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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5화. 놓으셔도 돼요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0:04:25

“작은방에서요. 저녁마다 버스 타는 시간은 줄잖아요. 제 집은 그대로 두고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신발장 앞에서 잡았던 소매가 떠올라 서연은 펜으로 빈칸을 눌렀다. 소매만이 아니었다. 목덜미에 닿았던 숨, 그 숨 때문에 열렸던 몸까지 빈칸을 눌렀다.

“형부 방에 들어가겠다는 것도 아닌데요.”

태주가 등을 세웠다. 서연은 말을 잘못 골랐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봄이가 적응할 동안만요.”

“불편하지 않겠어?”

“뭐가요?”

“나도 여기서 살아.”

서연은 펜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출근 시간과 버스 시간은 빼곡하게 적었는데, 그 말에는 준비한 대답이 없었다.

아침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마주칠 사람도 태주였다. 밤에 씻고 나와 복도 불을 끌 사람도. 방을 따로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방문 사이에는 그를 지나쳐야 하는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에서 숨이 다시 목덜미에 닿을 수도 있었다.

“알아요.”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태주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불편하겠느냐는 질문을 취소하지도, 괜찮을 거라고 대신 대답해 주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거실에서 봄이가 맞춘 퍼즐 조각을 두드렸다. 둘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아이는 곰의 코를 제자리에 붙이고 있었다.

“봄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네. 사장님하고도 정해야 돼서.”

“나도 현장 시간 확인할게. 네가 있어도 내가 해야 하는 건 해야지.”

그가 서연의 메모장을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고 식탁 가운데로 조금 밀었다. 빈 종이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적었다. 펜 끝이 수요일 위에서 멈췄다.

“일단 출근부터 얘기해 보고. 안 되는 시간이 있으면 그대로 말해.”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 메모장을 넣으려는데 배에서 소리가 났다. 태주가 주방을 봤다.

“밥 먹었다며.”

“우유 마셨어요.”

“그게 밥이야?”

그는 명자가 남겨 둔 계란찜을 꺼냈다. 서연이 괜찮다고 하기 전에 밥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봄이는 퍼즐 판을 안고 식탁 쪽으로 왔다.

서연이 숟가락을 들자 태주가 말했다.

“들어오면 네 방 문은 닫고 써. 나도 들어가기 전에 물어볼게.”

“그건 당연하죠.”

“당연한 건 미리 말해 놓는 게 낫더라.”

그는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고 봄이가 밀어 놓은 식탁 매트를 폈다.

서연은 메모장을 접으려다 수요일 칸 옆에 ‘작은방’이라고 적었다. 방 이름을 써 놓고 나니, 오히려 그 앞을 지나갈 태주의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문 닫는 규칙이 필요한 이유를, 그녀는 일정표에 쓰지 못했다.

***

월요일 아침, 서연은 회사 문을 열다가 언니에게 전화를 걸 뻔했다.

쉬고 나왔더니 출근하기 싫다고, 입으로만 투덜거리면 되는 상대였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사무실 불을 켰다. 책상 위에는 사흘 전 도착한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미경은 9시가 조금 못 되어 왔다. 두 사람은 고객문의 창을 열기 전에 시간표부터 봤다.

“8시부터 4시까지 여기서 하고, 저녁에 편집 1시간. 전화 업무는 오후 4시까지만. 맞지?”

“네. 점심시간 빼면 7시간이고, 집에서 1시간 채우면 돼요.”

“기간은?”

“수요일부터 4주요. 안 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미경은 종이에 적힌 날짜에 밑줄을 그었다.

“오늘 4시에 나가는 건 먼저 해 봐. 길 얼마나 걸리는지 봐야지. 대신 급한 수정은 점심 전에 넘겨 줘.”

“네.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하고. 반찬통 뚜껑 사진부터 찾아 봐. 내가 찍었더니 색이 다르더라.”

서연은 뚜껑 사진의 색을 맞추고 가격 표시가 가려지지 않게 옮겼다. 손이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손이 기억하는 다른 일도 있었다. 현관 소매의 주름, 식탁 아래 천의 온도. 그 기억은 포토샵 레이어처럼 상품 사진 위에 겹쳤다.

오전 중에 태주에게 문자가 왔다. 봄이는 교실에 들어갔고, 점심까지 있어 보기로 했다고 했다. 서연은 이모가 5시에 데리러 가도 되는지 물었다. 태주는 아이 상태를 보고 다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오후 1시가 지나 봄이가 더 있겠다고 했다는 답이 왔다. 태주는 선생님께 이모가 데리러 간다고 알리고, 봄이에게도 시간을 말해 두었다고 했다. 서연은 달력의 5시에 동그라미를 쳤다.

4시에 사무실을 나와 버스를 탔다. 길이 막혀 초조했지만 유치원 앞에 도착하니 4시 43분이었다.

5시에 나온 봄이가 가방을 내밀었다.

“왜 밖에 있었어?”

“일찍 와서 봄이가 신발 신는 동안 기다렸지.”

선생님이 몸을 낮춰 아이에게 인사했다. 서연에게는 낮잠 시간에 잠깐 울었지만 블록 놀이에는 참여했다고 조용히 말했다. 서연은 아이 앞에서 더 캐묻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봄이가 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새 학기 준비물 안내였다. 여벌 양말과 이름을 쓴 물병이 필요했다.

“물병 집에 있어?”

“뚜껑 안 닫혀.”

“그럼 아빠한테 말하고 하나 사자.”

“노란 거.”

서연은 노란색이라고 메모했다. 오는 길에는 문구점 유리에 붙은 공룡 스티커도 잠깐 구경했다. 봄이가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묻자 서연은 약속한 시간을 알려 줬다.

“6시 30분. 손 씻고 간식 먹으면 좀 있다 와.”

태주는 6시 25분에 왔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봄이가 식탁에서 내려갔다. 서연은 빈 우유컵을 치우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맞출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봄이가 거실에서 블록을 꺼냈을 때, 서연은 태주 앞에 회사와 맞춘 시간표를 놓았다.

“4시에 나와서 43분에 도착했어요. 차 막히면 조금 더 걸리겠지만요.”

“등원은 내가 할게. 아침 현장은 당분간 다른 직원이 먼저 열기로 했어.”

태주도 접힌 종이를 폈다. 수요일 일정 옆에 9시라고 적혀 있었다.

“저녁 8시에는 저 일해야 해요. 1시간은 문 닫고요.”

“그때는 내가 씻기고 재울게.”

“늦으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저도 사장님한테 얘기해야 하니까.”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전화 달력을 열었다. 서연은 입주 날짜인 3월 18일부터 손가락으로 주를 짚었다. 넷째 주 마지막 날은 4월 14일이었다.

“15일에 다시 얘기해요. 계속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알아.”

“봄이한테도 그렇게 말해 주세요.”

그가 바로 아이를 불렀다. 봄이는 블록 지붕을 들고 와서 식탁 끝에 놓았다.

“이모가 수요일부터 작은방에서 지낼 거야. 달력 여기까지.”

봄이는 태주가 보여 주는 화면을 봤다.

“내 생일?”

“생일은 지난달에 했지. 이모가 여기서 자는 날짜야.”

“그다음은?”

태주가 서연을 봤다. 서연은 아이 앞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그때 다시 얘기할 거야. 이모 집도 그대로 있어. 짐 다 가져오는 거 아니고.”

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블록 지붕을 다시 들었다.

“이모 베개 있어?”

“내 거 가져올게.”

“큰 거는 문에 걸려.”

“눕혀서 들고 오면 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돌아갔다. 태주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려 하자 서연은 준비물 안내를 먼저 내밀었다.

“물병이랑 장 볼 돈은 형부가 주세요. 저 월세는 제가 내고요.”

“네가 쓰는 것도 들어가잖아.”

“얼마 드는지 보고 정해요. 일단 봄이 것부터요.”

태주는 지갑을 내려놓고 종이 뒷면에 물병이라고 적었다. 서연이 노란색이라고 덧붙였다. 금액은 실제로 산 뒤 맞추기로 했다.

태주가 봄이를 재우고 나온 뒤에야 두 사람은 작은방을 정리했다. 접이식 책상 둘레로 수납 상자가 쌓여 있었다.

“위에 작은 건 비었죠?”

“응. 나머지는 열어 봐야 해.”

서연은 태주가 문 앞 상자 두 개를 베란다로 옮기는 동안 낮은 발판에 올라섰다. 책장 위의 상자를 당기자 뒤에 끼어 있던 뚜껑이 걸렸다. 한 번 더 힘을 주는 순간 발판 끝이 들렸다.

“서연아.”

방으로 돌아오던 태주가 한 손으로 팔꿈치를 붙잡았다. 다른 손은 아래로 가서, 기울던 엉덩이와 허벅지 뒤를 받쳤다. 상자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뒤로 기울던 몸은 그 두 손에 걸렸다.

“움직이지 마. 발판부터.”

태주가 발끝으로 발판을 눌렀다. 옆구리를 받친 손에 힘이 들어왔다. 아래로 간 손은 실수처럼 늦었다. 서연은 떨어진 상자 대신 자신의 팔꿈치를 감싼 손과, 엉덩이 아래 벌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한 발씩 내려.”

그제야 바닥에 발을 디뎠다. 나머지 발도 내리고 돌아보니 그의 턱이 눈앞에 있었다. 골반이 스쳤다.

바지 천 너머로 단단한 것이 서연의 아랫배에 닿았다. 받치느라 붙인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태주도 그 사실을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손은 아직 아래에 있었다.

서연은 그 감촉을 알아채고도 다른 말을 했다.

“발, 둘 다 닿았어요?”

“네. 다친 데 없어?”

대답이 겹쳤다.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말이 끊겼다. 엉덩이 아래 놓인 손은 아직 그대로였다. 발을 헛디뎠을 때보다 지금 더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제 손이 뒤늦게 보였다. 급해서 움켜쥔 손인데 바닥에 내려온 뒤에도 펴지지 않았다. 태주의 시선도 같은 곳에 머물렀다.

“……이제 놓으셔도 돼요.”

그 말은 팔꿈치가 아니라 아래에 있는 손을 두고 한 말이었다. 태주도 그렇게 알아들었다. 손은 곧 떨어졌다. 그러나 세 박자 늦게. 그 세 박자 동안 손바닥의 열이지 않은 자국이 허벅지 뒤에 남았다.

서연도 잡고 있던 팔을 놓고 책장 옆으로 비켜섰다. 떨어진 상자 하나를 둘 사이에 두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아랫배의 단단하던 감촉은 떨어졌는데도 남아 있었다.

태주는 상자를 주워 들고 발판을 벽 쪽으로 밀었다.

“발목은 괜찮아?”

“네. 그냥 놀라서요.”

“나 부르고 하지.”

서연은 대답하려다 옷자락을 내렸다. 태주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왔다가 멈췄다. 내린 옷자락이 방금 닿았던 아랫배를 가렸다.

“아프게 잡았어?”

“아뇨.”

그녀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태주가 다시 얼굴을 봤다.

“안 아팠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옷자락을 쥔 손을 놓았다. 다친 곳이 없다고 했으니 더 물을 말도 없을 텐데, 그가 한 번만 더 돌아봤으면 했다.

남은 상자는 서희 물건이어서 내일 함께 확인한 뒤 옮기기로 했다. 태주가 먼저 나가고 문이 반쯤 닫혔다.

서연은 작은방 문을 잠갔다. 잠그는 손이 떨렸다. 벽에 등을 대고 내려앉았다. 방금 그의 손바닥이 있던 허벅지 뒤를 자기 손바닥으로 눌렀다. 열은 아직 있었다.

바지를 내리고 손가락을 넣었다. 이미 미끄러웠다. 현관에서 열렸던 몸과, 식탁 아래 스친 몸과, 방금 아랫배에 닿았던 것이 한꺼번에 손가락 위로 몰렸다. 서연은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름을 부르려다 못 불렀다. 태주라는 두 글자는 이 방에서 너무 컸다. 대신 숨죽여 그 호칭이 나왔다.

형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허리가 접혔다. 절정은 짧게 왔다. 오고 나서 더 더러워졌다. 방금 그 말로 몸을 연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이 선명했다.

서연은 손을 씻지 않은 채 한참 앉아 있다가 휴지로 닦았다. 소매 끝을 한 번 당겨 내렸다. 잡혔던 자리를 문지를 이유가 없었다. 아프지도 않았고 겉으로 자국도 없었다. 안쪽에만 남아 있었다.

메모장을 덮었다. 수요일이면, 밤이 되어도 이 집에서 나가지 않게 될 터였다.

***

열 달이 지난 저녁, 같은 책장 앞이었다.

상자는 없었다. 발판도 없었다. 서연의 등이 책장에 붙어 있고, 태주가 허리를 받아 그녀를 들어 올렸다. 다리가 그의 허리에 감겼다. 들어가는 각도가 깊었다.

“그때 놓으라고 한 손이야.”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책장 모서리가 어깨뼈에 배었다. 태주의 손이 다시 허벅지 뒤에 가 있었다. 그날의 그 자리였다. 지금은 받치는 손이 아니라 벌리는 손이었다.

짧게 움직였다. 벽 너머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서 서연이 그의 입술을 막아 신음을 삼켰다. 막은 입이 키스가 됐다. 아래가 열리고 조여들었다.

빠져나온 뒤 태주가 이마를 책장에 붙였다.

“그때 놨어야 했어.”

“놓았잖아요.”

“세 번 세고 놨어. 그거 안 놓은 거랑 같아.”

서연은 내려서서 바지를 올렸다. 소매를 내려 봤다. 2027년의 소매에는 자국이 없었다. 2026년의 소매에도 자국은 없었다.

없는 것이 더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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