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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기를 기다린 사람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8 05:38:08

“그래서 나를 기다린 거야.”

유리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조향실 안에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4개월 전 작성된 매칭 리스트가 그대로 떠 있었다. KJ-04 — KWON JAEHEON. HAN YURI — Highest compatibility based on sensory interpretation profile.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문장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우연이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다른 방식으로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두 사람을 사랑에 빠뜨리기 위해 연결한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단순하고, 그래서 더 불쾌한 이유.

필요했기 때문이다.

권재헌이라는 특이한 체향 반응을 가진 사람과, 그것을 하나의 향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조향사 한유리.

둘을.

“2년 전에는 실패한 거예요.”

재헌이 유리를 바라봤다.

“무엇을.”

“향으로 만드는 거.”

유리는 작업대에 놓인 〈BORDERLINE〉 시향지를 집었다. 이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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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사람은 번역할 수 없습니다

    유리는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마지막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A person cannot be translated. Only the distance they choose can be remembered.사람은 번역할 수 없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거리뿐이다.문장을 저장한 뒤에도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17년 전부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R-01으로 기억과 익숙함을 건드리고, I-01으로 그 반응을 향으로 옮기려 했으며, 15년 뒤에는 P-11으로 비슷한 시도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제 BORDERLINE을 보며 드디어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번역한 마르크도, ‘익숙함’을 번역한 아드리안도 실패했으니, 다음에는 ‘사람’을 번역하면 된다고.하지만 처음부터 질문이 틀렸다.유리는 권재헌을 번역한 적이 없다. 그의 체온이 올라가는 순간을 관찰했고, 가까워질수록 달라지는 체취를 맡았으며, 그 변화에서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향의 언어로 풀었을 뿐이다. 같은 권재헌을 다른 조향사가 맡았다면 전혀 다른 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게 조향이다. 사람을 하나의 정답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한 순간을 자기 언어로 남기는 일.“선배.”맞은편에서 로그를 정리하던 세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응.”“이제 집에 안 가요?”유리는 시계를 봤다.“몇 시야?”“두 시 십이 분.”“미쳤네.”“제가 한 시간 전에도 말씀드렸어요.”“그때는 몇 시였는데.”“한 시 십이 분이요.”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정확히 한 시간 기다렸네?”“네. 이제는 강제 종료할까 고민 중이었어요.”유리는 결국 노트북을 닫았다. BORDERLINE_MASTER_1.1은 기존 개발 서버와 완전히 분리된 신규 저장소에 있었고, 접근 권한도 유리와 세아, 품질 책임자 세 명으로 제한했다. 무엇보다 레거시 인증을 아예 받지 않도록 별도 환경을 만들었다. 죽은 계정이 아무리 살아 돌아와도 이번 마스터에는 닿지 못한다.그런데 자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내 향의 답은 내가 정합니다

    “최종 마스터를 바꾸겠다고요?”세아는 유리의 말을 듣자마자 되물었다. 시향실은 이미 폐쇄됐고, 예약에 없던 블라인드 패널 샘플 다섯 개는 안전관리팀과 법무팀 입회 아래 별도 보관함으로 옮겨진 뒤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새로운 ‘깨끗한 대상’을 찾았다는 사실 때문에 연구실 전체가 긴장하고 있었는데, 유리는 오히려 그 순간 BORDERLINE의 최종 배합을 다시 열겠다고 했다.“응.”“지금 출시 일정 얼마 안 남았어요.”“알아.”“마스터 승인도 끝났고요.”“그것도 알아.”세아가 유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범인 잡으려고 향 바꾸는 건 아니죠?”그 질문에 유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에 세 개의 배합을 나란히 띄웠다. 자신이 만든 BORDERLINE_MASTER_1.0, 누군가 P-11을 BORDERLINE 쪽으로 억지로 끌어온 BL-B9-EVAL, 그리고 재헌의 차량에서 검출된 그 수정형. 세 개 모두 차갑게 시작해 따뜻한 잔향으로 넘어간다는 큰 구조는 닮아 있었지만, 유리에게는 전혀 다른 향이었다.“처음에는 잡으려고 바꾸겠다고 생각했어.”유리가 솔직하게 말했다.“저 사람이 내가 완성했다고 생각한 답을 훔쳤으니까, 그 답을 틀리게 만들어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그건 조향이 아니잖아.”세아가 가만히 들었다.“범인 때문에 배합을 바꾸면 결국 내 향의 마지막 결정도 저 사람이 하게 되는 거야.”유리는 마스터 배합표를 확대했다. 아주 얇게 남겨둔 앰버. 가까이 갈수록 피부 온도처럼 올라오는 머스크. 그 사이를 연결하는 아이리스와 시더.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이 구조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누군가 그 구조를 흉내 내는 과정을 보면서.오히려 자기 향의 작은 결점이 보였다.“BORDERLINE은 가까워지라고 만드는 향이 아니야.”“네.”“그런데 지금 마스터는.”유리는 앰버 수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아주 조금이지만 답을 먼저 알려줘.”세아의 눈빛이 달라졌다.“따뜻해질 거라는 답.”“응.”차가운 첫 향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향보다 먼저 당신을 알아봤습니다

    “재헌 씨, 차에서 내려요.”유리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지금 필요한 건 놀라는 것도 상대가 원하는 의미를 붙이는 것도 아니었다. 재헌이 방금 당신 향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BORDERLINE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 향 때문에 유리를 떠올렸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전화 너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내렸습니다.]“차에서 조금 떨어져요. 기사님도 같이.”[네.]“그리고 다시 확인한다고 냄새 맡지 마요.”재헌이 잠깐 침묵했다.[이미 맡았는데.]“그러니까 더 맡지 말라고요.”[알겠습니다.]유리는 보안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재헌의 차량 위치가 확인됐고, 가장 가까운 보안 인력과 안전관리 담당자가 동시에 이동했다. 차량은 그대로 보존하고, 누구도 안에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창문을 열어 환기할 것인지도 현장 채취가 끝난 뒤 결정하기로 했다.“재헌 씨.”[네.]“어지럽거나 머리 아프거나, 눈 따갑거나 그런 건.”[없습니다.]“기사님은.”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재헌이 대답했다.[없다고 합니다.]“그래도 안전관리팀 올 때까지 기다려요.”[유리 씨.]“왜요.”[숨 쉬어도 됩니다.]그제야 유리는 자신이 숨을 얕게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에 있던 세아도 같은 걸 알아차렸는지 물을 밀어줬다. 유리는 한 모금 마시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나 괜찮아요.”[안 괜찮아 보입니다.]“안 보이잖아요.”[목소리가 보입니다.]이런 상황에서도.그 사람은.이상한 말을 한다.유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아까 말한 거.”[당신 향.]“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재헌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질문이 중요했다. 누군가 이미 KJ-04 must identify the interpreter without being told라는 평가 항목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 재헌의 말을 그 문장에 맞춰 해석해서는 안 된다.“내 향이라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당신을 시험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Now I only need to know whether he recognizes yours.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세 번 읽고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는 의미가 모호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KJ-04, 권재헌. 그리고 ‘당신의 향’은 지금 이 사람이 P-11과 비교하고 있는 BORDERLINE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그러나 유리는 곧바로 재헌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먼저 화면을 캡처하고, 접근 세션을 끊지 않은 채 보안팀에 넘겼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계정을 차단했겠지만, 이제는 상대가 들어온 길을 먼저 본다. 보안팀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외부로 나가는 권한만 막은 격리 환경에서 세션을 살려두고 기기 지문, 인증 토큰, 접속 경로를 동시에 복제했다.“답장하지 마세요.”보안팀장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안 해요. 저 사람은 내가 반응하는 것까지 보고 싶어 하니까.”세아가 옆에서 화면을 바라봤다.“그런데 선배. ‘그가 당신의 향도 알아보는지’라는 게 정확히 뭘 보겠다는 거예요? 권 총괄님이 BORDERLINE을 맡고 선배를 떠올리는지?”“아마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겠지.”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중요한 건 실제로 무슨 반응이 나오느냐가 아니야. 저 사람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어. 재헌 씨가 향을 맡고 나를 떠올리면 모델이 맞았다고 할 거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노출 조건이 잘못됐다고 하겠지. 예전에 클레어 씨한테 했던 것처럼.”17년 전 헬레나가 만들었다가 스스로 철회했던 관계 반응 모델도 그랬다. 가까워지면 애착, 물러나면 회피, 다시 돌아오면 애착 강화. 어떤 행동을 해도 가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는 구조. 유리는 그걸 다시 반복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재헌 씨는 테스트 안 해.”세아가 유리를 봤다.“본인이 하겠다고 하면요?”“그래도 먼저 안전성부터 확인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 사람이 정한 방식으로는 안 해.”유리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재헌 씨가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선을 넘은 사람을 조사한 사람

    이정훈이 남긴 메모의 마지막 문장은 단순했다.17년 전 R-01 사건의 공식 조사 책임자를 찾으십시오.유리는 그 문장을 읽은 뒤 곧바로 사람 이름부터 검색하지 않았다. 이제는 순서를 안다. 누가 조사했는지를 찾기 전에 정말 그런 조사가 있었는지, 보고서가 존재하는지, 이정훈이 말한 ‘공식 조사’가 회사 차원의 윤리 조사였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17년 전 메종 르비에 글로벌 윤리·컴플라이언스 기록.”세아가 옆에서 노트북을 열었다.“세린 연구소 건으로요?”“세린, S-17, R-01, Hidden Yield. 전부 따로.”“한 번에 검색 안 하고요?”“응. 지금까지 자료 이름이 바뀔 때마다 놓친 게 너무 많아.”같은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R-01 연구였고, 다른 사람에게는 S-17 윤리 검토였으며, 또 다른 기록에는 H.Y. Protocol로 남아 있었다. 이름 하나만 따라가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법무팀도 같은 방식으로 검색 범위를 넓혔다.그리고.첫 번째 결과는.예상보다 빨리 나왔다.Maison Levier Global Ethics & Compliance — Case GL-17-041사건명.Undisclosed Olfactory Exposure in Associative Response Research.연상 반응 연구에서의 비고지 후각 자극 노출.유리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등을 의자에서 뗐다.“있네.”공식 사건.정말 있었다.조사 개시일은 17년 전 9월 4일. 클레어가 사고를 당하기 전이 아니라, 사고 이후였다. 제보자는 익명 처리돼 있었고 조사 대상 기관은 세린 인지소재 연구소와 외부 공동연구팀. 메종 르비에가 직접 연구를 주도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향료 및 감각 언어 자문 인력이 일부 참여해 내부 윤리 조사까지 함께 진행됐다.그리고.조사 책임자.Mireille Duval.미레유 뒤발.당시 직책.Global Ethics & Compliance Senior Investigator.유리는 처음 보는 이름을 그대로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면접이 끝난 뒤에 묻겠습니다

    헬레나의 메일을 읽은 뒤에도 유리는 한동안 화면을 내리지 않았다. 저는 당신과 권재헌 씨를 만나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처음 만난 날 R-01을 가져간 사람을 봤습니다. 지금까지라면 마지막 한 문장만 붙잡고 곧장 답장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어디서 봤는지, 누구였는지, 왜 이제야 말하는지 당장 캐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일의 첫 문장이 계속 눈에 밟혔다. 면접에서는 당신의 향만 이야기하세요. R-01도, KJ-04도, 저도 당신의 경력이 아닙니다. 그건 맞았다.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기분이 이상할 정도였다. 몇 주 동안 사건은 유리의 일과 연애, 과거와 미래를 모조리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파리 시니어 퍼퓨머 인터뷰조차 어느 순간부터 헬레나를 만나기 위한 통로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유리는 새 메일 창을 열었다. 확인했습니다. 면접 후 법무팀 입회하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딱 그것만 보냈다. 세아가 옆에서 놀란 얼굴로 봤다. “안 물어봐요?” “응.” “누군지 안 궁금해요?” “미치게 궁금해.” “그런데요?” 유리는 노트북을 닫았다. “내일 면접이잖아.” 세아가 잠시 멈췄다. “아.” “헬레나 말이 맞아. R-01도, KJ-04도 내 경력 아니야. 이 사건 때문에 내가 몇 년 동안 만든 향까지 뒷전으로 밀리면 그것도 싫어.” 세아의 표정이 천천히 풀렸다. “그럼 오늘은.” “면접 준비.” “진짜로?” “응.”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를 한꺼번에 정리했다. R-01 폴더도, 세린 아카이브 자료도, 가브리엘 진술도 전부 별도의 보안 드라이브로 넘겼다. 그리고 화면에 남긴 건 오직 하나였다. HAN YURI — SENIOR PERFUMER PORTFOLIO. 오늘은. 자기 향만 본다. ⸻ 그 결심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삼십칠 분. 유리가 BORDERLINE 발표 자료를 수정하고 있는데 연구실 문이 열렸고, 재헌이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는 조금 느슨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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