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
“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
“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
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
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
“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럼 오늘은 됐어요.”
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
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
“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
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
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
“한 대리.”
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
“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
「업무가 끝난 뒤.」
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
“그 뒤라도 괜찮습니다.”
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
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
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대답을 하려고.」
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으로 물이 넘어간 뒤에도 도현의 낮은 목소리는 또렷했다.
◇
3월 20일 오전, 서윤은 빌린 조사실의 테이블 위에서 가격표를 뒤집었다.
전날 받은 승인 메일은 자료철 맨 앞에 꽂혀 있었다. 비판매형 시험만 허용됐다. 후속 비용은 결과에 따라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민재가 상자에서 샘플을 꺼냈다.
“가격표는 나중에?”
“응. 처음부터 보면 사용 반응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선택지는 다 출력했어. 아무것도 안 고르는 칸도 크게 넣었고.”
서윤은 안내문을 확인했다.
후배 직원이 테이블마다 물병을 놓다가 다가왔다.
“대리님, 어제 말씀하신 문장 고쳤습니다.”
참여비는 제품 선택과 관계없이 같다고 적혀 있었다.
“좋아.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내도 읽어 줘.”
“네. 그런데 다 안 고르면 어떡하죠?”
“그것도 결과야.”
후배가 가격표 뒷면을 만졌다.
“괜히 잘 팔리는 제품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 여기서 네가 팔아야 하는 건 없어.”
후배의 손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설명하다가 빠뜨려도 제가 옆에서 확인할게요. 끝난 다음에 고치면 돼요.”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펼친 안내문은 아까보다 덜 흔들렸다.
민재가 서윤 쪽으로 물병 하나를 밀었다.
“진행자도 마셔.”
“고마워.”
서윤은 뚜껑을 풀었다. 물을 마시려다 잠깐 손을 멈췄다.
업무가 끝난 뒤에도 괜찮다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두르지 않던 말끝까지.
「지금은 이것부터.」
서윤은 한 모금 마셨다. 물병을 내려놓고 안내문으로 눈을 돌렸다.
출입문이 열렸다. 첫 참여자가 집에서 쓰는 용기를 담은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
“이건 높이가 달라도 같이 쓰는 거죠?”
참여자가 작은 몸체에서 뚜껑을 벗겼다. 같은 규격의 높은 몸체에 끼우자 가장자리가 맞았다.
“네. 같은 규격 안에서는 함께 쓸 수 있습니다.”
“씻고 나서 일일이 맞춰 볼 필요가 없겠네요.”
서윤은 사용 순서를 기록했다. 뚜껑을 고른 시간과 다시 끼운 횟수를 나눠 적었다.
옆자리 참여자는 용기를 겹쳐 놓았다.
“안 쓸 때는 이렇게 넣어 놓고요?”
“네. 다만 지금 샘플은 양산품과 마감이 다릅니다. 표시 크기도 조정 중이고요.”
“표시는 커야 해요. 작은 건 잘 안 보이더라고요.”
앞서 들었던 불편이 다시 나왔다.
민재가 기록지에 표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서윤은 가격표를 바로 세웠다.
테이블 위 움직임이 줄었다.
작은 몸체를 잡고 있던 참여자가 손을 내려놓았다.
“이 가격은 여기 있는 걸 다 사는 가격이에요?”
“기본 구성 가격입니다. 지금 판매하는 건 아니고, 이 가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물건은 좋은데.”
참여자가 선택지를 읽었다.
“집에 큰 용기는 이미 많아요. 이만큼 새로 살 필요는 없는데.”
서윤은 기록지에 펜 끝을 댔다.
“그럼 어떻게 고르시겠어요?”
“오늘은 안 사는 쪽이요.”
후배가 안내문을 따라 말했다.
“선택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참여자는 빈칸에 체크했다.
“작은 것만 살 수 있으면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서윤은 그 말을 따로 적었다.
뒤에 앉은 참여자도 가격표를 다시 봤다.
“뚜껑을 같이 쓸 수 있는 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전부 바꾸려면 부담돼요.”
“지금 쓰시는 걸 계속 쓰는 선택도 가능합니다.”
“그럼 그걸로 할게요. 나중에 하나 망가지면 사는 건 몰라도요.”
민재가 새 기록지를 건넸다. 서윤은 받아 들고 다음 참여자를 불렀다.
좋다는 말은 여러 번 나왔다.
가격표를 세운 뒤에도 용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점심이 지난 뒤, 민재는 테이블에 남은 연필을 모았다.
서윤은 제품 평가와 가격 제시 후 선택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사람이 적은 답인데도 두 칸은 달랐다.
“사용은 편하다고 했어.”
민재가 화면을 짚었다.
“근데 기본 구성을 고른 사람은 적고.”
“가격을 보기 전 반응만 보고하면 안 되겠네.”
“구매 의향도 낮고. 실제로 판 건 아니니까 더 조심해야 하고.”
서윤은 제목에서 구매라는 말을 지웠다. ‘가격 제시 후 선택 결과’로 고쳤다.
민재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구성 때문에 안 고른 사람부터 나눌까?”
“가격 자체가 부담이라는 답과 따로. 필요한 수량이 적다는 답도.”
“작은 것만 필요하다는 말이 꽤 있었어.”
서윤은 빈 용기를 집었다. 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를 꺼내 따로 놓았다.
“들어오는 가격을 낮춰야겠어.”
“전체 가격을 내리게?”
“그렇게 하면 비용은 그대로 남아. 처음 고를 수 있는 단위를 줄여 보려고.”
민재가 포장 견적서를 열었다.
“낱개로 팔면 포장 비용이 더 붙을 수 있어.”
“응. 세트 원가를 수량으로 나눠서 단품 원가라고 쓰면 안 돼.”
서윤은 계산표를 복사했다. 새 칸에 몸체와 뚜껑, 포장, 판매 비용을 나눠 적었다.
후배가 정리한 안내문을 가져왔다.
“대리님, 아까 제가 가격을 읽을 때 말을 더듬었는데요.”
“어느 순서였어?”
후배가 기록지를 가리켰다.
“여기요. 비싸다고 하셔서 저도 모르게 구성품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서윤은 그 기록에 표시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 다른 답과 구분해 둘게.”
“결과가 잘못된 건가요?”
“설명을 더 들은 답이니까 구분하는 거야. 기록을 지우지는 않을 거고.”
후배는 잠깐 종이를 봤다.
“다음에는 안내문에 있는 말만 할게요.”
“응. 오늘 덧붙인 말도 아래에 적어 줘.”
후배가 옆 테이블에 앉아 펜을 들었다. 민재는 모아 놓은 연필 하나를 그쪽으로 굴려 줬다.
서윤은 계산표로 눈을 돌렸다. 낮은 단품 가격을 적자 예상 이익률도 내려갔다.
그 칸을 비워 두지 않았다.
◇
회사로 돌아온 뒤 박 팀장은 결과표를 오래 봤다.
“평가는 좋은데 선택은 왜 이래?”
“필요한 수량보다 기본 구성이 많다는 답이 있었습니다. 처음 지불할 금액도 부담이라고 했고요.”
“평가가 좋은 걸 먼저 올리면 안 되나?”
“앞에는 넣겠습니다. 다만 가격 제시 뒤 결과도 동일한 장에 넣어야 합니다.”
박 팀장은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
“단품부터 팔면 남는 게 줄잖아.”
“그래서 포장과 판매 비용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작게 팔아서 언제 초기 비용을 회수해.”
서윤은 기본 구성의 계산을 옆에 띄웠다.
“구성을 유지하면 지금 계산상 이익은 남습니다. 그런데 선택하지 않으면 그 이익도 생기지 않습니다.”
박 팀장이 입을 다물었다.
민재가 추가 자료를 책상에 놓았다.
“구매 이력이 확인된 고객과 신규 고객 결과도 나눴습니다. 둘 다 필요한 용기만 사고 싶다는 답이 나왔고요.”
“그러면 작은 구성도 같이 봐야겠네.”
“네. 단품과 축소 구성을 비교하겠습니다. 가격을 내린 만큼 비용도 달라지는지 먼저 확인하고요.”
박 팀장이 보고서 첫 장을 돌려줬다.
“선택 적게 나온 이유, 말로만 쓰지 말고 원본 답 붙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윤은 자료를 챙겼다.
복도에 나오자 휴대전화에 비서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결과 자료를 받은 도현이 업무가 끝나면 잠깐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물었다고 했다.
서윤은 화면에 손끝을 댔다. 답을 쓰지는 않았다.
잠깐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읽고 나니 도현의 목소리로 들렸다. 태블릿 위에 손을 얹은 채 기다리던 모습도 떠올랐다.
서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일이 먼저야.」
휴대전화를 내렸다. 먼저 제조사에 단품 포장 비용을 다시 문의했다.
◇
퇴근 시간이 지나고 서윤은 6층으로 올라갔다.
도현은 사장실 문을 열어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서윤이 다가가자 시선이 먼저 닿았다.
서윤은 자료철을 조금 고쳐 쥐었다. 손바닥이 닿은 부분이 따뜻했다.
회의 테이블 한쪽에는 패널 결과가 놓여 있었다.
서윤이 자료철을 내밀었다.
“원본 답과 수정 계산입니다. 단품 비용은 확인이 남았습니다.”
“경영기획에도 동일한 자료를 보내셨습니까?”
“네.”
도현이 자료철을 받았다. 서윤이 잡고 있던 자리 가까이 손끝이 왔다. 손이 닿기 전에 서윤은 자료철을 놓았다.
도현은 테이블 끝에 자료철을 내려놓았다. 앞에 있던 결과표도 그 위로 포갰다.
종이에서 손을 뗀 뒤 서윤을 봤다.
“그날 하신 질문에 대한 답은 따로 하고 싶습니다.”
서윤은 문에서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도현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자료도 없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서윤은 도현을 봤다.
책상 앞에서 마주할 때와는 달랐다. 손도, 숨을 고르는 입술도 그대로 보였다.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온리빙을 인수한 건 사업과 회복 가능성을 검토한 결과입니다. 그 판단을 한 대리와의 과거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려고 물은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도현의 손이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손끝은 서윤 쪽으로 향해 있었다. 더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구분해서 말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내리는 결정과, 제가 서윤 씨를 다시 만난 일은.”
한 대리가 아니라 서윤 씨였다.
서윤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폈다. 접어 두었던 손끝에 감각이 돌아왔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서윤은 그 차이를 알아들었다.
「아직도 이렇게 들려.」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도현이 눈을 들었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망설이는 틈도 없었다.
“보고 싶었던 건 사실입니다.”
서윤은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도현도 피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자 옷이 가슴께에 가볍게 닿았다. 서윤은 천천히 숨을 내보냈다. 의자 아래에 놓인 구두 끝만 조금 움직였다.
보고 싶었다는 말이 반가워서는 안 됐다.
「그 말만 기다린 게 아니야.」
“그 말로 설명이 돼요?”
“안 됩니다.”
“7년 동안 연락이 없었어요. 한 번도.”
도현의 손끝이 천천히 굽었다. 서윤은 그 작은 움직임을 봤다. 그렇다고 말을 거두지는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몰랐어요. 왜 연락이 끊겼는지, 끝난 건지. 혼자 정해야 했어요.”
말끝이 짧아졌다.
서윤은 숨을 들이마셨다. 도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테이블에 놓인 손도 그대로였다.
그 기다림마저 신경 쓰였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는 것이.
“보고 싶었다는 말로 그 시간이 설명되지는 않아요.”
“그 말을 사과 대신 쓰려는 건 아닙니다.”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서윤은 무릎 위의 손을 거뒀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들을게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도 일어났다.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서윤은 잠깐 어깨에 힘을 줬다.
도현은 앞으로 오지 않았다. 테이블 건너편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제가 회사에 있다는 이유로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서윤은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끈을 눌렀다.
“그건 지켜 줘요.”
“네.”
서윤은 문까지 걸어갔다. 가까워졌던 목소리가 다시 뒤로 멀어졌다.
손잡이를 잡았을 때 도현이 불렀다.
“서윤 씨.”
손잡이에 얹은 손이 멈췄다.
일할 때 듣던 호칭이 아니었다. 서윤은 손잡이를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돌아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까 봐 망설였다.
“오늘은 물어봐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안 하는 게 맞아요.”
문을 나서자 비서실 쪽 불이 꺼져 있었다.
서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손을 내렸다. 손잡이를 쥐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왜 돌아왔는지 물었다. 그런데 보고 싶었다는 말만 자꾸 떠올랐다.
그 말을 할 때 도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곤란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서윤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
4층 사무실에는 민재가 보낸 수정표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서윤은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어깨에서 끈이 떨어지자 손도 함께 내려갔다.
단품 가격을 낮춘 계산과 작은 구성으로 묶는 계산을 나란히 열었다.
화면을 보고 있는데도 맞은편에 놓였던 도현의 손이 떠올랐다. 서윤이 일어났을 때 따라 일어나고도 다가오지 않던 모습이.
서윤은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자기가 한 말을 속으로 다시 말했다. 화면의 숫자를 처음부터 읽었다.
몸체 수를 줄이면 재료비는 내려갔다. 포장과 판매 비용은 그만큼 줄지 않았다. 서윤은 제조사 회신이 필요한 칸을 표시했다.
새 문서에는 구성을 확정하지 않았다. 줄일 수 있는 비용과 유지해야 하는 비용만 나눴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재무 담당자였다.
“한 대리님, 패널 결과 확인했습니다.”
“수정 손익은 지금 정리 중입니다. 단품 포장 조건이 오면 다시 보내겠습니다.”
“그 자료도 필요합니다만, 먼저 예산 상황을 말씀드려야 해서요.”
서윤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시험 비용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늘 진행한 비용은 승인 범위대로 처리합니다. 다만 남아 있는 조건부 시험 예산은 유지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서윤은 승인 메일을 열었다. 밑줄 친 문장이 다시 보였다.
“품질 확인과 출시 전 검증 비용을 구분해서 보신 건가요?”
“아직 조정안입니다. 항목별로 다시 검토할 예정입니다.”
“그럼 중단했을 때 남는 비용도 같이 보내겠습니다.”
“가능하면 내일 오전까지 부탁드립니다.”
서윤은 빈 문서를 열었다.
재무 담당자가 말을 덧붙였다.
“삭감안에 재시험 비용도 들어가 있습니다.”
(13화 끝)
“월요일은 괜찮아.”서윤이 대답하자 민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저녁 먹으면서 얘기해도 되지?”“응. 어디로 갈까?”“너 자주 가는 데. 회사 뒤에 밥집.”“거긴 퇴근 시간에 사람 많잖아.”“안쪽 자리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데 가자.”평소 식사 약속을 잡을 때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서윤을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월요일에 보자.”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갈림길에서 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 민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서윤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3월 24일, 서윤은 출근하자마자 제조사 메일을 확인했다.재시험 일정은 아직이었다. 승인된 비용 안에서 진행할 항목을 정리했다는 답만 와 있었다.민재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답 왔어?”“일정은 오후에 준대.”“고객 자료는 오전에 다시 보낼게. 구매 이력 확인된 것만 먼저 묶었어.”“고마워.”민재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당겼다. 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잡은 약속을 꺼내지 않았다.오전 회의가 끝나자 후배가 자료철을 안고 다가왔다.“대리님, 제가 지난주 조사 안내물을 추가 제작비에 넣었는데요.”서윤은 후배가 가리킨 항목을 봤다.&ld
“재시험을 빼면 수정한 조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서윤은 승인 메일 옆에 빈 문서를 띄웠다.전화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필수 시험과 추가 조사를 나눠서 보내 주시겠습니까?”“네. 비용이 이미 발생한 항목도 따로 적겠습니다.”“자료를 보내신다고 유지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알고 있습니다. 같은 항목이 두 번 삭감되지 않게 확인해 주세요.”통화가 끝났다.서윤은 첫 줄에 재시험이라고 적었다. 낙하와 개폐력, 높이가 다른 몸체에 같은 뚜껑을 끼우는 시험. 확인한 것과 남은 것을 나눴다.책상 한쪽에 조사실에서 가져온 샘플이 있었다.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 두 개를 꺼냈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는 같았다. 뚜껑을 바꿔 끼워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필요한 것만 살 수 있으면.」기록지에 적힌 말을 다시 읽었다. 서윤은 큰 몸체를 상자에 넣었다.◇3월 21일 아침, 민재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서윤의 책상을 봤다.“밤에 구성 바꿨어?”“아직 제안이야. 자주 쓰는 크기 두 개로 시작하려고.”서윤은 용기를 민재 쪽으로 밀었다.“규격은 같고 높이만 달라. 뚜껑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단품보다 이쪽이 나아?”“각각 포장하면 처음 사는 가격은 내려가도 비용이 많이 붙어. 두 개를 묶는 안으로 견적 요청했어.”민재가 작은 몸체를 들었다.“구성이 줄어도 공용 뚜껑을 써 볼 수 있겠네.”“응. 나중에 필요한 높이를 더 살 수 있고.”“추가로 살 거라고 계산에 넣은 건 아니지?”서윤이 손익표를 돌렸다.“입문 구성만으로 계산했어. 추가 구매는 따로 검증해야 해.”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그럼 이것도 입문 구성.”작은 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서윤이 민재를 봤다.“커피만 마셨을 것 같아서.”“아직 물도 안 마셨어.”“더 심하네.”민재는 자기 자리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서윤은 병을 받고 빵 하나를 꺼냈다.먹는 동안 제조사 회신이 왔다. 두 용기를 묶으면 재료비는 줄었다.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