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도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안다혜도 고개를 저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제 할 수 있는 건 운을 믿어보는 것뿐이에요.”“다른 건 몰라도 이 회사의 주요 책임자들을 찾아서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 봐야죠. 그냥 삭제했다고 말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비서는 안다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혜는 리스트에 적힌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황 대표가 이 문제의 관건이에요. 사람을 쏘려면 먼저 그 말을 쏘라고 자재 업체의 ‘황제’부터 잡아야만 다른 것도 따라서 해결되지 않겠어요?”안다혜는 어리둥절한 비서의 표정을 보고 더 설명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회사로 찾아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다른 건 닥치는 대로 해보자고요.”비서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혜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지 알았기 때문이다.“대표님, 그러면 바로 본사로 들어가실 건가요?”안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방법밖에는 없겠네요. 연락이 안 되니 이렇게 마냥 기다리는 것도 방법은 아니잖아요.”“네. 회장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비서가 친절하게 말했다. 상급인 안다혜가 잘나가야만 비서의 앞길도 창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젠 비서도 안다혜의 방식에 적응한 상태였다.안다혜가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려다 이렇게 말했다.“앞으로 누가 날 찾아오면 그게 누구든 거절해요. 체결해야 하는 계약서가 있으면 내게 보내서 확인하고요.”비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네. 그러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네.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다 생각이 있어요.”안다혜가 이렇게 말하고는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 대표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비서도 안다혜의 사무실을 자세히 주시하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대표님이 바쁘니 무슨 일이 있으면 대신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대부분 사람은 이 말에 순순히 돌아갔다.안다혜는 그 대표들이 있는 회사로
안다혜는 그런 두 사람이 그저 재밌었다. 대충 끼니를 때운 안다혜는 바로 태안 그룹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태안에 납품하던 업체들이 떠올랐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데 더는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안다혜는 미룰 수 있어도 풍산 그룹 프로젝트는 미룰 시간이 없었다. 안다혜 혼자만의 프로젝트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함께 노력한 결과였기 때문이다.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운 안다혜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납품 업체를 만나 위로를 건네는 게 최우선이었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사태의 발전은 이미 안다혜의 예상을 많이 빗나가 있었다. 업체를 만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어느 업체라 할 것 없이 다 그녀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이에 넋을 잃은 안다혜는 한참 멍해 있었다. 문자를 보내도 친구가 아니라고 뜨는 알림창을 보며 전에는 토론할 여지를 보이던 업체들이 왜 갑자기 지나칠 정도로 매정하게 나오는지 궁금해졌다.안다혜가 업체들을 찾아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려 했다. 비즈니스적으로 엮인 사이는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돌고 돌아 결국 그 사람들인데 너무 매몰차게 끊어내면 피차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밖에서 급박한 노크가 들려왔다. 순간 눈꺼풀이 세게 뛴 안다혜는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들어와요.”비서가 다급한 표정으로 A4 용지를 한 다발 들고 들어오더니 안다혜에게 내밀었다.“대표님, 한번 확인해 보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이 회사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협업을 중단하겠다고 팩스를 보내왔어요.”“그 회사에 소속된 비서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저를 삭제했고요.”이 말에 안다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도 그래요. 팩스를 보내온 회사의 사장님들이 나를 삭제했는데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안다혜의 표정도 매우 어두웠다. 이제 누군가가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고 있다는 게 더 분명해졌다. 아니면 동시다발적으로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질 리는 없었다.비서는
윤해준은 안다혜가 한 말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안다혜는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았다. 더는 참기 힘들었던 윤해준은 안다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먼저 입을 열었다.“다정아, 우리 언제 시작할까?”“요즘 수고 많았어.”윤해준의 말에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다혜가 몸을 돌렸을 때는 조금 전 밖에서 봤던 웃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아까는 농담이었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요.”안다혜가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해준이 화낼 게 뻔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만한 한유라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농담”이라는 안다혜의 말에 윤해준은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챘다.“그러니까 한유라를 약 올리기 위해서라는 거지?”이 말을 하는 윤해준은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고 독수리와도 같은 눈매로 안다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안다혜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덮쳐서 물어뜯을 것처럼 말이다.안다혜가 두 팔을 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알고 있으면 되지 뭘 굳이 얘기해요. 샤워하러 갈게요.”한유라를 약 올리기 위해 안다혜도 많은 희생을 무릅썼다. 안방에서 윤해준과 함께 자야 하니 말이다. 이제 안다혜는 어떻게 윤해준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 이렇게 하는 게 도덕적이진 않지만 카멜레온 같던 한유라의 얼굴만 생각하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래서 그런지 샤워하러 향하는 안다혜의 걸음이 매우 가벼웠다.안다혜가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윤해준은 뒷모습이 어딘가 외로워 보였지만 안다혜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샤워를 마치면 소파에서 잘 생각이었다.윤해준은 그런 안다혜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 결국 협조하기로 했다. 와이프니까 하자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침대맡에 앉아 자료를 조금 훑어보던 윤해준은 안다혜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샤워하러 갈게.”“소파에서 자지 말고 침대에서 자.”윤해준은 남은 말을 하기가 싫었는지 잠깐 멈
‘재밌네.’안다혜가 예쁜 눈동자를 굴려 윤해준을 바라봤다.“그만해요. 이제 동생과 할 얘기 끝났죠?”“끝났으면 방으로 들어가요. 하루 종일 출근했더니 온몸이 너무 쑤셔요. 좀 주물러줘요.”안다혜가 허리를 짚으며 윤해준을 째려보더니 방으로 걸어갔다. 이에 윤해준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교태를 부리는 안다혜의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라 뼈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서서 뭐 해요? 주물러주기 싫어요?”안다혜가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싫으면 됐어요. 나 먼저 들어갈게요.”한유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평소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화로 가득 차올랐고 윤해준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아니. 오빠는 절대 들어갈 리 없어.’하지만 그 기대는 이내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아니야. 지금 바로 갈게.”윤해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어두운 눈빛으로 한유라를 바라봤다.“여기서 뭐 해? 얼른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안다혜가 한 말만 생각하면 윤해준은 마음이 너무 간질간질했다. 한유라가 온 뒤로 안다혜가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라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이 살짝 의아하기도 했다.한유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나한테 정말 이럴 거야?”“우리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이 말에 윤해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너를 잘 챙기라는 말은 했어도 와이프까지 제쳐두고 네 옆을 지키라는 말은 없었어. 분수를 좀 지켜.”한유라는 차가운 윤해준의 옆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라도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안다혜도 윤해준이 이렇게 차갑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살짝 놀랐다.‘첫사랑에게 왜 이렇게 차갑지? 내가 있다고 그러나? 설마 일부러 연기하는 건가?’다만 한유라가 실망한 걸 봐서는 전혀 연기 같지 않았다.“알았어. 오빠. 가면 되잖아.”이 말을 하는 한유라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게 다 저 빌어먹을 년 때문이야. 해준 오빠를 손에 넣은 것도 모
민초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오빠. 절대 새언니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니까요.”그러더니 차에서 내려 껑충껑충 집으로 뛰어갔다. 민초연이 나가자 차 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만 남기도 했고 요즘 같은 상황까지 겹치자 분위기는 답답하면서도 어색했다.윤해준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보려 했다.“에헴. 이제 뒤에 사람도 없는데 조수석에 타는 건 어때?”“아니요. 뒤에 앉는 것도 나쁠 건 없죠.”안다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윤해준이 한유라와 한방에 있는 걸 본 후로 윤해준을 향한 감정이 너무 복잡했고 윤해준만 보면 자연스럽게 한유라가 떠올랐다. 마치 그녀가 제삼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다혜는 이제 그 장면을 떠올리면 그저 우스웠다.윤해준이 핸들을 꽉 움켜쥐더니 나지막하면서도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조수석의 풍경이 뒷좌석보다는 훨씬 좋을 거야.”윤해준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를 리가 없는 안다혜가 덤덤하게 말했다.“조수석이 뒷좌석보다 위험한 것도 사실이잖아요.”윤해준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안다혜는 평소 대화의 흐름을 깨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윤해준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안다혜가 큰 흥미를 보이지 않자 윤해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운전했다.한유라는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두 사람이 왜 함께 들어오지? 설마 화해한 건가?’한유라가 떠보듯 물었다.“새언니, 이렇게 늦었는데 해준 오빠랑 어디 있다가 들어오는 거예요?”“왜요? 사사건건 보고해야 해요?”안다혜는 궁금해하는 한유라가 너무 우스웠다.‘이젠 첫사랑이 우리의 생활까지 염탐하는데 가만히 있는 건가?’한유라가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며 설명했다.“해준 오빠,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 시간이 늦어서 걱정됐을 뿐이야.”“나는 새언니가 왜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오빠가 잘 좀 설명해 줘 봐. 나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한유라가 서럽다는 표정으로
결국에는 사실대로 부는 수밖에 없었다.곁눈질로 민초연의 표정을 확인한 안다혜는 이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참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민초연이 스파이짓을 할 줄 알았다면 절대 불러내지 않았을 텐데 잘못된 선택을 한 것에 후회했다.차에 탄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안다혜는 아직 윤해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그때 민초연이 먼저 입을 열어 난감한 상황을 풀어보려 했다.“오빠, 나 좀 데려다줘요.”윤해준이 입을 열려는데 민초연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빠,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말아줘요.”“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오빠가 말하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줘요.”민초연은 한 번만 더 술집에서 발견되면 다리를 분질러 버리고 용돈도 끊겠다고 했던 부모님의 말씀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도 발각되면 용돈이 그대로 날아가는데 누구든 무서울 것이다.윤해준이 안다혜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누가 너희 새언니 이런데 데려오래?”“혼자 가는 것도 모자라 새언니까지 끌어들였으니 반드시 엄벌해야지.”윤해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는 민초연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안다혜의 팔을 끌어안고 마구 흔들었다.“부탁이야. 다혜야. 내 사랑 다혜야. 너도 알잖아. 나 오늘 나올 생각 없었던 거. 다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서 나를 희생한 거지.”“다혜야. 아니. 새언니. 내 편 좀 들어줘 봐.”안다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기심과 기대에 찬 윤해준의 눈빛과 민초연의 빨개진 눈시울을 번갈아보던 안다혜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윤해준에게 말했다.“초연이 그만 놀리고 초연이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마요.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윤해준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한결 좋아진 말투로 말했다.“이 일은 누가 약속할 수 있지?”“민씨 가문의 유일한 딸인데 무슨 일이라도 나면 나도 책임을 회피하긴 힘들어서 말이야.”이 말에 민초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