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0월 11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짐 찾았어요.』
문자가 온 뒤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나는 보내온 글을 눌러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4시 12분이었다.
3일 전 화면에서 봤던 여행 가방이 떠올랐다. 다 쌌느냐고 묻자 이헌은 지퍼를 한번 보고 대답했다.
다 쌌다고. 돌아오는 날짜가 정해지면 먼저 알려 주겠다고.
나는 답장을 썼다.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라는 답이 왔다. 이어서 한강 둔치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작업이 남았으면 기다리겠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작업대에 놓인 종이를 살폈다. 아침에 보강한 자리는 말라 있었다. 덮개를 씌우고 모서리를 눌렀다. 바늘을 세어 통에 넣은 뒤 휴대폰을 들었다.
『갈게요. 도착하면 연락해요.』
보내자마자 답이 왔다.
『천천히 와요.』
나는 앞치마 끈을 풀었다. 매듭이 한쪽으로 몰려 손톱으로 벌려야 했다.
3층에서 다은이 내려왔다. 빈 찻잔을 들고 있던 다은이 내 가방을 봤다.
“오늘 일찍 가네?”
“응. 마른 종이는 덮어 놨어. 프레스기는 내일 열면 돼.”
“알았어. 그런데 연필.”
나는 머리에 손을 댔다. 연필 끝이 귀 뒤를 찔렀다. 뽑아서 작업대에 놓자 머리가 어깨로 내려왔다.
다은이 내 얼굴을 보다가 찻잔을 씻으러 갔다.
“문은 내가 잠글게. 가.”
나는 가죽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문 앞에서 다시 멈췄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꺼냈다.
새 문자는 없었다.
지도를 열고 이헌이 보낸 위치를 눌렀다.
◈
둑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난간 옆으로 비켜 섰다. 바퀴가 마지막 계단을 넘은 뒤에야 내려갔다.
휴대폰에는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산책로 건너 벤치가 보였다. 벤치 옆에는 덮개가 씌워진 매점이 있었고, 그 아래에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재킷, 손에 든 휴대폰.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계단 끝에서 발을 멈췄다. 이헌도 벤치 옆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얼굴이 보였다가 가려졌다.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머리가 더 짧았다. 재킷 안에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방을 메지 않은 어깨가 보였다.
나는 자전거 한 대를 보내고 산책로를 건넜다.
이헌 앞에 섰을 때 휴대폰이 손안에서 짧게 울렸다. 화면을 보지 않고 껐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벌렸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헌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어깨로 내려갔다. 손가락이 움직였다가 재킷 옆에서 멎었다.
나는 가방끈을 놓았다. 손바닥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이헌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바로 앞에서 보이는 셔츠 단추와 턱 아래를 번갈아 봤다.
이헌이 숨을 들이마셨다.
누군가 뒤로 지나갔다. 작은 개의 목줄에 달린 장식이 소리를 냈다. 나는 옆으로 반걸음 비켰다가 다시 이헌을 봤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휴대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방금까지 보이던 시각에서 숫자가 하나 바뀌었다. 계단 아래에서 이헌을 발견한 뒤 1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먼저 한 걸음 다가갔다. 재킷 앞자락을 손으로 잡고 이헌의 품에 이마를 댔다. 가방이 옆구리 사이에 끼었다.
이헌의 팔이 올라오다가 잠깐 멈췄다.
나는 재킷을 잡은 손을 놓고 허리 뒤로 팔을 둘렀다. 그제야 등이 받쳐졌다. 한 손이 어깨 아래에 닿고, 다른 손이 가방을 바깥쪽으로 밀어 줬다.
셔츠에서 세제 냄새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재킷에 눌린 뺨을 조금 옮겼다. 이헌의 손이 내 등에서 멎었다.
“나경아.”
그 한마디에 팔을 더 좁혔다.
이헌의 가슴 앞에서 숨을 고르고 나서 대답했다.
“왔네요.”
“네.”
“진짜 왔어요.”
“왔어요.”
이헌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숨이 닿았다. 나는 옆구리에 걸린 가방을 뒤로 밀었다. 팔을 풀지 않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밀었다.
“이헌 씨.”
“응.”
부르고 나니 다음 말이 없었다.
이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내 등을 받친 손만 조금 움직였다.
나는 셔츠 주름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
먼저 팔을 푼 것은 나였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져 고개를 들었다.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나는 가방끈을 바로 걸고 이헌에게서 떨어졌다.
재킷 앞자락이 구겨져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펴려 하자 이헌이 그대로 서 있었다. 손바닥으로 주름을 누르다가 멈췄다. 문질러 편다고 펴질 옷이 아니었다.
“많이 구겼어요.”
“괜찮아요.”
“이건 제가 못 고쳐요.”
이헌이 내 손을 봤다. 손가락 끝에 아침 작업 때 묻은 풀이 남아 있었다. 떼어 내려고 엄지로 문지르자 이헌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받아서 손끝을 닦았다. 마른 풀은 물이 없어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손 씻을 데부터 갈까요?”
“커피 사요.”
내가 고개를 들자 이헌이 가까운 편의점을 가리켰다.
“오는 길에 봤어요.”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걷자 팔 사이가 벌어졌다. 지나가는 자전거를 피할 때만 이헌이 바깥쪽으로 비켰다.
나는 손수건을 접었다.
“빨아서 줄게요.”
“그냥 줘도 돼요.”
“풀 묻었어요. 이대로 두면 얼룩 남아요.”
이헌이 내밀던 손을 거뒀다. 나는 손수건을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당겼다.
“해외에 있는 줄 알아요?”
“형님은요.”
“현석 씨는 알고요?”
“네. 오늘은 따로 움직였어요.”
“숙소는 잡았어요?”
“잡았어요. 짐도 먼저 보냈고.”
나는 그제야 빈손인 이유를 알았다. 한 손에는 휴대폰, 다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손이 걸을 때마다 내 가방끈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 이헌이 내 보폭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불편하면 다른 데로 가도 돼요.”
나는 편의점 유리문에 비친 뒤쪽을 봤다. 유모차를 미는 사람과 자전거를 세우는 학생이 있었다.
“커피부터요.”
문을 잡고 이헌을 돌아봤다.
“저 오늘 일찍 끝냈어요. 급하게 갈 필요 없어요.”
이헌이 문을 받았다.
“그럼 천천히 마셔요.”
나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이헌은 커피 기계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종이컵 두 개가, 다른 손에는 동전이 있었다.
계산대 위에도 동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거 다 어디서 났어요?”
“바꿨어요.”
이헌이 손을 펴 보였다. 동전이 겹쳐 있었다.
“이번엔 넉넉하게요.”
나는 컵을 하나 받아 들었다.
“이 기계는 계산대에서 먼저 계산하는 거예요.”
이헌이 동전 투입구가 없는 기계를 봤다. 뒤에서 점원이 영수증을 내밀었다.
“두 잔 누르시면 돼요.”
나는 영수증을 받고 컵을 기계 아래에 놓았다. 이헌이 동전을 주머니에 넣었다. 걸을 때마다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다 바꿨나 봐요.”
“부족한 것보단 나아서.”
나는 커피가 나오는 동안 입술을 눌렀다. 이헌이 나를 보자 더 참지 못했다.
“웃어도 돼요?”
“이미 웃고 있는데.”
“너무 많이 바꿔서요.”
이헌도 기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첫 컵을 빼고 다음 컵을 넣었다. 나는 뚜껑을 들고 기다렸다. 뜨거운 커피가 손등에 튀지 않도록 이헌이 컵 받침을 바로 놓았다.
계산대 옆에서 아이가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고른 우유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었다. 뒤에 선 어른이 가방 안을 찾으며 아이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이헌은 손에 남은 동전을 내려다봤다. 나는 소매를 살짝 잡았다.
곧 어른이 지갑을 꺼냈다. 아이가 우유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이헌이 내 쪽을 봤다.
“조금만 기다리면 됐죠?”
“네.”
나는 남은 컵에 뚜껑을 끼웠다. 이헌이 잔돈을 모아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쓸 데가 있겠죠.”
“다음 커피는 제가 살게요.”
컵 두 개를 나눠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헌이 먼저 문을 열었다.
◈
벤치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골랐다. 등 뒤에는 둑이 있었고 앞쪽으로 강이 보였다.
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이헌은 컵을 벤치 사이에 놓으려다 손에 그대로 들었다. 내가 앉은 쪽으로 뚜껑의 입구가 돌아가지 않게 고쳤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뜨거웠다. 혀끝이 데어 컵을 입에서 떼자 이헌이 뚜껑 입구를 가리켰다.
“식혀서 마셔요. 급할 거 없다면서요.”
“밥은 먹었어요?”
내 질문에 이헌이 컵을 내렸다.
“기내식 먹었어요.”
“샌드위치 아니고요?”
“밥이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컵을 불었다.
“당신은요?”
“다은이랑 국수 먹었어요.”
“다 먹고?”
“그릇까지 보여 줄 걸 그랬네요.”
이헌이 웃었다. 휴대폰 너머로 봤던 얼굴과 달랐다. 눈가가 접히는 것도, 웃음을 거두며 입술을 한번 누르는 것도 바로 옆에서 보였다.
나는 컵의 이음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으니까 이상해요.”
이헌이 나를 봤다.
“화면으로 볼 때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요?”
“얼굴 보느라 못 하겠어요.”
말을 하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를 마시지는 못했다. 이헌이 시선을 내릴 때까지 뚜껑 가장자리만 보고 있었다.
무릎 위 가방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바로잡다가 목에 건 실이 옷깃 밖으로 나왔다.
반지를 먼저 안으로 넣었다.
이헌이 컵을 쥔 손을 옮겼다. 나는 실이 보이지 않게 옷깃을 펴고 가방 지퍼를 잠갔다.
“작업할 때 빼 둔 걸 그대로 하고 나왔어요.”
“알아요.”
“안 잊었어요.”
이헌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봤다.
나는 컵을 무릎 위에서 떼어 벤치 끝에 놓았다. 빈손을 가방 위에 올렸다.
“오늘 잠깐 본 걸로 다시 6개월 기다리라고 하면 안 돼요.”
이헌의 손이 컵 아래에서 멎었다.
“그렇게 안 해요.”
“말 못 할 일이 생기면, 못 한다고라도 말해 줘요.”
“그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끈을 접어 손잡이 안에 넣었다. 이헌은 내가 손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뭐 하려고 했어요?”
“당신 보는 거요.”
“그다음은요?”
이헌이 커피를 들었다.
“이거 마시는 거.”
나는 빈손으로 컵을 다시 집었다.
“그다음도 생각해 둬요.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
“좋아요.”
컵 뚜껑 너머로 이헌을 봤다. 이헌이 재킷 소매를 올렸다. 손목에 시계는 없었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손목 대신 소매 끝을 잡았다. 천을 조금 당기자 이헌이 팔을 내 쪽으로 옮겼다.
“아까는 얼굴을 못 봤어요.”
“지금 보면 돼요.”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소매를 잡은 채 잠깐 버텼다. 먼저 시선을 피하면 또 6개월을 화면으로만 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이헌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둑 위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손을 멈췄다.
계단 난간 가까이에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두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긴 렌즈가 산책로 아래를 향했다.
이헌도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소매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렌즈가 향한 곳을 확인했다. 강 쪽이 아니었다. 우리가 앉은 벤치였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얼굴을 가리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67화 끝)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이거 돌려줘야 해.”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지금은 안 해요.”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현금이나 물건은요?”다은이 뒤에서 말했다.“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경아, 계단에서 조심해. 유리 있어.”휴대폰 너머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멈췄다.“무슨 유리?”“우리 출입문. 누가 깨고 들어왔어.”계단 위에서 빗자루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너는 어디 있어?”“복도. 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켜고 나오다가 넘어졌어.”“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 밑에 유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위층에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웠다.“가운데로 와. 벽 쪽은 아직 못 쓸었어.”가끔 가계부를 고치러 오는 할머니였다. 손에는 쓰레받기 대신 빈 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다은은 2층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친 채였다. 나는 다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머리는 안 부딪혔어?”“손만 짚었어. 불이 꺼져 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못 봤거든.”다은의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손목을 들자 입술을 깨물었다.“삐었나 봐.”“움직이지 마. 손바닥 좀 보여 줘.”긁힌 곳은 없었다. 손목 바깥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은 손 밑에 접어 넣었다.복도 끝의 출입문은 잠금장치 옆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안쪽 문고리에 유리 조각이 걸려 있었다.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컴퓨터는 있어.&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