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입술을 사리물었다.박민정과 더 이상 말다툼을 하려 하지 않고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그 모습에 박민정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 다 한 거예요? 병원에 가기로?”유남준은 그녀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앞을 향해 걸었다.걷는 내내 방 안에 있는 장식품이나 다른 물품들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더 가면 벽이에요!”유남준이 벽에 부딪히려고 할 때 박민정이 그를 불러 세웠다.순간 유남준은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방향을 돌려 문 쪽으로 더듬으면서 가려고 했다.박민정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예전의 유남준이라면 아마 싫증을 내며 뿌리쳤을 것인데, 그러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박민정의 손끝이 팔에 닿자 그대로 굳어버리는 듯했다.유남준은 이러한 기분과 상황이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그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박민정은 방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요. 밥 먹고 병원에 가봐요.”김인우가 있으므로 유남준은 병원에 가서도 비밀리에 모든 검사를 받을 수 있다.유남준은 더 이상 거절도 승낙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다희는 유남준이 회복이라도 한 줄 알았다.“대표님.”“꺼져.”‘그래, 아직 회복은 이르시지.’“아침은 준비됐어요?”박민정이 서다희에게 물었다.“네. 준비해 놓았습니다.”“저희랑 같이 먹지 않을래요?”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따로 챙겨 먹으면 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서다희가 떠나고 나서 박민정은 유남준을 끌어 아침 먹으러 식탁으로 향했다.하도 급히 온 바람에 아직 물 한 잔도 마시지 못한 박민정이다.물론 유남준도 아직 빈속이다.식탁에는 음식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유남준을 자리에 앉히고 나서 박민정이 말했다.“수저는 앞에 있어요. 먹기 불편하면 다른 사람한테 먹여주라고 부탁이라도 해볼까요?”먹여줘?
유남준에게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 박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가 이지원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하지만 지금 자기 품에 기대고 있는 박민정이 싫지만은 않았다.“뭔가 달라.”다짜고짜 날아오는 말에 박민정은 그저 생뚱맞기만 했다.“뭐가 다르다는 건데요?”유남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그녀를 놓아주었다.‘내가 박민정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심지어 아이까지 생겼다고?’주위 사람들이 말해주고 있는 그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그 아이는 몇 살이야?”유남준은 또다시 생뚱맞게 물었다.“4살 좀 넘어요.”갑작스러운 질문이 그저 이상하기만 했으나 박민정은 대답을 해주었다. ‘4살이라면 이혼하려고 했던 그때가 맞는 것 같은데.’“나한테 약을 탔었어?”유남준은 대충 짐작하면서 물었다.“기억 난 거예요?”박민정은 그가 말하고 있는 일이 그의 아이를 품기 위해 약을 탔었던 그때를 말하고 있는 줄 알았다.오해가 또 생기기 시작했는데.유남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삼엄한 빛을 드러냈다.“그럴 줄 알았어.”박민정과 이혼하기로 했었는데 왜 이혼을 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약을 타는 악랄한 수단으로 자기를 잡았다면서.“너 참 보통 여자가 아니었구나. 이런 일에 있어서는 참 솔직하게 대답하네?”비아냥거리며 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지금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긴 줄도 모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라고 후에 분명히 설명해 줬었어요. 윤우가 백혈병으로 앓고 있는데, 친형제 골수가 필요하다고 그랬단 말이에요.”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으나 대화 속에서 포인트를 찾아냈다.“그럼, 첫 번째 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 일까지 잊고 있겠다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긴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박민정은 그때를 생각하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곤 한다.“이제 와서 왜 그렇게 묻는 거예요? 일단 병
은회색 승합차가 입구에 멈춰 섰다.얼마 지나지 않자 유남준을 부축하여 차에서 내리고 있는 박민정이 김인우의 시야로 들어왔다.두 사람 뒤에 서다희도 바짝 따라왔다.“남준아, 형수, 어떻게 된 거야?”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형수’라는 부름이 유남준에게 유난히 낯설었다.김인우는 박민정을 귀머거리로 불렀었는데 말이다.그리고 김인우만큼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박민정을 ‘형수’라고 부르고 있다.“말로 하자면 좀 길어요. 서 비서님이 알려줄 거예요.”김인우에 대한 박민정의 태도는 여전히 덤덤하기 그지없다.그러한 태도에 김인우는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을 들여보내고 나서 서다희에게 물었다.서다희는 자초지종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하민재 그놈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김인우는 욕설을 퍼부었다.“하씨 가문에 그런 놈도 있었던 거예요? 다들 하나 같이 쩔쩔맬 줄 알았는데, 감히 남준이한테 손을 대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게 맞는 것 같네요.”서다희 역시 미처 생각지 못했다.그동안 하씨 가문은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남준이 봐줄 의사는 찾아냈어요.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서다희는 바로 그를 가로막았다.“대표님께서 회복되시고 나면 그때 다시 계획 세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김인우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하민재와 연지석은 저희 사모님 친구이기도 합니다.”그 말에 조금 전까지 노발대발하던 김인우는 갑자기 차분해졌다.“그럼, 회복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시죠.”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서다희는 순간 믿어지지 않았다.유남준의 말만 듣는 김씨 가문의 도령이 이토록 쉽게 설득되었으니 말이다.유남준은 검사받으러 들어갔고 박민정을 비롯한 일행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서다희로 부터 모든 상황을 알게 된 김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해외에 있는 신경 전문의한테서 비슷한 상황을 들은 바가 있는데, 그 사람은 기억이 딱 그대로 멈췄다고 했어.”“완쾌됐나요?”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지금 기술로는
조하랑은 멈칫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이목구비가 뚜렷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유남준은 더 이상 잠꼬대를 하지 않았고 조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민정아, 혹시 저런 사람은 우리랑 뇌 구조가 다른 거 아니야?”그 말에 박민정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가 봤던 건 절대 잊지 않았던 사람인데, 기억을 잃었다니... 그게 말이 돼?”두 사람은 유남준의 병상 바로 옆에서 그를 한동안 깍아내렸다.아주 덤덤한 모습으로.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 다가왔고 유남준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서다희는 박민정에게 먹고 싶은 게 있냐면서 부하에게 물어보라고 했다.그때 조하랑이 전혀 사양하지 않고 메뉴를 읽기 시작했다.“샤브샤브, 마라탕, 마라샹궈 먹고 싶어요.”산모인 박민정은 그동안 줄곧 음식을 싱겁게 먹어왔다.이렇게 자극적인 음식은 정말로 듣는 것마저도 오랜만이었다.“제 친구가 말한 대로 준비해 주세요. 샤브샤브는 두 개로 준비해 주시고 제가 먹어왔던 영양식도 그대로 준비해 주세요.”박민정은 서다희가 보내온 사람에게 부탁했다.배 속의 아이를 위해 생각해야 하니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어머, 내 기억 좀 봐! 너 임신한 거 까먹고 있었어.”“괜찮아. 나도 오랜만이라 좀 당겨. 이번 기회에 좀 먹지 뭐.”“그래.”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들이 줄줄이 들어왔다.유남준이 지내고 있는 VIP 병실에는 거실 뿐만 아니라 부엌까지 준비되어 있다.그러나 그럼에도 음식 향기는 그의 병상까지 전해졌다.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다희를 불러와 한바탕 야단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사무실에 왜 이렇게 음식 냄새가 진동하냐면서.조하랑이 옆에 있어서 그러한지 박민정은 시간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는 것 같았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그때 조하랑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는데, 박예찬이었다.“이모, 왜 인제야 전화 받는 거야! 내가 집에 없어서 몰래 쉬려는 건 아니지?”조하랑이 박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조하랑은 박예찬 덕분에 취업 방향을 정할 수 있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돈이 없는 건 아니나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어 안도감이 들었다.전 남자 친구였던 강연우가 늘 조하랑을 이처럼 풍자했었다.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라고.그리고 지금의 수입을 보면 아마 변호사인 강연우보다 몇십 배는 더 벌 수 있을 것이다.“참, 하랑아, 김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어? 강연우가 또 찾아오지 않았어?”지난번에 강연우와 김인우는 크게 싸운 적도 있다.조하랑은 오늘따라 유난히 소탈해 보였다.“김씨 가문에서 잘 지내고 있고 강연우한테서 전화는 몇 번 왔었어.”그러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덧붙였다.“민정아, 강연우 참 이상하지 않아? 나한테 김씨 가문이랑 엮이지 말라고 절대 김인우한테 시집가지 말라고 인우 씨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수없이 타이르고 말해줬어.”이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조하랑은 어처구니가 없다.강연우에 대해서.“자기는 결혼까지 했으면서 네가 누구한테 시집을 가든말든 무슨 상관이지? 이상하긴 하네.”박민정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하랑아, 김씨 가문 어른들은 다들 좋으신데, 결혼하는 건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절대 후회하는 일 없이 신중하게 고려해 봐.”정서 변화가 심한 김인우 인지라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사경으로 몰아넣을 때까지 괴롭히는 면도 있다.지금 자기한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박민정은 그럼에도 김인우란 사람이 걱정되었다.“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께도 말씀드렸어. 적어도 1년 정도는 만나보고 결정해야 한다고.”“인우 씨랑도 이미 얘기했어. 1년 지나고 나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자고. 서로서로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 그만 포기하시라고.”조하랑의 말을 듣고 난 박민정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그래.”“그럼, 나 먼저 간다. 내일 또 올게. 올 때 노트북도 가지고 와야겠어. 예찬이가 수시로 검문 들어올까
유남준 역시 벽에 찰싹 붙어 있는 박민정에게 다가갔다.벽과 팔을 사이에 두고 박민정을 그 속에 꽉 갇혔다.박민정은 다짜고짜 들려온 그의 질문이 생뚱맞기만 했다.“무슨 뜻이에요?”유남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는데, 손바닥에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 놀라웠다.‘정말이었어?’“너 죽었잖아.”한껏 가라앉은 소리로 유남준이 말했다.그 말에 더더욱 어리둥절해진 박민정이다.“아무리 싫어도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내가 널 2년 동안 찾아다녔어. 알아? 2년 동안 꿈에 나타나지도 않더니 오늘 어쩌다가 나타난 거야? 설마 정말 죽기라도 한 거야?”유남준은 이 모든 게 꿈인 줄 안다.“죽어서 꿈에 나타난다더니 정말로 죽은 거야?”“얼굴 좀 보여줘 봐. 왜 못 보게 하는 거야?”아무런 조명도 없어 그는 아직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인지 못 하고 있다.박민정은 그의 말속에서 서서히 눈치를 차리게 되었다.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는 것.자기가 실종 되고 나서 2년이 흐른 그 시점으로 돌아갔다는 것.“남준 씨, 그게 실은... 남준 씨 기억을...”하지만 말을 채 끊내기도 전에 유남준은 갑자기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꽉 잡고서거칠게 키스를 해왔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유남준은 어느새 옷까지 벗기고 있었다.“남준...”빈틈을 포착하여 박민정은 그를 미친 듯이 때리며 멈추게 하려고 했다.일단 자초지종부터 들어보라고.하지만 유남준은 그 어떠한 기회도 주려 하지 않았다.오늘 피해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조명이 밝아졌다.그보다도 더욱 화끈거리게 한 것은 김인우가 의사 가운을 입은 채 문 앞에서 두 사람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놀라기는 김인우도 매한가지였다.그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었다.“미안.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었어.”‘남준이 기억 잃었다면서?’‘근데 왜 저래?’김인우는 나가면서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주었다.유남준
유난히 부드러운 입맞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다시 박민정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내가 연지석 질투하는 거 알아 몰라?”그 말에 박민정은 멍하기만 했다.“네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제야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 인제 그만 돌아와 주면 안 돼?”눈물 한 방울이 박민정의 어깨에 툭하고 떨어졌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았던 유남준이 눈물을 흘리다니... 박민정은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천천히 손을 들어 그를 꼭 안아주면서 다독였다.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숨긴 채.유남준은 또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다시 병상에 누웠다.깊이 잠든 그를 바라보며 박민정은 그의 눈을 어루만졌는데, 여전히 축축했다.유남준이 우는 걸 처음 보는 박민정이다.그가 울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자기를 신경 쓰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박민정이다.왠지 모르게 목이 메어왔고 그렇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박민정 역시 천천히 잠에 들었다.다시 깨어나 보니 이미 병상에 누워있었고 고개를 살짝 돌리니 창문 앞에 서 있는 훤칠한 그가 보였다.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보아하니 좀 나아진 듯했다.“남준 씨.”박민정의 소리에 유남준은 고개를 돌렸는데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그럼에도 천천히 다가갔다.“깼어?”“네.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박민정은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요즘 그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려고 할 때 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너 죽었잖아. 이번엔 지옥에서 돌아온 거야?”그 말에 박민정은 또다시 얼어붙었다.‘회복된 게 아니었구나.’“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건 남준 씨에요.”박민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럼, 아니야? 죽은 척 하는 게 재미있었어? 그냥 끝까지 죽은 척하지 그랬어? 왜 돌아온 거야?”어젯밤에 일어난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물었다.“말해
생각지 못한 박민정의 행동에 유남준은 그대로 굳어졌다.우남준의 온몸에 힘이 빠지는 틈을 타서 박민정은 바로 자기 손목을 빼냈다.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자국이 생길 지경이었다.‘아파.’박민정이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유남준은 다시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로 눕혔다.“누구한테 배운 거야?”가라앉은 목소리에 살짝 거친 느낌도 들어 있었다.지금 그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 박민정이다.“겨우 뽀뽀 하나 한 것뿐인데, 배울 필요가 있어요?”유남준은 그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귀가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를 박민정이 보게 되었다.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박민정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귓불을 천천히 만졌다.바로 그때 유남준은 다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는데, 힘을 들이지는 않았다.“연지석한테서 배웠어?”“혼자서 터득하면 안 되는 거예요?”박민정은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무엇이든 연지석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유남준때문에.홧김인지 아닌지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다른 볼에도 뽀뽀했다.“이제 믿겠어요? 스스로 터득한 거라고요.”유남준은 세상 차갑게 웃기 시작했다.“내가 실수했네. 그럼, 뭘 더 어떻게 터득했는지 한 번 봐봐.”이윽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박민정에게 다가갔다.그러나 하필이면 바로 이때 서다희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다른 부하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나 유남준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또 하필이면 문이 열려있어 바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서 비서님.”박민정은 바로 유남준의 입을 막고 그를 밀쳤다.“서 비서는 지금 해외 출장 중이야. 무서워서 피하는 거야?”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유남준, 그런 유남준이 내내 어이없는 박민정.“서 비서님, 한마디 좀 하시죠.”서다희는 나지막이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익숙한 소리가 들려오자 유남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돌아보았다.“넌 해외로 출장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