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작은방에서요. 저녁마다 버스 타는 시간은 줄잖아요. 제 집은 그대로 두고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신발장 앞에서 잡았던 소매가 떠올라 서연은 펜으로 빈칸을 눌렀다. 소매만이 아니었다. 목덜미에 닿았던 숨, 그 숨 때문에 열렸던 몸까지 빈칸을 눌렀다.
“형부 방에 들어가겠다는 것도 아닌데요.”
태주가 등을 세웠다. 서연은 말을 잘못 골랐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봄이가 적응할 동안만요.”
“불편하지 않겠어?”
“뭐가요?”
“나도 여기서 살아.”
서연은 펜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출근 시간과 버스 시간은 빼곡하게 적었는데, 그 말에는 준비한 대답이 없었다.
아침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마주칠 사람도 태주였다. 밤에 씻고 나와 복도 불을 끌 사람도. 방을 따로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방문 사이에는 그를 지나쳐야 하는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에서 숨이 다시 목덜미에 닿을 수도 있었다.
“알아요.”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태주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불편하겠느냐는 질문을 취소하지도, 괜찮을 거라고 대신 대답해 주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거실에서 봄이가 맞춘 퍼즐 조각을 두드렸다. 둘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아이는 곰의 코를 제자리에 붙이고 있었다.
“봄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네. 사장님하고도 정해야 돼서.”
“나도 현장 시간 확인할게. 네가 있어도 내가 해야 하는 건 해야지.”
그가 서연의 메모장을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고 식탁 가운데로 조금 밀었다. 빈 종이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적었다. 펜 끝이 수요일 위에서 멈췄다.
“일단 출근부터 얘기해 보고. 안 되는 시간이 있으면 그대로 말해.”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 메모장을 넣으려는데 배에서 소리가 났다. 태주가 주방을 봤다.
“밥 먹었다며.”
“우유 마셨어요.”
“그게 밥이야?”
그는 명자가 남겨 둔 계란찜을 꺼냈다. 서연이 괜찮다고 하기 전에 밥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봄이는 퍼즐 판을 안고 식탁 쪽으로 왔다.
서연이 숟가락을 들자 태주가 말했다.
“들어오면 네 방 문은 닫고 써. 나도 들어가기 전에 물어볼게.”
“그건 당연하죠.”
“당연한 건 미리 말해 놓는 게 낫더라.”
그는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고 봄이가 밀어 놓은 식탁 매트를 폈다.
서연은 메모장을 접으려다 수요일 칸 옆에 ‘작은방’이라고 적었다. 방 이름을 써 놓고 나니, 오히려 그 앞을 지나갈 태주의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문 닫는 규칙이 필요한 이유를, 그녀는 일정표에 쓰지 못했다.
***
월요일 아침, 서연은 회사 문을 열다가 언니에게 전화를 걸 뻔했다.
쉬고 나왔더니 출근하기 싫다고, 입으로만 투덜거리면 되는 상대였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사무실 불을 켰다. 책상 위에는 사흘 전 도착한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미경은 9시가 조금 못 되어 왔다. 두 사람은 고객문의 창을 열기 전에 시간표부터 봤다.
“8시부터 4시까지 여기서 하고, 저녁에 편집 1시간. 전화 업무는 오후 4시까지만. 맞지?”
“네. 점심시간 빼면 7시간이고, 집에서 1시간 채우면 돼요.”
“기간은?”
“수요일부터 4주요. 안 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미경은 종이에 적힌 날짜에 밑줄을 그었다.
“오늘 4시에 나가는 건 먼저 해 봐. 길 얼마나 걸리는지 봐야지. 대신 급한 수정은 점심 전에 넘겨 줘.”
“네.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하고. 반찬통 뚜껑 사진부터 찾아 봐. 내가 찍었더니 색이 다르더라.”
서연은 뚜껑 사진의 색을 맞추고 가격 표시가 가려지지 않게 옮겼다. 손이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손이 기억하는 다른 일도 있었다. 현관 소매의 주름, 식탁 아래 천의 온도. 그 기억은 포토샵 레이어처럼 상품 사진 위에 겹쳤다.
오전 중에 태주에게 문자가 왔다. 봄이는 교실에 들어갔고, 점심까지 있어 보기로 했다고 했다. 서연은 이모가 5시에 데리러 가도 되는지 물었다. 태주는 아이 상태를 보고 다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오후 1시가 지나 봄이가 더 있겠다고 했다는 답이 왔다. 태주는 선생님께 이모가 데리러 간다고 알리고, 봄이에게도 시간을 말해 두었다고 했다. 서연은 달력의 5시에 동그라미를 쳤다.
4시에 사무실을 나와 버스를 탔다. 길이 막혀 초조했지만 유치원 앞에 도착하니 4시 43분이었다.
5시에 나온 봄이가 가방을 내밀었다.
“왜 밖에 있었어?”
“일찍 와서 봄이가 신발 신는 동안 기다렸지.”
선생님이 몸을 낮춰 아이에게 인사했다. 서연에게는 낮잠 시간에 잠깐 울었지만 블록 놀이에는 참여했다고 조용히 말했다. 서연은 아이 앞에서 더 캐묻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봄이가 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새 학기 준비물 안내였다. 여벌 양말과 이름을 쓴 물병이 필요했다.
“물병 집에 있어?”
“뚜껑 안 닫혀.”
“그럼 아빠한테 말하고 하나 사자.”
“노란 거.”
서연은 노란색이라고 메모했다. 오는 길에는 문구점 유리에 붙은 공룡 스티커도 잠깐 구경했다. 봄이가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묻자 서연은 약속한 시간을 알려 줬다.
“6시 30분. 손 씻고 간식 먹으면 좀 있다 와.”
태주는 6시 25분에 왔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봄이가 식탁에서 내려갔다. 서연은 빈 우유컵을 치우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맞출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봄이가 거실에서 블록을 꺼냈을 때, 서연은 태주 앞에 회사와 맞춘 시간표를 놓았다.
“4시에 나와서 43분에 도착했어요. 차 막히면 조금 더 걸리겠지만요.”
“등원은 내가 할게. 아침 현장은 당분간 다른 직원이 먼저 열기로 했어.”
태주도 접힌 종이를 폈다. 수요일 일정 옆에 9시라고 적혀 있었다.
“저녁 8시에는 저 일해야 해요. 1시간은 문 닫고요.”
“그때는 내가 씻기고 재울게.”
“늦으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저도 사장님한테 얘기해야 하니까.”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전화 달력을 열었다. 서연은 입주 날짜인 3월 18일부터 손가락으로 주를 짚었다. 넷째 주 마지막 날은 4월 14일이었다.
“15일에 다시 얘기해요. 계속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알아.”
“봄이한테도 그렇게 말해 주세요.”
그가 바로 아이를 불렀다. 봄이는 블록 지붕을 들고 와서 식탁 끝에 놓았다.
“이모가 수요일부터 작은방에서 지낼 거야. 달력 여기까지.”
봄이는 태주가 보여 주는 화면을 봤다.
“내 생일?”
“생일은 지난달에 했지. 이모가 여기서 자는 날짜야.”
“그다음은?”
태주가 서연을 봤다. 서연은 아이 앞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그때 다시 얘기할 거야. 이모 집도 그대로 있어. 짐 다 가져오는 거 아니고.”
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블록 지붕을 다시 들었다.
“이모 베개 있어?”
“내 거 가져올게.”
“큰 거는 문에 걸려.”
“눕혀서 들고 오면 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돌아갔다. 태주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려 하자 서연은 준비물 안내를 먼저 내밀었다.
“물병이랑 장 볼 돈은 형부가 주세요. 저 월세는 제가 내고요.”
“네가 쓰는 것도 들어가잖아.”
“얼마 드는지 보고 정해요. 일단 봄이 것부터요.”
태주는 지갑을 내려놓고 종이 뒷면에 물병이라고 적었다. 서연이 노란색이라고 덧붙였다. 금액은 실제로 산 뒤 맞추기로 했다.
태주가 봄이를 재우고 나온 뒤에야 두 사람은 작은방을 정리했다. 접이식 책상 둘레로 수납 상자가 쌓여 있었다.
“위에 작은 건 비었죠?”
“응. 나머지는 열어 봐야 해.”
서연은 태주가 문 앞 상자 두 개를 베란다로 옮기는 동안 낮은 발판에 올라섰다. 책장 위의 상자를 당기자 뒤에 끼어 있던 뚜껑이 걸렸다. 한 번 더 힘을 주는 순간 발판 끝이 들렸다.
“서연아.”
방으로 돌아오던 태주가 한 손으로 팔꿈치를 붙잡았다. 다른 손은 아래로 가서, 기울던 엉덩이와 허벅지 뒤를 받쳤다. 상자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뒤로 기울던 몸은 그 두 손에 걸렸다.
“움직이지 마. 발판부터.”
태주가 발끝으로 발판을 눌렀다. 옆구리를 받친 손에 힘이 들어왔다. 아래로 간 손은 실수처럼 늦었다. 서연은 떨어진 상자 대신 자신의 팔꿈치를 감싼 손과, 엉덩이 아래 벌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한 발씩 내려.”
그제야 바닥에 발을 디뎠다. 나머지 발도 내리고 돌아보니 그의 턱이 눈앞에 있었다. 골반이 스쳤다.
바지 천 너머로 단단한 것이 서연의 아랫배에 닿았다. 받치느라 붙인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태주도 그 사실을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손은 아직 아래에 있었다.
서연은 그 감촉을 알아채고도 다른 말을 했다.
“발, 둘 다 닿았어요?”
“네. 다친 데 없어?”
대답이 겹쳤다.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말이 끊겼다. 엉덩이 아래 놓인 손은 아직 그대로였다. 발을 헛디뎠을 때보다 지금 더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제 손이 뒤늦게 보였다. 급해서 움켜쥔 손인데 바닥에 내려온 뒤에도 펴지지 않았다. 태주의 시선도 같은 곳에 머물렀다.
“……이제 놓으셔도 돼요.”
그 말은 팔꿈치가 아니라 아래에 있는 손을 두고 한 말이었다. 태주도 그렇게 알아들었다. 손은 곧 떨어졌다. 그러나 세 박자 늦게. 그 세 박자 동안 손바닥의 열이지 않은 자국이 허벅지 뒤에 남았다.
서연도 잡고 있던 팔을 놓고 책장 옆으로 비켜섰다. 떨어진 상자 하나를 둘 사이에 두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아랫배의 단단하던 감촉은 떨어졌는데도 남아 있었다.
태주는 상자를 주워 들고 발판을 벽 쪽으로 밀었다.
“발목은 괜찮아?”
“네. 그냥 놀라서요.”
“나 부르고 하지.”
서연은 대답하려다 옷자락을 내렸다. 태주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왔다가 멈췄다. 내린 옷자락이 방금 닿았던 아랫배를 가렸다.
“아프게 잡았어?”
“아뇨.”
그녀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태주가 다시 얼굴을 봤다.
“안 아팠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옷자락을 쥔 손을 놓았다. 다친 곳이 없다고 했으니 더 물을 말도 없을 텐데, 그가 한 번만 더 돌아봤으면 했다.
남은 상자는 서희 물건이어서 내일 함께 확인한 뒤 옮기기로 했다. 태주가 먼저 나가고 문이 반쯤 닫혔다.
서연은 작은방 문을 잠갔다. 잠그는 손이 떨렸다. 벽에 등을 대고 내려앉았다. 방금 그의 손바닥이 있던 허벅지 뒤를 자기 손바닥으로 눌렀다. 열은 아직 있었다.
바지를 내리고 손가락을 넣었다. 이미 미끄러웠다. 현관에서 열렸던 몸과, 식탁 아래 스친 몸과, 방금 아랫배에 닿았던 것이 한꺼번에 손가락 위로 몰렸다. 서연은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름을 부르려다 못 불렀다. 태주라는 두 글자는 이 방에서 너무 컸다. 대신 숨죽여 그 호칭이 나왔다.
형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허리가 접혔다. 절정은 짧게 왔다. 오고 나서 더 더러워졌다. 방금 그 말로 몸을 연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이 선명했다.
서연은 손을 씻지 않은 채 한참 앉아 있다가 휴지로 닦았다. 소매 끝을 한 번 당겨 내렸다. 잡혔던 자리를 문지를 이유가 없었다. 아프지도 않았고 겉으로 자국도 없었다. 안쪽에만 남아 있었다.
메모장을 덮었다. 수요일이면, 밤이 되어도 이 집에서 나가지 않게 될 터였다.
***
열 달이 지난 저녁, 같은 책장 앞이었다.
상자는 없었다. 발판도 없었다. 서연의 등이 책장에 붙어 있고, 태주가 허리를 받아 그녀를 들어 올렸다. 다리가 그의 허리에 감겼다. 들어가는 각도가 깊었다.
“그때 놓으라고 한 손이야.”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책장 모서리가 어깨뼈에 배었다. 태주의 손이 다시 허벅지 뒤에 가 있었다. 그날의 그 자리였다. 지금은 받치는 손이 아니라 벌리는 손이었다.
짧게 움직였다. 벽 너머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서 서연이 그의 입술을 막아 신음을 삼켰다. 막은 입이 키스가 됐다. 아래가 열리고 조여들었다.
빠져나온 뒤 태주가 이마를 책장에 붙였다.
“그때 놨어야 했어.”
“놓았잖아요.”
“세 번 세고 놨어. 그거 안 놓은 거랑 같아.”
서연은 내려서서 바지를 올렸다. 소매를 내려 봤다. 2027년의 소매에는 자국이 없었다. 2026년의 소매에도 자국은 없었다.
없는 것이 더 오래 남았다.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