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9월 26일 금요일, 재단 복원본 점검』
출국장에서 받은 주원의 문자에는 그날 끝내 답을 쓰지 못했다. 저녁 약속에는 나갔다. 주원은 식당에서 메뉴판만 넘기다가 9시 전에 나를 집 앞에 내려 줬다. 결혼 얘기는 둘 다 꺼내지 않았다. 그 대화방 아래로 이제 6개월 치 문자가 쌓여 있었다.
작업실 달력은 3월에서 9월로 넘어와 있었다. 그사이 나는 같은 건물 3층을 얻었고, 프레스기를 한 대 더 들였다.
◈
프레스기 받침을 옮기려는데 다은이 내 팔을 붙들었다.
“잠깐. 둘째 아직 자리 못 잡았어.”
“바닥 높이는 맞췄잖아.”
“이름표가 없다고.”
다은은 종이테이프를 뜯어 기계 옆에 붙였다. 검은 펜으로 둘째라고 적고는 뚜껑을 닫았다.
2층 창가에서 보던 전깃줄과 건너편 지붕이 3층에서는 눈 아래로 보였다. 같은 건물인데 3층은 오후 해가 더 오래 들었다.
나는 기계 옆 테이프를 떼었다.
“접착제 남아.”
“이름 붙이자마자 떼는 게 어디 있어.”
“종이에 써서 세워 둬. 기계에는 붙이지 말고.”
다은이 입술을 내밀더니 메모지 받침을 가져왔다. 둘째라고 쓴 종이가 프레스기 앞에 놓였다. 아래층에 있는 첫 기계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먼저 온 애는?”
“첫째지.”
“너무 성의 없는데.”
“네가 지어.”
다은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내 앞치마를 보고 멈췄다.
“오늘도 걸고 하네.”
나는 목에 건 실을 앞치마 안으로 넣었다. 백금 반지가 쇄골 아래에 닿았다. 손에 끼고 있으면 종이를 누를 때 걸렸다.
“재단 책 표지 벗겨야 해.”
“알아. 소매도 걷어. 풀 묻겠다.”
다은이 내 소매 끝을 가리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소매를 접다가 손을 멈췄다.
두 번.
이헌은 소매를 늘 그렇게 접었다.
나는 한 번 접은 소매를 더 올리고 작업등을 켰다.
문 옆 달력에는 금요일 칸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9월 26일. 그 아래 붙인 납품표에는 서진재단 도서관이 적혀 있었다.
내 작업실에 서진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납품표를 떼어 작업대 오른편에 놓았다.
◈
재단에서 온 책은 바닥에 놓지 않았다. 다은과 상자를 나눠 들어 빈 선반에 올린 뒤 인수 목록부터 펼쳤다.
“이번에도 수장고에서 바로 보냈대?”
내가 묻자 다은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응. 상태 사진은 메일로 왔고. 담당자가 표지 안쪽 얼룩은 지우지 말아 달래.”
“연필 표시 있으면 그것도 그대로 두고.”
“알아. 네가 지난번에 3번 말했어.”
나는 얇은 종이를 사이에 끼워 책을 꺼냈다. 등 아래쪽 실이 끊어져 있었다. 당겨서 벌리지 않고 받침을 넣은 뒤 벌어진 부분만 확인했다.
겉표지는 멀쩡했지만 안쪽 풀은 굳어 있었다. 힘을 주면 종이가 먼저 찢어질 상태였다.
“이건 오늘 안 끝나겠네.”
“납기 바꿀까?”
“아니. 마른 작업 먼저 해 둘게. 풀 걷는 건 다음 주에 하고.”
나는 작업표에 순서를 적었다. 다은이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우리는 동시에 내 앞치마 주머니를 봤다. 나는 장갑을 벗은 뒤 화면을 확인했다. 공장에 있는 아버지였다.
“아빠.”
수화기 너머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바쁘냐.”
“책 막 꺼냈어요. 무슨 일 있어요?”
“네가 보내 달란 종이 받았다. 내가 뭘 잘못 보낸 건가 해서.”
다은이 촬영을 끝내고 책 위에 덮개를 씌웠다. 나는 창가로 가서 서류 봉투를 열었다.
경매 절차 취소를 알리는 문서였다.
봄에 받은 원본은 따로 보관했고, 오늘 받은 것은 공장 보관분의 사본이었다. 나는 두 장을 겹쳐 날짜와 문서 번호를 대조했다.
“맞게 보내셨어요. 공장 직인 찍힌 건 아빠가 갖고 계시고요.”
“취소된 지가 언젠데 그걸 또 보냐.”
“없어진 건 경매 일정이지 빚이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봉투 안에 남은 작은 종이까지 꺼냈다. 염 반장이 적어 보낸 공장 보관 서류 목록이었다. 모서리에 기름 묻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경아.”
“네.”
“이제 그런 건 내가 챙길 테니까 너는 일해라. 위층까지 얻었다며.”
“그래서 더 챙기는 거예요. 일 멈추고 공장 달려가는 일 없게.”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월세는 괜찮고?”
“다은이 월급부터 드리고도 낼 수 있어요.”
옆에서 듣던 다은이 엄지를 들었다. 나는 펜으로 공장 보관 목록에 확인 표시를 했다.
“공장 서류 내주는 일 있으면 저한테 먼저 말해 주세요. 사본도요.”
“알았다.”
“도장도 직접 갖고 계시고요.”
“그건 안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나는 봉투를 접지 않고 서랍에 눕혀 넣었다.
통화를 끝내자 다은이 메모지 받침을 내 쪽으로 밀었다. 둘째 밑에 작은 글씨가 늘어나 있었다.
『월세 밀리지 않게 일할 것.』
“기계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네.”
“우리 셋 중에 얘가 제일 안 쉬잖아.”
나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판이 내려가며 시험용 판지를 눌렀다. 한쪽이 먼저 닿지 않는지 확인하고 다시 풀었다.
“됐어. 이제 쓸 수 있겠다.”
다은이 종이 받침을 기계 옆으로 옮겼다.
“들었지? 오늘부터 일해.”
◈
점심을 먹고 내려간 2층에는 포장할 책이 쌓여 있었다.
다은은 위층에서 재단 책을 정리하고, 나는 수선이 끝난 사전을 펼쳤다. 의뢰인이 표시해 둔 쪽을 확인한 뒤 끊어진 실과 남은 표지 조각을 작은 봉투에 담았다.
맡긴 사람이 버려도 된다고 했던 조각이었다. 그래도 돌려줄 때는 같이 드렸다.
문이 열리고 사전을 맡긴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책을 받침 위에 올리고 덮개부터 벗겼다.
“완전히 펴지는지 보셔도 돼요. 억지로 누르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손님은 사전을 바로 펼치지 않았다. 안쪽에 남겨 둔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건 지워질 줄 알았는데.”
“지워 달라는 말씀이 없으셔서요.”
“잘됐네요. 아버지 이름이라.”
나는 옆에 놓은 봉투도 건넸다. 손님은 표지 조각을 꺼내 보고 다시 넣었다. 책을 싸는 동안 몇 번이나 봉투가 잘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계단으로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주원이었다.
나는 문을 닫고 전화를 걸었다.
“왜요?”
“바빴어요, 나경 씨?”
“책 찾아가시는 분이 있어서요.”
“토요일에 본가 갈 수 있어요? 어머니가 저녁 먹자는데.”
나는 달력을 올려다봤다. 내일 납품할 책은 없었다.
“갈게요. 몇 시까지요?”
“6시. 그리고 어머니가 또 식장 얘기하면 나한테 넘겨요.”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날짜는 안 바꿔요.”
“알아. 11월 22일.”
“공장 정리 때문에 미뤘다고 제가 말씀드릴게요.”
“계속 그 말만 할 거잖아.”
“다른 이유 필요해요?”
수화기 너머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이 닫힌 뒤 주원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아니. 그냥 확인한 거야.”
나는 책상 위 포장지를 모서리에 맞춰 쌓았다.
봄에 잡혔던 결혼 날짜를 넘길 때도 공장 이야기를 했다. 거래처 정리와 서류 확인이 끝나야 한다고, 아버지 혼자 두고는 결혼 준비를 못 한다고 했다.
경란은 그 자리에서 새 날짜를 정하려 했다. 나는 달력을 받아 직접 11월을 펼쳤다.
주원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내일 올 거지?”
“네.”
“먼저 가 있지는 마. 입구에서 만나.”
“알겠어요.”
“같이 들어가는 게 낫잖아. 그치?”
나는 달력의 토요일 칸에 시간을 적었다.
“도착하면 연락해요.”
전화를 끊고도 잠깐 펜을 놓지 못했다. 달력 아래에는 결혼식장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봉투를 빼서 서랍 안으로 옮겼다.
맨 아래 놓인 경매 취소 문서와 닿지 않게 칸을 나눴다.
◈
오후가 되자 다은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손에 든 쟁반에는 물컵 두 개와 잘라 놓은 빵이 있었다.
“너 점심 반도 안 먹었지.”
“먹었어.”
“달걀만 먹었잖아. 내가 봤어.”
나는 작업용 천을 덮고 의자를 밀었다. 다은이 빵을 내 쪽으로 당겼다.
“위층 얻고 나면 좀 편해질 줄 알았는데 계단만 더 타.”
“옮길 건 거의 끝났어.”
“의자는 언제 올라와?”
“내일. 허리 받침 있는 걸로 주문했어.”
다은이 빵을 집다가 멈췄다.
“내 것도?”
“네가 더 오래 앉아 있잖아.”
“먼저 말하지. 나 의자 구경하고 있었는데.”
“취소해. 영수증은 책상 위에 있어.”
다은이 입에 넣은 빵을 다 씹고 나서 컵을 들었다.
“좋네. 둘째만 좋은 자리 주는 줄 알았어.”
나는 웃다가 목에 걸린 실을 앞치마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매듭이 느슨해졌는지 반지가 내려와 있었다.
다은은 내 손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나 먼저 은행 다녀올게. 자재비 보내고 올 거 있어?”
“없어. 천천히 와.”
문이 닫힌 뒤 나는 남은 빵을 마저 먹었다. 손을 씻고 물기를 닦은 다음에야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과 나누는 말은 하루에 한 줄이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서류를 봤는지는 적지 않았다. 나도 이헌도 서로 있는 곳의 시간을 묻지 않았다. 답이 늦어도 같은 날 두 번 보내지 않았다.
화면에 남은 전날 문장은 짧았다.
『소매에 풀 묻히지 말고.』
나는 내 소매를 내려다봤다. 접힌 자리 안쪽에 마른 풀이 조금 붙어 있었다.
손톱으로 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마른 뒤 솔로 털어야 천이 상하지 않았다.
입력 칸에 몇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
새 기계를 들였다고 썼다가, 그것도 지웠다. 넓어진 방을 보여 주고 싶었다. 창문을 열면 어느 쪽에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이헌이 앉을 의자를 어디에 두었는지.
사진을 찍으려고 들었던 휴대폰을 내렸다.
내 의자 옆에 빈 의자가 하나 있었다. 다은은 손님용인 줄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한 줄만 보냈다.
『위층 정리를 마쳤어요. 창가 자리는 비워 뒀어요.』
전송 표시를 확인하고 화면을 껐다. 바로 답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휴대폰을 뒤집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빈 의자를 벽 쪽으로 밀지 않았다.
◈
해가 기울기 전에 재단 책의 상태 기록을 마쳤다.
등의 벌어진 폭을 적고, 실이 끊어진 위치를 그림으로 남겼다. 나중에 다시 꿰맬 때 원래 구멍을 써야 했다. 새 구멍을 내면 오래된 종이가 버티지 못할 수 있었다.
기록지를 넘기다가 휴대폰 진동을 들었다.
나는 펜 뚜껑부터 닫았다.
『앉을 때까지 그대로 둬.』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창가에서 30cm쯤 떨어진 자리였다. 팔을 뻗으면 작업대 모서리가 닿았다.
이헌이 앉으면 나는 맞은편에 앉아야 할까.
아니면 책을 보여 주겠다는 핑계로 옆에 서게 될까.
나는 의자 방향을 창문 쪽에서 작업대 쪽으로 돌렸다. 답장은 쓰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조금 더 오래 들고 있었다.
위층에서 내려놓은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종이를 주워 모서리를 확인한 뒤 파일에 끼웠다. 창문을 반쯤 닫자 골목에서 오토바이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 다른 소리가 났다.
계단 아래에서 딱, 하고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다은은 이런 소리를 내며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문 앞으로 갔다.
지팡이 끝이 계단을 짚었다.
발소리는 하나였다.
나는 문을 열어 둔 채 마지막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먼저 지팡이 손잡이가 보였고, 그 위에 얹힌 손이 보였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강태수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계단 아래를 한 번 더 봤다. 비서도 운전기사도 없었다.
회장이 지팡이를 문 안에 짚었다.
“혼자 좀 왔네. 들어가도 되겠나?”
(61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