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월요일은 괜찮아.”
서윤이 대답하자 민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도 되지?”
“응. 어디로 갈까?”
“너 자주 가는 데. 회사 뒤에 밥집.”
“거긴 퇴근 시간에 사람 많잖아.”
“안쪽 자리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데 가자.”
평소 식사 약속을 잡을 때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서윤을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에 보자.”
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갈림길에서 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 민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
서윤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
◇
3월 24일, 서윤은 출근하자마자 제조사 메일을 확인했다.
재시험 일정은 아직이었다. 승인된 비용 안에서 진행할 항목을 정리했다는 답만 와 있었다.
민재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답 왔어?”
“일정은 오후에 준대.”
“고객 자료는 오전에 다시 보낼게. 구매 이력 확인된 것만 먼저 묶었어.”
“고마워.”
민재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당겼다. 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잡은 약속을 꺼내지 않았다.
오전 회의가 끝나자 후배가 자료철을 안고 다가왔다.
“대리님, 제가 지난주 조사 안내물을 추가 제작비에 넣었는데요.”
서윤은 후배가 가리킨 항목을 봤다.
“이미 만든 거야?”
“네. 조사실에서 쓴 거요. 아직 결제가 안 돼서 남은 비용인 줄 알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박 팀장은 통화 중이었다. 후배는 팀장 자리 쪽을 보고 자료철을 더 세게 안았다.
서윤은 빈 의자를 당겨 줬다.
“앉아. 결제일이랑 제작일을 따로 보자.”
“예산 회의는 끝났는데 괜찮을까요?”
“이미 발생한 비용으로 옮기면 돼. 추가로 만들 계획은 없었던 거지?”
“네. 같은 안내물을 다시 쓰려고 했어요.”
“그 내용도 적어 줘.”
민재가 자기 화면을 돌렸다.
“주문한 메일 여기 있어. 날짜 확인해 봐.”
후배가 메일을 확인하는 동안 서윤은 고칠 칸을 짚었다.
“수정해서 보내 줘. 옮긴 이유도 한 줄 적고.”
“죄송합니다.”
“지금 확인해서 다행이야. 다음에는 결제일 말고, 취소할 수 있는 비용인지도 같이 봐.”
후배가 일어났다. 자료철을 안은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민재가 빈 의자를 원래 자리로 밀었다.
“방금 숨 쉬더라.”
“누가?”
“후배. 올 때부터 숨을 참고 있던데.”
서윤은 후배의 뒷모습을 봤다. 자리로 돌아간 후배가 바로 수정 파일을 열었다.
“나한테 보고하기 그렇게 어렵나.”
“오늘은 예산 건이라 더 그랬겠지.”
민재가 서윤의 책상 위에 물병을 놓았다.
“너도 좀 쉬어. 오전 내내 전화했잖아.”
서윤은 뚜껑을 열었다. 물을 마시는 동안 민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늘 있던 일이었다.
물을 놓아 주고, 필요한 자료를 먼저 찾고,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것.
서윤은 병을 내려놓았다. 손끝에 묻은 물기를 엄지로 문질렀다. 민재는 벌써 자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월요일에 하자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무슨 얘기일까.」
물어보지 않았다. 서윤은 수정 메일을 열었다.
◇
오후에 제조사와 통화가 끝나자 박 팀장이 물었다.
“이번 주 안에 시험 생산 들어갈 수 있대?”
“입문 구성 검토 자료를 확인한 뒤 답을 주기로 했습니다.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고객 반응 자료는?”
“기존 결과와 바뀐 구성에 대한 확인을 나눠 보내겠습니다.”
박 팀장은 넥타이 매듭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일정 나오면 바로 알려 줘.”
서윤은 통화 내용을 기록했다. 민재가 옆에서 고객 자료를 넘겨 줬다.
“이쪽은 끝났어.”
“확인하고 보낼게.”
“급한 거 아니면 내일 아침에 봐도 돼.”
서윤이 화면 오른쪽의 시계를 봤다.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민재가 자료 위에 손을 놓았다.
“밥 먹고 다시 올라오자는 말은 안 할 거지?”
서윤은 열어 둔 메일을 저장했다.
“안 할게.”
“그럼 나 먼저 내려가 있을까?”
“같이 가. 가방만 챙기면 돼.”
서윤은 샘플 상자의 덮개를 닫았다. 민재는 옆에서 기다렸다.
급하게 재킷을 입다가 소매 안감이 접혔다. 민재는 다시 벗지 않고 손목만 당겼다. 소매 끝이 조금 당겨졌다.
서윤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자 민재가 자기 책상을 한 번 더 봤다.
“뭐 놓고 가?”
“아니. 다 챙겼어.”
휴대전화도 가방도 손에 있었다.
서윤은 민재의 손을 잠깐 봤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서윤은 먼저 사무실 문을 열었다.
◇
식당 안쪽에 빈자리가 있었다.
민재는 서윤이 벽 쪽에 앉은 뒤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 메뉴판을 펼쳤지만 금세 내려놓았다.
“늘 먹던 거?”
“응. 넌?”
“나도.”
주문을 받은 직원이 물통과 컵을 놓고 갔다. 민재는 서윤의 컵부터 채웠다.
물통을 내려놓는 손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바닥에 닿는 소리도 작았다.
서윤은 컵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출장 전부터 하려던 얘기잖아.”
“응.”
“계속 미뤄서 미안해.”
“네가 미룬 건 아니지. 시험이 길어졌고, 돌아와서도 바빴고.”
민재가 컵 가장자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나도 말하기 편한 날만 찾았어.”
서윤은 수저를 꺼내려던 손을 멈췄다.
“오늘은 편한 날이야?”
민재가 짧게 웃었다.
“아니. 오늘도 안 편해.”
옆자리에서 직원이 빈 그릇을 치웠다. 두 사람은 직원이 지나갈 때까지 말을 멈췄다.
민재는 컵에서 손을 뗐다. 테이블 아래로 내렸던 손을 다시 위에 올렸다.
“서윤아.”
“응.”
“나 너 좋아해.”
서윤의 손끝이 수저통 옆에 멈췄다.
민재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동료로만 좋아한 게 아니야.”
주방 쪽에서 주문을 확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민재를 보고 있었다.
입술을 벌렸다가 잠깐 다물었다.
“언제부터…….”
말을 끝내지 못했다.
민재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정확히 어느 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오래됐어.”
“그동안 한 번도.”
“말 안 했으니까 몰랐겠지.”
민재는 서윤의 손 옆에 놓인 수저통을 조금 밀었다. 곧 손을 거두고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알아 달라는 뜻으로 잘해 준 건 아니야. 그걸 갚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서윤은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렸다 폈다.
아침에 받은 물병이 떠올랐다. 출장 자료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줬던 일도.
그때 고마웠던 마음은 지금도 같았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로 민재에게 답할 수는 없었다.
「고마운 것과는 달라.」
“내가 너무 당연하게 받았나 봐.”
“그렇게 생각하지 마.”
민재가 바로 말했다.
“너도 내 일 도와줬잖아. 힘든 문의 대신 받아 준 적도 있고. 우리가 한 일을 전부 이 얘기에 넣을 필요는 없어.”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민재의 입가에는 웃음이 없었다. 손가락은 테이블 모서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늘 말한 건, 내가 계속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야.”
음식이 나왔다.
직원이 그릇을 내려놓는 동안 민재는 자기 컵을 안쪽으로 옮겼다. 서윤도 수저를 꺼냈다. 직원이 떠난 뒤에도 잠깐 말이 없었다.
서윤은 밥그릇 덮개를 내려놓았다. 덮개에서 손을 떼고 민재를 봤다.
“민재야.”
“응.”
“나 지금 바로 답하면 제대로 못 할 것 같아.”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갑자기 들은 말이라서만 그런 건 아니야.”
서윤은 수저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너는 나한테 편한 사람이야. 많이 고맙고. 그런데 그걸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민재는 눈을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서윤을 봤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서윤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로 끝내면 민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답할게. 그냥 없던 일로 넘기지는 않을게.”
“시간이 필요하면 기다릴 수 있어.”
“며칠만 줘.”
“알았어.”
민재가 수저를 들었다. 그러다 다시 내려놓았다.
“사장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물을게.”
서윤의 시선이 민재에게 멎었다. 수저를 쥔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민재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기다렸다.
“알고 있었어?”
“아는 건 없어. 네가 그분 앞에서 평소랑 다르다는 것만 봤어.”
서윤은 물컵으로 눈을 내렸다. 컵을 잡으려다 손끝만 테이블에 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도현에게 돌아섰던 순간이 떠올랐다. 몸을 돌리자마자 눈이 먼저 도현을 찾았다.
그 앞에서는 숨을 고르는 일도 의식하게 됐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할수록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보였구나.」
로비에는 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윤은 물컵에서 시선을 뗐다.
“말하지 않은 일이 있어.”
“지금 설명 안 해도 돼.”
“네가 묻지 않으니까, 나도 계속 아무 말 안 했어.”
“네가 말하고 싶을 때 들으면 되니까.”
민재는 몸을 뒤로 조금 물렸다. 테이블과 민재 사이가 조금 벌어졌다.
“오늘은 네가 나한테 어떤 마음인지 물으려고 온 거야. 다른 사람 얘기를 듣자고 온 건 아니고.”
서윤은 민재를 마주 봤다.
말수가 적은 자신을 오래 봐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대답해서는 안 됐다.
“답할 때는 내가 말할게.”
“응. 기다릴게.”
민재가 이번에는 수저를 들었다.
“우선 먹자. 내가 얘기 꺼내 놓고 저녁도 못 먹게 했네.”
“너도 안 먹었잖아.”
“나 지금 배고픈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어.”
서윤이 밥을 조금 떴다. 민재도 뒤늦게 한술을 먹었다.
식사는 천천히 이어졌다.
서윤이 물컵을 들자 민재의 손이 물통으로 갔다가 멈췄다. 서윤은 직접 물을 채웠다. 이어 민재의 컵에도 따랐다.
민재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내일 자리 바꾸고 그러는 건 아니지?”
“왜 바꿔.”
“네가 불편할까 봐.”
“일은 그대로 할 거야.”
“응. 나도.”
서윤은 빈 물통을 테이블 끝에 놓았다.
민재는 평소 하던 농담을 덧붙이지 않았다. 서윤도 억지로 웃지 않았다.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작게 났다.
◇
계산대 앞에서 서윤이 지갑을 꺼냈다.
민재도 카드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얘기하자고 했으니까.”
“내 건 내가 낼게.”
민재는 잠깐 서윤을 보다가 직원에게 각자 계산해 달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을 나왔다. 민재가 출입문을 잡았다. 서윤이 지나가자 손을 뗐다.
“역까지 같이 갈까?”
“응.”
서윤이 가방 끈을 올렸을 때 길 건너편에 도현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서 막 나온 듯했다. 휴대전화를 한 손에 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서윤의 걸음이 잠깐 늦어졌다.
가방 끈을 잡은 손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끈을 고쳐 올리려던 손이 어깨 가까이에 그대로 멈췄다.
도현의 시선이 서윤 옆의 민재에게 옮겨 갔다가 돌아왔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서윤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길 건너인데도 고개를 돌리기가 어려웠다. 도현이 휴대전화를 든 손을 내리고 있다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로 차가 지나갔다. 잠깐 가려졌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왜 하필 지금.」
민재도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이네.”
도현은 먼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민재가 인사하자 서윤도 고개를 움직였다.
서윤은 입술을 조금 벌렸다가 다물었다. 이 거리에서는 그렇게 인사했다.
도현은 길을 건너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내려다본 뒤 몸을 돌렸다. 서윤의 시선은 아직 도현에게 머물렀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걷는 뒷모습이 건물 모퉁이로 사라졌다.
서윤은 도현이 사라진 쪽을 잠깐 더 봤다. 가방 끈을 쥔 손끝이 눌려 있었다.
민재가 서윤 쪽을 봤다.
“가자.”
“응.”
서윤은 가방 끈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을 펴자 손끝의 압박이 풀렸다. 짧게 멈췄던 걸음도 다시 이어졌다.
역 입구까지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서윤은 앞을 보고 걸었다. 길 건너에서 마주친 도현의 눈이 자꾸 떠올랐다.
민재를 보던 시선.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던 시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윤은 입술 안쪽에 힘을 줬다가 풀었다.
계단 앞에서 민재가 멈췄다.
“오늘 들어 줘서 고마워.”
“내가 답을 미뤘는데.”
“말은 했잖아. 어떻게 답할 건지도 들었고.”
민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일 보자.”
“응. 조심히 가.”
민재가 계단을 내려갔다. 서윤은 입구 옆으로 비켜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진동이 한 번 울렸다.
도현에게서 온 업무 메시지였다.
「한 대리, 제조사 일정 회신이 오면 경영기획에도 공유해 주십시오. 입문 구성 검토 자료는 기존 고객 패널 결과와 구분해 전달 부탁드립니다.」
서윤은 내용을 끝까지 읽었다.
식당 앞에서 본 일에 대한 말은 없었다.
‘한 대리.’
익숙한 호칭인데 손끝이 잠깐 멈췄다. 낮고 차분한 도현의 목소리로 읽혔다. 길 건너에서는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었다. 다시 읽어도 업무 이야기만 있었다.
「그 얘기만 하는 게 맞지.」
답장을 입력했다.
「네. 일정이 확정되면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서윤은 입력한 문장을 확인했다. 자신이 쓴 답도 짧고 단정했다. 보내고 나면 더 할 말이 없었다.
전송 버튼 위에 손끝을 가져갔다.
누르려던 순간, 화면 위에 새 알림이 떴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였다.
서윤은 입력창에서 손을 떼고 알림을 눌렀다. 짧은 첫 문장이 보였다.
「한서윤 씨, 강혜정입니다.」
(15화 끝)
“월요일은 괜찮아.”서윤이 대답하자 민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저녁 먹으면서 얘기해도 되지?”“응. 어디로 갈까?”“너 자주 가는 데. 회사 뒤에 밥집.”“거긴 퇴근 시간에 사람 많잖아.”“안쪽 자리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데 가자.”평소 식사 약속을 잡을 때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서윤을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월요일에 보자.”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갈림길에서 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 민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서윤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3월 24일, 서윤은 출근하자마자 제조사 메일을 확인했다.재시험 일정은 아직이었다. 승인된 비용 안에서 진행할 항목을 정리했다는 답만 와 있었다.민재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답 왔어?”“일정은 오후에 준대.”“고객 자료는 오전에 다시 보낼게. 구매 이력 확인된 것만 먼저 묶었어.”“고마워.”민재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당겼다. 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잡은 약속을 꺼내지 않았다.오전 회의가 끝나자 후배가 자료철을 안고 다가왔다.“대리님, 제가 지난주 조사 안내물을 추가 제작비에 넣었는데요.”서윤은 후배가 가리킨 항목을 봤다.&ld
“재시험을 빼면 수정한 조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서윤은 승인 메일 옆에 빈 문서를 띄웠다.전화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필수 시험과 추가 조사를 나눠서 보내 주시겠습니까?”“네. 비용이 이미 발생한 항목도 따로 적겠습니다.”“자료를 보내신다고 유지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알고 있습니다. 같은 항목이 두 번 삭감되지 않게 확인해 주세요.”통화가 끝났다.서윤은 첫 줄에 재시험이라고 적었다. 낙하와 개폐력, 높이가 다른 몸체에 같은 뚜껑을 끼우는 시험. 확인한 것과 남은 것을 나눴다.책상 한쪽에 조사실에서 가져온 샘플이 있었다.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 두 개를 꺼냈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는 같았다. 뚜껑을 바꿔 끼워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필요한 것만 살 수 있으면.」기록지에 적힌 말을 다시 읽었다. 서윤은 큰 몸체를 상자에 넣었다.◇3월 21일 아침, 민재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서윤의 책상을 봤다.“밤에 구성 바꿨어?”“아직 제안이야. 자주 쓰는 크기 두 개로 시작하려고.”서윤은 용기를 민재 쪽으로 밀었다.“규격은 같고 높이만 달라. 뚜껑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단품보다 이쪽이 나아?”“각각 포장하면 처음 사는 가격은 내려가도 비용이 많이 붙어. 두 개를 묶는 안으로 견적 요청했어.”민재가 작은 몸체를 들었다.“구성이 줄어도 공용 뚜껑을 써 볼 수 있겠네.”“응. 나중에 필요한 높이를 더 살 수 있고.”“추가로 살 거라고 계산에 넣은 건 아니지?”서윤이 손익표를 돌렸다.“입문 구성만으로 계산했어. 추가 구매는 따로 검증해야 해.”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그럼 이것도 입문 구성.”작은 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서윤이 민재를 봤다.“커피만 마셨을 것 같아서.”“아직 물도 안 마셨어.”“더 심하네.”민재는 자기 자리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서윤은 병을 받고 빵 하나를 꺼냈다.먹는 동안 제조사 회신이 왔다. 두 용기를 묶으면 재료비는 줄었다.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