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아침 6시.
알람과 함께 눈을 뜬 희수는 밤새 쌓인 재원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네에] 23:05
[주무세요~] 23:05 [난 2차 중] 23:05[숙소 도착] 00:43
[취해따~] 00:43 [씻고 쉬다가 잘게] 00:45“하… 진짜 정확해 죽겠다… 귀여워.”
희수도 루틴대로 답장을 보냈다.
[나 일어났어] 06:03
[취했다구? 해장 잘해~] 06:03 [난 세미나 갈 준비할게!] 06:04부랴부랴 준비해 차에 탔을 때 재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면서. 못만나게 되더라도 그와 함께 같은 도시에서 같은 날씨를 느끼게 되는 것은
상상만해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자기 나 출발~] 06:40
대구 도착후.
세미나 까지 3시간.
끝나고 나오자, 역시 재원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으아 일어났다] 11:20
[이따 오후에 미팅 있어 준비할게] 11:25희수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지금 시각, 오후 14:19분,
그의 말투를 따라해보고 싶어진 것이다.[준비를 3시간이나 하나보네] 14:20
‘후후, 뭐라고 할까?’
예상대로 얼마 뒤, 무미건조한 답이 왔다.
[아, 늦어가지고] 15:05
[지금 미팅 중입니다] 15:05“…이게 끝?”
희수는 볼을 부풀렸다.
너는 되고, 나는 안되고? 어디보자!
[예예] 15:06
보낸 직후 혼자 킥킥 웃었다.
예상대로 곧 재원의 반응.
[말투 뭐냐] 15:10
“…너도 했잖아아…”
[장난입니다~] 15:13
희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세미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 대구 햇살이 기분 좋게 내렸다.
잠깐은 혼자 외지의 기분을 누리고 싶어서,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리고 문제는 그때 시작되었다.
희수는 길을 오래 걷기 시작하면 ‘절대’ 기억하지 못한다.
예쁜 가게 보이면 들어가고,
카페 보이면 커피 마시고,
사거리 보이면 ‘저쪽이 더 예쁘네?’ 하고 걷고…
그리고 어느 순간—
주차했던 위치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
몸이 굳고, 식은땀이 올라왔다.
‘설마 또…?’
희수는 급히 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팅 중이라 몇 번이고 연결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생각이 멈추고, 호흡이 가빠졌다.
희수에게 통제 불가능한 상황은 단순한 당황이 아니라
곧바로 ‘고장’이었다.
결국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 나 길 잃어버린 것 같아…]
[차가 어딨는지 모르겠어 ㅠㅠ] [나 지금 어떡해…]몇 분 뒤, 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희수. 너 지금 어디야.”
“나… 몰라… 그냥 걷다가… 모르겠어…”
“아까 커피 마신다고 보낸 사진 있지.”
“응…?”
“사진 정보에 위치 기록 있을 거야.
EXIF라고… 아래 내리면 주소 뜬다. 확인해봐.”“…엑스… 뭐…?”
“사진 열어서. 아래 주소 보여? 거기로 다시 가.
지금 있는 위치도 보내고.”하지만 희수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자기… 나 진짜 못 가겠어… 너무 멀어…”
“지금 울어?
잘못은 니가 해놓고 왜 우는데?”“아니야… 흐윽… 눈물이 그냥… 나는 거지…”
재원이 길게 숨을 쉬었다.
화가 아니라, 완전한 ‘상황 정리 모드’의 숨.
“너… 가까운 큰길로 나가.
숙소 프런트에 말해둘게. 호텔은 크니까 찾기 쉽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근데… 차…”
“차는 나중에 같이 찾아.
지금 운전할 상태 아니니까 이동부터 해.”“…흑…”
“울지 말고, 지금 출발해.”
희수는 거의 두 시간 동안 헤매다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머리도 대충 말리고, 소파에 기대 앉아 있다가 그대로 꾸벅꾸벅 졸았다.
문이 ‘딸깍’ 열렸다.
재원이 들어왔다.
재킷만 벗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희수 너…”
“…응…”
“솔직히 말해.”
“…뭘…”
“너 이과 아니지?”
희수는 잠이 확 깼다.
“아니거든?! 나 이과 맞거든?!”
“이과는 길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
“운전할 때는 잘 찾아가!!!”
“그걸 말이라고.”
“……”
“말대꾸 하지 마라.”
희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재원은 그녀 앞에 서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앞으로 주차하면 사진부터 찍어.”
“….”
“그리고 이동할 때마다 바로 말하고.”
“….”
“대답.”
“…네…”
눈물이 콧등까지 차올랐다.
재원은 눈을 슬쩍 좁혔다.
“울어?”
“안 울어… 흐윽… 눈물이… 그냥… 나오니까…”
재원은 다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특유의 피곤한 숨.
“…됐다, 무사히 온 게 더 중요하다.”
그 말에 희수의 어깨가 조금 풀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그냥… 자기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원은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렸다.
눈을 맞추진 않았지만,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정말 티도 안 나게— 올라갔다.“…안다.”
희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는 거면… 말투라도 부드럽게 해줘…”
“그건… 내 맘이다.”
재원이 덧붙였다.
“괜히 멀리까지 와서 울고 그러고.”
“진짜… 미치겠네 너…”
“…대신 얼굴 봤잖아요.”
“…”
“됐죠.”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오늘 길은 잃었지만, 결국 재원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게—
희수가 돌아와야 할, 유일한 제자리였다. 사랑 받고 있는 거 맞는데? 희수만 모르는 재원의 사랑방식
또 어떤 식으로 보여질까?
월요일 저녁이었다.재원이 미용실에 데리러 왔을 때 희수는 마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재원이 들어오자마자 희수 얼굴을 봤다. 평소랑 똑같았다. 그런데 희수가 청소를 하는 동안 재원이 핸드폰을 보다가 희수가 돌아보는 타이밍에 화면을 끄는 게 보였다.희수는 그냥 넘겼다. 기분 탓이겠지.그런데 수요일에도 그랬다. 재원이 뭔가를 보다가 희수가 옆에 오면 핸드폰을 뒤집어 놨다. 희수는 그 모습을 보며 잠깐 멈췄다."자기야, 뭐 봐?""아무것도.""핸드폰 뒤집었잖아.""습관이야."희수는 재원을 봤다. 재원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어색했다. 저 남자가 뭔가를 숨길 때 저런 얼굴을 한다는 건 이제 알았다.금요일엔 더 이상했다. 재원이 오늘은 좀 늦겠다고, 볼일이 있다고 했다. 볼일이 뭔지는 말하지 않았다. 희수는 그냥 알겠다고 했는데, 재원이 볼일이라고만 하고 더 설명을 안 하는 게 낯설었다. 이 남자가 요즘 먼저 말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번엔 먼저 말하지 않았다.희수는 혼자 미용실 마감을 하면서 생각했다. 뭔가 있긴 한데, 뭔지 모르겠다.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이상했다.재원이 뭔가를 숨길 때는 보통 이유가 있었다. 혜리 건으로 불안할 때도 달력을 보는 행동으로 나왔고, 희수 걱정될 때는 주변을 정찰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그 남자가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이제 알았다. 근데 지금은 행동이 뭘 말하는 건지 읽히지 않았다.핸드폰을 숨기는 건 뭔가를 보고 있다는 거였다. 볼일이 있다는 건 어딘가를 다녀왔다는 거였다. 그게 연결되는 게 뭔지. 희수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더 지켜보기로 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건 ESTJ 스타일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더 모아야 했다.---토요일 오전이었다.희수가 미용실에서 첫 손님을 보내고 잠깐 쉬고 있는데 동현한테서 문자가 왔다.'누님 잠깐 통화 가능해요?'희수는 전화를 걸었다."왜, 무슨 일이야?""누님, 저 요즘 이상한 것 같아
동현이 자료 출력하러 복사실에 갔다가 혜리랑 마주쳤다. 혜리도 뭔가를 출력하고 있었다. 둘이 좁은 복사실에서 어색하게 섰다.혜리가 먼저 말했다."오늘 저녁 뭐 먹어요?"동현이 잠깐 혜리를 봤다."왜요.""그냥요. 저 오늘 회식도 없고 혼자 먹어야 해서.""저도 혼자인데요.""그럼 같이 먹어요."동현은 잠깐 멈췄다. 혜리가 태연하게 출력물을 챙기며 말했다."부담 갖지 말고요. 그냥 밥이에요.""...그냥 밥이요.""네. 혼자 먹기 싫어서요."동현은 출력물을 챙기며 대답했다."알겠어요."복사실을 나오면서 동현은 생각했다. 그냥 밥이라고 했다. 그냥 밥이면 그냥 밥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괜히 한 번 내려앉는 건지 몰랐다. 동현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밥이다. 그냥 밥.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켜면서 동현은 또 생각했다. 혜리가 혼자 먹기 싫다고 했다. 그게 동현한테 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한 말이 아니라. 팀에 동현 말고도 사람이 있는데, 왜 동현한테 물어본 건지.동현은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그냥 밥이다.근데 퇴근 시간이 됐을 때 동현은 자연스럽게 혜리 자리 쪽을 봤다. 혜리도 일어서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갈게요?"혜리가 물었다. 동현이 대답했다."네."둘이 어쩌다 보니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동현은 정면을 봤고 혜리도 정면을 봤다. 1층에 내려서도 같은 방향이었다. 동현이 먼저 말했다."어디 먹을 거예요?""이동현 씨가 골라요.""왜 제가요.""선배잖아요."동현이 기가 막힌 얼굴로 혜리를 봤다. 혜리는 태연하게 걸었다. 동현은 결국 고깃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냥 밥이니까. 뭐든 상관없으니까.---회사 근처 고깃집이었다.둘이 마주 앉아서 고기를 구웠다. 동현이 고기를 뒤집으면서 혜리를 흘끗 봤다. 혜리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야, 밥 먹을 때 핸드폰 보지 마요.""왜요.""같이 먹자고 해놓고 핸드폰 보면 혼자 먹는 거랑 뭐가 달라요."
희수가 미용실 마감을 끝내고 나왔을 때 재원이 핸드폰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희수가 옆을 들여다봤다. 메모장이었다. 항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희수가 멈춰 서서 읽었다.[처가 방문 준비 목록]1. 선물 — 과일 세트 vs 홍삼 vs 와인 (아버님 취향 확인 필요)2. 복장 — 캐주얼 vs 세미 포멀 (너무 격식차리면 부담, 너무 편하면 실례)3. 대화 주제 — 아버님 취미, 직업, 관심사 파악4. 도착 시간 — 약속 시간 10분 전 vs 정각 (일찍 오면 부담줄 수 있음)희수는 그 메모를 보며 잠깐 굳었다. 그러다가 웃음이 터졌다."자기야, 이게 뭐야.""처가 방문 준비.""D-6라고 써놨어?""일요일에 가는 거잖아.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D-6 맞아."희수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재원이 진지한 얼굴로 핸드폰을 봤다."아버님 취미가 뭐야?""등산."재원이 메모장에 뭔가를 추가했다. 희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가 처가 방문을 프로젝트처럼 준비하고 있었다. 항목별로 정리하고, 변수를 예측하고, 리스크를 줄이려는 거였다. 재원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대하는 방식이었다."엄마가 좋아하는 거 있어?""글쎄, 별로 내색을 안 해서.""드라마는 봐?""봐.""어떤 거.""왜 그걸 알아야 해.""대화 소재."희수는 웃으며 재원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재원이 핸드폰을 뒤로 뺐다."아직 못 다 적었어."희수는 포기하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저 리스트가 일요일까지 몇 항목이 될지 궁금했다.수요일에 재원이 또 물어봤다."아버님이 드라마 봐?""아니, 뉴스.""어느 채널.""왜 그걸 알아야 해.""대화 소재."목요일엔 또 물어봤다."어머님이 싫어하는 음식 있어?""고수.""식당 예약할 때 참고할게."희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식당도 예약해?""점심 드시고 가야 하면 근처 좋은 데 알아봐뒀어."희수는 말을 잃었다. 이 남자, 밥집까지 알아봤다. D-6에 시작한 프
밥을 먹고 나서 희수가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희수 아빠는 동현이랑 혜리한테 말을 걸고 있었고, 재원은 희수 엄마 옆에 남겨졌다. 재원은 물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정면을 봤다. 희수 엄마도 정면을 봤다.잠깐 침묵이 흘렀다.희수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직장은 언제부터야.""입사한 지 칠 년 됐습니다.""희수랑은 언제부터야.""다시 만난 건 올해입니다.""다시?"재원이 잠깐 멈췄다. 희수가 부모님한테 얼마나 말해뒀는지 몰랐다. 근데 숨길 이유도 없었다."전에 만난 적 있었습니다. 제 쪽에서 잘못한 게 있어서 헤어졌고, 올해 다시 시작했습니다."희수 엄마가 재원을 봤다."잘못한 거 알아?""네.""고쳤어?""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희수 엄마가 잠깐 재원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희수가 집에 잘 안 와. 연락도 뜸하고. 걱정된다."재원은 그 말의 무게를 알았다. 무뚝뚝한 사람이 저 말을 꺼냈다는 건, 진짜 하고 싶은 말이라는 뜻이었다."제가 챙기겠습니다."희수 엄마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재원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희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엄마랑 재원을 번갈아 봤다."둘이 무슨 얘기 했어?""별로 없어." 희수 엄마가 툭 대꾸했다.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수는 그 둘을 보며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희수 아빠가 재원 어깨를 탁 쳤다."재원 씨, 우리 희수 잘 부탁해요. 이 녀석이 속은 여린데 겉으로 티를 안 내거든.""아빠.""사실이잖아. 재원 씨는 알아?"재원이 희수를 봤다가 아빠를 봤다."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희수 아빠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기를 집었다. 희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희수 엄마는 물을 마시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아무 말 없이도 꽤 많은 걸 담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는 뜻 같기도 했고, 좀 더 지켜보겠다는 뜻 같기도 했다. 희수는 엄마 눈빛 해석이 원래 어려웠는데, 오
희수는 뒤통수를 긁으며 유리창 너머를 봤다. 골목 입구에 서 있는 그 여성이 아직 거기 있었고, 희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서야 입을 뗐다."저 사람... 우리 엄마야."재원이 굳었다."...뭐?""우리 엄마. 내가 집에 잘 안 가니까 몰래 보러 온 것 같아."재원이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희수는 그 얼굴을 살폈다. 황당하다는 게 얼굴에 써 있었고, 그러면서도 뭔가를 빠르게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ISTJ 특유의 상황 파악 모드였다."며칠째 저기 있었던 거야?""...아마도.""그럼 내가 며칠 동안 정찰한 미행범이 어머님이었던 거야."희수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재원은 진지한 얼굴로 그 말을 했는데, 그 진지함이 더 웃겼다."...응."재원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넥타이를 고쳐 매며 일어섰다. 희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 황당한 상황에서도 넥타이부터 고친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준비 동작이었다."나가자.""...지금?""그냥 두면 더 거기 서 계실 거잖아."희수는 앞치마를 벗으며 웃음을 참았다. 재원이 넥타이를 고쳐 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희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진짜 대단하다.---희수가 미용실 문을 열고 나가자 골목 입구의 여성이 멈칫했다.오십대 중반, 장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서 있는 여자. 딸이 나오는 걸 보자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가 이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엄마, 여기서 뭐 해?""...길 지나가다가."희수는 어이가 없어서 잠깐 멈췄다. 마치 희수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말하는 엄마를 보며, 이 무뚝뚝함이 어릴 때부터 봐온 거라는 게 새삼 실감났다. 보고 싶었는데 말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며칠째 여기 서 있었던 거였다."며칠째 여기 있었지?""...아니야.""엄마.""그냥 지나가다가 본 거야."희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엄마랑 이 주제로 대화하면 끝이 없었다.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전봇대
희수와 재원이 미용실 근처 카페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재원이 희수 손을 잡고 걷는 평범한 오후였다. 하늘이 맑고 거리는 한산했다. 별일 없는 주말이었다.그런데 희수는 걸으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시선이었다. 어딘가에서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희수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훑었다. 카페 앞 벤치에 앉은 노인, 편의점에서 나오는 아주머니, 자전거 타는 아이들. 딱히 이상한 사람은 없었다.희수는 그냥 넘겼다. 기분 탓이겠지.근데 며칠이 지나도 그 느낌이 계속됐다. 미용실 마감할 때도, 재원이랑 저녁 먹으러 갈 때도. 희수는 결국 재원한테 말했다."있잖아, 요즘 누가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재원이 멈췄다."언제부터.""한 일주일 됐나? 확실하지 않은데 자꾸 그래."재원의 표정이 굳었다. 희수는 그 표정을 보며 살짝 후회했다. 말했다가 재원이 과도하게 반응할 것 같았다."기분 탓일 수도 있어. 혜리 씨 때문에 예민해진 건지도 몰라.""아니야. 확인해볼게."재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희수는 잠깐 재원을 봤다. 저 눈빛 한번 켜지면 멈추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업무 모드가 켜졌다. 미행범 색출 프로젝트 시작이었다.희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거 좀 크게 말했나.재원이 이미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희수 옆에 서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훑는 눈빛이었다. 평소에 보고서 검토하던 그 집중력이 지금 동네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희수는 그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한테 뭔가 말하면 반드시 행동으로 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왜 말했지.근데 사실 말하고 나서 좀 홀가분하기도 했다. 혼자 며칠 동안 찜찜하게 안고 있었는데, 말하고 나니까 덜했다. 재원이 알면 알아서 뭔가 하겠지. 그리고 재원이 하면 뭔가 나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문제는 그 뭔가가 얼마나 진지하게 나올 거냐였는데.---그날부터 재원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퇴근하면서 미용실 주변을 빙 돌았다. 자연스럽게 걷는 척하면서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희수
가게 구석에 앉아 타로 카드의 잔상을 떠올리던 희수는, 습관처럼 예전 메시지 창의 가장 윗부분으로 스크롤을 올렸다. 지금의 서늘한 침묵과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는, 설탕 가루가 뿌려진 듯한 대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작은 사소한 질문이었다. [주말인데 뭐 해요?][볼일 있어서 나와 있어요]지금의 재원 같으면 '확인' 한 마디로 끝났을 그가[개인적인 볼일이라 나중에 말해줄게요]라며 여지를 남겼을 때, 희수는 예감했다. 이 무뚝뚝한 곰의 성벽에 아주 작은 틈이 생겼음을."나한테 나중에 말해준다고?"희수는
진우와의 식사는 체기만을 남긴 채 끝났다. 가게로 돌아와 찬물을 들이켠 희수는 여전히 명치 끝이 답답했다.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먹어도 결국 끝은 재원이라는 결론. 희수는 이 지독한 굴레를 끊어내기보다, 차라리 그 굴레 안으로 다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먼저 인스타그램을 켰다. 진우와 잠시 다녀왔던 인천 바다의 풍경 사진을 올렸다. 캡션도 없이, 그저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뿐인 사진. ‘나 여기 갔다 왔어, 바보야. 나 너 없이도 이렇게 잘 돌아다니고 잘 지내.’속으로는 수천 번 외치는 말을 삼키며, 희수는 그 사진
진우의 고백은 희수에게 구원이 아니라 숙제 같았다. 관계로 엮이고 싶지 않다는 희수의 말에 진우는 "그럼 편하게만 보자"며 물러섰지만, 약속을 잡는 과정부터 희수는 피로감을 느꼈다. [희수야, 우리 어디 갈까? 가고 싶은 곳 있어? 뭐 먹고 싶어?]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들. 희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재원과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들이었다. 재원과의 첫 데이트는 철저히 ESTJ인 희수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오후 3시 만남, 3시 30분 카페 티타임, 5시 공원 산책,
대구의 밤은 유난히 길었다. 재원은 습관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일종의 의식이 되어버린 희수의 SNS 염탐. 그는 '새 게시물'을 알리는 빨간 점을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화면에 뜬 사진은 푸른 어스름이 깔린 인천 바다였다. 백사장에 놓인 커피 두 잔, 그리고 수평선을 배경으로 찍힌 풍경 사진 몇 장. 희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 속 분위기는 지독하게도 평화롭고 다정했다. “인천...?”재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사진을 확대했다. 뇌 회로가 순식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