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세이런은 의외로 순순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응. 감고 있을게.”
하지만 그의 귀끝이 이미 붉다 못해 아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티니스는 황급히 잠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이내 그것이 생각보다 얇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가운까지 걸쳤다.
“다, 다 됐어요....”
그 말에 세이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신들의 영역도 인간의 세계도 아닌, 이름조차 없는 허공이 끝없이 펼쳐졌다.벨루알은 그 고요한 어둠 속에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서 있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다만 숨을 참은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그때였다. 신들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네루실리아.—무겁고 웅장하며,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담은 것만 같은 소리였다.네루실리아는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그녀의 눈에는 오직 하나, 라이엔뿐이었다. 무너진 그의 몸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신의 생명. 자신이 가진 마지막 것. 그것마저 그에게 흘려보내려 했다.그러나 생명이 그의 몸속으로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인간의 창조주 레아토르가 라이엔을 데려갔다.그제야 네루실리아는 순간 모든 동장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안 돼…! 안 돼…! 레아토르—! 제발… 라이엔을 돌려줘…!”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자신의 생명 일부가 라이엔에게 흘러든 순간, 신의 본질이 이미 금이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온전한 신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불완전한 형체로 신들을 마주 볼 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만을 들었다.—어리석은 네루실리아. 너는 신으로서의 규율을 어겼다.——너의 행동으로 인해, 이제 너는 신으로도 인간으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마땅히 소멸되어야 한다.—“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네루실리아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라이엔.라이엔을 되살려야 한다. 그것뿐이었다. 신들의 웅장한 선고도, 자신의 소멸도,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네가 살리려 했던 그 인간 또한 이제 소멸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안 돼…! 라이엔만은… 라이엔만은 살려줘. 내가 사라질게. 내가 대신 소멸될게. 제발….”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신들의 목소리가 잠
라이엔은 그 찰나의 순간, 네루실리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그녀의 몸이 그의 뒤로 밀려났다. 한순간에 그녀의눈앞에 그의 등이 가득 들어찼다.그리고—푹.살을 꿰뚫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네루실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라이엔의 몸을 관통한 검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순간 그녀의 숨이 멎었다.“라이엔!!!!”네루실리아의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큭흐흐흐흐하하..하…아…으윽.”
“오랜만이군, 제2황자.”황제는 입꼬리를 스르르 올렸다.“짐이 널 찾느라, 제법 애를 먹었지.”“폐하…. 몇 번이고 말씀드렸듯, 전 황위를 넘본 적도, 넘볼 생각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그 말을 짐이 어떻게 믿겠느냐?”황제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아주 섬뜩하게.그는 검을 빼어 들어 검을 라이엔에게 겨눴다. 그의 뒤편 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형님!”라이엔이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 끝은 떨리고 있었다. 손에 쥔 검도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릴 적엔, 그래도 함께 웃으며 자랐던 사이였다. 무엇보다 황제이기 전에, 그는 분명 그의 형이었다.라이엔은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여태껏 도망쳐 왔다. 싸우지 않기 위해, 피 흘리지 않기 위해.그저 조
‘나의 네루실리아님이… 저런 하찮은 인간에게…. 그런 눈빛을…?’벨루알은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렁임을 느꼈다.들어가고, 어둡고, 낯선 감정이었다.그녀의 손이 그 하찮은 인간 남자의 손을 꼭 잡았다.그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진심이 있었다. 마치 그녀를 전부 품겠다는 듯.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그녀의 미소 하나, 손끝의 온기 하나조차 자신에게만 향하길 바랐던 벨루알은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그녀는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저 인간만… 없으면… 저 인간을 그녀 곁에서 치워버린다면…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질문은 곧 답이 되었다. 한순간, 단 하나의 욕망이 모든 것을 잠식했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루실리아가 말한 ‘잘생긴 인간’이 자신을 뜻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라이엔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부디 그렇다고 말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숨길 수 없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내가 본 인간 중에서는.”“세상엔 잘생긴 인간은 많아요. 그럼 잘생기기만 하면 다—”라이엔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상상도,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라이엔이라 불러주세요, 실리아님.”네루실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이엔.”네루실리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l
“짝짓기라니…. 아니, 단어도 왜 하필 짝짓기라는 거예요? 그게 뭔 줄 알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라이엔이 귀끝이 붉어진 채 외쳤다.“두 인간이 밀폐된 공간에서 옷을 벗는 거?”“그니까–”라이엔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누가 그렇게 알려 줬어요.”“베….”“... 베?”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하지만 네루실리아는 천사인 벨루알의 이름을 그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벨… 아는… 이, 인간이….”그녀의 대답에 라이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벨? 여자인 것 같긴 한데… 여자라서 그나마
다시 인간 세계에 내려왔을 때는 어느새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이었다.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허공에 뜨겁게 피어올랐다가 금세 찬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와! 입에서 연기가 나오네!”네루실리아는 두
풍덩—! 이는 소리와 함께꼬르륵 물속으로 가라앉은 네루실리아는 그 남자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참았다.그러나 인간의 몸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들이 섬기는 수많은 신들 중 인간을 가장 사랑한 신이 있었다.자연의 창조자, 네루실리아.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신의 영역에서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지내던 신이었다.여성의 모습으로 길게 풀어내린 머리카락은 햇살이
“그럼 이제—”세이런은 이미 등을 돌려 말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말은 하나뿐이니까, 넌 알아서 뛰어와.”“뭐?! 어떻게 황성까지 뛰어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