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늘 일정: 9월 30일 화요일, 호텔 방문』
나는 받침째 사진을 들어 무지 봉투에 옮겼다. 손가락으로는 사진 면을 만지지 않았다. 봉투 겉에는 발견한 자리만 적었다. 앞표지 안쪽, 덧댄 종이 사이.
그날 저녁 회장에게 사진이 나왔다고 알렸다. 버리지 말고 따로 보관해 달라는 답이 왔다. 누구와 찍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봉투는 보관함 맨 안쪽 칸에 넣고 잠갔다.
4일 뒤 화요일 오후, 나는 그 칸이 잠겼는지 한 번 더 당겨 보고 작업 기록을 덮었다.
다은이 위층에서 내려오다가 내 가방을 봤다.
“호텔 간다며. 아직 안 갔어?”
“지금 가려고.”
“오늘은 책 안 들고 가?”
“서류만.”
나는 재단 납품표를 가방에 넣었다. 주원이 호텔에서 만나자고 한 건 저녁 식사 때문이었다. 가는 김에 재단으로 보낼 서류도 맡기기로 했다.
다은이 내 손을 잡아 돌렸다.
“풀 묻었어.”
엄지 밑에 풀이 말라 있었다. 물로 닦고 와서 반지를 꺼냈다. 목에 걸었던 실에서 빼 왼손에 끼우자 다은이 내 앞을 비켜 줬다.
“밥은 먹고 와. 와서 남은 빵 찾지 말고.”
“너 혼자 다 먹겠다는 거지?”
“남겨 놓으면 또 내일 먹는다고 할 거잖아.”
나는 가방을 들다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헌에게서 온 문자는 없었다. 오늘 내가 보낼 한 줄도 아직 쓰지 않았다. 호텔에 간다는 말부터 쓰고 싶지는 않았다.
화면을 끄자 다은이 문을 잡아 줬다.
“늦으면 문은 내가 잠글게.”
“오늘 맡긴 책은 위층 건조대에 있어.”
“알았어. 가.”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
호텔 부사장실 앞에는 서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직원이 상자를 옆으로 밀고 나를 맞았다. 문이 열려 있었지만 안쪽 책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사장님께서 잠깐 내려가셨습니다.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여기서 기다릴게요.”
직원은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멈췄다. 나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재단으로 보내는 납품표예요. 맡겨 두면 전달해 주신다고 해서요.”
직원이 봉투 겉면을 확인했다.
“접수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류를 챙기는 손목에 종이띠가 붙어 있었다. 직원이 소매를 내리려 했지만 종이띠 끝이 책상에 걸렸다.
나는 손을 뻗지 않고 가리켰다.
“거기 걸렸어요.”
“아, 감사합니다.”
직원이 소매를 빼며 웃었다. 책상 한쪽에 생일 축하 문구가 적힌 띠가 접혀 있었다. 포장 상자에서 떨어진 장식이었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주원이 걸어왔다.
서류가 아니라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상자 밑을 두 손으로 받친 채였다.
“나경 씨, 일찍 왔네요.”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원이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이거 어디다 놓지?”
“제가 받겠습니다.”
“놓을 자리만 좀 만들어 줘요. 옮겨 담다가 옆에 묻었어.”
주원이 상자를 들여다봤다. 뚜껑 틈에 흰 크림이 묻어 있었다.
나는 옆 탁자에 놓인 잡지를 치웠다.
“여기 놓으세요.”
“고마워요, 나경 씨.”
직원들 앞이었다. 예전 같으면 주원은 여기서 나를 자기라고 불렀다. 약혼식 날부터 남 앞에서는 늘 그랬다.
나는 주원의 얼굴을 한 번 더 봤다. 주원은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 상자 끈을 풀고 있었다.
주원은 상자를 내려놓고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냅킨으로 닦았다.
“직접 사 오셨어요?”
“아래 제과실에서 가져왔어요. 들고만 오면 되는 건데 이러네.”
직원이 초가 든 봉투를 가져왔다.
“부사장님, 식사부터 하셔도 됩니다. 저희끼리 나누겠습니다.”
“생일인 사람이 케이크 자르고 접시까지 나르면 좀 그렇잖아요.”
주원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접시 어디 있어요?”
직원이 서랍을 열자 주원은 접시를 받아 탁자 위에 펼쳤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상자 옆면을 풀었다.
◈
안쪽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나왔다.
주원이 칼을 들자 생일을 맞은 직원이 급히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첫 조각만 잘라 줘요.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같이 잘라야 크기가 맞습니다.”
“그럼 나경 씨가 봐줘요. 이런 거 잘 맞추잖아요.”
“책 자르는 거랑 달라요.”
“칼 쓰는 건 같지 않아요?”
“제가 쓰는 건 종이 접는 칼이에요.”
내가 말하자 옆에 있던 직원이 웃음을 참다가 입을 가렸다. 주원은 칼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나 배웠네.”
초에 불을 붙이고 짧게 축하 노래를 불렀다. 직원은 촛불을 끄고도 바로 칼을 들지 못했다.
주원이 먼저 물었다.
“누구 눈치 봐요?”
“부사장님 계셔서요.”
“내가 먹을 거 먼저 떼 놓으면 되죠?”
주원이 접시를 내밀었다. 그제야 직원이 케이크를 잘랐다.
나는 잘린 조각 아래로 받침을 넣었다. 주원이 접시를 가까이 댔다. 서로 손이 닿지 않도록 내가 받침을 빼자 주원은 접시를 직원에게 먼저 건넸다.
“생일인 사람부터.”
“감사합니다.”
“오늘 야간 근무는 아니죠?”
“네. 저녁에 가족이랑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이건 남기지 말고 지금 먹어요. 들고 가면 또 케이크 먹으라고 할 테니까.”
직원이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주원은 자기 몫을 받기 전에 빈 상자를 접었다. 바닥에 떨어진 초 봉투도 주워 넣었다.
예전에는 식당에서 물잔이 비어도 주원이 직원을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오늘은 접시가 모자란 걸 보고 먼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탁자에 묻은 크림을 닦았다.
주원이 돌아와 내 앞에 포크를 놓았다.
“나경 씨 것도 남겨 놨어요?”
“저는 조금이면 돼요.”
“그 말 하면 제일 큰 거 줘요.”
“식사하자고 부르셨잖아요.”
“그러네.”
주원은 내 접시에서 한 조각을 덜어 자기 접시에 옮겼다. 직원들이 보는 앞인데도 내게 먹여 주거나 어깨를 감싸지 않았다.
접시가 비자 나는 상자에 남은 받침을 정리했다. 주원이 쓰레기통을 당겨 줬다.
“그건 내가 할게요. 손에 묻어요.”
“이미 묻었어요.”
내가 손가락을 펴 보이자 주원이 냅킨을 뽑아 건넸다.
“그럼 각자 닦는 걸로.”
우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손을 닦았다.
◈
부사장실 안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주원은 내 자리를 만들려고 소파 위의 파일을 치웠다. 책상에는 검정 휴대폰이 놓여 있었고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파 끝에 앉았다.
“방이 달라졌네요.”
“지저분해졌죠.”
“전에는 책상에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그때는 결재할 게 없는 줄 알았어요.”
주원이 파일을 책상으로 옮겼다.
“안 올린 거였더라고요.”
“지금은 올려요?”
“반려하면 이유는 적어요. 전엔 다시 하라고만 했는데.”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주원은 앉으려다 다시 일어나 서류를 받았다.
“이건 오늘 안으로 봐야 합니다.”
“알았어요. 표시한 데부터 볼게요.”
직원이 나간 뒤에도 주원은 바로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책상에 서서 표시된 쪽을 펼쳤다.
나는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급하시면 먼저 보세요.”
“잠깐이면 돼요.”
주원은 펜으로 한 줄을 짚고 옆에 짧게 적었다. 검정 휴대폰이 울리자 화면을 확인한 뒤 뒤집어 놓았다.
“늦어도 돼요?”
내가 묻자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밥이요?”
“전화요.”
“문자로 답해도 되는 거예요.”
주원은 서류를 덮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소파 사이 탁자에 빈 찻잔이 놓여 있었다. 예전에는 늘 내 옆자리를 골랐다.
“드레스 보러 가는 날짜는 그대로죠?”
“네. 그런데 이번엔 혼자 가도 돼요.”
“맞추는 데 내가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요.”
“알겠어요.”
주원은 휴대폰 일정에 한 줄을 적었다. 화면을 내 쪽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공장 쪽은 어때요?”
“종이 견본 만들고 있어요. 얇게 뜨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려요.”
“팔 데는 있고요?”
“제가 먼저 써 보려고요. 고치는 책에 맞아야 다른 작업실에도 권할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호텔에서도 쓸 게 있는지 물어볼게요.”
나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건 완성되면요. 약혼자 회사 물건이라고 사 주는 건 싫어요.”
주원은 펜 뚜껑을 닫았다.
“알았어요. 견본 나오면 가져와요. 써 볼 사람한테만 줄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이 탁자 아래로 밀어 둔 쓰레기통에 냅킨을 버렸다. 손끝에 남은 크림을 한 번 더 닦고서야 내 왼손을 봤다.
나는 반지를 돌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왜요?”
“작업할 땐 빼죠?”
“네.”
“그냥 물었어요. 전에는 늘 목에 걸고 왔으니까.”
나는 손을 가방 위에 올렸다. 주원은 반지 쪽을 더 보지 않았다.
“오늘은 책 안 만져요?”
“돌아가서 기록만 할 거예요.”
“그럼 밥 먹고 바로 데려다줄게요.”
“차 가져왔어요.”
“그럼 각자 가고.”
직원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재단 납품표 접수증이었다. 주원이 받아서 날짜를 확인하고 내게 건넸다.
“내일 오전에 재단으로 간대요. 늦으면 나한테 말해요.”
“감사합니다.”
나는 접수증을 반으로 접지 않고 수첩 사이에 끼웠다. 주원은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같이 왔다고 꼭 같이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가방 손잡이를 안쪽으로 접었다.
◈
주원이 식당 예약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과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문장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잘 먹었는지 묻는 말에 점심은 먹었다고 답한 게 어제였다.
손가락을 입력 칸에 대고도 쓰지 못했다.
문 하나 밖에는 직원들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주원이 앉아 있었다.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아도 화면을 켠 것만으로 어깨가 굳었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가방 위에 놓았다.
주원이 통화를 마쳤다.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요.”
“음식이요?”
“그것도 그렇고.”
나는 가방에서 손을 뗐다.
주원은 자기 휴대폰을 탁자에 놓았다. 나를 보고 있었지만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주원이 내 말을 한 번 따라 했다.
복도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케이크를 나누던 직원들이었다. 누군가 퇴근 인사를 하자 주원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다녀와요. 식사 늦지 말고.”
문밖에서 고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주원은 재킷을 가지러 나갔다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소매 끝에 묻은 크림을 보고 손으로 문지르려 하기에 내가 멈춰 세웠다.
“물로 닦으세요. 문지르면 더 들어가요.”
“이것도 종이랑 같아요?”
“옷은 저보다 세탁하는 분이 잘 아시죠.”
“오늘은 계속 틀리네.”
주원은 재킷을 팔에 걸쳤다. 나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가요?”
“나경 씨.”
손잡이를 내리기 전에 돌아봤다.
주원은 탁자 위 휴대폰을 챙기지 않았다. 문에서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나만 먼저 말할게요.”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식당 예약 시간 때문은 아니었다. 주원은 문 아래 틈을 내려다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듣고 나서 바로 연락하지는 말고요. 지금은.”
가방 안의 휴대폰이 팔꿈치에 닿았다.
나는 가방을 몸 쪽으로 당겼다.
“무슨 얘긴데요?”
주원이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 문밖에서 직원이 서류 상자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주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삼촌 다음 달 들어온대. 아버지는 몰라. 그치?”
(63화 끝)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이거 돌려줘야 해.”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지금은 안 해요.”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현금이나 물건은요?”다은이 뒤에서 말했다.“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경아, 계단에서 조심해. 유리 있어.”휴대폰 너머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멈췄다.“무슨 유리?”“우리 출입문. 누가 깨고 들어왔어.”계단 위에서 빗자루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너는 어디 있어?”“복도. 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켜고 나오다가 넘어졌어.”“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 밑에 유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위층에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웠다.“가운데로 와. 벽 쪽은 아직 못 쓸었어.”가끔 가계부를 고치러 오는 할머니였다. 손에는 쓰레받기 대신 빈 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다은은 2층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친 채였다. 나는 다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머리는 안 부딪혔어?”“손만 짚었어. 불이 꺼져 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못 봤거든.”다은의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손목을 들자 입술을 깨물었다.“삐었나 봐.”“움직이지 마. 손바닥 좀 보여 줘.”긁힌 곳은 없었다. 손목 바깥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은 손 밑에 접어 넣었다.복도 끝의 출입문은 잠금장치 옆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안쪽 문고리에 유리 조각이 걸려 있었다.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컴퓨터는 있어.&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