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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8 16:18:11

성문이 열렸다.

쿠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윤서화는 저도 모르게 고삐를 움켜쥐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이상한 곳이었다.

성벽은 검은 돌로 쌓여 있었다.

한양의 성곽과는 생김새부터 달랐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탑과 뾰족한 지붕, 커다란 유리창.

무엇보다.

사람들이 달랐다.

“…….”

서화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움직였다.

금빛 머리카락.

붉은 머리카락.

갈색은 그나마 익숙했지만 눈동자 색까지 제각각이었다.

푸른색.

초록색.

회색.

‘정말 조선이 아니구나.’

조금 전까지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나 했다.

자신이 모르는 먼 나라일지도 모른다고.

오라버니와 함께 아버지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수많은 나라 이야기를 들었다.

서역에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다른 사람들이 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끝에서 불을 만들어내는 사람까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하늘에는 달이 둘이었다.

서화는 품 안의 백옥 노리개를 만졌다.

‘어머니.’

손끝에 차가운 옥의 감촉이 닿았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익숙했다.

“전하!”

누군가 크게 외쳤다.

그러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기사들이 길을 열었다.

사용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허리를 숙였다.

몇몇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든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카시안.

서화가 옆을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창백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저 이상한 검은 기운까지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등을 곧게 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쓰러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 사람.’

서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당히 높은 사람인가.’

높은 정도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성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까.

카시안이 말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그의 몸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화는 봤다.

“…….”

곧장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카시안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레오넬의 표정이 굳었다.

“멈춰.”

당연히 서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계속 걸었다.

“전하께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서화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건 알았다.

그리고 저 얼굴도 알 것 같았다.

오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서화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제가 가지 않으면 저분이 쓰러지실 텐데요.”

레오넬은 못 알아들었다.

“…….”

“…….”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레오넬이 다시 손으로 멈추라는 시늉을 했다.

서화도 이번에는 확실히 이해했다.

그래서 멈췄다.

대신.

카시안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셋.”

레오넬이 인상을 찌푸렸다.

서화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

“……?”

하나를 더 접었다.

“하나.”

카시안의 몸이 기울었다.

“전하!”

레오넬이 급히 붙잡았다.

서화가 두 팔을 허리에 얹었다.

거 보라는 표정이었다.

“…….”

레오넬이 입을 다물었다.

카시안은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흡이 거칠어졌다.

서화가 이번에는 레오넬에게 다가갔다.

레오넬이 경계했지만 서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시안을 가리켰다.

그다음 성 안을 가리켰다.

눕는 시늉.

“방.”

당연히 못 알아듣는다.

서화가 다시 말했다.

“침상.”

“…….”

“아, 정말.”

서화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말이 안 통하니 답답했다.

그때.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레오넬.”

“예, 전하.”

짧은 명령이 이어졌다.

레오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전하, 저 여자는…….”

카시안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레오넬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카시안이 성 안으로 옮겨졌다.

서화도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또 막혔다.

이번에는 여자였다.

나이가 어머니와 비슷해 보이는 여인.

회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리엘이었다.

“…….”

마리엘이 서화를 위아래로 살폈다.

젖은 한복.

흙투성이 치마.

헝클어진 머리.

피가 묻은 손바닥.

그리고 카시안의 커다란 외투.

마리엘의 눈이 마지막에서 멈췄다.

‘전하의 외투?’

서화는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바라봤다.

마리엘이 먼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리 오세요.”

서화는 눈만 깜빡였다.

마리엘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

서화는 손을 내려다봤다.

따라오라는 뜻인가.

그런데 카시안은 반대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서화가 카시안을 가리켰다.

“저 사람.”

마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치료해야 합니다.”

서화가 침통을 들어 보였다.

마리엘의 눈이 커졌다.

바늘.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뭡니까?”

한 남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은빛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

푸른 눈.

에드윈이었다.

그는 카시안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참이었다.

그러다 서화 손에 들린 침을 발견했다.

“설마.”

에드윈이 서화에게 다가왔다.

서화는 반사적으로 침통을 품 쪽으로 당겼다.

“보여주십시오.”

“…….”

“그것 말입니다.”

에드윈이 손을 뻗었다.

탁.

서화가 그의 손등을 쳤다.

“…….”

에드윈이 굳었다.

마리엘도 굳었다.

뒤에 있던 기사들도 굳었다.

서화는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에드윈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서화를 봤다.

“……방금 날 때린 겁니까?”

서화는 못 알아들었다.

“제가?”

에드윈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맞은 손등을 보여줬다.

서화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차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답만큼은 아주 당당했다.

물론 에드윈은 ‘예’의 뜻을 몰랐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건 알아봤다.

“하.”

에드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마법사님!”

표정이 심각했다.

에드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대공 전하의 저주가 다시 움직입니다.”

에드윈이 즉시 돌아섰다.

서화 역시 한 단어를 알아들었다.

‘대공?’

아까도 사람들이 비슷한 말을 했다.

그리고.

카시안.

서화는 에드윈을 따라 움직였다.

마리엘이 막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서화가 먼저 손을 들어 보였다.

“저도 갑니다.”

말은 안 통해도 표정만큼은 단호했다.

카시안이 누운 방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의원.

마법사.

기사.

서화는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대강 구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누구도 카시안에게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검은 문양이 목덜미를 넘어 턱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

서화의 얼굴이 변했다.

아까보다 빠르다.

침을 제거한 탓인가.

아니면 이동하면서 무리했기 때문인가.

에드윈이 카시안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푸른빛이 피어났다.

화아악―

서화가 멈칫했다.

다시 봐도 놀라웠다.

손끝에서 빛이 생겨났다.

빛이 카시안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검은 문양이 크게 요동쳤다.

“큭!”

카시안의 몸이 들썩였다.

에드윈의 얼굴이 굳었다.

“반발이 너무 강해.”

마력을 더 끌어올렸다.

푸른빛이 강해졌다.

그런데.

서화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두 힘이 싸우고 있었다.

푸른빛이 밀어내면 검은 기운이 더 거칠게 반발했다.

카시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만하십시오.”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만하시라고요.”

당연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서화가 앞으로 나섰다.

레오넬이 막았다.

“안 돼.”

서화가 카시안을 가리켰다.

“죽습니다.”

레오넬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화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의 발등을 밟았다.

“……!”

레오넬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서화는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잠깐!”

침상으로 달려갔다.

에드윈이 놀라 서화를 바라봤다.

서화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법을 쓰고 있는 손을 카시안에게서 떼어냈다.

빛이 사라졌다.

“무슨 짓입니까!”

서화는 무시했다.

카시안의 맥부터 짚었다.

엉망이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군.”

침통을 열었다.

에드윈이 경악했다.

“또 그 바늘?”

레오넬도 다가왔다.

그러나.

카시안이 눈을 떴다.

“……그대로 둬.”

목소리가 희미했다.

“전하.”

“하게 둬.”

레오넬이 멈췄다.

에드윈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서화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침을 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카시안의 호흡을 확인했다.

그리고 네 번째 침을 놓았다.

꿈틀거리던 검은 문양이.

멈췄다.

“…….”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에드윈의 눈이 커졌다.

레오넬도 말이 없었다.

의원은 자신이 잘못 본 것처럼 카시안의 목을 바라봤다.

서화는 그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맥을 짚었다.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됐습니다.”

물론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서화는 카시안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려다가 멈췄다.

손수건이 없었다.

옷소매를 사용하려다 자신의 옷이 더러워진 것을 보고 그것도 멈췄다.

그때.

하얀 천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화가 고개를 들었다.

마리엘이었다.

그녀가 깨끗한 천을 내밀고 있었다.

“…….”

서화가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리엘은 뜻을 몰랐지만.

서화의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 작은 미소에.

서화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카시안이 잠든 뒤.

서화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끌려왔다.

“저 사람을 봐야 하는데.”

마리엘은 서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욕조를 가리켰다.

“…….”

서화가 눈을 깜빡였다.

따뜻한 물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진흙.

피.

젖은 옷.

머리카락에도 흙이 묻어 있었다.

“……씻으라는 말씀이시군요.”

마리엘이 웃었다.

말은 안 통하지만.

이 사람과는 이상하게 대화가 되는 기분이었다.

서화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마리엘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

서화의 옷을 벗기는 것을 도우려 했다.

서화가 깜짝 놀랐다.

“괜찮습니다!”

마리엘이 멈췄다.

“제가 합니다.”

서화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을 저었다.

마리엘은 잠시 바라보다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나가려다가.

옷 하나를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화는 그것을 바라봤다.

“…….”

드레스였다.

물론 서화는 그 이름을 몰랐다.

마리엘이 나가고.

한참 뒤.

깨끗이 씻은 서화는 침상 위의 옷을 펼쳐보았다.

“이걸.”

앞으로 들었다.

“어떻게 입으라는 것이지?”

한참 고민했다.

결국 입기는 했다.

문제는.

“……너무 파였습니다.”

서화가 거울 앞에서 굳어 있었다.

목 아래가 훤했다.

조선에서라면 속살을 이렇게 드러내고 밖에 나갈 수는 없었다.

“이곳 여인들은 정말 이렇게 입는단 말인가.”

결국 서화는 자신의 저고리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젖어 있었다.

“…….”

고민 끝에 침상 위에 있던 얇은 천을 발견했다.

어깨에 둘렀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거울을 봤다.

서화의 움직임이 멈췄다.

처음 보는 옷.

낯선 방.

낯선 거울.

자신인데.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순간.

집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머리를 빗겨주던 아침.

“서화야, 움직이지 마라.”

“어머니, 다 했습니까?”

“아직이다.”

“오라버니가 기다립니다.”

“도겸이는 기다리라고 하렴.”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고 뛰어나갔다가 머리가 풀어져 어머니에게 붙잡혔던 날.

서화가 천천히 거울 앞에 앉았다.

“……어머니.”

아주 작게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손이 백옥 노리개로 향했다.

그런데.

“……?”

노리개가 없었다.

서화의 얼굴이 굳었다.

“어디 갔지?”

벌떡 일어났다.

옷.

젖은 한복.

침통.

짐.

“노리개.”

없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안 돼.”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노리개가 없습니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서화를 바라봤다.

서화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리엘!”

자신이 들었던 이름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사람들이 그 여인을 그렇게 부른 것 같았다.

“마리엘!”

잠시 후.

저쪽에서 마리엘이 나타났다.

서화가 달려갔다.

“제 노리개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서화가 자신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매듭을 묶는 시늉.

옥의 둥근 모양을 손으로 만들었다.

마리엘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

무언가를 깨달았다.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

서화는 곧장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카시안의 방이었다.

서화가 들어갔다.

그리고 멈췄다.

카시안이 깨어 있었다.

침상에 기대어 앉은 그의 손에.

백옥 노리개가 들려 있었다.

서화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왜.”

카시안이 서화를 봤다.

그 순간.

서화는 자신의 차림을 잊었다.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카시안이 노리개를 내려다봤다.

다시 서화를 봤다.

“이게 무엇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서화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제 것입니다.”

카시안은 노리개를 바라봤다.

설원에서.

이것이 빛났다.

마수들이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가 반응했다.

그렇다고 해도.

카시안은 잠시 후 노리개를 서화에게 내밀었다.

서화가 곧바로 받아 가슴에 품었다.

“…….”

눈에 띄게 안도했다.

카시안은 그 표정을 바라봤다.

서화가 노리개를 꼭 쥐었다.

“어머니께서 주신 것입니다.”

카시안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서화는 계속 말했다.

“제 어머니께서.”

자신을 가리키고.

노리개를 가리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어머니.”

카시안의 눈이 움직였다.

“……어머니.”

그가 따라 했다.

발음이 어색했다.

서화의 눈이 커졌다.

카시안도 멈췄다.

서화가 다시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예.”

서화의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웃음이 나타났다.

“어머니입니다.”

카시안은 그 미소를 바라봤다.

뜻은 모른다.

그러나.

이 물건과 관련된 누군가를 부르는 말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서화가 노리개를 품에 넣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레오넬과 에드윈이 들어왔다.

에드윈의 손에는 책이 여러 권 들려 있었다.

그는 서화를 보자 눈이 빛났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책을 펼쳤다.

각 나라의 지도.

언어.

문자.

그림.

서화의 시선이 곧바로 책으로 향했다.

에드윈이 무언가 물었다.

서화는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지도를 보는 순간.

의도를 이해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것이구나.’

서화가 다가갔다.

지도 위를 살폈다.

북쪽.

남쪽.

바다.

수많은 나라.

아무것도 모른다.

한참을 살폈다.

혹시.

혹시라도.

익숙한 지형이 있을까.

없었다.

서화의 손끝이 조금씩 굳었다.

에드윈이 다른 지도를 펼쳤다.

더 큰 지도.

대륙 전체였다.

서화는 다시 살폈다.

없었다.

조선이.

없었다.

서화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이 미간을 좁혔다.

“없다고?”

서화는 지도 가장자리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붓과 비슷한 필기구를 집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글자를 적었다.

朝鮮.

조선.

방 안의 사람들이 글자를 바라봤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서화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조선.”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었다.

“조선.”

에드윈이 따라 했다.

“……조선?”

서화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선.”

에드윈은 지도들을 살폈다.

다시 글자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뜻.

서화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없습니까?”

에드윈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서화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朝鮮.

분명 존재한다.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오라버니가 있는 곳.

그런데.

이 사람들의 지도에는 없다.

서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카시안은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서화가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사람 하나를 그렸다.

그 옆에 세 사람.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그리고 자신.

그다음.

가족과 자신의 사이에 긴 선을 그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

마지막으로.

자신에게서 가족 쪽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 화살표에 멈췄다.

서화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족 그림을 가리켰다.

“돌아가야 합니다.”

천천히.

다시 말했다.

“집으로.”

카시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은 이해했다.

서화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먼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만큼은 알았다.

카시안의 눈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

에드윈이 무언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카시안을 향해 말했다.

“전하, 일단 이 여자의 출신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서화의 귀가 움직였다.

‘전하.’

또 들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반복해서 들었던 다른 말.

대공.

서화는 고개를 들었다.

에드윈이 카시안을 향해 말했다.

“대공 전하.”

이번에는 확실했다.

서화가 에드윈을 가리켰다.

“대공?”

에드윈이 멈췄다.

서화가 다시.

“대공.”

그리고 카시안을 가리켰다.

“카시안.”

이번에는.

“대공?”

에드윈의 얼굴이 밝아졌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카시안 에르하르트 대공 전하.”

서화가 아는 것은 두 단어뿐이었다.

카시안.

대공.

서화는 잠시 고민했다.

공.

조선에도 공작의 작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의 체계와 같을 리 없다.

무엇보다.

성 하나가 통째로 이 남자의 것처럼 보였다.

서화가 카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대공이라는 것이.”

카시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무엇입니까?”

당연히.

대답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화는 곧 알게 될 터였다.

자신이 설원에서 바늘로 찌르고.

손등까지 내려치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타박했던 남자가.

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날 밤.

대공성 지하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백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방.

누구도 열 수 없었던 문에.

쩌적.

가느다란 금이 갔다.

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벽화 속 한복 차림의 여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윤서화를 닮아 있었다.

벽화 아래 새겨진 고대 문자가 하나씩 빛났다.

첫 번째 아이는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아래.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두 번째 아이 역시 돌아가려 할 것이다.

잠시 뒤.

마지막 문장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문은 두 번 같은 것을 돌려보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지하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으냐.』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서화는 창가에 서 있었다.

낯선 성.

낯선 하늘.

두 개의 달.

백옥 노리개를 꼭 쥔 채.

조선이 있을 리 없는 방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기다려주십시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제가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그 약속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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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이곳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이 생깁니다

    아침이 밝았을 때, 서화는 어젯밤 자신이 했던 생각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도 좋은 것이 생기고 있다.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마리엘이 가져다준 쌀죽도, 에드윈과 밤늦게까지 기록을 뒤진 일도, 레오넬이 이제는 자신을 볼 때 검부터 잡지 않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카시안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귀환 방법을 함께 찾고 있다는 사실도. 좋은 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인데. 서화는 자꾸만 그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좋아하게 되면 떠나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익숙해지면 그만큼 이별이 아파질 것 같아서. 그래서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에드윈을 찾아갔다. 생각할 틈을 만들지 않으면 됐다. 언어를 배우고, 기록을 읽고, 돌아가는 길을 찾으면 된다. “에드윈.” 연구실 문을 열자 안쪽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무너졌다. 쾅! “…….” 서화가 멈췄다. 잠시 뒤 책더미 사이에서 에드윈의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괜찮아!” 서화가 천천히 눈썹을 올렸다. “안 물었습니다.” 조선말이었다. 에드윈은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서화는 연구실 바닥을 둘러봤다. 책, 종이, 작은 수정구, 마법 도구와 잉크병이 뒤섞여 있었다. 며칠 전보다 더 엉망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위험.” 에드윈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그제야 자신도 책 한 권을 밟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서화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에드윈이 재빨리 발을 뗐다. “책은 안 망가졌어.” 서화는 못 알아들었다. 대신 책을 집어 먼지를 털고 책상 위에 올려놨다. “책.” 그리고 에드윈을 가리켰다. “소중.” “…….” “소중.” 그녀가 다시 강조했다. 며칠 전 배운 단어였다. 에드윈은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 그가 손을 들었다. “정리하겠습니다.” 서화는 ‘정리’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에드윈이 책을 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남쪽의 문을 찾아서

    남쪽 해안에서 사흘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진 문.그 기록 하나 때문에 서화는 밤이 늦도록 지도를 떠나지 못했다. 북부에서 남쪽 끝까지 이어진 길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따라가며 몇 번이고 거리를 가늠했다. 이 세계의 지리를 완전히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북부와 남쪽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도시와 산맥, 강이 놓여 있는지는 이제 알 수 있었다. 하루 이틀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할 만큼 조급하지 않았다.이전까지의 길은 늘 막혀 있었다. 검은 문을 열라는 목소리, 알 수 없는 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존재.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때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찜찜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윤연화가 남긴 길이었다.자신과 같은 조선 사람.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했고, 결국 검은 문을 닫은 여자.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문은 하나가 아니란다.서화는 그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아니, 믿기만 해서는 안 됐다.확인해야 했다.“남쪽.”서화가 지도 끝을 가리켰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드윈이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밤새 기록을 뒤진 탓에 머리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다.“남쪽.”서화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나.”손가락을 남쪽으로 움직였다.“가다.”에드윈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안 돼.”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 단어는 너무 잘 안다.“왜?”“멀어.”에드윈이 지도를 길게 쓸었다.“아주 멀어.”서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알다.”“그리고 위험해.”그가 산맥과 숲을 가리켰다. 이어 마수를 뜻하는 그림까지 급히 그렸다. 그제야 서화는 그의 걱정을 이해했다.“마수.”“그래.”“기사.”서화가 손으로 검을 쥔 시늉을 했다.“같이.”에드윈이 눈을 크게 떴다.“지금 호위까지 데려가겠다고?”문장이 길어지자 서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문 너머의 것은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서화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어둠은 사라졌다.가족의 모습도.도겸의 손도.전부.백옥 노리개는 다시 평범한 빛을 되찾았다.그런데.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서화가 천천히 손을 펼쳤다.손바닥이 축축했다.조금 전까지.그 너머에 오라버니의 손이 있었다.닿지는 않았지만.분명히 봤다.아버지.어머니.오라버니.모두 살아 있었다.자신을 찾고 있었다.그리고.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그 사실만으로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기뻐서.당장 울고 싶었다.그런데.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문만 열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그 존재는.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계속해서 문을 열라고 했다.대가가 무엇인지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조선이 위험한지.이 세계가 위험한지.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자신이 물었다.당신, 문 너머에서 나오고 싶은 겁니까?대답은 없었다.하지만.그 침묵이 이상하리만큼 분명했다.서화가 백옥 노리개를 움켜쥐었다.“저를 이용하려는 거군요.”처음 설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드디어.』『찾았다.』『문을 여는 아이야.』그때는 뜻을 몰랐다.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문을 여는 아이.자신을 그렇게 불렀다.처음부터.기다리고 있었다.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늦은 밤.대공성의 복도는 조용했다.경비 기사들이 서화를 발견하고 놀랐다.“서화 아가씨?”마리엘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뒤.성 안의 몇몇 사람들도 어색하게 그 호칭을 따라 하고 있었다.서화는 기사에게 물었다.“카시안.”그리고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어디?”기사가 잠깐 망설였다.이 시간이라면 대공은 집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가 방향을 알려줬다.서화는 곧장 걸었다.집무실 앞.레오넬이 있었다.“서화?”그는 서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웃음기를 거뒀다.“무슨 일이지?”서화는 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대신.“카시안.”문을 가리켰다.“지금.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첫 번째 여인의 이름

    윤연화.서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백옥 위에 나타났던 글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다시 아무리 들여다봐도.평범한 흰 옥일 뿐이었다.그런데도 서화는 눈을 떼지 못했다.“윤연화…….”어젯밤.분명히 보았다.윤.연.화.그리고.너의 피가 처음 문을 닫았다.“피.”서화가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핏줄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 세계로 건너왔던 여인.자신과 같은 백옥 노리개를 가지고 있던 여자.그리고.자신의 피와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의 말.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겹쳤다.“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뜻인가.”하지만 이상했다.서화는 자신의 집안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윤씨 집안은 오래된 양반가였다.족보도 있었다.선대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았다.어릴 때 아버지에게 가계에 관해 배운 적도 있었다.그런데.이세계에 다녀온 여인이라니.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잊을 리 없다.더구나 백옥 노리개는.“어머니께서 주셨는데.”서화의 손이 멈췄다.이상하다.백옥 노리개는 아버지의 윤씨 가문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어머니 한연화가.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다.그런데 이름은.윤연화.“…….”서화의 눈빛이 달라졌다.같은 ‘연화’.그것까지 우연일까?“아니야.”무언가 있다.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서화는 침상에서 내려왔다.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확인해야 해.”누구에게?이 세계에서 사백 년 전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한 명이 바로 떠올랐다.“에드윈.”쾅!연구실 문이 열렸다.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에드윈이 펄쩍 뛰었다.“뭐야!”서화가 들어왔다.“에드윈.”“서화?”그는 눈을 비볐다.창밖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도 않았다.“지금 몇 시인지 알아?”서화는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그러나.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종이를 꺼냈다.그리고 붓을 들었다.에드윈이 멍하니 바라봤다.서화가 한자를 적었다.尹蓮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는 길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희망이 생긴 날 밤. 서화는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곳으로 온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그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아갔다…….” 서화는 침상 위에 앉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연했다.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정작 방법은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길이 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 길을 지나갔다. 그렇다면. 자신도 찾을 수 있다. 서화는 품에서 백옥 노리개를 꺼냈다. 달빛 아래. 옥은 다시 평범한 흰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그분을 돌려보낸 것입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말을 멈췄다. 어젯밤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화야.』 도겸의 목소리. 꿈이었을까. 아니. 서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선명했다. 오라버니 특유의 말투까지.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오라버니도 찾고 계시는군요.”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금세 사라졌다. ‘손.’ 꿈에서 본 도겸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서화가 눈을 감았다. 절벽.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던 오라버니. 마지막 순간. 자신을 놓친 사람. “……또 자기 탓을 하고 계시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서화가 나무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쳤을 때도. 자신이 조금만 빨리 왔으면 막았을 거라고 했다. 서화가 감기에 걸렸을 때조차 전날 함께 밖에 나간 자기 탓이라 우겼다. 그런 오라버니가. 자신의 손을 놓쳤다. “바보.” 서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라버니 탓이 아닌데.” 노리개를 꼭 쥐었다. “그러니까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 있다고. 괜찮다고. 오라버니가 놓은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전부 따질 겁니다.” 눈물이 맺혔지만. 서화는 웃었다. 그날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오라버니는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문.門.한연화는 한참 동안 함 안쪽을 바라보았다.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희미한 붉은빛이.분명 글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여보.”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방 한쪽에서 젖은 도포를 갈아입던 윤정헌이 고개를 돌렸다.“왜 그러오?”“이것 좀…… 보세요.”정헌이 다가왔다.그 뒤로 도겸도 따라왔다.도겸의 손은 엉망이었다.절벽 아래의 돌과 흙을 맨손으로 헤집은 탓에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곳곳에서 피가 배어 있었다.연화가 그 손을 발견했다.“도겸아.”그러나 도겸은 자신의 손을 감췄다.“괜찮습니다.”“그게 어찌 괜찮은 손이니.”“어머니.”도겸이 함을 가리켰다.“먼저 이것부터 보십시오.”연화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정헌이 함을 들어 올렸다.딸에게 백옥 노리개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평범한 나무함이었다.연화의 어머니에게서.그리고 그 어머니에게서.몇 대를 거쳐 내려왔던 것.“문.”정헌이 글자를 읽었다.“門이구려.”도겸의 얼굴이 굳었다.“문이라고요?”“그래.”“아버지.”도겸이 급하게 정헌을 바라봤다.“제가 봤던 것도…….”말이 끊겼다.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서화의 손.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던 손.그리고 절벽 아래.분명히 열렸던 검은 무언가.처음에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서화는 떨어지지 않았다.사라졌다.도겸이 함을 움켜쥐었다.“문이었습니다.”정헌이 아들을 바라봤다.“무엇이?”“서화 아래에 생긴 것 말입니다.”도겸의 숨이 거칠어졌다.“검은 구멍처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문이었습니다.”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도겸아.”“서화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아니.”도겸이 이를 악물었다.“끌려갔습니다.”정적이 내려앉았다.빗물이 처마 끝에서 떨어졌다.뚝.뚝.뚝.정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생 학문을 익힌 사람이었다.괴력난신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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