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꼬마어
김소아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구급상자를 찾아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까지 감았다.

화상을 입은 손은 따끔하면서 욱신거렸다.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거실 한쪽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서준우가 기억을 되찾은 뒤 사 온 피아노였다.

자신이 직접 가르쳐 주겠다던 말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피아노 덮개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의 관계도 그 피아노처럼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김소아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과 신분증, 카드까지 하나씩 정리했다.

손길은 느렸다.

하나씩 정리할 때마다 지난날과 작별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창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서준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치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펼쳐진 캐리어를 본 서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해?”

“짐 싸.”

김소아는 담담히 대답하며 계속 옷을 갰다.

서준우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오늘 임지연에게서 맡았던 향이었다.

서준우가 갑자기 김소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이 너무 강해서 김소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오늘 지연이랑 밥 좀 먹었다고 집을 나가겠다는 거야?”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당신이 사람까지 다치게 해 놓아도 지연이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런데 당신이 먼저 화를 내?”

김소아는 말없이 서준우를 바라봤다.

서준우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집안이랑 지연이네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지연이도 이제 막 돌아왔고, 부모님도 나한테 잘 챙겨 달라고 하셨어.”

잠시 말을 멈춘 서준우가 미간을 더 찌푸렸다.

“당신도 이제 철 좀 들면 안 돼?”

‘철들라니?’

그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김소아는 들고 있던 옷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은 자리를 비켜 주려고 이렇게 짐까지 싸고 있는데.

대체 여기서 뭘 더 해야 철이 드는 걸까?

“대답해.”

서준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소아는 말없이 몸을 돌리면서 다시 짐을 쌌다.

그 침묵에 서준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래. 언제까지 이러나 두고 보자.”

서준우는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묻이 닫히는 큰 소리에 김소아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

다음 날 아침.

김소아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임지연이 거실에 앉아 서준우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흰색 원피스를 입고 화장도 단정하게 한 모습이었다.

청순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였다.

김소아를 발견한 임지연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소아 씨, 일어났어요?”

이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부모님이 오늘 자선 경매에 꼭 준우 씨랑 같이 가라고 하셔서요.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김소아는 서준우를 바라봤다.

서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커프스단추만 만지고 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해 안 해요.”

김소아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 일은 저랑 상관없으니까요.”

커프스단추를 만지던 서준우의 손이 순간 멈칫하면서, 미간이 더 깊이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려던 순간 임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소아 씨도 같이 갈래요? 어차피 오늘 별일 없잖아요.”

김소아가 거절할 틈도 없이 임지연이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결국 김소아도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자선 경매장은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앞줄에 앉은 서준우는 무심한 얼굴로 입찰 번호판을 들었다.

보석과 명품 시계가 하나씩 낙찰될 때마다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옆에 앉은 임지연에게 건넸다.

임지연은 온화하게 웃으며 때때로 서준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누가 봐도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준우 씨.”

임지연이 배려하는 척 물었다.

“소아 씨 것도 좀 사 줄래?”

서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됐어. 소아는 이런 거 안 써.”

임지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서준우가 보지 못하는 틈에 김소아를 향해 보란 듯이 웃었다.

김소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끝으로 경매 책자만 천천히 쓸었다.

‘안 쓰는 걸까?’

‘아니면 내게는 이런 물건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서준우의 눈에는 여전히 자신이 가난한 동네에서 살아온 여자일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고 해도 이런 값비싼 물건까지 가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테니까.

김소아는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경매를 지켜봤다.

서준우가 임지연을 위해 거액을 쓰는 모습도, 두 사람이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도 담담히 바라봤다.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일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경매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취 팔찌였다.

김소아는 순간 숨을 멈췄다.

손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건 바로 할머니의 유품이었다.

3년 전.

서준우는 김소아의 생일 선물을 사 주겠다며 공사장에서 일하다 추락했다.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한 큰 사고였다.

수술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던 김소아는 결국 할머니가 유일하게 남겨 준 팔찌를 팔았다.

나중에 돈을 모아서 다시 찾아갔지만, 팔찌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린 뒤였다.

시내의 골동품 가게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팔찌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김소아는 반사적으로 입찰 번호판을 들었다.

“2억 원.”

임지연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 가볍게 웃으며 번호판을 들었다.

“6억 원.”

“8억 원.”

“10억 원.”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몇 차례 입찰이 오가자 서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김소아와 임지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최고가로 입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른 사람이 얼마를 부르든 그보다 높은 금액을 내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뒤 경매사가 낙찰봉을 내리쳤다.

“축하드립니다, 서준우 님!”

장내가 술렁이는 가운데 서준우가 임지연을 바라봤다.

“지연아, 마음에 든다면 가져.”

김소아의 손에서 입찰 번호판이 툭 떨어졌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제23화

    H시에서도 손꼽히던 서씨 가문은 순식간에 무너졌다.XS그룹의 대표 서준우는 납치와 불법 감금 등 여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수사 과정에서 5년 전 있었던 성범죄 미수 사건까지 다시 드러났다.결국 서준우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범행을 사주한 또 다른 관련자 역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범행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본인 역시 크게 다쳐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는 점이 고려돼 형의 집행은 유예됐다.이후에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됐다.서준우는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대신 한 가지 부탁을 했다.김소아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김소아는 한참 고민한 끝에 면회를 가기로 했다.다만 혼자 가지는 않았다.면회실.두꺼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김소아는 수화기를 들었다.유리 너머로 들려오는 서준우의 목소리에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소아야.”체포된 뒤 재판이 끝날 때까지 몇 달이 흘렀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하지만 유리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마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김소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때...”서준우가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내가 당신을 서씨 가문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런 지경까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김소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만약 그때 서준우가 자신을 서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 뒤의 수많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서준우가 조금만 더 확실하게 행동했더라도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몰랐다.끝까지 김소아를 선택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임지연과의 결혼을 선택했거나.김소아가 애초에 서준우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또 달랐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만약’이 없었다.서준우는 XS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다.기억을 되찾은 이상 평생 김소아와 낡은 단칸방에서 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서씨 가문으로 돌아간 뒤, 부모의 뜻을 완전히 무시할

  • 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제22화

    “서준우.”김소아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정말 몰라?”서준우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그때 지하실 쪽에서 임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준우!”울부짖는 소리가 선명하게 이어졌다.“김소아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제일 잘못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서준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사라졌다.못 들은 척하고 싶었다.그대로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김소아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서준우의 움직임이 멈췄다.작은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지만 지하실 입구는 여전히 어두웠다.김소아는 곧 손을 거뒀다.자리에서 일어나 서준우를 지나쳐서 밖으로 향했다.그러면서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임지연 말이 맞아.”서준우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정말 내 복수를 해 주고 싶다면, 먼저 당신 자신부터 돌아봐.”김소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나는 부모도 없고 배경도 없는 가난한 여자였어. 그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날 미워한 게 아니야.”잠시 걸음을 멈췄다.“당신들 같은 사람들 눈에는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김소아가 다시 서준우를 바라봤다.“그런 곳으로 나를 데려간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나를 여자친구로 곁에 두면서, 다른 여자와 애매한 관계를 이어 간 것도 당신이고.”목소리가 한층 또렷해졌다.“사람들이 날 무시하고 괴롭히는 동안 모른 척한 것도 당신이야.”김소아는 마지막으로 말했다.“서준우,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당신이었어.”서준우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자신은 김소아를 사랑했다고.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지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5년 전의 자신.김소아가 자신을 미행했다며 짜증 내던 모습.임지연을 일부러 다치게 했다며 김소아를 몰아붙이던 모습.사고가 났을 때 망설임도 없이 다른 사람부터 감싸던 모습.무대 위에서는 임지연과 함께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그 아래에서 김소아의 손목이 부러질 만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제대로 신경도 쓰

  • 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제21화

    김소아는 가정부의 부축을 받으면서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순식간에 지하실에는 서준우와 임지연, 그리고 조금 전에 끌려온 남자만 남았다.임지연은 겁에 질린 눈으로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봤다.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듯했다.“준우 씨, 미쳤어?”목소리가 갈라졌다.“당신 완전히 미쳤어! 이러고도 벌을 받는 게 안 무서워?”오랫동안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듯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서준우는 임지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턱을 거칠게 붙잡고 겁에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짧게 웃었다.“벌?”서준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내가 뭘 무서워해야 하는데?”“당신들이 그런 짓을 할 때는 벌받을 생각도 안 했잖아.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임지연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런 짓?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그 생각이 들자 마지막 기회라도 붙잡듯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준우 씨,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누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하지만 다음 순간 서준우는 임지연을 거칠게 밀어냈다.이어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마치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임지연은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감히 따질 수는 없었다.서준우가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여러 번 상상해 봤다.하지만 막상 이렇게까지 차갑게 돌변한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서준우의 눈에는 분명한 혐오가 담겨 있었다.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욱 믿기 힘들었다.“5년 전에 네가 꾸민 일 때문에 소아가 큰일을 당할 뻔했지.”서준우가 임지연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번에는 네가 썼던 방법을 그대로 돌려줄 거야.”임지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조금 전 나간 김소아.얼마 전 손을 다친 사람들.지하실에 갇힌 자신.그리고 옆에 있는 낯익은 듯 낯선 남자.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임지연의

  • 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제20화

    장씨, 이씨, 진씨, 왕씨 집안의 아가씨들이 같은 날 오른손을 크게 다쳤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그리고 바로 그날.평소처럼 회사에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김소아는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익은 방 안이었다.김소아는 한동안 주위를 살폈다.그러다 문득 기억해 냈다.5년 전 서준우를 따라 서씨 가문으로 들어왔을 때 사용했던 방이었다.그렇다면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이 누군지도 뻔했다.김소아는 곧바로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손잡이를 돌려 봤지만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김소아 씨, 일어나셨어요?”문밖에서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김소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급하게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김소아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은 전부 막혀 있었다.확인할 건 다 확인했다.김소아는 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서준우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한번 보기로 했다.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잠시 뒤 방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서준우가 들어왔다.김소아가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익숙한 사람과 익숙한 방.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순간 5년 전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을지도 몰랐다.“소아야...”서준우가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김소아가 돌아봤다.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서준우는 그 반응을 보지 못한 듯 웃으면서 방 안을 둘러봤다.“이 방, 다시 예전처럼 꾸며 놨어.”김소아를 바라보며 물었다.“기억나? 우리가 여기 살던 때랑 거의 똑같지?”정말 비슷했다.예전에 두 사람이 다투다 떨어뜨려서 모서리가 깨진 액자까지 똑같이 만들어서 같은 자리에 놓아두었다.굳이 묻지 않아도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아무리 똑같이 되돌려 놓는다 해도 두 사람의 감정까지 예전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김소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날 여기까지 데려온 이

  • 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제19화

    김소아와 강주원이 처음 만난 건 5년 전이었다.김소아가 막 Y국에 도착했을 때였다.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어도 통하지 않았다. 혼자 낯선 나라에 와 있다 보니, 한동안은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강주원은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나중에 가까워지고 난 뒤에는 강주원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자신도 Y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현지어도 못 하고 아무 계획도 없이 혼자 외국까지 오고 두 달이 지나도록 기본적인 대화조차 못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그래도 운은 좋았다.마침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강주원을 만났으니까.두 사람은 결국 거래를 하나 했다.김소아가 적지 않은 돈을 주는 대신, 강주원이 현지 생활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현지어를 가르쳐 주고, Y국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알려 줬다.갈피를 잡지 못하는 김소아를 지켜보면서, 잘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도와줬다.오른손의 부상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왼손을 쓰는 연습도 함께했다.처음에는 글씨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다.그러다 조금씩 익숙해졌고, 결국 왼손으로도 완성도 높은 설계도를 그릴 수 있게 됐다.지금의 김소아가 되기까지 강주원의 도움은 분명 엄청나게 컸다.하지만 강주원이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처음 고백을 들었을 때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그날 이후 김소아는 일부러 강주원과 거리를 뒀다.강주원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렇다고 물러나지는 않았다.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다.그러다 김소아가 서준우와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앞으로도 한동안은 누군가와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도 말했다.그제야 강주원도 방식을 바꿨다.더 이상 예전처럼 밀어붙이지는 않았다.그렇다고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괜찮아, 소아야.”강주원은 그때 그렇게 말했다.“난 그냥 네 옆에 있을게. 네가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잠시 웃으며 덧붙였다.

  • 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제18화

    김소아는 그날 이후 한동안 서준우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불과 이틀 뒤.집 근처에서 서준우를 발견했다.김소아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핸드폰으로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런 뒤에야 서준우 쪽으로 다가갔다.그래도 일정한 거리는 유지했다.“여기 왜 왔어?”서준우는 그런 반응에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피곤해 보였다.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그런데도 김소아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밝았다.“소아야...”김소아가 바로 말을 끊었다.“서 대표님.”목소리는 차분했다.“앞으로는 김소아 씨라고 불러 주세요.”잠시 서준우를 바라봤다.“우리 사이가 그렇게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깝지는 않잖아요.”서준우의 표정이 굳어졌다.한참 뒤 억지로 웃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소아야.”결국 다시 같은 이름을 불렀다.“네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까지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어.”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아직 나를 원망하는 것도 알아.”서준우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그래도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건 보여 줄게.”김소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바라봤다.“그때 널 괴롭힌 사람들.”서준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전부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잠시 멈췄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임지연도 마찬가지야.”서준우는 김소아를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서준우가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자, 김소아가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렸다.“할 말이 있으면 거기서 해.”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당신들끼리 벌이는 그런 유치한 일에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김소아는 잠시 서준우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정말 예전 일 때문에 미안하다면 그냥...”“난 포기 안 해.”서준우가 급하게 말을 끊었다.김소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듯했다.“소아야, 난 아직도 널 사랑해.”목소리가 조급해졌다.“난 정말 너 없이는 안 돼.”이어 쉴 새 없이 말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