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서지우의 목소리는 파열하는 데이터의 굉음 속에서도 선명했다. 나를 믿지 말라는 그 서늘한 경고는 무너지는 서버실의 잔해들 사이에서 기묘한 공명음을 냈다. 손목의 흉터 칩이 타들어 가며 뇌 속으로 흘려보내는 고통은 이제 70년의 지옥이 아닌, 현실의 단절된 신경이 보내는 마지막 비명이었다. 나는 지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서버실의 중심부로 몸을 던졌다. 붕괴하는 벽면 너머로 관리국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저장소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일반적인 서버실의 형태가 아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투명한 기둥들이 지하 깊은 곳까지 일렬로 정렬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끈적하고도 영롱한 빛을 내뿜는 액체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타인의 행복을 도둑질해 담아놓은, 도살장의 거대한 수조였다.
지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흉터 칩의 단자를 서버의 외부 포트에 강제로 삽입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화면에는 수만 명의 인격 데이터가 파형을 그리며 쏟아져 나왔다. “이게 관리국이 숨겨온 진짜 전리품이야, 한결아.” 지우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평범한 시민들의 웃음소리, 연인의 따뜻한 체온,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의 경이로움 같은 사소하고도 눈부신 기억들이 데이터라는 이름의 액체 속에 갇혀 있었다. 관리국은 인간의 뇌에서 이 가장 순수한 감정의 입자만을 정제해 영생의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육체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주입된 타인의 비극적인 기억들뿐이었다.
서버실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데이터의 액체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냉각 장치가 시스템 붕괴를 감지하고 가동을 멈춘 탓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기둥 하나를 붙잡았다. 차가운 유리의 질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유리관 너머로 보이는 액체 속에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 기억이 파편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3년 전 처형당했다던 동료 박준석의 웃음소리였고, 그 옆에는 실종된 내 동료 민호의 평온한 한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스템은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 그들의 행복을 추출해 영원히 가두는 것을 선호했다.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고, 오직 데이터의 부산물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잔인한 연옥이었다.
나는 흉터 칩을 통해 연결된 신경망을 역방향으로 흐르게 했다. 손목에서 시작된 통증이 머리끝까지 뻗어 나갔다. 그것은 70년의 지옥을 역류시키는 과정이었다. 뇌 속의 시냅스가 타들어 가는 감각 속에서 나는 관리국의 중앙 서버가 어떻게 이 기억들을 갈취하는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기억을 단순히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의 행복한 순간을 분리해내어 그 자리에 공포와 무력감을 대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데이터의 밀도는 관리국이 영생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 내가 겪은 70년의 영겁 또한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고 남은 찌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지우가 나를 부축하며 서버실의 중앙 제어판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은 숙련된 솜씨로 시스템의 보안 코드를 무력화하고 있었다. “이 기억들을 전부 복원하면 관리국은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해. 데이터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순간, 시스템은 과부하로 자폭할 거야.” 지우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 역시 부모님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이 지옥의 설계도를 파헤쳐 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지금 인류의 영혼을 도둑질한 거대 기업의 금고 한가운데 서서, 그 모든 보물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천장에서 전선들이 불꽃을 튀기며 낙하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관리국장 최진혁이 이 사태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시스템이 붕괴하더라도 데이터를 백업 서버로 전송해 또 다른 형태의 통제를 준비할 것이다. 나는 마스터 키인 흉터 칩을 더욱 깊숙이 콘솔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흉터 칩이 내 혈관과 하나가 되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내 몸 자체가 거대한 데이터 송신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이 통로를 통해 모든 기억을 일제히 방출해야 했다. 내 뇌를 조각내어 시스템의 중심에 박아 넣는 행위. 그것은 내 자아를 완전히 삭제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나는 이미 돌아갈 곳이 없었다. 죽음만이 유일한 해방이었으니까.
지우가 내 손목의 칩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준비됐어? 이 기억들이 돌아가면, 아마 세상은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질 거야.” 그녀의 말은 희망이라기보다는 차가운 선언에 가까웠다. 시스템이 무너지면 그 시스템 속에서 기생하던 이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은 인간들이 관리국이라는 도살장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 그것이 내가 그려온 마지막 풍경이었다. 데이터가 소용돌이치며 서버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수만 개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서버의 외부 망으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서버실의 기둥들이 하나둘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액체화된 기억들이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 차가운 액체 속에서 나는 잠시 동안 환영을 보았다. 아무런 억압도 없는 거리, 사람들의 평범한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풍경. 관리국은 그것을 영생이라 부르며 착취했지만, 인간에게 그것은 그저 삶의 본질이었다.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파괴의 행위는 영생의 파멸이자,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지우는 서버실의 메인 셧다운 레버를 당길 준비를 마쳤다. 우리 두 사람의 생명력이 데이터의 흐름과 함께 섞여 들어갔다.
“한결아, 기억나?” 지우가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죽음만을 갈구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그 70년의 지옥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타인의 기억들이 서버를 통해 쏟아져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겪은 그 끔찍한 시간조차도 관리국이 내게 강제로 주입한 데이터의 파편이었음을. 나의 진짜 기억은 아직 이 도서관 어딘가, 잊힌 섹터에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내 과거가 아니었다. 이 거대한 도살장을 폐쇄하는 것, 그것이 먼저였다.
서버실 중앙의 액체 기둥이 마침내 터져 나갔다. 쏟아져 나온 기억 데이터들이 서버실 전체를 빛으로 가득 채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했다. 데이터의 역류 현상으로 인해 관리국의 중앙 서버가 경고음을 울리며 미친 듯이 회전했다. 붉은 비상등이 점멸하며 시스템 붕괴를 알리는 기계음이 귀를 찢었다. 최진혁이 심어놓은 백업 프로토콜이 가동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나는 흉터 칩을 통해 시스템의 핵심 암호화 키를 파괴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타고 흐르던 70년의 지옥 데이터가 시스템의 심장부로 폭주했다.
그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관리국이 수천 명의 희생자로 쌓아 올린 영생이라는 탑을,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의 고통’과 ‘행복’이라는 감정의 무게로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시스템은 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데이터들이 서로 충돌하며 서버실 내부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지우가 비틀거리며 내 팔을 잡았다. “지금이야! 셧다운 프로토콜을 실행해!”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콘솔을 내리쳤다. 서버실 전체가 거대한 데이터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어떤 장치도, 그 어떤 약물도 이제는 우리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칩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빛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파괴되고, 관리국의 도살장이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아니면, 이 기억들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면서 새로운 지옥이 시작되는 걸까. 지우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기억의 도서관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진정한 침묵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물리적인 서버의 파괴가 아니라, 그 안에 응축된 수만 명의 생애가 강제로 해방되며 뿜어내는 가상의 비명이었다. 내 손목의 흉터 칩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살을 파고들고 있었고, 그 고통조차 시스템의 붕괴 속에서는 하찮은 파편에 불과했다. 나는 지우를 향해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금속성 마찰음 속에 묻혔다. 시스템의 중추가 무너지면서 지하 4층의 천장이 비틀렸고, 쏟아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액체화된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데이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첫사랑, 갓난아기의 온기, 어머니의 낡은 앞치마 냄새 같은 것들이 투명한 수액 속에 섞여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관리국이 그토록 철저히 분리하고 추출했던 행복의 원형들이,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홍수가 되어 복도를 뒤덮었다. 우리는 그 기억의 파편을 피해 바닥을 굴렀고, 그 과정에서 내 피부에 닿은 차가운 액체들이 뇌 속으로 기이한 환영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 여기서 넋을 놓는다면 70년의 지옥이 다시 내 뇌를 점령할 것이 뻔했다. 지우는 이미 자신의 단말기를 이용해 데이터의 흐름을 강제로 격리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스템의 역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정보를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뇌에 가해지는 압박이 임계점을 넘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끌어당겼다. “지우야, 더 이상은 안 돼!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가상 인터페이스를 미친 듯이 휘젓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시스템을 부수는 것을 넘어, 이 망각의 도서관에 갇힌 사람들의 기억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관리국에 들어온 진짜 이유이자, 부모님의 흔적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사투였다.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냉각 파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이프가 터지며 뿜어져 나온 차가운 질소 가스가 서버실 전체를 하얀 안개로 뒤덮었다. 그 안개 속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민호, 3년 전 처형당했던 박준석, 그리고 관리국의 실험체가 되어 이름마저 잃어버린 수많은 이들의 잔상이 데이터의 파편과 섞여 춤을 추고 있었다. 최진혁이 설계한 완벽한 통제 국가의 민낯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데이터로 변환해 불멸의 성을 쌓으려 했지만, 결국 그 성은 자신들이 짓밟은 자들의 비명과 행복으로 가득 찬 썩은 늪이었을 뿐이다. 나는 흉터 칩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부어 중앙 서버의 백업 프로토콜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시스템은 이제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지우가 갑자기 멈췄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나를 거대한 유리 탱크가 늘어선 복도로 이끌었다. 그곳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서버실보다도 웅장하고 기괴했다. 수천 개의 액체 탱크 속에는 뇌를 적출당한 채 기억의 부산물만을 토해내고 있는 실험체들이 수평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산 채로 영겁의 시간을 반복하며 시스템의 연료가 되고 있었다. 닥터 린이 말하던 영생의 연구란 결국 인간을 도살하여 그 정수를 추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탱크 하나를 짚고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액체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거세된 디스토피아적 어둠 그 자체였다. 이 도서관은 책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가장 고귀한 재산을 도둑질하여 쌓아 올린,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전당이었다.
“이걸 봐, 강한결.” 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수만 개의 유리관이 빛을 내며 정렬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각각이 하나의 생애였고, 하나의 우주였다. 관리국은 이 기억들을 데이터의 밀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분류하고 있었다. 행복은 고가에 매매되고, 비극은 실험체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촉매제로 사용되었다. 나는 내 손목의 흉터 칩이 보내는 마지막 맥박을 느꼈다. 칩은 이제 과열되어 내 피부를 태우고 있었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시스템의 셧다운 프로토콜이 완성되면서, 이 거대한 유리 탱크들 속의 데이터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댐이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제 이 기억들은 더 이상 관리국의 소유가 아니었다. 데이터의 족쇄가 풀리고 있었다.
시스템의 붕괴는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지하 4층의 바닥이 진동하며 서버실의 벽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외부의 요원들이 들이닥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박철웅이 이끄는 무장 요원들이 통로를 확보하고 있다는 무전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지우와 함께 중앙 제어 장치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시스템의 모든 데이터를 관장하는 마스터 키 삽입구가 보였다. 내 손목에 박힌 흉터 칩은 그 삽입구와 완벽하게 호환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내가 관리국에 납치되어 겪었던 그 70년의 지옥 데이터가, 이제는 역으로 시스템을 파괴할 바이러스가 되어 내 팔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손목의 통증이 팔꿈치를 타고 어깨까지 번졌지만, 나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내 기억이, 내 고통이, 우리 모두의 비극이 이곳을 끝낼 열쇠였다.
“준비됐어?” 지우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시스템이 무너지는 순간, 관리국이 설치한 자폭 장치가 가동되어 우리는 이 데이터의 바다와 함께 소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관리국이 계산한 데이터 수확의 일부로 전락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가 시스템의 파괴자가 되어 도살장을 멈추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찬란한 승리였다. 나는 손목을 들어 삽입구에 흉터 칩을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시스템의 비명이 정점에 달했다. 서버실 전체가 하얀 빛으로 뒤덮이며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빛의 폭풍 속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관리국에 의해 지워졌던 내 기억의 파편들이, 강제로 주입되었던 70년의 지옥 데이터가,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했던 아주 짧은 순간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뇌를 관통했다. 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닌 해방의 울림이었다. 관리국이 구축한 시스템의 연산 장치가 과부하로 인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적인 비프음이 길게 늘어지며 정적 속으로 사라졌다. 벽면을 따라 흐르던 액체들이 멈추고, 천장에서 쏟아지던 잔해들도 정지했다.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묘한 공간 속에서, 나는 지우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이제 시스템은 완전히 셧다운 되었다. 관리국의 도살장은 멈췄고, 그들이 수확했던 수만 명의 영혼들은 비로소 자유를 향해 흩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데이터들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지하 4층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텅 비어버린 서버실, 차가운 금속 벽면, 그리고 텅 빈 유리 탱크들. 그 속에는 더 이상 인간의 기억도, 영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데이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혹은 영원한 망각의 바다로 돌아갔다. 나는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지우 역시 내 옆으로 쓰러지듯 앉았다. 우리의 옷은 이미 데이터의 액체로 젖어 있었고, 흉터 칩이 박혀 있던 내 손목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창밖으로 관리국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조차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해냈다. 시스템을 부수고, 기억의 감옥을 열었다.
지우가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그녀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아래 흐르는 맥박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정말 이긴 걸까?”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액체 탱크 속에 잠겨 있던 수많은 생명체가 비로소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관리국이 강제로 주입했던 비극의 데이터에서 해방되어, 스스로의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관리국의 실험체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은 인간들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혼란과 고통은 작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관리국이 조작한 데이터인지 구분해야 하는 새로운 지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살 권리를 되찾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흉터 칩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빛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에너지가 빠져나가며 내 의식도 희미해져 갔다. 시스템이 파괴되고, 관리국의 도살장이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아니면, 이 기억들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면서 새로운 지옥이 시작되는 걸까. 지우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기억의 도서관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진정한 침묵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침묵은 죽음의 전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고요한 약속이었다. 나는 지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길고 긴 영겁의 시간 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해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끝이 아닌, 비로소 시작되는 나의 진짜 1분이었다.
첫눈은 12월 22일 밤에 왔다.자정이 조금 지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철웅이었다. 문자 대신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병실 창가,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 사이를 비스듬히 내리는 눈. 그리고 사진 앞쪽에 누군가의 손. 앙상한 손가락, 누런 피부. 새끼손가락 손톱 끝에 주황색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 가는 초승달. 거의 다 자라 나가서, 손톱깎이로 한 번만 깎으면 없어질 만큼.사진 아래 한 줄이 따라왔다.남았다.나는 옥탑방 창문을 열었다. 눈이 빨랫줄 위에 얇게 쌓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소원 뭐래요. 답은 한참 뒤에 왔다. 안 알려 준대. 말하면 안 이루어진대.나는 그날 밤 무전을 켜지 않고 잤다. 1년 만에 처음이었다.그 뒤로 2주가 흘렀다. 그 2주 동안 세상은 빠르게 움직였다.연말 뉴스는 올해의 말을 뽑았다. 1위는 마지막 1분이었다. 보험사 네 곳이 실손 보험에 라스트 미닛 특약을 기본으로 끼워 넣었다. 새로 보험에 드는 사람은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패치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대형 병원 스무 곳이 호스피스 병동 전체에 도입했다. 요양 시설 단체 가입이 줄을 이었다. 1월 첫 주, 안식은 가입자 이백만 명 돌파를 발표했다. 11월에 삼십만이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였다.지하철 광고판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약국 계산대 옆 전단지에서 하얀 바탕의 노인의 손이 나를 따라왔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는데, 계산대 아르바이트생의 귀 뒤에 흰 동그라미가 붙어 있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걸 보고 한참 서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봉투 필요하세요, 하고 두 번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나오다가 돌아서서 물었다. 그거, 왜 붙였어요? 아르바이트생은 귀 뒤를 만지며 웃었다. 보험 들었더니 그냥 왔어요. 떼기 귀찮아서요. 그리고 이거 있으면 좀 덜 무섭잖아요, 오토바이 탈 때. 나는 고개를 끄덕
나흘 뒤 밤, 철웅에게서 전화가 왔다."나와."그 한마디였다. 어디냐고 묻자 성진대 후문 앞이라고 했다. 포장마차. 목소리가 이미 조금 풀려 있었다.밤 열 시 반, 후문 건너편 골목 입구에 주황색 비닐 천막이 하나 서 있었다. 천막 안에 백열등 두 개, 플라스틱 탁자 세 개. 어묵 냄비에서 김이 올라 비닐 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손님은 철웅 하나였다. 그는 구석 탁자에 앉아 지팡이를 탁자 모서리에 기대 놓고, 소주병 두 개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다."어머님은요?""자. 오늘 저녁에 한 번 숨이 이상해서 다들 뛰어왔는데, 돌아왔어. 의사가 오늘은 넘긴대." 그가 잔을 비웠다. "미경이가 옆에 있어. 나가서 바람 좀 쐬라고 쫓아냈어."나는 맞은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기우뚱했다. 포장마차 주인 할머니가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떠서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술은 안 마신다고 했고, 할머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묵 꼬치 두 개를 국물 옆에 얹었다."지팡이 양반이 매일 여기서 한 병씩 해." 할머니가 철웅을 턱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두 병째야. 아가씨가 좀 말려."철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냄비 앞으로 돌아가 어묵을 꼬치에 꿰기 시작했다."이만 명." 철웅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 말이 머리에서 안 나가."나는 국물을 불었다. 나흘 전 가족실에서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만 명이 서로 옆에 서서, 서로 모르고."아무도 모르잖아. 그 사람들이 거기 있는 거." 그가 소주를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가족들은 편히 가셨다고 생각하고, 안식은 이만 명 돌파라고 광고하고. 근데 그 사람들은 그 골목에 서 있어. 아무도 모르는 데에. 아무도 안 찾는 데에.""……네.""나 그런 사람들 옮긴 적 있어.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주치의가 상담실 문을 열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어제 입은 스웨터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원탁 위에는 식은 커피 두 잔과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벽의 뇌 단면 그림 옆에 누군가 모니터 기록을 출력한 긴 종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초록 선을 검은 잉크로 옮긴 띠가 벽을 가로질러 문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밤새 계셨어요?""집에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잠이 안 와서요."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 합니다."나는 앉았다. 그는 수첩을 펼쳤다. 어제 적은 시각들이 빽빽했다."첫째, 어제 그 새 파형이요. 밤 열한 시 이십 분쯤 마지막으로 나오고 멈췄습니다. 오늘 새벽엔 없었어요." 그는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시각을 늘어놓고 보니까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네 시 오십이 분부터 여덟 시까지, 그러니까 정하윤 씨가 병실에 계시던 동안에 제일 촘촘하게 나왔어요. 가시는 뒤로는 점점 드물어지고요.""제가 있어서요?""모릅니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루치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런데 두 번째가 더 큽니다."그는 벽에 붙은 긴 종이 앞으로 갔다."어젯밤에 그 새 파형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확실히 하려고, 1년 치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이 모니터에 분석 기능이 있어요. 파형을 쪼개서 겹쳐 있는 성분을 따로 보여 주는 기능입니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안 켰어요. 선 모양이 1년 동안 똑같았으니까."그가 종이의 왼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선이 가늘었다."이게 작년 11월, 강한결 씨가 처음 오셨을 때입니다. 선 하나예요. 깨끗한 한 줄." 그는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선이 조금 굵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면 여전
다음 주 목요일 아침, 나는 은평 시장에서 귤을 샀다.트럭 것 말고 시장 것으로.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과일 가게 확성기는 여전히 귤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바구니를 샀다. 두 개가 아니라 스무 개쯤 되는 귤이 검은 봉지 안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생선 가게 앞을 지나다 멈췄다. 파란 천막 아래에서 문순자 할머니가 얼음을 깨고 있었다. 두꺼운 고무장갑, 목까지 올린 털 조끼, 머리에 두른 수건. 쇠꼬챙이로 얼음 덩어리를 내리칠 때마다 작은 조각이 튀어 할머니의 앞치마에 붙었다. 며느리가 옆에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랬잖아요.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할머니가 먼저 나를 보았다. 쇠꼬챙이를 든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귤 거기서 샀어? 잘했네. 거기가 싸.""할머니, 얼음 깨셔도 돼요?""이거 안 깨면 내가 죽어." 할머니가 얼음을 한 번 더 내리쳤다. "병원에서 누워 있으니까 자꾸 그 하얀 게 생각나. 여기서 이거 깨고 있으면 안 나. 손이 시리고, 비린내 나고, 저 여편네가 잔소리하고. 그래야 여기가 내 데인 줄 알지."며느리가 한숨을 쉬었고, 할머니는 웃었다. 이 몇 개 빠진 입이었다."오늘은 어디 가?""아빠 보러요. 요양원."할머니가 쇠꼬챙이를 내려놓고 나를 오래 보았다."잘 생각했네. 가서 손 한번 잡아 드려. 늙으면 그게 제일 좋아."솔밭요양원 2층 거실에 들어섰을 때, 창가 끝 의자 옆에 엄마가 서 있었다.1년 사이에 엄마는 작아져 있었다. 머리가 반쯤 하얘졌고, 등이 조금 굽었다. 회색 누빔 점퍼를 입고,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온병을 창턱에 내려놓고 걸어와,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아프지 않게."살 빠졌네.
이송 병원은 성진대학병원이었다.무전에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사십 분, 서울까지 한 시간 반. 버스 안에서 나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이어폰 속 무전은 이미 다른 출동으로 넘어가 있었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고속도로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갔다. 하나, 둘, 셋, 넷.안식의 남자는 패치가 작동하면 자동으로 연락이 간다고 했다. 새벽 두 시에도 머리를 빗고 봉투를 챙겨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패치는 지퍼 백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비공개 동의서에는 서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섬망입니다. 흔한 일입니다.나는 휴대전화를 열어 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가고 그가 받았다."왜.""아저씨 지금 병원이에요?""어. 엄마 옆에.""성진대 응급실에 방금 소생자가 들어왔어요. 라스트 미닛. 스물네 살이래요. 오토바이."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병실의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래서.""제가 한 시간 반 뒤에 도착해요. 그 전에 안식 사람들이 먼저 올 거예요. 그 사람 어디로 옮겨지는지만이라도 알아봐 줄 수 있어요?"철웅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 귀 뒤에는 그 패치가 붙어 있었다. 그는 그 하늘이 자기 어머니의 하늘보다 낫다고 말한 사람이었다."구급 7이면 서교 쪽 애들이네." 그가 말했다. "알았어."전화가 끊겼다.아홉 시 반, 나는 성진대학병원 본관 로비에 도착했다. 철웅이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회색 스웨터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지팡이가 무릎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구급 7 반장이 내 후배야." 그가 먼저 말했다. "애 이름은 오재민. 배달하다가 합정 사거리에서 혼
마을버스는 정류장 앞에 섰다가, 아무도 타지 않자 문을 닫았다.기사가 창밖으로 나를 한 번 보았다. 나는 벤치에 앉은 채 손만 들었다. 괜찮다는 뜻인지, 가라는 뜻인지 나도 몰랐다. 버스가 짧게 경적을 울리고 떠났다. 산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사라졌다.이어폰 속에서 무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송 준비. 들것. 잡음. 산속이라 신호가 자꾸 끊겼다. 스물넷. 그 숫자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 들어야 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 가까이 들었다. 지지직. 목소리의 반쯤만 들어왔다가 흩어졌다.정류장 기둥의 시간표를 보았다. 다음 버스는 사십 분 뒤였다.해는 이미 산 뒤로 넘어가 있었다. 주황색이던 하늘이 잿빛으로 식어 갔다. 정류장 지붕 밑 형광등이 깜박이다 켜졌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발끝이 시렸다. 벤치 끝에 누가 두고 간 목장갑 한 짝이 얼어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손바닥 쪽 빨간 고무가 반쯤 닳아 있었다. 밭일을 하던 누군가가 버스를 타면서 떨어뜨렸을 것이다. 나는 그걸 한참 보았다. 다른 할 일이 없었다.십 분쯤 지났을 때 산길 위쪽에서 헤드라이트가 내려왔다. 흰 승합차였다. 옆구리에 초록 글씨로 솔밭요양원. 차가 정류장 앞에 서더니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분홍 조끼가 보였다."따님! 아직 계셨네. 버스 놓쳤어요?"면회 신청서를 받던 요양보호사였다. 그녀는 비상등을 켜 두고 차에서 내렸다. 한 손에 종이컵 두 개를 포개 들고, 겨드랑이에 무언가를 끼고 있었다."병원 가는 어르신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이라서요. 원장님 차 빌렸어요. 저녁 배식 전에 올라가야 돼서 오래는 못 있어요."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자판기 거예요. 율무차."나는 컵을 받았다. 손바닥이 녹았다. 달고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아까 어머님한테 전화드렸어요. 따님 오셨다고." 그녀가 자기 컵을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