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소.”수월관의 대문이 그제야 열렸다.북진연은 명을 받고 온사를 호송해 온 사람들이니 수월관 대사부를 비롯해 어린 사태들까지 모두 사실을 알고 있었다.문을 열어준 사태는 당연히 그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물론 북진연의 말이 아예 거짓말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제 그는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폐하께 청을 올려 자신이 이번 기도 의식을 주관하겠다고 했다.어린 황제는 비록 의아했지만 갑작스러운 삼촌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그러니 북진연이 명을 받고 왔다고 한 것도 사실이었다.“무우 사매는 지금 대전에서 막수 사부와 아침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시지요.”그렇게 반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북진연이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온사가 막수 사태와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사내는 기둥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왜 이리 빨리 오셨지?’막수 사태는 북진연을 발견하고 약간 이상을 찌푸렸다.그러자 온사가 재빨리 해명했다.“섭정왕 전하께서는 제가 부탁한 의술 서적을 가져오셨나 봅니다. 전에 제가 부탁을 했거든요.”막수 사태가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의술을 배우려고?”온사가 그럴듯하게 답했다.“산에서 아침 공부와 기도를 마치고도 매일 시간이 남는데 어차피 한가하기도 하고 해서 책을 좀 읽고 싶어서요.”“전에 배운 적은 있고?”막수 사태의 질문에 온사는 쑥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아니요. 배운 적은 없어요.”그 말을 들은 막수 사태는 잠깐의 호기심일 거라 판단하고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그래. 원하면 그렇게 하려무나. 다만….”막수 사태는 북진연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저 분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는 말고.”온사가 순순히 답했다.“예, 저도 압니다. 저는 이미 출가한 몸이니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온사는 출가한 후 막수의 제자이자 수월관의 막내 사매가 되었다.막수는 뭔가 설명을 덧붙이려다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어련히 알
북진연이 여인과 접촉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줄 몰랐다면 온사는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녀는 그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아침 공부는 끝났고 저녁에 기도할 시간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만.”“그럼 잘됐네요. 가시지요.”말을 마친 북진연은 앞장서서 걸었다.온사는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전하, 먼저 가계시면 안 될까요? 이 서적들이랑 아침 공부를 한 경문을 처소에 두고 오고 싶은데요.”“예. 그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말을 마친 북진연은 곧장 뒷산으로 향했다.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처소로 달려갔다.그렇게 잠시 후, 그녀는 간 김에 물도 길어올 생각으로 물통 두 개를 챙겨서 길을 나섰다.그런데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무엇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언제 사람이 이리 많이 모였지?’냇가에는 북진연을 제외하고도 그의 흑기군 네 명이 더 있었고 바닥에는 한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소녀는 그녀를 등지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온사는 한눈에 그 소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그 소녀는 다름 아닌 온모였다.두 명의 흑기군은 북진연의 옆을 지키고 서 있고 남은 두 명은 온모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었다.온사가 물통을 들고 도착하자, 온모가 낮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섭정왕 전하, 살려주세요. 소녀는 수월관에 참배를 하러 왔다가 부주의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옵니다. 일부러 섭정왕 전하의 휴식을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참배?”북진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수월관은 기도 의식 때문에 한 달 동안 폐관한다고 하는데 참배를 하러 왔다고? 누가 널 들여보냈지? 아니면 몰래 들어온 건가?”“아닙니다!”온모가 다급히 말했다.“언니를 만나러 왔습니다! 제 언니가 며칠 전 출가한 성녀 온사거든요. 저는 진국공의 막내딸 온모라고 합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언니
북진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그는 온모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표정이 싸늘하다 못해 한기를 내뿜는 온사만 쳐다보았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면 자신을 잔뜩 경계하는 것 같았다.‘내가 자기 여동생을 잡아서 저러나? 아니야. 자매 사이가 그 정도로 좋은 거 같지 않았어. 아마 아닐 거야.’하지만 온사는 분명 그와 온모라는 여인을 동시에 보고서야 경계심을 드러냈었다.‘설마 내가 온모의 말을 믿고 자신과 맞설 거라 생각해서 경계하는 건가?’이런 생각에 북진연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그에게 병이 있어도 한 여인의 말만 듣고 편을 들어서 다른 여인을 상대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그저 추측에 불과했지만 온사의 생각을 잘 간파했다.예전에 공명정대하고 이성적인 온사의 아버지 온권승이 바로 온모의 몇 마디 말 때문에 편신한 적이 있었다.나중에 그런 믿음 때문에 온사와 최소택을 포함한 몇몇 오라버니들이 피의 대가를 치렀었다.그 사건을 계기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그래서 지금은 온모가 어떤 사내와 함께 서 있는 것만 봐도 무의식적으로 경계했다.온모가 북진연에게 잡혀 무릎을 꿇고 있는 상황이라도 말이다.왜냐면 그는 온모의 입을 틀어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예로부터 온모가 가장 잘하는 것은 저 가식적인 입으로 모든 사람들 속이고 들었다 놨다 했었다.“섭정왕 전하께서도 명을 받아 행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소녀의 다섯째 언니는 일전에 파혼을 당한 충격을 못 이겨 비구니가 되어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했습니다.”온모는 북진연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계속 가련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아버지는 다섯째 언니가 걱정되어 소녀더러 찾아가라고 하셨어요. 한데 언니는 아버지 충고를 듣지 않고 어제 저한테 물까지 끼얹었어요. 소녀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그때 온사가 경계하듯 북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이 사내가 온모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다.떳떳한 섭정왕도 온모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확
온사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성녀님이 어제 읽었던 경전은 무엇입니까?”북진연은 그녀를 자기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그런데 온사는 여전히 경계하며 그가 앉은 바위에 같이 앉지 않고 옆에 있는 작은 바위에 앉았다.혼자 앉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어제 읽었던 경전이요? 혹시나 제가 물을 길어올 때 외웠던 금광명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습니다.”그녀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북진연이 못마땅해하며 대답했다.왠지 아직도 그를 경계하는 것 같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경전에 대해 물었다.“성녀님은 능력이 되는 한 본왕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북진연이 빙그레 웃으면서 쳐다보자, 온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북진연이 예리한 눈빛으로 뭔가 알아채고 심드렁하게 말했다.“설마 말을 번복하는 겁니까? 본왕이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이런 작은 보답도 하기 싫습니까?”“그게 아니라…”온사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방금 온모 때문에 망설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북진연의 말처럼 그동안 여러 번이나 그의 도움을 받았다.상대방의 신세를 졌으니 갚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께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이런 은혜는 빨리 갚아야 정신을 가다듬고 온가를 상대할 계획을 세우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진작에 그랬어야죠.”북진연은 그제야 만족이 되었는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큰일도 아닙니다. 어제 읽었던 경전이 꽤 마음에 들더군요. 보답으로 내 앞에서 금광명경을 읽어보십시오.”그 말에 온사가 조금 놀랐다.“그… 그것만 하면 됩니까?”“그럼요.”북진연이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너무 쉽다고 생각된다면 몇 번 반복해서 읽어주면 됩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들거든요.”“알겠습니다.”온사는 흔쾌히 대답했다.북진연이 정말 금광명경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손해보는 것은 아니었다.복습할 기회라고
온사는 무려 여덟 번이나 읽어 목이 마르고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해서야 멈추었다.그런데 누구는 자는 척을 하는지 그녀가 멈출 때마다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깨어나서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또 멈춥니까?”참다못한 온사가 힐끗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계속 읽다간 제 목소리가 나갈 것 같습니다.”그제야 북진연은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진 것을 알아채고 머뭇거리며 물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한 시진이 지났습니다.”북진연은 의아했다.“그리 오래 지났습니까?”그는 고작 이 각 정도 지났다고 생각했었다.‘그래서 목소리가 나갈 것 같다고 했구먼.’북진연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온몸이 개운하고 특히 가장 골치 아팠던 부분이 오늘따라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금광명경이라는 것이 그의 병에 상당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만약 돌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읽으라고 한다면 다시는 수월관에 찾아와 계집애에게 귀찮게 부탁할 필요가 없게 된다. 북진연은 이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리며 말했다.“오늘 수고했습니다. 여기까지 하지요.”그는 자발적으로 그녀가 들고 온 나무통 두 개를 들고 냇가에 가서 문을 잔뜩 채웠다.그 모습을 본 온사가 재빨리 말렸다.“너무 많이 채웠어요.”그녀의 힘으로는 가득 찬 물통을 짊어질 수 없어 보였지만, 북진연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본왕이 바래다주겠습니다.”그는 온사가 갖고 온 멜대도 사용하지 않고 아주 가볍게 물통을 들고 산꼭대기에 있는 수월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온사는 말릴 겨를도 없이 멜대를 들고 서둘러 뒤를 쫓아갔다.한편, 진국공 저택.북진연의 부하들에게 끌려 남산 기슭에 버려진 온모는 결국 비참하게 혼자서 산중턱까지 올라갔다.거기서 온가의 마차를 발견하고 씩씩거리며 저택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언성을 높였다.온가에 도착한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서책에 있는 온권승과 온장온에게 달려갔다.“아버지, 큰오라버니!”그러나 안타깝게도 근처에서 한바퀴 돌았지만 누구도 없었다.결
"뭐? 걔가 너한테 물을 뿌린 거라고? 설마 어제도 뿌린 거야?!" 온자신은 단단히 화가 났다. 그러자 온모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척했다. "괜찮아, 오빠.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야. 그냥 물 좀 뿌린 것뿐인데 뭐, 난 괜찮아.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다섯째 언니가 집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게 어디 심각한 일이 아니야!" 온자신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사 걔, 정말 기가 막힌 애네! 아무리 성격이 못되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절대 인정하지 않더니… 자기 여동생까지 이렇게 괴롭히는 사람이 못된 게 아니라면 또 누가 못되다고 할 수가 있겠어?" "오빠! 그런 말 하지 마. 다섯째 언니가 뭘 했든, 지금으로서 오빠는 날 도와줄 방법만 생각하면 돼. 그리고 무엇보다도 빠른 시일 내에 다섯째 언니를 돌아오게 만들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거라고!" 온모는 최대한 서러운 감정은 숨기고, 절박한 목소리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그녀의 입에서 큰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온자신은 의아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온사가 수월관에서 다른 짓까지 저질렀어?" "사실 언니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온모는 이를 악물으며, 마치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숨겨두고 있는 듯 당황하고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사실 나, 언니가 수월관의 뒷산에서 한 남자랑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본 적 있어.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더라고. 게다가..." "게다가 뭐? 얼른 말해!" 온자신은 이미 온모의 말에 크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내심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닫고는 급히 추궁했다. "그 남자와 담소를 나누더니 갑자기 껴안더라고!" 온모는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숨겨온 비밀을 모두 털어놓고 나서야 그녀는 기분이 상쾌해졌다. “온사, 이 모든 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감히 나한테 더러운 물을 끼얹다니… 설령 네가 온씨 집안에 있지 않아도 나는 너를 처단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마침 안에 있던 시태가 나와 문을 사이에 두고는 온자신과 대치하였다.“폐관하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니고 당장 온사 불러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낡은 문을 걷어차고 너희들의 수월관을 뒤집어 엎어버릴거야!"온자신은 하찮은 태도로 시태의 말을 제멋대로 끊고는 위협했다.그의 건방진 태도에 시태는 언짢아져, 더더욱 문을 열어줄 마음이 없어졌다.그렇게 뒤이어 세번이나 요구를 했지만,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자, 온자신은 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들어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쾅! 쾅! 쾅!"본래 매우 아담한 수월관은, 그 대문도 그다지 두껍지 않은 두 개의 나무문으로 만들어졌다.온자신이 겹겹이 몇 발 발길질은 하자, 시태가 막을 겨를도 없이 문이 펑하고는 걷어차이게 됐다.이내 온자신은 성큼성큼 들어서 시태를 차갑게 흘깃 보고는 곧장 안으로 뛰어들었다."시주님 멈추세요! 지금 대체 뭘 하려는겁니까! 수월관 내는 그 어떤 남자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이 늙은 여승 봐라, 감히 또 나를 막으려 한다면 아예 너까지 걷어차버릴거야!"온자신은 그의 앞을 막으려는 사태를 밀어내고는 대문을 뚫고 대전으로 향했다.들어서는 길에 사람만 보이기만 하면, 온사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심상치 않은 동정을 들은 온사가 급히 달려왔을 때는, 이미 여러 명의 어린 여승이 온자신 때문에 크게 놀라 울음을 보이고 있었다.그 모습에 온사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만해요!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그 소리에 온자신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온사, 너 이제야 모습 드러내는거야?"잔뜩 흥분한 그의 모습에, 온사는 온모가 그에게 고자질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사실은, 온모는 온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엄청난 더러운 물을 뿌렸다는 것이다."우리가 친남매인 사이를 봐서라도, 우리 오빠들이 너한테 다시 한번 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러니 당장 물건 정리하고 온씨 집안으로 돌아가!"온자신은
온자신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 온사의 머리를 쳤다.“온사, 너 미쳤어? 당장 안 놔?”하지만 온사가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미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바로 온자신이었으니까!힘들게 가문을 탈출했는데 여기까지 쫓아와 그녀의 평온을 방해하는 사람 역시 온자신 뿐이었다. 누구든 그녀를 그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이라면 원수가 되었다.온사는 온자신의 팔뚝을 더 힘주어 깨물었다.그렇게 온자신의 폭력이 행해질수록 그녀는 어금니에 힘을 꽉 주었다.이빨에 피부가 찢겨져 피가 흘러 내렸지만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결국 온자신은 고통에 신음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미친년! 넌 완전히 미쳤어!”“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온자신은 주먹을 꽉 쥐고 온사에게 마구 휘둘렀다.가녀린 소녀의 몸으로 어찌 사내의 거센 공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온사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눈물이 줄줄 흘렀고, 목구멍에서는 피비린내까지 올라왔다. 대체 자신의 피인지 온자신의 피인지도 구분도 가지 않았다.이 광경에 주변에 있던 사태와 어린 여승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며 달려와서 두 사람을 떼어내려 했지만, 계속 서로를 놓아주지 않았다.심지어 온사는 온자신에게 맞아 이마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물고 있는 팔뚝을 놓아주지 않았다.그러자 온자신도 점점 한계가 찾아와,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발을 들어 온사의 배를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그 순간 온사도 그의 살점을 물어뜯었다.“악!”온자신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살점이 뜯겨져 피가 줄줄 흐르는 자신의 팔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그냥 집에 데려가려고 찾아온 것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반항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온사야, 넌 우릴 가족으로 생각한 적은 있어?”분노에 이성을 잃은 온자신이 소리를 질렀다.그러자 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온사는 사태들의 부축을 받으며 원한에 사무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말하고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