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타박타박― 맨발이 마룻바닥을 딛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씻겠다던 강은택이었다. 축축하고 시커먼 정장 대신에 편안하고 깨끗한 반팔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입은 채였다.
심우주는 그의 얼굴을 보더니 제 손에 들린 신분증을 하찮은 물건 다루듯 잘잘 흔들어 보였다.
“완전 그지.”
“그게 다야?”
“어. 가출 청소년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성인이긴 하네.”
“다행은 무슨.”
강은택은 성큼성큼 다가와 심우주의 손에 들린 운전면허증을 가로채듯 집어 갔다. 거기에 쓰여 있는 ‘도복희’라는 이름을 빤히 보더니, 그녀의 신분증을 그대로 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얻다 쓰게?”
심우주가 물었으나 강은택은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왜 저러냐.”
심우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그리고 최지호의 보호를 받으며 자고 있는 도복희의 머리맡으로 와 어슬렁거렸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도복희의 얼굴을 빤히 보던 심우주의 눈이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손을 뻗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 아래에 콕 박힌 점을 엄지로 거칠게 문질렀다.
“아, 보다 보니까 예쁜데. 턱에 박힌 초코칩도 귀엽고.”
심우주가 킬킬거렸다. 그러자 도복희의 손을 소중하게 쥐고 있던 최지호가 번뜩 고개를 들더니 재빠르게 심우주의 손목을 잡아챘다.
“하지 마.”
그녀에게 ‘여깄어, 괜찮아’ 말하던 물기 어린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날이 선 경고에도 심우주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떠날 줄 몰랐다.
“왜. 만지면 닳나? 네 거냐?”
심우주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최지호에게 잡힌 손목을 부드럽게 비틀어 빼냈다. 최지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 팽팽한 긴장감이 방안에 감돌았다.
그때, 쿵- 쿵- 쿵-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잠들었을지 모르는 야심한 시각임에도 그 발걸음에는 조심하려는 기색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인기척이 문턱까지 다가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방문을 꽉 채우다시피 했다. 그 몸에 걸쳐진 부드러운 실크 잠옷이 역광으로 조금 번들거렸다.
“…여자가 아니라 애잖아.”
내용과 다르게 낮은 목소리는 무심했다. 목소리의 주인인 탁유환이 잠든 도복희를 내려다 보았다. 까만 눈동자는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더욱 차가운 인상으로 느껴지게 했다.
“갖다 묻을 건가.”
탁유환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무감하게 내뱉으며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새까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최지호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얼른 회복 시켜서 내보내. 귀찮게…. 쯧.”
탁유환은 잠든 여자애를 단지 귀찮은 사건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혀를 차며 방밖으로 나가버렸다. 최지호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도복희는 다음날 오전에 잠이 깼다. 여전히 열기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지난 밤처럼 눈도 못 뜨고 끙끙 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낯선 방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목까지 덮여 있던 이불이 힘없이 떨어지며 낯설고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았다.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얼른 이불을 끌어다 제 몸을 가렸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던 최지호가 눈을 떴다. 밤새 그녀를 돌보다 지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당혹으로 물든 도복희의 눈이 최지호의 잠이 덜 깬 눈과 마주쳤다. 최지호는 그녀의 허연 어깨를 보고 흠짓 놀라며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미안…. 어제 옷이 다 젖어서, 어쩔 수 없이, 형이….”
변명하듯 횡설수설 설명하는 그의 귓바퀴가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다.
도복희는 심히 당황했다. 그러나 굶어 죽든, 얼어 죽든, 아무튼 길바닥에서 죽기 직전인 자신을 주워다 살려 놓은 사람에게 ‘왜 내 옷을 마음대로 벗겼냐’ 따져들 염치 없는 부류는 아니었다.
“옷…, 옷 입어. 죽 데워 줄게.”
최지호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한 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손이 발치에 곱게 개켜진 채 놓여 있던 옷가지를 집어 도복희의 무릎 쯤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쾅.
방문이 닫히고 어렴풋이 우당탕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복희는 조심스럽게 그가 준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머리에 꿰었다. 천천히 이불을 헤치고 나와 커다란 바지에도 다리를 넣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티셔츠는 너무 커서, 옷자락이 무릎까지 내려와 아빠 옷을 훔쳐 입은 듯 우스꽝스러운 꼴로 보이게 했다. 트레이닝복 바지는 아무리 허리끈을 졸라 매도 골반에 걸쳐지지도 않아서 결국 입기를 포기했다.
잠시 후, 죽 그릇을 쟁반에 받쳐든 최지호가 방으로 돌아왔다. 짧은 노크와 함께 들어온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도복희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길게 내려온 티셔츠는 충분히 허벅지를 가려 주었으나, 최지호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정보만 입력되었다.
“아, 바지가 너무 커서요.”
“아….”
그녀의 해명에 최지호의 시선이 뒤늦게 옆에 놓여 있는 옷가지로 향했다. 바지는 분명 개켜져 있었으나 그가 처음 가져다 둘 때처럼 반듯하게 접힌 상태는 아니었다.
“이불 덮어.”
그의 말은 배려이자 걱정이었다. 도복희는 얌전히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최지호는 그녀가 이불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최지호가 쟁반을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죽이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미친듯이 허기가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죽 그릇을 들고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도복희는 숟가락으로 휘적거리며 죽이 식기를 기다려야 했다.
따뜻할 때 얼른 먹지 않는 그녀를 보고 최지호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왜? 맛없어 보여? 아니면 속 안 좋아?”
최지호는 금방이라도 새로 죽을 끓여올 기세였다.
“뜨거워서….”
도복희는 죄인이 된 듯 고개를 푹 떨군 채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난히 뜨거운 것을 못 먹는 편이었다. 그 말에 안절부절 못하던 최지호가 순간 멈칫했다.
“아….”
알아차렸다는 작은 탄식. 한 박자 늦게 이해한 그의 얼굴에 짙게 내려앉았던 걱정이 아주 조금은 걷혔다.
최지호는 죽 그릇을 가져가 크게 휘저으며 후- 후- 불어 온도를 낮췄다. 생면부지인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이 미안하고도 고마워서, 도복희는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때, 옆방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다가와 이미 문이 열려 있는 게스트룸의 문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네가 낳았냐?”
심우주였다.
“남자는 다 개새끼다, 아가.”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지금보다 열 살 정도 어렸더라면? 아니, 덩치만 조금 더 작은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당신도 개새끼니까 조심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하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탁유환의 앞에서 주눅들고 말았다.도복희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제 나름 노력했으나, 그녀가 쫄아붙었다는 걸 탁유환은 금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겁을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놀랐나?”“놀랐어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네게 손대겠단 뜻은 아니야. 그래도 어른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진 마라.”“네….”도복희는 혼이 난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농담이 아니야. 심우주 그 놈은 조심해야 돼.”탁유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층 계단 위에 심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심우주는 어디 외출이라도 할 참인지 깔끔한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윗단추를 두 개 풀어 살짝 드러난 탄탄한 가슴팍에는 가늘고 긴 볼체인 목걸이가 늘어져 있었고, 그의 한쪽 귓불에는 초승달 모양의 실버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심우주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탁유환은 어떤 중요한 이야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채였다.“저 놈은 치마만 두르면 다 환장하지.”“풉….”도복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주의할 점이라도 알려주는 줄 알고 귀를 쫑긋 세웠는데, 그녀의 귀에 꽂힌 것은 난데없는 조롱이었다. 허무해서 웃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렵고 불편한 존재였던 이 남자가, 자신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 같아서 기뻤다.“저 영감탱이가 미쳤나. 애한테 뭔 소릴 하는 거야?”탁유환의 말을 들은 심우주는 바락 성질을 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복희는 정말로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붙기라도 할까봐 목 뒤로 침을 크게 넘겼다.그
“씨발, 이거 뭐냐….”집요하게 매달리던 강은택이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짧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렸다.도복희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었으나 출신 학교는 중학교가 마지막이었다. 중졸 이후 검정고시 응시. 고등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1학년도 안 마치고 관뒀다. 주목할 만한 건, 그녀가 학교를 관둔 그 시점에 가족이 전원 사망했다는 것. 가족이 없다는 건 처음 그녀의 신분증을 습득하자마자 떼어 본 서류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뭔가 찜찜했다. 도복희의 출신지는 작은 촌동네라 큰 사건이랄 게 잘 없었다. 그 때문에 실마리를 찾아 당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은택은 지역 신문에서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금품을 노리고 들어왔던 강도와 대치 끝에 엄마와 아들이 사망했다는 내용. 딸이 혼자 살아남았다는 기사. 날짜를 대조할 것도 없었다. 도복희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단순 강도 사건이라기에는 현장이 너무 잔인하더란다. 그 때문에 원한이라고 떠드는 놈들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도복희는 세상에 혼자 남았다. 열일곱 살부터 읍내 편의점이나 빵집 아르바이트 따위로 생활비를 벌며 제 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주소지는 어느 낡은 다세대 주택으로, 알아보니 실거주하지 않은 지도 오래라고 했다. 활자상의 도복희는 가족을 모두 잃은 그날로부터 시간이 멈춘 사람 같았다.강은택은 입안이 껄끄러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담배를 물었다. 뿌연 연기로 밀어내지 않으면 이 답답한 속이 도저히 뚫릴 것 같지가 않았다.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오갈 곳이 없었던 열다섯의 자신. 친척이라 부를 어른들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강은택을 떠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버려지듯 어느 산골 기숙학교에 처박혔던 십대 시절. 어쩐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닮았다―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강은택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비웃었다. 이십대에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강은택이 자리를 뜬 뒤, 부엌에는 도복희와 최지호만 남겨졌다.도복희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니, 제가 사용한 그릇 정도는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최지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넌 쉬어. 내가 할게.”“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아, 아니야. 괜히 움직였다가 다시 아프면 내가 혼나.”최지호는 도복희를 식탁에 다시 앉히려고 손을 뻗었다가 닿기도 전에 금방 손을 거두었다. 커다란 자신에 비해 그녀의 몸은 너무 작고 약하게 느껴져서, 아무렇게나 쥐었다간 부서질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도복희는 제 앞에서 허둥대는 이 남자가 신기하고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얌전히 국그릇을 싱크대 볼 안에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최지호는 곧바로 고무장갑을 꼈다. 울룩불룩 근육이 잡힌 까무잡잡한 팔에 덧씌운 진분홍 고무장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최지호는 제 할 일을 찾은 듯 익숙하고 편안해 보였다.“거실에서 티브이 봐도 돼.”최지호가 잠시 돌아보고서 말했다. 혼나지 않으려고 남의 일을 떠맡은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대신 해 줄 수 있어 기쁘다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도복희는 ‘TV를 보는 일’이 꼭 미션처럼 느껴졌다. 널찍한 거실 대부분을 시커먼 가죽 소파가 차지하고 있었다. 간밤에 누워 있었던 게스트룸의 침대보다도 큰 것 같았다. 도복희는 화면이 잘 보이는 가운데가 아닌 오른쪽 팔걸이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런 다음에 리모컨을 꾹꾹 눌러 영화 채널을 찾고, 들릴듯 말듯 작게 소리를 낮춘 뒤, 의무적으로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스토리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영화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지루했다. 뜨끈한 선지국으로 채워진 속은 나른한 포만감을 주었고, 허리에 두른 담요는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반듯하게 앉아있던
“선지국…….”난데없이 튀어나온 ‘선지국’이란 단어에 부엌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부드러운 계란찜이나 아니면 영양가 있는 전복죽 따위를 예상했던 최지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는 일시 정지한 채 멍하게 도복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이 애가 너무 아파서 헛소리를 하는 건가?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 듯했다.“…허.”탁유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아픈 애기가 선지국.”도복희는 그의 말에서 ‘아픈’에 주목해야 할지, ‘애기’에 주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얼어붙은 거실 공기를 깨뜨린 건 심우주의 웃음 소리였다.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제 귀를 의심한 듯 몇 초간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 있던 심우주가 폭소를 터뜨렸다.“와, 이거 진짜 웃기네. 복희야, 너 진짜 재밌는 애다.”도복희는 선지국을 먹고파 하는 게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 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들의 반응은 그녀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야, 그거 먹으면 낫겠어? 그럼 먹여 드려야지.”심우주는 여전히 낄낄대며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엄지로 화면을 톡톡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뚜르르― 짧은 신호음이 간 끝에 귀찮아하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같은 집안에서 왜 전화질이야, 미친놈이.」강은택이었다.“네가 주워 온 애가 선지국 먹고 싶대.”능청스러운 심우주의 목소리를 덮으며 2층에서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편안한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강은택이 부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뭐라는 거야.”강은택의 시선이 빠르게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을 훑어 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채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 웅크린 도복희. 대놓고 실실 쪼개고 있는 심우주. 옅게 웃고 있는 탁유환. 조금 놀란 표정의 최지호.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정보가 더 필요하진 않았다.“…가지가지 한다,
“혼자 내려올 수 있지. 혹시 구르면 병원에는 데려다 주지. 머리가 깨진 애기를 내버려 둘 정도로 각박한 사람들은 아니니.”탁유환은 안절부절 못하는 최지호의 손에 들린 담요를 잡아챘다. 그리고 ‘어디 가져갈 테면 가져가 보라’는 식으로 들어 보였다.도복희는 방 밖으로 나오면서 분명 제 상태를 간단히 점검했다. 티셔츠가 원피스마냥 무릎까지 늘어지니, 문제가 될 거라곤 전혀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희롱하듯 훑어보는 심우주의 시선, 속내를 알 수 없는 탁유환의 조소, 불안한 표정의 최지호, 뒤늦게 나와 이마를 짚는 강은택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도복희는 이 민망한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손에 들린 담요를 얼른 받아들어 제 허리에 두르는 것. 결심한 그녀는 난간을 생명줄처럼 붙잡고서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풀썩 꺾일 것 같은 무릎에 의식적으로 힘을 실으며 간신히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마지막 한 칸, 바닥에 맨발이 닿는 순간이었다. 도복희는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찌르는 두통과 함께 이명이 동반했다.“아…….”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휘청거리는 도복희를 잡아챈 것은 탁유환이었다. 시험이라도 하듯 그의 얼굴에 떠 있던 묘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여린 팔뚝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쯧. 비리비리해서는.”혀를 차며 나직하게 읊조린 탁유환이 그녀를 받느라 놓쳤던 담요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도복희의 어깨에 툭 걸쳐 주었다.“걸음마 제대로 걷기 전까지 싸돌아다니지 마라.”“…….”“지호. 네가 책임지고 회복시켜 놔.”아이를 대하는 건지 환자를 대하는 건지 모호한 태도였다. “응.”최지호는 그의 명령이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는 듯 빠릿하게 대답했다.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에 도복희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탁유환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마음대
“네가 낳았냐?”심우주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았지만, 딱히 최지호를 말리지는 않았다.심우주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최지호는 직접 떠 먹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정거리는 그를 의식한 탓인지 죽을 충분히 식히고 나서 숟가락을 도복희에게 쥐여 주었다.“천천히 먹어.”“고맙습니다.”도복희의 목소리는 듣기 민망할 정도로 쉬고 갈라져 있었다. 쓸데없이 지극정성인 최지호를 놀리고 싶어 일부러 때 맞춰 찾아왔던 심우주는 그걸 듣고 준비했던 조롱을 다 까먹었다.심우주는 그녀가 깨작거리는 걸 가만 보고 있다 한 마디 던졌다.“복희야, 팍팍 좀 먹어라. 그래야 얼른 낫지.”알려준 적 없는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도복희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두려움도 떠 있었다. 기민하게 그 감정을 읽어낸 최지호가 허둥지둥 대신 변명했다.“아, 혹시 보호자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해서 가방을 열어봤어. 가방에 신분증이 있더라고. 멋대로 열어서 미안….”최지호는 제가 하지도 않은 짓을 대신 사과했다. 그러자 심우주가 코웃음을 쳤다.“뭘 미안이야. 그럼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정신 놓고 남의 집에 누워 있는데, 신분 확인도 안 하냐?”도복희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죄송합니다….”힘없는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심우주는 그녀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는 당황하며 입술만 달싹거리더니 결국 무슨 말도 더 하지 않은 채 나가 버렸다.최지호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아니야. 우리 형 차에 치인 건데…, 바로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는데, 우리가 미안.”최지호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아, 아니에요. 병원 안 가도 돼요. 고맙습니다.”간단한 문장의 나열이었지만, 최지호는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본인의 몸상태가 어떤지나 알고 병원에 안 가도 된다고 하는 건지, 피해자는 당신인데 대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