그래서 왕야께서 무서워서 널 때리지 못한다고 하시더냐?”

낙청연에게 말꼬리가 잡힌 맹금우는 안색이 돌변해서 말했다.

“그건…”

다시금 정신을 차린 맹금우는 다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망할 년. 왕비라고 한 번 불러줬더니만 네가 진짜 왕비라도 된 줄 아느냐? 이 저택에서 너는 짐승만도 못한 미천한 존재다. 감히 날 때리다니, 죽을 각오나 해두거라.”

맹금우는 뺨을 부여잡고 낙청연을 노려보더니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맹금우는 감히 자신을 때린 낙청연에게 오늘 밤 제대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맹금우와 계집종들이 떠나고 등 어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낙청연은 본디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 했으나 등 어멈의 달랑거리는 팔을 보니 팔이 빠진 게 분명해 보였다.

낙청연은 곧바로 등 어멈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고 등 어멈은 낙청연의 행동에 기겁하면서 두려운 얼굴로 버둥거렸다.

“뭐 하는 짓입니까? 놔주시옵소서!”

“움직이지 말거라. 팔이 빠져서 그런다.”

낙청연이 호통을 쳤고 등 어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낙청연이 자신을 해하려 하는 게 아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등 어멈이 잠시 넋을 빼놓고 있는 틈을 타서 낙청연은 제대로 된 위치를 찾고는 재빨리 뼈를 맞췄다.

낭랑한 소리가 들렸고 등 어멈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됐다.”

그녀의 말에 등 어멈은 적지 않게 놀랐다. 팔을 움직여보니 그녀의 말대로 멀쩡했다. 등 어멈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낙청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왜 절 구해주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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