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태가 다가가자 가장 먼저 그를 눈치챈 사람은 구진원이었다.그의 얇은 입술이 불쾌하게 일그러졌고 시선엔 서늘한 기색이 스쳤지만 하승태는 그런 기류를 아예 못 본 척,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그리고 연미혜 앞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물었다.“무슨 얘기 중이었어요?”연미혜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듯, 담담히 답했다.“일 얘기요.”그녀가 구진원과 그렇게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구진원이 적어도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하승태와는 다르게 연미혜와 공통 주제가 많을
연미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민준 역시 굳이 말을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그때 다른 방향 주차장 쪽에서 구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멀리서 두 사람을 보자 곧장 연미혜에게 다가왔다.“미혜 씨, 좋은 아침입니다.”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네. 진원 씨, 좋은 아침이에요.”구진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뒤쪽에 서 있는 경민준에게도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사적인 자리와 달리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경 대표님도 좋은 아침입니다.”경민준은 특유의 시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아침.”오
“같이 식사 어때요? 제가 살게요.”경민준이 웃으며 말했지만 김태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마음만 받을게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저는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먹고 들어가려고요. 경 대표님은 편하신 대로 하시죠.”그러자 경민준이 유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구내식당도 좋죠. 간편하고 실속 있잖아요.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희도 같이 가도 될까요?”김태훈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로부터 몇 분 후, 두 사람과 정시원은 넥스 그룹 사내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김태훈은
그날 오전, 회의를 막 끝낸 연미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착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마침 복도 끝에서 넥스 그룹에 새로 영입된 총괄 부사장 남시현이 경민준, 정시원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가장 먼저 그녀를 알아본 건 남시현이었다.“미혜 씨, 안녕하세요!”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연미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남시현은 연미혜와 경민준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 몰랐다.며칠째 경민준이 넥스 그룹과의 협력 건으로 회사를 들락거리고 있지만, 두 사람이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연미혜가 경
그녀는 마음에서도, 머릿속에서도 두 사람을 지운 채 조용히 차를 몰아 넥스 그룹을 떠났다.점심시간, 연미혜는 허미숙의 지인들과의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에서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차에 올라타는 일행을 향해 마지막까지 인사를 건넨 그녀는,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차 문을 열려던 그때, 건물 쪽에서 걸어 나오는 염성민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연미혜를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마지막으로 마주한 건, 얼마 전 경민준이 넥스 그룹을 찾았을 때였다.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요
세 사람은 관중석에 자리를 잡았고, 곧이어 연습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윤승재와 지현승은 평소 레이싱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딱히 응원할 선수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경기를 보다 보니 해설자의 설명 덕분에 38번 레이서 CC와 다른 두 명의 선수가 우승 후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무엇보다 CC는 이번 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 레이서였기에, 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게다가 CC 선수는 두 번이나 코너에서 화려하게 추월을 성공시켜 관중석의 환호를 자아냈다.윤승재도 참지 못하고 감탄을 터뜨렸다.“와... 미쳤는
“연극이요? 어떤 연극인데요? 어디서 볼 수 있죠?”“도원의 전통극인데... 진원 씨 취향이 아닐 것 같아요.”구진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건 모르는 거죠. 제가 해외에서 자랐지만 저희 전통문화에도 항상 관심이 많았거든요. 다만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연미혜는 그의 말에 결국 연극 정보를 알려주었다.구진원은 통화를 끊자마자 온라인티켓을 예매했다.잠시 후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진원아,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안 될 것 같아. 오늘은 선약이 있어.”한편 연미혜는 구진원과의 통화를 마친 뒤 점심때까
연미혜를 보고 지현승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반갑게 인사했다.“미혜 씨? 여기서 다 뵙네요?”연미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현승 씨, 안녕하세요.”지현승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미혜 씨도 기술 센터에 일하러 오신 거예요?”연미혜가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고... 교수님께서 직접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서, 제가 와서 도와드리게 되었어요.”지현승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기술 센터에 정식 인력도 아닌 사람을 들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는데...’연미혜가 김태훈과 친분이 있지만 연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