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오늘 일정: 10월 3일 금요일, 해윤 시험 생산』
삼각대 다리가 담장 아래에 닿았다.
염 반장이 출입문에서 내려가려 하자 아버지가 팔을 잡았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두 사람 옆으로 갔다.
조끼를 입은 사람이 차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다른 사람은 장비를 세운 채 공장 문을 살폈다.
“해윤제지 관계자분이세요?”
“대표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서류철을 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부지 현황 확인하러 왔습니다. 안쪽에 장비를 좀 세워야 해서요.”
“누가 요청했습니까?”
“서진건설에서요. 오늘 작업하는 걸로 전달받았습니다.”
염 반장이 아버지 팔에서 손을 빼고 앞으로 나섰다.
“오늘 기계 돌리는 건 알아도 측량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기사가 서류철을 펼쳤다. 나는 열린 문 앞에 서서 안쪽을 돌아봤다. 바닥을 닦던 직원들이 하나둘 호스를 내려놓고 있었다.
“우선 들어오지는 마세요. 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
내 말에 장비 옆 기사가 들었던 가방을 차에 내려놓았다.
염 반장의 손자는 담장 옆에서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나는 손을 펴 아래로 내렸다.
“지금은 찍지 말아 주세요.”
청년은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기사는 서류 한 장을 꺼내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이 일정으로 배정받았습니다. 담당자 연락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서류를 받지 않고 글씨를 내려다봤다. 나는 옆에서 종이 아래쪽을 받쳤다.
『해윤제지 부지 현황 조사』
그 아래 작업 구역을 나눈 표가 있었다. 공장 안쪽까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건 작업 일정표네요. 저희가 출입을 허락했다는 서류는 따로 있나요?”
“동의는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받았는지 확인해 주세요. 저희는 오늘 처음 봤어요.”
기사는 종이를 도로 받았다. 염 반장이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내 뒤에서 공장 문을 반쯤 닫았다.
◈
직원들이 출입문 안쪽에 모였다.
누군가 대걸레를 벽에 세우는 소리가 났다. 기사는 휴대폰을 꺼내며 문에서 떨어졌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장비는 그대로 두셔도 돼요. 안으로만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나는 염 반장을 돌아봤다.
“반장님, 차 들어올 길은 비워 두세요.”
“차로 밀고 들어오면?”
“그러면 문을 닫으면 돼요. 사람 앞에 세우지 말고요.”
염 반장은 문 안쪽에 선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뒤로 가. 거기 서 있으면 다쳐.”
직원들은 물러났지만 작업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보자 한 사람이 앞치마를 벗어 손에 쥐었다.
“대표님, 오늘 또 멈춥니까?”
“시험은 끝냈어요. 정리는 하던 대로 해 주세요.”
“안에 들어와서 뭘 재면 치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은 못 들어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 옆에 섰다.
전화 중이던 기사가 우리 쪽을 봤다.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서류철을 다시 넘겼다.
“출입 협조까지 돼 있다고 하십니다.”
“누구와 협의했다는 건가요?”
기사가 잠깐 머뭇거렸다.
“위에서 정리된 일이라고만…….”
아버지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제 연락처를 아실 겁니다. 허락받았다고 하신 분한테 직접 연락하라고 하세요.”
기사는 전화 너머에 아버지의 말을 전했다. 나는 서류철에 끼워진 도면을 가리켰다.
“그 종이도 볼 수 있을까요?”
기사는 통화를 마친 뒤 도면을 꺼냈다. 나는 건네받지 않고 펼쳐진 면을 봤다.
공장 출입구 옆에 빈터로 표시된 곳이 있었다. 지금은 원료를 옮기는 길이었다. 나는 담장 안쪽을 손으로 짚었다.
“여긴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에요. 지게차가 다니는 길이에요.”
“이 도면에는 시설물이 없어서요.”
“건물이 없어도 쓰는 길이에요. 오늘 장비를 세웠으면 작업이 겹쳤겠네요.”
기사가 도면과 출입구를 번갈아 봤다.
“현장 설명은 따로 못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연락을 주셨어야 해요.”
나는 종이에서 손을 뗐다. 기사는 도면을 접어 서류철에 넣었다.
◈
장비 옆에 있던 기사가 차 문을 열었다. 빈 물병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죄송한데, 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염 반장이 돌아봤다. 기사가 입술을 닦으며 덧붙였다.
“오전 현장부터 돌았더니 다 마셨네요. 근처에서 사려고 했는데 바로 들어오라고 해서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가방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사무실로 갔다. 탁자에 보리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점심에 쓰고 씻어 둔 컵을 쟁반에 얹었다.
따라온 염 반장 손자가 쟁반 한쪽을 잡았다.
“제가 들까요?”
“주전자만 부탁할게요.”
청년은 카메라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밖으로 나가자 기사가 모자를 벗었다. 나는 출입문 바깥 턱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공장에서 끓인 보리차예요.”
“감사합니다.”
기사는 컵을 받아 천천히 마셨다. 서류철을 든 사람에게도 컵을 내밀었다.
“물 드시는 거랑 출입 허락은 별개예요.”
“압니다. 확인 없이 온 건 저희니까요.”
그 사람이 컵을 받았다. 염 반장은 팔짱을 끼고 있다가 주전자를 들었다. 먼저 마신 기사의 컵에 차를 더 따랐다.
“아침부터 돌아다녔으면 밥은 먹었어?”
“차에서 먹었습니다.”
“앉아서 마셔. 흘리겠네.”
기사는 차 뒤쪽 턱에 앉았다. 작업화 끈이 풀려 있었다. 컵을 내려놓고 끈을 묶는 동안 염 반장은 장비를 살폈다.
“저거 비싼 거지?”
“회사 겁니다. 망가지면 곤란하죠.”
“그럼 잘 챙겨. 우리도 기계 건드리는 게 제일 싫어.”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쟁반 옆에 남은 컵을 놓았다. 아버지는 맡아 둔 가방을 내밀었다. 안에 든 견본 봉투가 눌리지 않았는지 먼저 봤다.
기사는 가방 밖으로 나온 봉투를 보고 물었다.
“종이 만드는 공장이죠?”
“네. 오늘 시험한 거예요.”
“그래서 다들 계셨구나. 휴일이라 안에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염 반장이 주전자 뚜껑을 눌렀다.
“기계 돌아가는 날엔 사람이 있어야지.”
기사는 빈 컵을 쟁반에 놓았다.
“잘 마셨습니다. 들어가는 건 확인될 때까지 안 하겠습니다.”
◈
서류철을 든 기사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차에서 조금 떨어져 통화했지만 몇 마디는 들렸다. 현장에 대표가 있다는 말, 출입 동의를 못 받았다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나는 아버지에게 작게 물었다.
“혹시 전에 측량 얘기 들으신 적 있어요?”
“없다.”
“다른 서류에 같이 적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공장 정리나 담보 확인 같은 말로요.”
아버지는 나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경매 취소된 뒤로는 도장 안 찍었어. 네가 확인하기 전엔 안 찍겠다고 했잖니.”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럼 오늘 오신 건 적어 둘게요.”
날짜와 차량 문에 붙은 회사 이름을 썼다. 기사가 돌아오자 수첩을 든 채 물었다.
“방문 목적하고 요청한 부서만 알려 주세요. 공장 출입 기록에 남기려고요.”
기사는 서류철 맨 앞장을 봤다.
“부지 현황 조사고요. 요청 부서는 여기 적혀 있습니다.”
나는 적힌 부서를 옮겨 썼다.
“저희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도 전달하셨죠?”
“네. 현장 확인만 하고 철수하라고 하셨습니다.”
“담장 밖에서 보신 범위만요. 공장 안에 들어오신 걸로 적히면 안 돼요.”
기사는 펜을 꺼내 일정표 여백에 두 줄을 썼다. 종이를 돌려 보여 줬다.
『소유자 출입 동의 미확인. 내부 조사 미실시.』
나는 아버지에게도 보여 드렸다.
아버지가 글씨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겨 주세요.”
기사가 서류를 챙기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 가방 안쪽에서 짧게 한 번이었다.
화면에 이헌의 답이 떠 있었다.
『남겨 둬요. 돌아가서 볼게요.』
나는 가방을 몸 쪽으로 당겼다. 1m 옆에는 아버지가, 그 옆에는 기사들이 서 있었다.
답장을 쓰지 않고 화면을 껐다. 가방 입구를 닫은 뒤 견본 봉투가 있는 쪽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따님이세요?”
기사가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봤다.
“네.”
“그럼 남은 확인은 대표님하고 직접 하도록 전달하겠습니다.”
“저한테도 같이 연락 주세요.”
나는 수첩 귀퉁이에 작업실 번호를 적어 건넸다. 기사는 종이를 서류철에 끼웠다.
◈
삼각대를 접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염 반장은 장비 옆에 놓인 뚜껑을 발견하고 기사를 불렀다.
“이거 두고 가면 안 되는 거 아냐?”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뚜껑을 받아 장비에 끼웠다. 아버지가 차 옆으로 가자 나는 같이 걸었다.
“다음에 오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부지에 관한 건 저희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네. 다시 일정 잡히면 출입 협의부터 하겠습니다.”
기사들은 문을 닫기 전에 컵을 모두 돌려줬다. 물을 청했던 사람이 빈 물병을 들고 서 있기에 나는 주전자를 가리켰다.
“병에도 담아 드릴까요?”
“괜찮겠습니까?”
나는 병 입구에 닿지 않게 보리차를 따랐다. 기사는 두 손으로 병을 받았다.
“저희는 하루 일당 받고 나오는 거라, 여기 사정은 몰랐습니다.”
“기사님들한테 따질 일은 아니에요. 다만 허락 없이는 못 들어오세요.”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차가 움직이자 염 반장이 직원들을 안쪽으로 보냈다. 출입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나는 수첩에 철수한 시각을 적었다. 차량이 담장 끝을 돌아 사라진 뒤 아버지에게 펼쳐 보였다.
“오늘 오신 건 이렇게 남겨 둘게요. 공장에도 한 부 놓을게요.”
“작업실 가서 또 일하려고?”
“견본도 봐야죠.”
아버지는 수첩을 읽다가 펜을 빌려 달라고 했다. 마지막 줄 아래에 직접 이름을 적었다. 나는 아버지가 펜을 놓을 때까지 수첩을 받치고 있었다.
염 반장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차 안 막았더니 조용히 갔네.”
“반장님이 물도 따라 주셨잖아요.”
“목마르다는데 어떡해.”
아버지가 쟁반의 컵을 세어 보고 하나를 집었다. 안쪽에 남아 있던 차를 마신 뒤 빈 컵을 포갰다.
작업장에서는 호스로 바닥을 씻는 소리가 다시 났다. 염 반장 손자가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왔다.
“할아버지, 저 먼저 갈게.”
“작업화 놓고 가.”
청년이 발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염 반장은 쟁반을 든 채 뒤따라갔다.
나는 문 옆에 서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견본 넣어 둔 봉투, 서랍에 있죠?”
“그래. 왜?”
“잘 마른 뒤에 보관해 주세요. 봉투 입구는 열어 두고요.”
“네가 적어 준 대로 할게.”
아버지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은 조용했다.
“직접 연락하라고 했는데 연락이 없네.”
“오면 바로 알려 주세요. 혼자 만나지는 마시고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내 수첩을 가리켰다.
“그것부터 한 부 놓고 가라.”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 기록을 복사했다. 아버지 책상에 종이를 놓고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석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출입문 너머로 아버지가 직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담장 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네, 부회장님.”
“우리 며느릿감이 현장 사람들을 돌려보냈다면서.”
“공장 출입을 허락한 적 없어요.”
“잠깐 재고 가면 되는 걸 일을 크게 만들었네.”
“오늘 오신 분들도 허락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고 하셨어요. 필요하시면 요청 내용을 서류로 보내 주세요.”
석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아버지 도장 필요한 서류는 저도 같이 보겠습니다.”
수화기에서 의자를 미는 소리가 났다.
“결혼식 날, 땅 서류에 너희 아버지 도장 찍는다.”
(65화 끝)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이거 돌려줘야 해.”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지금은 안 해요.”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현금이나 물건은요?”다은이 뒤에서 말했다.“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경아, 계단에서 조심해. 유리 있어.”휴대폰 너머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멈췄다.“무슨 유리?”“우리 출입문. 누가 깨고 들어왔어.”계단 위에서 빗자루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너는 어디 있어?”“복도. 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켜고 나오다가 넘어졌어.”“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 밑에 유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위층에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웠다.“가운데로 와. 벽 쪽은 아직 못 쓸었어.”가끔 가계부를 고치러 오는 할머니였다. 손에는 쓰레받기 대신 빈 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다은은 2층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친 채였다. 나는 다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머리는 안 부딪혔어?”“손만 짚었어. 불이 꺼져 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못 봤거든.”다은의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손목을 들자 입술을 깨물었다.“삐었나 봐.”“움직이지 마. 손바닥 좀 보여 줘.”긁힌 곳은 없었다. 손목 바깥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은 손 밑에 접어 넣었다.복도 끝의 출입문은 잠금장치 옆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안쪽 문고리에 유리 조각이 걸려 있었다.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컴퓨터는 있어.&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