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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마음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4 06:44:13

점심을 마치고 헤어질 때, 이수는 괜히 걸음을 늦췄다.

바쁜 오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온도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오늘은 여기까지죠.”

도진이 말했다.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끝에 남긴 숨이 조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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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217. 같은 속도로 걷다 보니 어느새 옆에 있었던 것

    오후의 빛은 창가에 오래 머물렀다.이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떼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마치 무언가가 막 지나간 것처럼 마음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점심 이후로 도진의 말들이 생각보다 자주 떠올랐다.“이수 씨가 먼저 가면, 하루가 덜 남은 느낌이 들어서요.”그 문장은 의미를 갖지 않으려는 듯 가볍게 던져졌지만,그 가벼움이 오히려 이수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회의 잘 끝나셨어요?짧은 안부였다.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이수는 잠시 답장을 미루었다. 망설임이라기보다 지금의 감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네. 방금 끝났어요.- 생각보다 길었네요.잠시 후 답장.-그럼 지금은-잠깐 숨 돌릴 시간인가요?이수는 ‘네’라고 쓰려다 문장을 바꿨다.-네.-커피 한 잔 마시려고요.-근처시면,-제가 합석해도 될까요?그 제안은 어제보다 한 걸음 가까웠다.그리고 이수는 그 사실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좋아요.-회사 근처예요.카페는 조용했다.오후의 한산함이 공간 전체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이수는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사람들의 걸음은 빨랐고, 그 속도와 달리 자신의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아 있었다.도진은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마침 근처에 있어서요.”그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주문을 마친 뒤에도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고, 서로를 재촉하지도 않았다.“요즘,”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시간 감각이 좀 이상해요.”도진은 고개를 들었다.“어떤 식으로요?”“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요.”이수는 웃었다.“같은 하루인데도요.”“그럴 때 있죠.”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의미가 겹칠 때요.”이수는 그 말을 곱씹었다.의미가 겹친다는 표현이 생각보다 정확했다.커피가 나왔다.

  • 천년의 기억   216. 너무 자연스러운 거리

    아침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결 가벼웠다.이수는 창문을 열어 두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특별한 일이 예정된 날도 아니었고, 마음에 걸릴 만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상하리만큼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그 안정감이 어디서 오는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다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었다.휴대전화가 울렸다.메시지 알림이었다.-오늘도 일정 많으시죠?짧은 문장이었다.안부를 묻는 말 치고는 담백했고, 담백해서 더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네. 오전에 미팅 하나 있어요.-도진 씨는요?답장을 보내고 나서 이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언제부터 이렇게 서로의 하루를 자연스럽게 묻는 사이가 되었을까. 답장은 곧 도착했다.-저는 오후에만 좀 바쁠 것 같아요.-점심 괜찮으시면 같이 하실래요?이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이제는 이 정도 제안이 설레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았다.그저 ‘그렇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뿐이었다.-좋아요.-장소는 도진 씨가 정하세요.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이수는 미팅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길은 평소보다 붐볐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제각각이었다.그 사이를 지나며 이수는 문득 도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그때는 지금처럼 편안하지 않았다.낯설고, 조심스럽고,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살피던 시간.그런데 어느새 그 경계는 너무 자연스럽게 옅어져 있었다.식당 앞에서 도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고 있던 그는 이수를 보자 고개를 들었다.“오셨어요.”그 말 한마디에 이수는 괜히 발걸음을 늦췄다.환영도, 반가움도 과하지 않게 담긴 목소리였다.“기다리셨어요?”“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둘은 자리에 앉았다.메뉴를 고르는 동안에도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두 사람 모두에게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음식이 나오고, 포크와 젓가락이 움직였다.처음 몇 분은 그저 먹는 데 집중했다

  • 천년의 기억   215. 지금은, 이 정도가 좋다

    아침 공기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였다.이수는 커튼을 조금만 열어 두고 커피를 내렸다.창밖의 소음이 실처럼 얇게 스며들었고, 그 소음 위로 김이 오르는 머그잔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미리 정해 주는 듯했다.휴대전화가 조용히 울렸다. 도진의 이름이었다.전화를 받기 전, 이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이제는 이 짧은 간격조차 자기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이 되어버렸다.“네.”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아침 일찍 연락해서 죄송해요.”도진의 말투는 여전했지만, 말과 말 사이에 놓인 공기가 어제보다 한 톤 부드러워졌다.“괜찮아요. 마침 일어나 있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이수도 묻지 않았다.두 사람 모두 이 통화의 목적이 ‘용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은 비 온다던데요.”이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우산 챙기세요.”“네. 이수 씨도요.”짧은 대화였지만, 끊고 나서도 통화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이수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따뜻함이 손끝에 오래 남았다.도진은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와이퍼가 유리에 남기는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비는 얌전했지만, 그 얌전함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한 번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이수와의 대화는 늘 그랬다.별것 아닌 말들이 그의 하루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사무실에 도착하자 회의와 전화가 이어졌다.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정이었지만,도진은 문득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무슨 좋은 일 있어요?”직원이 농담처럼 묻자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요.”그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자신에게도 낯설었다.점심 무렵,이수는 편집자와의 미팅을 마치고 잠시 혼자 남았다.노트북 화면에 문장이 떠 있었지만 바로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흘러내리는 물방울처럼 자신의 감정도 천천히 자리를 옮기고

  • 천년의 기억   214.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마음

    점심을 마치고 헤어질 때, 이수는 괜히 걸음을 늦췄다.바쁜 오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온도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오늘은 여기까지죠.”도진이 말했다.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끝에 남긴 숨이 조금 길었다.“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일정 있으시죠.”“있긴 한데,”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급한 건 아니에요.”그 말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말도,

  • 천년의 기억   213.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온전한 선택

    밤은 깊어졌지만 이수의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불을 끄고 누운 뒤에도 눈꺼풀 안쪽으로는 조금 전의 장면이 느리게 되감기고 있었다.도진의 목소리. 말끝을 고를 때마다 잠시 멈추던 호흡.“괜찮은 날”이라고 말하던 순간의 표정.괜찮다는 말이 왜 그렇게 오래 남는지,이수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굳이 정리하지 않으려 했다.정리하는 순간, 이 밤이 너무 명확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휴대전화가 베개 옆에서 다시 한 번 울렸다.-집에 잘 들어가셨어요?아주 평범한 문장이었다.그래서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이수는 잠시 화

  • 천년의 기억   212. 말을 건네지 못한 자리

    저녁은 생각보다 일찍 내려왔다.이수는 창가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불빛들을 하나씩 바라보고 있었다.도시는 늘 같은 얼굴로 밤을 맞이하지만, 그날의 공기는 어쩐지 조금 더 느리게 흘렀다.휴대전화가 아주 짧게 울렸다.이수는 바로 화면을 보지 않았다.그 진동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알고 있어서, 잠시 더 늦췄다.잠깐의 숨을 고르고 그제야 화면을 켰다.-지금… 잠깐 괜찮으세요?짧은 문장이었다.장식도,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더 도진다운 문장이었다.

  • 천년의 기억   10. 이름을 가둔 가슴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 천년의 기억   9. 금지된 이름의 파문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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