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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출국장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17:00:00

『오늘 일정: 3월 28일 금요일, 공항 가기』

나는 이헌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저도 갈게요. 출국장 앞에서 봐요.』

전송을 누르고 가방을 들었다. 어젯밤 택시에서 내린 뒤 현관에 세워 둔 가방이었다. 안에는 아버지와 함께 읽은 서류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출근할 때 입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밥은 먹고 가.”

“공항에서 먹을게요.”

아버지가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종이봉투에 넣어 둔 빵과 우유를 꺼냈다. 나는 가방 지퍼를 열었다. 봉투가 서류에 눌리지 않게 옆으로 넣었다.

“강 실장한테…….”

아버지가 말을 멈췄다. 우유 팩을 쥔 손이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빠가 하실 말씀은 아빠가 해요.”

“그래. 그래야지.”

아버지는 우유를 건네고 휴대폰을 찾았다. 식탁 위 서류에는 아버지가 붙여 놓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취소 날짜와 채무 금액, 법률 상담을 받을 곳의 전화번호였다.

“그거 오늘 가져가서 보여 주세요. 원본은 따로 두고요.”

“너는?”

“저도 제 것 할게요.”

나는 신발을 신었다. 아버지가 따라 나와 문을 잡아 줬다.

“나경아. 네 결혼까지 공장 일로 정하지 마.”

발뒤꿈치를 구두에 넣던 손을 멈췄다.

“알아요.”

아버지가 문에서 손을 떼기 전에 내가 손잡이를 잡았다.

◈

공항에 도착하자 이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예요?”

“들어왔어요. 위에 출발 안내판 있어요.”

“그 아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내판 앞에 이헌이 서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외투를 입고 여행 가방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나는 통화를 끊고 걸어갔다. 이헌도 내 쪽으로 왔다.

“왔네요.”

“간다고 했잖아요.”

이헌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가방끈을 어깨에 고쳐 걸었다.

“잠은 잤어요?”

“조금요. 당신은요.”

“저도 조금.”

바로 앞을 여행 가방 여러 개가 지나갔다. 나는 이헌 쪽으로 반걸음 붙었다. 외투 소매 사이로 손등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헌이 내 가방을 내려다봤다.

“무거워요?”

“제가 들 수 있어요.”

“그럼 천천히 가요.”

이헌은 내 보폭에 맞춰 걸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여행 가방이 자꾸 발에 걸렸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이헌의 손 가까이에 손을 두고 걸었다. 잡지는 않았다.

조현석이 긴 의자 앞에서 일어났다. 무릎에 두고 있던 서류철을 들었다.

“윤나경 씨, 아침 드셨어요?”

“아직요.”

“잘됐네요. 실장님도 안 드셨습니다.”

“밥 먹을 시간 있어요?”

“있습니다. 제가 계속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안 움직이셔서요.”

이헌이 조현석을 봤다. 조현석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웠다.

“이제 오셨으니까 드시죠.”

나는 가방에서 빵 봉투를 꺼냈다.

“저 가져왔어요.”

셋이 앉을 자리가 있었다. 나는 가운데 빈자리에 봉투를 내려놓고 우유를 꺼냈다. 이헌이 여행 가방을 세운 뒤 옆에 앉았다.

“아버지가 챙겨 주셨어요.”

이헌은 봉투 안을 보고 빵을 하나 꺼냈다.

“아버님하고 통화했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돌아오면 공장에 오라고요.”

나는 우유 팩 모서리를 눌렀다. 빨대를 꽂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이헌의 손이 움직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구멍을 확인하고 다시 꽂았다.

“그때는 제가 안내할게요.”

“네.”

이헌이 봉투를 벌려 내 쪽으로 놓았다. 나는 빵을 뜯었다. 조현석은 맞은편에서 전화가 와 잠깐 자리를 비켰다.

우리는 빵을 먹는 동안 말하지 않았다. 이헌의 무릎 옆에 내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이헌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시집 모서리가 조금 보였다.

“책도 가져가요?”

이헌이 외투에 손을 댔다.

“늘 가지고 있었잖아요.”

“비 오면 젖지 않게 하세요. 새로 붙인 종이는 처음에 더 조심해야 해요.”

“알겠어요.”

“가방에 넣으셔도 되고요.”

“지금은 여기 둘게요.”

나는 봉투에 남은 부스러기를 모아 접었다. 이헌이 우유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

조현석은 통화를 끝내고 와서 이헌에게 서류철을 건넸다. 항공권과 발령 관련 서류를 차례로 확인했다.

나는 그동안 가방에서 얇은 봉투를 꺼냈다.

이헌이 내 손을 봤다.

“뭐예요?”

“제가 가져갈 거예요. 보여만 드릴게요.”

봉투에는 메모한 종이와 서류 사본이 들어 있었다. 나는 메모부터 꺼냈다. 추가 대출 2건의 날짜, 아버지가 서명했다고 적힌 날의 일정, 원본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을 나눠 썼다.

“약혼은 당장 안 끝낼 거예요.”

이헌의 손이 항공권 위에서 멈췄다.

나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 공장 때문에 결혼하겠다는 뜻 아니에요. 결혼은 안 해요.”

“그 안에 남겠다는 거예요?”

“네. 재단 일도 계속할 거고요.”

이헌은 메모를 읽었다. 내가 적은 글씨 아래로 손끝이 내려갔다.

“이건 형님이 알아요?”

“몰라요. 아빠도 이 종이는 안 봤어요.”

“누가 도와줄 수 있는지부터 정해요.”

“조 비서님한테 자료 확인을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괜찮으시면요.”

조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메모를 돌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말려도 제가 정할 거예요.”

“말리려고 묻는 게 아니에요.”

이헌이 종이를 내 손바닥에 놓았다.

“어젯밤에 나한테 한 말 알아들었어요. 대신 어디까지 하려는 건지 듣고 싶어요.”

나는 메모를 펴서 무릎 위에 놓았다.

“서명 감정을 받고, 추가 대출금이 실제로 어디로 들어갔는지 확인할 거예요. 제가 볼 수 있는 서류부터요.”

“원본을 혼자 빼내려 하지는 말아요.”

“그러다 들키면 종이까지 못 보게 되죠. 저도 알아요.”

“복사본만으로 판단하지도 말고요.”

“그건 제 일이에요.”

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메모를 접지 않고 기다렸다.

“맞아요. 그건 윤나경 씨 일이에요.”

나는 그제야 종이를 봉투에 넣었다.

이헌이 낮게 물었다.

“약혼을 유지하면 주원이가 뭘 요구할 수도 있어요.”

“그때마다 제가 대답할게요. 전부 받아 주겠다는 약속은 안 했어요.”

“나한테도 알려 줘요.”

“실장님도요.”

이헌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봉투 입구를 손톱으로 눌렀다.

“혼자 조건 정하고 다 끝난 다음에 알려 주지 마세요.”

“네.”

“제가 못 해낼 때도 있을 거예요.”

“나도 그래요.”

이헌이 무릎 위에 놓인 내 봉투를 보고 말했다.

“그때 숨기지 않는 걸로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조현석이 서류철에서 봉투 하나를 더 꺼냈다. 흰 봉투였다. 입구가 붙어 있지 않았다.

이헌이 그것을 보고 눈을 들었다.

“현석 씨.”

“어제 드리려던 겁니다.”

“아직 안 냈죠?”

“네.”

조현석이 봉투 안의 종이를 꺼냈다. 위쪽에 사직서라는 글자가 보였다. 나는 들고 있던 빵 봉투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만두시려고요?”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국내에 있으라고 하셔서요.”

이헌이 서류철을 덮었다.

“현석 씨가 그만둘 이유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밤새 고쳐 썼는데 아깝기는 하네요.”

조현석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다시 펴서 서명한 아래쪽부터 찢었다. 종이 찢는 소리에 옆자리 사람이 잠깐 고개를 돌렸다.

조현석은 조각을 봉투에 넣었다.

“남아서 지켜볼게요.”

이헌이 대답하기 전에 조현석이 나를 봤다.

“윤나경 씨가 확인하신 건 저한테도 남겨 주세요. 회사에서 제가 볼 수 있는 건 확인하겠습니다.”

“조 비서님 일까지 잘못되면 안 돼요.”

“그래서 사직서 안 냈습니다. 밖에 있으면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게 줄어드니까요.”

나는 빈 빵 봉투를 벌렸다.

“여기 넣으세요. 같이 버릴게요.”

조현석이 잠깐 웃었다.

“그건 제가 버리겠습니다.”

찢은 사직서가 든 봉투를 자기 가방에 넣었다. 이헌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탁해요.”

조현석도 일어섰다.

“실장님도 식사 챙기시고요.”

“먹었잖아요.”

“오늘 아침 말고요.”

나는 남은 빵을 이헌에게 건넸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이헌은 받으면서 내 손끝을 잠깐 잡았다. 손가락 두 개가 닿았을 뿐인데 봉투를 놓는 게 늦었다.

조현석이 여행 가방 손잡이를 바로 세웠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

출국장 쪽으로 걸었다. 이헌이 가운데, 내가 옆에 섰고 조현석은 전화가 와서 조금 뒤처졌다.

이헌은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쳤다. 셔츠 소매가 손목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옆에서 소매를 두 번 접는 손을 봤다.

“거기 가서도 그렇게 접어요?”

“왜요?”

“그냥요. 똑같이 계실 것 같아서요.”

이헌은 왼쪽 소매를 접다 멈췄다. 나는 접힌 부분을 손끝으로 펴 줬다. 어긋난 선을 맞춘 뒤 손을 내렸다.

뒤에서 조현석의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손을 가방끈에 올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주원이었다.

나는 화면을 뒤집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주원 씨.”

이헌이 걸음을 늦췄다. 내 앞에는 출국장으로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다.

“일어났네. 작업실이야?”

“밖이에요.”

“어디?”

나는 안내판 쪽으로 눈을 들었다.

“공항이요.”

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삼촌 배웅?”

“네.”

이헌은 내 대답을 듣고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내 옆에서 외투를 고쳐 들었다.

“아버지한테는 작업실 갔다고 할게. 물어보면.”

“주원 씨가 제 일정 대신 말하지 마세요.”

“알았어. 그럼 모른다고 해.”

나는 손바닥으로 가방끈을 눌렀다.

“오늘 저녁에 잠깐 봐. 돌아오면 연락하고.”

“무슨 일인데요?”

“밥이나 먹자고. 꼭 일 있어야 봐?”

탑승 안내가 들렸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더 붙였다.

“돌아가서 연락할게요.”

“그래. 배웅 잘해.”

통화가 끝났다. 이헌은 묻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넣으며 말했다.

“저녁 먹자고요.”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요.”

“할 말 있으면 만나서 할게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줄 끝으로 걸어갔다.

◈

입구 앞에서 조현석이 이헌에게 여권을 건넸다.

“도착하시면 차량이 나와 있을 겁니다. 연락처는 따로 보내 놨습니다.”

“받았어요.”

“전화는 회사 것하고 구분해서 쓰시고요.”

조현석은 나를 한 번 보고 옆으로 물러났다.

이헌과 내 사이에 여행 가방 하나가 놓였다. 손잡이를 쥔 이헌의 손 위에 내가 손을 얹었다.

“기다리라는 말 안 하셔도 돼요.”

이헌이 내 손을 봤다.

“저도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알아요.”

“연락은 해요. 길게 못 해도요.”

“할게요.”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손잡이를 옆으로 밀었다. 이제 가방이 우리 사이에 있지 않았다.

이헌의 셔츠 깃에 실밥이 하나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뗐다. 손톱 끝에 붙은 실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었다.

“다녀오세요.”

이헌이 허리를 조금 숙였다. 입술이 닿지는 않았다. 이마 앞에서 멈춘 얼굴을 내가 3초 동안 봤다.

뒤에서 누군가 출국장 위치를 물었다. 조현석이 길을 알려 줬다. 나는 먼저 한 걸음 물러났다.

“가세요. 또 부르기 전에.”

이헌은 내 손을 천천히 놓았다.

여권을 확인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입구 옆 유리벽을 따라 걸었다. 안쪽 통로와 잠깐 나란해지는 곳에서 멈췄다.

이헌도 걸음을 멈췄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나는 손바닥을 들었다. 이헌이 내 손 높이에 자기 손을 댔다.

손끝이 겹쳤다. 유리는 차가웠다.

나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밥 먹어요.

이헌이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빈손으로 휴대폰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 뒤에 사람이 늘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렸다. 이헌은 내 손이 떨어진 자리를 잠깐 보고 여행 가방을 끌었다.

나는 안쪽 모퉁이에서 외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조현석이 다가와 내 가방을 가리켰다.

“아래층까지 같이 가시죠.”

“잠깐만요.”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바로 화면을 켰다.

이헌에게서 온 문자였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나는 답장을 쓰려고 입력칸을 눌렀다. 곧바로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주원이었다.

『이제 우리 둘뿐이네. 그치?』

(60화 끝 ·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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