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사람 말 못 알아듣는 거야?”주영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는 강루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난 너를 사랑하게 됐어.”주영도의 애절한 고백은 그녀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끌어내지 못했다.강루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버렸다.그가 아무리 초라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서 있다고 해도 그녀는 더 이상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단호하게 멀어지는 강루인의 뒷모습은 마치 주영도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듯했다.검은 코트를 걸친 주영도의 모습은 유난히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깊은 고독함이 묻어 있었다.노윤환은 막 도착하자마자 버려진 사람처럼 허탈하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잘하지.’그는 한숨을 삼키더니 주영도 앞으로 다가서며 재촉했다.“대표님, 이제 업무 보러 가셔야 합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주영도만 그 자리에 홀로 남아 감성에 젖어 있었다.사랑을 잃었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돈이 없다면 사람은 정말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주영도가 회사 내부에 남아 있는 잔재들을 정리하는 동안 강루인 역시 지수현의 회사가 안북시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노윤환은 이 상황까지 주영도에게 보고했다.하지만 그는 강루인에게 넘어가는 손실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쓰지 마. 그냥 가져가게 둬.”주영도는 자신이 강루인에게 진 빚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그렇기에 그녀가 원하는 만큼 가져가도록 내버려둘 생각이었다.그 말을 들은 노윤환은 말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대표님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해야 하나?’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이 자원들이 강루인에게 넘어간다면 결국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지수현이었다.주영도가 경쟁 상대에게 이토록 관대
주영도는 함께 시찰을 나온 직원들을 뒤로한 채 유령처럼 강루인 일행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바라본 강루인의 얼굴에는 그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억지로 지어낸 웃음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꾸밈없는 감정이었다.그녀는 과거에 주영도 앞에서도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 미소는 언제나 절제되어 있었고 조심스러웠다.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마저 마치 자로 재어 표시해 둔 것처럼 정확하고 완벽했기에 어딘가 지나치게 가식적으로 느껴졌다.무엇이든 비교라는 것은 가장 잔인한 법이었다.눈앞에서 너무나 확연한 차이를 마주한 순간 주영도는 마치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숨이 막힐 듯 답답해졌다.‘강루인이 나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주영도는 다시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 너무 두려웠다.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그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뒤흔들었다.주영도는 강루인을 잃고 싶지 않았고 정말로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불안감은 결국 그를 강루인 앞에까지 서게 했다.지은우에게 막 솜사탕을 사준 그녀는 순간 주영도에게 팔을 붙잡힌 채 사람이 비교적 적은 건물 뒤편으로 끌려갔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강루인은 상대가 주영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짜증과 불쾌감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너 미쳤어?”그녀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강루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혐오와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왜 지수현이랑 같이 있는 거야?”그 말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느냐는 의미였다.주영도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낮고 거친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강루인은 그를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기에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하지만 주영도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너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거야?”주영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순간도 눈을
이 모든 것은 전부 지수현 때문이었다.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리도 없었다.강루인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지수현은 조금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그는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기분 좋은 듯 춤을 추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그녀와의 관계가 이 정도까지 깊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수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고 끝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이미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으니 다음에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될 일이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지수현은 문득 눈앞의 작은 꼬맹이를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좁혔다.‘다음에는 절대 방해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만약 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의 얼마 남지 않은 부성애마저 정말 바닥나 버릴지도 몰랐다.놀이공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지은우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양쪽으로 손을 잡고 걷고 싶어 했다.하지만 지수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는 자신을 방해한 아이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고 그저 강루인과 손을 잡고 걷고 싶을 뿐이었다.지은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이제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하지만 지수현은 아이의 연약한 수법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응. 이제 사랑 안 해.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그게 누군데요?”“네 엄마.”“안 돼요. 엄마는 제 거예요.”“내 아내거든.”“엄마는 제 거라고요!”“나이도 어린 게 욕심은 많네. 아내가 필요하면 나중에 커서 네가 직접 찾아. 종일 남의 아내만 탐내지 말고.”“엄마...”지은우는 억울하면서도 분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같은 남자끼리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아이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지수현이 미웠다.“여보...”지수현 역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촉촉한 눈빛으로 강루인을 바라보았다.마치 그녀가 아이의 편을 들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강루인은 두 남자를
지수현은 더 이상 입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그의 입맞춤은 강루인의 얼굴을 스쳐 귓가와 목덜미로 흔적을 새기듯 천천히 이어졌고 허리를 감싼 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걷어 올린 손끝이 매끄러운 피부에 닿는 순간 지수현의 몸은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강루인은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고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루인아...”지수현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그 안에는 억눌린 욕망과 간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강루인의 얼굴 역시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는 지수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와의 스킨십 역시 싫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젊고 잘생긴 데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그녀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강루인은 평생 혼자 늙어갈 생각도 없었고 누군가를 위해 평생 과부로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자신에게 잘해주고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강루인은 천천히 팔을 들어 지수현의 목을 감싸안았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행동은 분명한 허락이었다.그리고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지수현을 완전히 자극했다.그는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놓지 못했다.“그만 좀 물어.”“너무 좋아서 그래.”지수현의 목소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고 손끝 하나조차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자꾸만 강루인의 몸으로 향하려 했다.지수현은 그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해야 해.’오늘은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밤은 아직 길었고 그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그는 강루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 남겨주고 싶었다.“아빠,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지은우의 순수한 목소리는 그 순간 지수현에게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소파 위의 두 사람은 마치 누군가 정지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듯 그
“윽!”고통 섞인 신음이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강루인이 망치를 다시 들어 올려 한 번 더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상대의 머리에서 불과 일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내려간 망치는 가까스로 멈췄다.강루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그쪽이 왜...”지수현 역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알아본 듯했다.“생명의 은인을 죽이려고 한다니.”강루인은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물었다.“왜 이러고 있어요?”몇 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지수현은 언제나 깔끔한 옷차림에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초라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온몸은 엉망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그나마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얼굴뿐이었다.쓰레기통 안에 숨어 있었으니 깨끗한 모습일 리 없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굴만큼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그렇지 않았다면 강루인의 손에 들린 망치에 맞아 이미 저승으로 가버렸을지도 몰랐다.“원수한테 복수 당한 거예요?”그게 아니라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통 안에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지수현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입을 열지 않자 강루인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움직일 수 있어요?”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의 처참한 모습에 강루인은 자신이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제가 부축할게요.”강루인은 지수현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 위로 걸쳤다.그를 일으키려는 순간 조금 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지수현은 자신의 품 안으로 쓰러진 강루인을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이건 뭐지? 또 보험 사기인가? 설마 습관이 된 거야?’강루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있은 곳은 지수현의 집이었다.생명의 은인이라는 명분 덕분에 그녀는 성공적으로 지수현의 곁에 남을 수 있었다.물론 아무런
주방 안쪽에서 남자 사장은 직원을 챙긴다는 핑계로 강루인의 앞을 가로막았다.희미한 조명 아래 남자 사장의 탁하고 흐린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강루인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하게 말했다.“사장님, 여기 정리는 다 끝났습니다. 이제 문 닫으려고요.”건장한 체격에 불룩 튀어나온 남자 사장의 배는 임신 8개월은 된 사람처럼 보였고 작은 눈은 마치 물건의 가치를 따져보듯 거리낌없이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옷 위로 닿는 시선만으로도 강루인은 역겨움을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좁고 밀폐된 주방 안에서 그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출구는 이미 상대의 거대한 몸에 가로막혀 있었다.남자 사장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오며 노골적으로 말했다.“루인아, 나랑 같이 살자.”강루인은 못 들은 척하며 말을 돌렸다.“시간이 늦었네요.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그녀가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이미 좋게 말로 해결할 단계는 끝났다는 듯 그는 곧바로 강루인에게 달려들었다.사실 그가 주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강루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등 뒤에 감춘 손은 이미 조리대 위에 놓인 식칼을 더듬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강루인은 재빨리 칼을 빼내 앞으로 내저었다.“다가오지 마!”남자 사장은 순간 멈칫했다.“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비켜!”“얼른 칼 내려놔. 내 말 들어.”남자 사장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으려 하자 강루인은 굳은 얼굴로 칼을 더 세게 휘둘렀다.“꺼져!”남자 사장은 겁먹은 척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비킬게. 칼은 내려놔. 그럼 바로 나갈게.”강루인은 칼을 휘둘러 그를 몰아붙이며 뒤로 물러나게 했다.그녀는 주방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렸다.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강루인은 본능적으로 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 뚱뚱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