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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지켜 주는 대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44:07

“재시험을 빼면 수정한 조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서윤은 승인 메일 옆에 빈 문서를 띄웠다.

전화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필수 시험과 추가 조사를 나눠서 보내 주시겠습니까?”

“네. 비용이 이미 발생한 항목도 따로 적겠습니다.”

“자료를 보내신다고 유지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같은 항목이 두 번 삭감되지 않게 확인해 주세요.”

통화가 끝났다.

서윤은 첫 줄에 재시험이라고 적었다. 낙하와 개폐력, 높이가 다른 몸체에 같은 뚜껑을 끼우는 시험. 확인한 것과 남은 것을 나눴다.

책상 한쪽에 조사실에서 가져온 샘플이 있었다.

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 두 개를 꺼냈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는 같았다. 뚜껑을 바꿔 끼워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살 수 있으면.」

기록지에 적힌 말을 다시 읽었다. 서윤은 큰 몸체를 상자에 넣었다.

◇

3월 21일 아침, 민재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서윤의 책상을 봤다.

“밤에 구성 바꿨어?”

“아직 제안이야. 자주 쓰는 크기 두 개로 시작하려고.”

서윤은 용기를 민재 쪽으로 밀었다.

“규격은 같고 높이만 달라. 뚜껑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

“단품보다 이쪽이 나아?”

“각각 포장하면 처음 사는 가격은 내려가도 비용이 많이 붙어. 두 개를 묶는 안으로 견적 요청했어.”

민재가 작은 몸체를 들었다.

“구성이 줄어도 공용 뚜껑을 써 볼 수 있겠네.”

“응. 나중에 필요한 높이를 더 살 수 있고.”

“추가로 살 거라고 계산에 넣은 건 아니지?”

서윤이 손익표를 돌렸다.

“입문 구성만으로 계산했어. 추가 구매는 따로 검증해야 해.”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럼 이것도 입문 구성.”

작은 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서윤이 민재를 봤다.

“커피만 마셨을 것 같아서.”

“아직 물도 안 마셨어.”

“더 심하네.”

민재는 자기 자리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서윤은 병을 받고 빵 하나를 꺼냈다.

먹는 동안 제조사 회신이 왔다. 두 용기를 묶으면 재료비는 줄었다. 상자와 포장 작업 비용까지 그만큼 줄지는 않았다.

서윤은 규격 표시와 용기를 고정하는 방식도 확인해 달라고 답장을 썼다.

민재가 봉투를 접으며 물었다.

“오늘 예산 회의지?”

“오전까지 자료 보내야 해.”

“고객 자료는 내가 마저 볼게. 문의가 실제 주문으로 읽히지 않게.”

“구매 이력이 연결된 고객도 다시 확인해 줘.”

“응. 기간도 맞춰서.”

서윤은 빵을 내려놓았다. 계산표를 열고 새로 받은 비용을 옮겼다. 기존 원가를 수량대로 나누어 넣지는 않았다.

◇

박 팀장은 입문 구성이라는 제목에서 손을 멈췄다.

“결국 작게 파는 거네.”

“처음 지불하는 금액을 낮추는 안입니다. 전체 구성 가격을 무조건 내리는 건 아니고요.”

“기본 구성은 어떻게 해?”

“비교안으로 남겼습니다. 이번에는 입문 구성부터 확인하자는 제안이고요.”

서윤은 가격을 본 뒤의 선택 결과를 펼쳤다.

“많아서 안 고른 답과 비싸서 안 고른 답을 나눴습니다. 구성만 줄이면 해결되는지 다시 봐야 합니다.”

“재시험 예산도 잘린다는데 그걸 또 할 수 있어?”

박 팀장이 넥타이 매듭을 밀어 올렸다.

서윤은 예산표를 내려놓았다.

“성능 재시험과 가격 확인은 구분했습니다. 가격은 기존 참여자에게 바뀐 구성과 함께 보여 주는 방식부터 검토하려고 합니다.”

“전에 좋다고 한 사람들한테 다시 물으면 잘 나온다고 하지 않겠어?”

“그럴 수 있습니다. 이전 결과와 합치지 않고 따로 보고하겠습니다.”

박 팀장이 표시된 칸을 읽었다.

“필수 시험이라고 쓴 건 전부 남겨야 하고?”

“네. 그걸 빼면 출시할 수 있는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럼 이 자료로 올려.”

서윤이 자료를 챙기려 하자 박 팀장이 첫 장을 눌렀다.

“예산 줄이라고 하면 다른 데서 줄일 항목도 붙여. 시험만 남겨 달라고 하면 안 들을 테니까.”

“추가 조사 이동비와 별도 안내물 제작비를 줄이는 안을 붙였습니다.”

박 팀장은 다음 장을 넘겼다. 잠깐 입을 다물더니 결재 칸에 서명했다.

자리로 돌아온 서윤은 경영기획과 재무 담당자에게 그 자료를 보냈다.

전송 표시가 떴다. 그런데도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남겨야 할 이유는 다 적었다. 그 이유가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서윤은 굽혔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

후배가 샘플 상자를 들고 오다가 책상 앞에 멈췄다.

“대리님, 이것 좀 봐 주세요.”

종이 띠를 두른 뚜껑이었다. 규격 표시 끝이 띠 아래에 가려져 있었다.

“포장 확인용으로 온 건데, 제가 정리하다가 이렇게 감았어요.”

후배가 띠를 벗기려 했다. 서윤이 손을 들었다.

“잠깐. 지금 상태부터 사진 남겨 줘.”

“제가 잘못 감은 건데요?”

“누가 감아도 표시를 가릴 수 있다는 거잖아. 위치를 정해야 해.”

후배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뚜껑을 든 손이 기울자 민재가 밑에 빈 상자를 받쳤다.

“여기 놓고 찍어. 손 안 나오게.”

서윤은 사진을 확인한 뒤 띠를 조금 옮겼다.

“표시가 보이는 위치로 바꾼 것도 찍어 줘. 제조사에 두 장 같이 보내자.”

“처음 사진도요?”

“응. 어떻게 가려졌는지 알아야 고칠 수 있어.”

후배는 상자 가장자리의 배송표를 떼었다. 사진을 다시 찍고 나서야 어깨를 폈다.

서윤은 뚜껑을 받아 높이가 다른 몸체에 끼웠다.

“그리고 이건 버리지 말고 포장 확인 상자에 넣어 둬.”

“다시 쓸 수 있겠네요.”

“그래서 따로 파는 거니까.”

후배가 작게 웃었다.

서윤은 사진을 메일에 붙였다. 위치를 바꾼 뒤에도 띠가 움직여 표시를 가리는지 확인해 달라고 썼다.

민재가 화면 옆에 고객 자료를 놓았다.

“이쪽도 구분 끝났어. 보관 용기 뚜껑은 문의만 있어. 다른 상품 교체 부품은 실제 판매 자료가 있고.”

“상품군별로 나눴지?”

“응. 뚜껑도 팔릴 거라는 결론은 안 썼어.”

서윤은 자료를 다시 읽고 추가 메일을 보냈다.

◇

점심 뒤 경영기획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기존 고객 이탈 관련 자료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서윤은 오전에 보낸 파일을 열었다.

“문의 이후 구매 이력이 없다고 전부 이탈로 잡지는 않았습니다. 확인 기간 밖의 구매는 알 수 없어서요.”

“그 구분은 봤습니다. 고객 한 명을 다시 확보하는 비용 자료도 있습니까?”

“저희 팀 자료에는 없습니다. 판매 운영 쪽에 확인해야 합니다.”

“대표님 요청으로 그쪽 자료도 받고 있습니다. 상품기획팀에서는 고객군과 조회 기간만 다시 확인해 주세요.”

서윤의 손이 멈췄다.

“어떤 검토에 들어가는 자료인가요?”

“오후 투자사 예산 검토회의 자료입니다. 부품 판매 실적도 상품별로 분리해서 취합 중이고요.”

“보관 용기 교체 뚜껑은 판매 실적이 없습니다.”

“네. 문의 수요와 기존 부품의 실제 판매는 별도 표로 들어갑니다.”

서윤은 화면을 내렸다.

“조회 기간은 맞습니다. 구매 이력이 연결되지 않은 문의는 아래쪽에 따로 두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손은 마우스 위에 있었다.

고객 유지율과 교체 부품 수요.

처음에는 제출할 자료가 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 항목들이 이제 시험을 계속할 이유로 쓰이고 있었다.

서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었다. 사장실로 전화할 수는 있었다.

묻고 싶은 말도 있었다. 어디까지 확인한 건지. 왜 서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는지.

손끝이 마우스 옆을 짧게 눌렀다.

「지금은 자료부터.」

서윤은 전화하지 않았다. 고객 분류 기준이 적힌 원본 파일을 경영기획에 보냈다.

◇

오후 늦게 공식 회의록이 도착했다.

박 팀장이 일어났다.

“왔어?”

“네. 같이 보시죠.”

민재도 서윤의 화면 쪽으로 의자를 당겼다.

서윤은 결정 사항부터 읽었다.

필수 성능 재시험 예산 유지.

추가 고객 조사 비용은 축소안 재검토.

상품기획팀 조직 판단은 기존 검토 일정 유지.

박 팀장이 화면 가까이 몸을 숙였다.

“시험비는 안 자른다는 거지?”

“승인된 필수 항목은 유지합니다. 추가 지출은 별도 승인이 필요하고요.”

“팀은?”

“팀 존속 결정은 아닙니다.”

박 팀장이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시험은 하겠네.”

“네.”

서윤은 첨부 자료를 열었다.

도현이 제출한 검토 의견이었다. 기존 고객의 불편과 신규 고객 확보 비용이 함께 적혀 있었다. 부품을 파는 상품군은 실제 매출과 대응 비용을 나눴다.

서윤의 시선이 도현의 이름에 잠깐 머물렀다. 곧 아래로 내려갔다.

민재가 한 줄을 가리켰다.

“우리 뚜껑 매출로 넣은 건 없네.”

“응. 판매 전인 건 판매 전이라고 썼어.”

중단하면 없어지는 비용과 남는 비용도 나뉘어 있었다. 이미 쓴 수정 비용은 회수할 수 없었다. 기존 고객의 문의에도 계속 대응해야 했다.

박 팀장이 물었다.

“사장님이 유지하자고 한 거야?”

“남은 시험을 끝내고 판단하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서윤은 마지막 장을 열었다.

반대 의견도 그대로였다. 판매 전 자료로 수익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 실제 매출을 검증해야 한다는 요구도 바뀌지 않았다.

그 아래에 도현의 답변이 있었다.

‘시험 중단에 따른 절감액만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관련 비용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음.’

서윤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도현은 팀을 남기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회의록에도 그런 약속은 없었다.

서윤의 자료 옆에 다른 부서의 근거를 놓았다. 반대 의견을 지우지 않고, 시험을 끝낼 이유를 냈다.

서윤은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내 자료를 읽었구나.」

그 사실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혼자 적고, 고치고, 다시 확인했던 문장들. 도현도 그 문장들을 보고 있었다.

민재가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제조사에 일정 확인할까?”

“응. 예산 유지 범위도 같이 보내 줘.”

박 팀장은 넥타이에서 손을 뗐다.

“월요일에 나도 일정 다시 볼게.”

두 사람이 물러난 뒤 서윤은 회의록을 저장했다.

어젯밤 도현에게 했던 말은 거두지 않았다. 연락 없이 사라진 시간은 이 자료로 달라지지 않았다.

서윤은 잠깐 손을 내려놓았다.

고마운 것과 괜찮아진 것은 달랐다. 오늘 받은 회의록까지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제조사에 보낼 메일을 열었다.

◇

퇴근할 무렵 민재가 휴대전화를 챙겼다.

“지하에 내려가 있을게. 충전 맡긴 보조 배터리 찾아야 해서.”

“먼저 가도 돼.”

“너도 곧 끝나잖아.”

“수정 일정만 보내면.”

“그럼 로비에서 보자.”

서윤은 메일을 보내고 샘플 상자를 닫았다. 종이 띠에 표시가 가려졌던 뚜껑은 포장 확인 상자에 따로 넣었다.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었다.

안쪽에 도현이 서 있었다.

서윤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도현도 서윤을 봤다. 손이 열림 버튼으로 갔다.

“내려가십니까?”

낮은 목소리였다. 서윤은 가방 끈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네.”

닫히던 문이 다시 벌어졌다.

서윤은 안으로 들어갔다. 뒤로 물러서려다 도현 옆에 섰다. 한 사람이 더 서기에는 좁은 거리였다.

도현의 소매가 가까이 보였다. 서윤은 그쪽을 오래 보지 않았다.

도현이 버튼에서 손을 뗐다. 문이 닫혔다.

서윤은 숨을 조용히 들이마셨다.

“회의록 받았습니다.”

“확인하셨습니까?”

도현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 서윤은 정면을 보며 답했다.

“네. 시험 일정은 제조사에 다시 요청했고요.”

“추가 비용이 생기면 승인 전에 범위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 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자 도현과의 거리가 새삼 느껴졌다. 서윤은 팔을 조금 굽혔다. 가방이 몸 가까이 붙었다.

층 표시가 바뀌었다.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손끝 아래에서 끈이 조금 접혔다.

“다른 부서 자료까지 확인해 주신 건 몰랐습니다.”

도현이 서윤을 봤다.

그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서윤도 층 표시에서 눈을 내렸다. 눈이 마주쳤다. 서윤은 준비했던 다음 말을 잠깐 늦게 꺼냈다.

“저희 자료만으로는 설명 못 하는 비용이 있었어요.”

끝말이 조금 낮아졌다.

도현은 서윤의 말을 다 듣고 답했다.

“전체 비용을 봐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서윤은 도현의 입술에서 눈을 떼었다. 대답은 담담했다. 더 큰 뜻을 붙일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듣는 목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도현의 손이 몸 옆으로 내려왔다. 손끝이 서윤의 가방 가까이에 멈췄다. 닿지는 않았다.

서윤은 그 손을 봤다. 가방 끈을 쥔 손가락이 한 번 움직였다.

반대쪽으로 옮기면 거리가 벌어질 터였다.

옮기지 않았다.

「이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숨을 더 조심하게 됐다. 도현이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알아챌 수 있었다.

“팀을 남겨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서윤은 이번에는 도현을 보며 말했다.

“네.”

도현의 답이 짧았다. 서윤의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자료를 더 내야 하면 말씀해 주세요.”

“경영기획을 통해 요청하겠습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먼저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서윤도 앞을 봤다. 가방 옆에는 여전히 도현의 손이 있었다.

문에 비친 두 사람이 나란히 앞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서윤도 급히 시선을 피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문에 비친 도현의 얼굴을 잠깐 봤다.

직접 볼 때보다 마음이 조금 덜 들킬 수도 있었다.

「오늘 일만 말하면 돼.」

서윤은 가방 끈을 쥔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고맙다는 말 하나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도현이 옆으로 비켰다. 가까웠던 소매가 멀어졌다.

서윤은 먼저 문턱을 넘었다. 몇 걸음 더 가기 전에 돌아봤다.

도현은 아직 안쪽에 있었다. 서윤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감사합니다.”

‘오늘은’에 힘을 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말까지 빼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마친 뒤 서윤의 손끝이 가방 끈을 다시 눌렀다.

도현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서윤은 대답을 기다렸다. 도현의 시선이 그대로여서 먼저 돌아서지 못했다.

그때 로비 쪽에서 민재가 손을 들었다.

“서윤아.”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민재는 보조 배터리를 가방에 넣고 있었다. 서윤이 가까이 가자 엘리베이터 쪽을 잠깐 봤다.

도현은 다가오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확인한 뒤 출입문 반대쪽으로 걸었다.

서윤은 가방 끈에서 손을 조금 내렸다. 미처 듣지 못한 대답이 자꾸 신경 쓰였다.

뒤를 다시 보지는 않았다.

민재가 서윤의 가방을 봤다.

“오늘은 샘플 안 가져가네.”

“집에서 열어 본다고 시험이 빨라지진 않으니까.”

“잘 생각했어.”

민재가 출입문을 밀었다. 바깥 공기가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서윤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이렇게 숨을 쉬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옆으로 지나가려는데 민재가 불렀다.

“서윤아. 월요일 저녁, 비워 줄 수 있어?”

서윤이 걸음을 멈췄다.

“출장 뒤에 하려던 얘기?”

“응.”

민재는 문에서 손을 떼고 서윤을 마주 봤다.

“이번에는 일 얘기 뒤에 미루지 않고 말하고 싶어.”

(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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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2화. 밤의 두 자리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1화. 돌아온 견적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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