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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보루비
“3년 전에는 약혼자가 싫다고 내게 떠넘기더니 귀국해서는 내 남편을 빼앗으려 하고 있어요. 이게 언니를 생각하는 건가요?”

진윤슬이 비꼬듯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난 감당 못 하겠어요.”

“너...”

“쉬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주세요.”

진윤슬은 더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씩씩거리며 문 앞까지 간 주아란이 또 한마디 했다.

“할머니가 너 보고 싶대. 몸이 좀 괜찮아지면 할머니 보러 와.”

진윤슬은 마음속에 아무리 원망이 많아도 할머니라는 두 글자만 들으면 모두 눈 녹듯 사라졌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뚝뚝 흘렸다.

가슴속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이를 잃은 그녀에게 그들은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단지 진세린이 울었다는 이유로 찾아와 질책했다.

‘내 아이가 세린이의 눈물보다도 못했구나...’

진윤슬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했다. 눈이 시큰거렸고 퉁퉁 부어 있었다.

잠시 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산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고 출장 중이라 집에 돌아가면 보러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몇 마디 당부했다. 손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찬 말들이었는데 상처투성이가 된 진윤슬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고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한 보름 동안 문강찬도 병원에서 함께 지냈다. 사소한 일까지 손수 챙기며 그녀를 돌봤다.

닥터 김해인이 진윤슬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표님은 정말 한결같이 좋은 남자예요.”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와도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고 심지어 곁에 있는 비서조차 남자였다.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재벌 2세, 3세들과 달리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하는 귀한 품덕을 지녔다고 칭찬했다.

진윤슬은 김해인에게 문강찬의 한결같은 마음이 향하는 곳이 그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결과는 어떤가요?”

진윤슬이 화제를 돌렸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편안했던 김해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진윤슬은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해인이 검사 결과를 진윤슬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모님 복부에 큰 충격을 받으셨고 게다가 빗속에서 너무 오래 계신 탓에 아무래도 앞으로 아이를 갖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진윤슬은 검사 결과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종이 위에 적힌 글씨가 다 아는 글씨였지만 한데 조합하니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씀은 제가 앞으로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건가요?”

김해인이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아직 젊으시니 몸 관리를 잘하시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진윤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사모님.”

김해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요.”

진윤슬은 진단서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일 일단 남편한테 얘기하지 말고 비밀로 해주세요.”

“그건...”

김해인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문강찬이 진윤슬을 돌보라고 특별히 데려온 의사였기에 얘기하지 않는다면 직무 유기에 해당했다.

진윤슬이 검사 결과서를 꽉 쥐었다.

“제가 기회를 봐서 얘기할게요.”

“알겠습니다.”

김해인은 그제야 승낙했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후계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김해인은 잘 알고 있었다. 진윤슬의 몸이 손상되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면 그녀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하여 이것이 진윤슬이 당분간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진윤슬은 병실로 돌아와 검사 결과서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눈을 감은 순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몸부림치던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비가 너무 차가웠다. 그때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

퇴원 당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올 수 없게 된 문강찬은 대신 비서를 보냈다.

진윤슬은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후 곧장 진씨 저택으로 향했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거실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문강찬과 진세린이 함께 앉아 있었고 반대쪽 소파에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앉아 있었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해 보였다.

진윤슬은 들어가지 않고 할머니 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눈썰미 좋은 도우미가 그녀를 발견했다.

“윤슬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스위치라도 누른 듯 거실의 대화 소리가 순식간에 뚝 끊겼다.

진윤슬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진세린이 문강찬의 옆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둥지둥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언니 왔어?”

진씨 가문 사람들은 진윤슬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몰라 저마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태호는 진윤슬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비아냥거렸다.

“사모님이 되더니 다르네. 세린이마저 네 눈치를 봐야 하고. 이젠 강찬이랑 함께 서 있는 것도 안 된다는 거야?”

진윤슬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진태호를 쳐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들어와서 여기 서 있을 때까지 난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세린이가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

“네가 평소에 세린이를 너무 괴롭히니까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야.”

진태호가 코웃음을 쳤다.

“세린이 아니었더라면 넌 강찬이랑 결혼할 자격도 없었다는 거 잊지 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덤덤하게 쳐다봤다. 주아란도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고 가족들을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세린이가 결혼하기 싫다고 도망한 게 내 탓이야? 내가 강찬 씨한테 시집가겠다고 억지를 부렸어?”

진세린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언니. 그때 내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언니한테 상처 줬다는 거 알아. 정말 미안해.”

“됐어. 그만해.”

문강찬은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치고는 긴 다리를 내디뎌 진윤슬에게로 걸어갔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왜 해?”

진태호가 피식 웃었다.

“얻을 건 다 얻어놓고 딴청 부려? 역겨워서, 원.”

진윤슬은 문강찬과 진씨 가문 사람들이 진세린을 편애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비난에 정신이 멍해졌다.

특히 그녀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던 남자 문강찬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한 건 진세린이었다. 그런데 진태호가 비아냥거릴 땐 가만히 있다가 그녀가 반격하자마자 그만하라고 호통쳤다.

편애도 이런 편애가 없었다.

진윤슬은 진세린의 억울해하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너랑 강찬 씨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강찬 씨는 이제 내 남편이야. 선을 지키고 남편이랑 거리를 뒀으면 좋겠어.”

불륜녀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뿐 뜻은 같았다.

진세린이 입을 가리고 어깨를 떨면서 흐느껴 울었다.

“진윤슬, 세린이는 네 동생이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주아란이 벌떡 일어나더니 안타까워하며 진세린의 손을 잡았다.

“세린아, 울지 마.”

“진윤슬.”

진태호가 잔뜩 굳은 얼굴로 분노했다.

“마음이 어쩜 이렇게 더러울 수 있어? 세린이랑 강찬이는 그냥 친한 친구이자 오빠 동생일 뿐이야. 만약 뭔가 있었더라면 진작 있었겠지. 네 차례까지 왔겠어?”

진윤슬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세린이가 버린 걸 나한테 떠넘겼던 거 아니었어?”

거실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흐느끼던 진세린조차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문강찬의 안색을 살폈다.

방금 한 진윤슬의 말이 사실이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던 그 말을 진윤슬이 말해버렸다.

화가 난 진태호가 계속 포효하려던 그때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슬이 왔어?”

너무나 친절한 목소리였다.

진윤슬은 바로 몸을 돌려 거실을 나갔다.

“같이 가.”

문강찬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진윤슬의 손가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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